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영욱아. 넌 늘 까불거렸지만, 그건 어쩌면 외피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너의 마음엔 늘 외로움이 웅크리고 있었고, 네 이야길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겠지. 가끔은 어떤 추억들을 꺼내 그것으로 널 희화화하면서도 그것을 공유하길 바랬다는 것, 그땐 몰랐다. 영욱이 네가 그렇게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그시절처럼 노닥거리고 치고받는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좀더 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땐 그것을 왜 몰랐을까, 라고 나는 후회하지만, 글쎄, 변명을 하자면, 그 당시 나의 한계이자 현실이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나로서는, 그 전만큼 너와 붙어다닐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삶의 환경과 주변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나는 네게 미안하다. 좀더 네 이야길 들어주지 못해서,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나는 그냥 네 소식을 들었을때, 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영욱아... 그때 그시절엔, 너와 보낸 시간이 내 세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음에도... 미안하다, 혼자 널 내버려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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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내린 빗방울 수 만큼의 기다림이나, 우주를 수놓은 별들의 수만큼의 그리움,
은 당연 아니다. 이런 기다림과 그리움은, 아주 지독한 사랑을 할 때나 가능한 일이고.

그럼에도, 그 이름이 호명될 때면,
나는, 가뭄 끝에 내리길 바라는 짧은 비만큼의, 어떤 기다림을 품는다.

그 이름, 왕가위.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그런 왕가위가 내린다. 비처럼.

이름하여,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언제나처럼, 그 속엔, 어떤 '사랑'과 '이별'의 풍경화가 펼쳐지리라. 기억과 상처 역시 품은.
(왕)가위 감독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찍은 첫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작품.
주드 로, 노라 존스, 나탈리 포트만...
양조위, 장만옥, 장국영 등이 아닌,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놓을 가위's World는 어떨까.
블루베리 파이와 함께, 어떤 밤들을 지새우면 '블루베리 나이츠'로 명명될까.

전반적인 평이 그닥 좋은 것 같진 않다만, (☞ 의아할 정도로 가볍고 퇴행적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이같은 평 또한, '왕가위'라는 이름값에 붙은 기대값 때문에 그러하지 않겠는가.
사실 중요한 건, '왕가위'를 만난다는 사실.
지난 <2046>때처럼, 다시 4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나는, 그저 '블루베리'를 냉큼 베어먹을 준비가 돼 있다.
설혹,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있나.
'블루베리'를 선택한 건, 결국 나인걸.

이번엔 어떤 사랑과 기억이, 스크린을 지배할까. 궁금하다.
그런 면에서, 내게 가위 감독의 최고작은, <동사서독>이다.
그 황량한 사막에서 펼쳐진 서사시의 운율을, 상처에 할퀸 외로운 군상들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슬픔을,
나는 환상처럼 품고 있다. 어쩌면, 실제보다 기억 속에서 더 부풀려졌을 영화의 감흥.
간절하고, 또 간절하면서도,
누르고 묻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랑과 기억 한자락.
마시면, 지난 기억을,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술, 취생몽사(醉生夢死 : 본뜻은, 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꾸는 꿈 속에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한평생을 아무 하는 일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리고 그들만의 농담. 잊으려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기억임을 아는 두 사람만의 어떤 언어.

그렇다고,
<동사서독>의 슬픔 한잔이, 머그잔 한잔을 넘칠만큼은 아니었다.
딱 그만큼만. 넘치지 않을 만큼만. 그저 한잔으로 충분히 목너울이 적셔질만큼만.

어쨌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내린다.

가위가 녹슬진 않았는지,
함께 가위 한번 잡아볼까?
그리고, 우리 함께, 블루베리 파이 한번 시식해볼까? ^.^*

아래는, 4년 전, <2046>을 기다리면서, 읊조린 일종의, 왕가위 찬가(?).





엇갈린 갈지자를 그리는 연인들의 스쳐감...
언제고 떠남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누군가...
부지불식간 다가와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의 물결...
걷잡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꾹꾹 눌러 담는...
그것이 왕가위였다...
문 꼭 잠그고...
지독한 외로움에 스스로를 던진 뒤...
온몸은 최대한 늘어져 있어야 한다...
담배와 술도 곁에 있다면 금상첨화다...
담배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창문은 꼭꼭 닫아두고...
술잔은 언제든 입 속으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늘 손에 쥐여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견딜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왕가위와 그렇게 마주 대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골방에 처박혀 담배연기에 질식당하고 술에 찌들어 왕가위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싶었다...

연출 작품  (장편)
· 열혈남아(1987),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 동사서독(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2046(2004)
 
한 남자가 있다

내뿜은 담배연기 마냥 갈 곳 몰라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음악과 영상들로 나의 감성을 애무해주던 그 남자.(그래서 오르가슴을 느끼게 만들고...)
영상마다 끈적끈적한 감정의 행로를 심어놓곤 갑자기 나 몰라라 해 버리던 무책임한 남자.(그래서 더욱 슬프도록 안타까운...)
때로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우울하고 니힐한 우리네 인생을 들쑤셔보는 건지 알 수없게 만드는 아리송한 남자. (그래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한편 만들면서 온갖 똥 폼은 다 잡고 시간은 시간대로 걸려서 팬들을 지치게 만드는 괘씸한 남자.(그래서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그가 온다는 소식만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섹시한 남자.(그래서 설렘을 안겨다주는...)

