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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별을 스치는 바람 1,2 (전2권) / 이정명 / 은행나무 (2012)

동주 / 구효서 / 자음과 모음 (2011)

 

얼마전 구효서의 '동주'를 읽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구효서의 팬입니다. '열렬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충실한' 팬 정도는 됩니다. 시작은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었을 겁니다. 이제 막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던 터라 영화 한편을 보고나면 그와 관련된 모든 기사며 인터뷰, 평론 등을 부지런히 찾아읽곤 했었지요. 그러던 차에 저는 이 영화의 원작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바로, 구효서라는 낯선 작가가 쓴 '낯선 여름'이라는 짧은 장편소설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저는 득달같이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와는 참 많이 다른 분위기며 이야기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저는 영화와는 달리 온기어린 담백함을 간직한 원작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인간 본연의 이기적인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냉소 가득한 홍상수의 영화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품고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놓지않는 구효서의 소설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요.

그날 이후로 저는 구효서의 작품들을 꾸준히 찾아 읽었고, 신작이 나올 때마다 '득달같이'는 아니더라도 너무 늦지는 않게 꼬박꼬박 구해 읽곤 했습니다. 특별함보다는 꾸준함을 무기로 하는 작가답게 그 품질은 대부분 균일했지만 아무래도 눈에 띄는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차분하고 소소한 일상이나 하잘것없이 평범한 인생들을 아주 클래식한 구조와 문법으로 형상화해내는 그의 문체는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으니까요.

 

그러던 구효서에게 변화가 느껴진 건 '동주' 직전에 낸 장편 '랩소디 인 베를린'이었습니다. 최근의 단편들에서 기록되지 못한 소중한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내는데 공을 들이며 변화를 향한 단초를 드러내긴 했지만, 이러한 '기록되지 못한 소중한 삶'들을 향한 관심을 현재화해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꿰함으로써 우리의 내일을 제시하려는 욕심까지 내보인 건 바로 이 '랩소디 인 베를린'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구효서는 파편화된 개인의 미시사를 그려내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그러한 개인들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며 거시적인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특히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다른 시대 다른 인물들의 삶을 나열하다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개로 하나로 묶어내는 솜씨는 이제 구효서가 대가의 경지에 이르기 직전이구나, 라는 찬탄이 일 정도로 단단하고 정교했습니다.

디아스포라. 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가 낳은 조국을 잃고 떠도는 '국제미아'들의 슬픈 여정을 여러 시대 여러 주인공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여주는 이러한 방식은 최근작 '동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더군요. 작곡가 윤이상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주인공을 내세웠지만 '랩소디 인 베를린'이 결코 윤이상의 이야기가 아니었듯이 '동주' 역시 시인 윤동주를 제목 삼았음에도 그의 모습은 쉬이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는 일종의 매개체로 기능하며 현재와 과거를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한곳으로 모여들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더 윤동주의 존재감은 커져만 갔고,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등장인물들의 노력을 통해 그 조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는가 싶더니...마지막에 가서는 비로소 하나로 합쳐져 인간 윤동주의 위대한 면모가 완성되더군요. 현재를 살아가는 재일교포 3세인 주인공 김경식의 눈으로, 그리고 윤동주를 옆에서 지켜봤던...일본인이나 일본인일 수 없었던 일본인이 아니지만 일본인이어야만 했던 요코 혹은 이타츠 푸리 카라라 불리는 여인의 눈으로...말입니다.

 

이정명의 '별을 스치는 바람'은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동주'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기도 하고, 또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도 한 작품입니다. 윤동주를 살아있는 진짜 인물로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전자이고 그를 아끼며 동경하며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는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는 후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 두 작품은 시인 윤동주를 다룬, 동전의 양면이면서 서로를 마주보는 거울 같은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억지로 갖다붙이자면 전사와 후사처럼 볼수도 있는 작품이구요.)

 

이 소설은 '바람의 화원'과 '뿌리깊은 나무'를 쓴 작가의 작품답게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익숙한 구조를 따라갑니다. 악독한 간수인 스기야마 도잔이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풋내기 간수인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이 의문의 살인사건이 맡겨지면서 스기야마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이 소설의 중심플롯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고...유력한 용의자인줄 알았던 조선인 죄수 말고 진짜 진범은 따로 있는데...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발전되는 것이지요.

이렇게만 말하면 '별을 스치는 바람'은 여느 추리소설들과 그다지 차별점도 없고 그렇다고 장르적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특출나게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정명의 두 전작들이 그러했듯 정작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이러한 미스터리 구조가 실은 맥거핀에 가까운, 독자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미끼일 뿐이고 작가가 진짜 하고싶은 이야긴 따로 있다는 걸 알게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저 만만한 추리소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나는 지점이란 바로 '악독한 간수' 스기야마가 '교활한 죄수' 윤동주에 의해 자신의 인간적 혹은 감성적 면모를 각성하게 되고, 억압된 자아와 악몽같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영혼의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으며 우리를 거부할 수 없는 윤동주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진짜 범인이 누구냐 라는 물음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도소라는 공간 안에서 절대 교감할 수 없는 죄수 윤동주와 간수 스기야마의 내밀한 소통과 그들만의 특수한 우정을 이어가는 모습이 훨씬 더 스릴 넘칩니다. 그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작당 모의'가 부디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며 더욱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윤동주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스기야마 뿐이 아닙니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스기야마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수사관 와타나베 또한 이 사건의 중심에 조선인 죄수 윤동주가 있다는 걸 알게되고 난 이후부터는 스기야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한없이 순수한 영혼과 그러한 순수함이 여과없이 반영된 그의 투명한 시(詩)들에 감화되어 살인사건 수사관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스기야마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해내려 하였으나 미처 완수하지 못한 윤동주를 보호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효서의 '동주'와 이정명의 '별을 스치는 바람'이 같은 인물을 소재로 한 전혀 다른 소설이 아닌, 꼭 함께 읽음으로써 윤동주라는 인간, 윤동주라는 시인, 그리고 그의 빛나는 작품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 같은 소설이라고 말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동주'는 제국주의자들의 비뚤어진 욕심의 발로인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영혼들과 현재에도 여전히 그로 인한 상처에 허덕이는 후손들이 역시 제국주의자들의 억압에 못이겨 쓸쓸하게 죽어간 윤동주라는 순수한 영혼과 그 영혼이 반영된 시(詩)들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윤동주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상향, 간도는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깨닫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소설입니다.

그에 비해 '별을 스치는 바람'은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동주'가 끝내 흐릿하게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은 윤동주라는 인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되살려내 보여줌으로써  좀 더 직접적이고 친근하게 윤동주와 그의 작품들이 전쟁과 폭력으로 인해 피폐해진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위무하고 치료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인 것입니다.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두 소설은 민족이나 사상이라는 틀 안에 결코 가둘 수 없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자유를 갈망한 인간 윤동주를 위한 레퀴엠이며, 정치적인 의미의 모국어가 아닌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혹은 자연이라는 의미에서의 모국어를 지키려 애쓰던 시인 윤동주를 위한 오마주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동주'를 읽은 분이라면 '별을 스치는 바람'을,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으신 분이라면 '동주'를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해봅니다. 내일은 마침 8월 15일, 윤동주가 미처 보지못한 바로 그날 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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