그랬다. 왕가위는 젊은 날이 지니고 있을법한 우울한 영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마약보다 위험하고 죽음보다 강렬한...
 
그와 함께라면 저주라도 좋다

왕가위는 저주다. 계절이, 혹은 가을이, 아픈 사람들에겐. 조금씩 부식돼 가는 마음의 시간을 그는, 불쑥 끄집어낸다. 그리고선 박박 긁어대면서 니힐함을 주입시킨다. 한결같은 슬픔의 정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늘 주춤주춤 거리는 주인공들. 언제고 떠남을 예고하고 있는 관계. 그 정서와 감정은 지독하게 슬프고 아프다. 조용하게 흐느적거리면서 고름을 짜내는 감정의 파편들...

예외적으로 <중경삼림>의 633(양조위)을 제외한다면 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끝이 암울하고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태로운 관계에 발을 담든다. 처음부터 끝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 그 얼마나 지독한가. 그럼에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없다. 그건 어쩌면 나, 우리의 모습이고 현대의 자화상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공연히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그건 일종의 저주다...

에고, 그 불온한 매력

어떤 식으로든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의 영화로 입은 상흔은 다시 그의 영화로 씻김굿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왕가위의 영상에서 굳이 의미를 따지려 해선 대략 곤란하다. 이유를 찾고, 근거를 요구하고, 이성에 의한 분석을 요구하는 이 까다로운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직관에 의존해서 세상을 부유한다.

하나같이 마음의 고름을 품고 있는 그의 페르소나들은 이성과 합리보다 '불끈' 즉흥과 충동에 어울린다. 그리고 불온한 매력을 품고 있다. 상처를 주고받고, 그 아픈 상처를 꽁꽁 품은 채 슬픈 기억 속에서 부유한다. 그 에고들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연가. 소화(유덕화, 열혈남아)가, 아비(장국영, 아비정전)가, 223(금성무, 중경삼림)이, 구양봉(장국영)과 맹무살수(양조위, 동사서독)가, 아휘(양조위, 해피투게더)와 보영(장국영)이 그랬고. 특히 <화양연화>의 차우(양조위)와 리첸(장만옥)은 이성에 지배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는 마음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멈칫거림을 너무도 절절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은 몸짓, 제스처 하나에도 내 마음은 하릴없이 서걱거렸다.

다시 돌아온 그에게

4년을 기다렸다. 앞서 그를 만난 것이 2000년이었다. <화양연화>, 반복과 시간의 건너뜀, 스쳐 지나가는 느낌들의 미묘한 연결, 찰나에 담아내는 그 감정들의 절절함. 그건 쉽게 말이나 글로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알아채기라도 할라치면 터질 것 같은 정염의 불꽃들을 거세한 채 차곡차곡 쌓아올린 미세한 감정들의 작은 요동이 오감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왕가위의 매력은 '거부'에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듯 보여도 그의 속내에는 젠체하는 것들을 마음껏 씹어준다. 때론 시간의 흐름이나 기승전결 따위도 무시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거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진짜 착하다면 모르지만 착한 척 할 필요는 없다. 강호의 협객들이 나오는 <동사서독>에서는 "칼은 필요없다"며 "무협은 죽었다"고 일갈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화양연화>도 불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감싸 안고 동정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과연, 왕가위!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현대의 태도와 감정을 놓고 왕가위는 모험을 한다. 세월에 깎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도덕, 윤리 혹은 관습에 도전장을 던진다. 그리고 규정짓지 않는다. '부재'와 '결핍'이 두려운 이들에게 왕가위는 슬며시 말을 건네는 듯 하다.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고독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조용히 고독을 받아들이라는 듯. 그래서 <2046> 앞에서 나는 또 다시 묘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끊임없이 먹어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고 타는 듯한 목마름에 시달렸던 그 때처럼 말이다...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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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책도둑> 출간 기념, 책 훔치기 이벤트 (응모방식이 일부 변경되었습니다.)

가까스로 경찰을 따돌린 나는, 문학동네로 흘러 들어갔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도망을 가다보니, 발이 도달한 곳이었던 셈이다.

발이 날 이끈 것일까. 아니면, 어떤 운명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 것일까.

그 동네는, 그렇다. 예삿동네가 아니다. 쉽게 발 디딜 수도 없는 동네다. 세계에서 온리 원.

이유는 바로 '문학'.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가치가 소장돼 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난 이 곳에 오려고 맘 먹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왜냐, 난 좀도둑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또한 아무나 올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거룩하고 우아한 우리 도둑계의 셀리브리티들도 원한다고 이곳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있는 동네면서도, 없는 동네다.

동네가 고래처럼 숨을 쉬면서, 사람들을 골라 받아들인다. 이 미친 놈의 동네. 그런 곳에 내가, 이 좀도둑인 내가 발을 디딘 것이다. 허허. 훔치고 싶었다. 도벽이 재차 발동함과 동시에, 이젠 욕심이 난다.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보니, 반짝반짝 빛이 난다.

소심한 좀도둑이던 나였다. 그런데 마음이 둥둥, 둥둥, 왜 이런가. 도둑계 최고의 경지인 < 책도둑 1, 2 >의 타이틀이 아롱아롱. 일찌기 없던 전율이다. 왜, 왜.

나는 단독자였다. 누군가와 함께 합작으로 털어볼 생각 따위 추호도 한 적이 없다. 흥해도 혼자 흥하고, 잡혀도 혼자 잡힌다는 철저한 개인 플레이.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나는 철저히 원맨밴드였다. 그래서 저런 타이틀엔 관심 없었다. 대부분 저 타이틀을 따기 위해선 합작이나 제휴 플레이어들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와 < 더불어 숲 >에 가 본 적도 없다. 집 바로 옆에 숲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 마음 속에선, < 모방범 1, 2, 3 >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 순간. 나는 모방범이면서도 창조범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책도둑의 칭호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된다. 공허한 명예나 헛된 명성 따위 콧방귀를 꼈는데. < 어린 왕자 >를 그려보지만, 순수했던 하얀 마음은 이미 검은색으로 순식간에 물들고 있다. 이건 하나의 혁명이다. 내 삶의 하나의 전기. < 기나긴 혁명 >이 될 것 같은 예감. 내 마음 속에도 < 보이지 않는 경제 >가 똬리를 틀고 나를 동하는 것일까.

동이 틀 때까지 나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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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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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 무엇을 떠나보내고 싶어서였을까. 무엇을 정리하고 싶어서였을까. 누군가 그러더라. 연말, 소득공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안에 가득찬 미련한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흠, 그럴 듯하단 생각이 들긴해.

사실, '작별'이란 제목이 냉큼 마음으로 들어왔다. '이별(離別)'이 아닌, '작별(作別)'이어서 좋았달까. 그게 뭐, 별다른 차이냐고 투덜거리면, 할말은 없어.^^; 순전히, 내 억측이지만, 작별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라면, 이별은 왠지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야. 이별은, 쓸쓸한 느낌이 더해.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그러더라.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또는 그 인사', 이별은 '서로 갈리어 떨어짐. ≒별리·상별'. 내겐, 혀에서 구르는 '작별'의 어감이 더 좋아.

정이현은, 말하고 싶어했어. 나직하게. 나는, 그 말을 조근조근 듣는 아이가 됐어. 별다른 이유가 있겠어. 진짜, 작별할 시간이잖아. 2007년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이 묘한 감상들. 당신도 알잖아. 말끝마다, 마지막, 마지막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주술을 외지.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어느 순간에 대해. 나는, 그 순간을 나누고 싶은 책으로 <<작별>>을 고른 게지. 나에게도, 영영 작별을 고하고픈 2007년의 어떤 순간들이 있으니까.

정이현은, 7개의 감정을 분절해 놨어. 외롭게, 가득하게, 어른스럽게, 자연스럽게, 사랑스럽게, 뼈아프게, 당혹스럽게. 덜그럭덜그럭. 정이현은, 균질하지 않아. 감정의 결은 출렁거리면서도 켜켜이 생의 결을 쌓아가고 있더라. 굳이 어렵게 따라갈 필요는 없더라. 자신을 증명하면서 타인과 소통하고픈 욕망에 시달리면서도, 타인과의 부대낌에 에라이,하고 고독을 택하고픈 소망 사이에서 외줄을 타기도 한다.

나는 처음, 정이현을 읽었다. 대체로 <<작별>>은 나른하고 미끈해. 섬뜩한 귀기나, 감정의 파고가 벅차 오르는 클라이맥스는 없어. 이 글에는, 도시 중산층, 큰 굴곡 없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향기가 은연 중에 뿜어나오더라. 뭐, 그것이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야. '마지막'을 레떼르를 붙이고 보기엔 무난하단 얘기. 2007년12월31일과 2008년1월1일이 사실 다를 건 없지만, '작별'은 12월31일에 어울리는 인사가 아닐까. 정이현의 '단칸방'에서 나온 지금, 나는 그냥 '90년대'가 아른거린다. 보고 싶거나, 그리운 그런 것은 아니고. 작별도 제대로 할 필요가 있지. 발길에 걷어채는 과거 때문에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다고? 발목을 친친 감으면서 매달리는 미련과 후회 때문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겠다고? 그래도 우린, 거닐어야 한다는 걸 알잖아. 생은 그래도 지속됨을 알잖아.

그래, 2007년의 '균열'은 뒤편으로 밀어넣고. 2008년을 향한 '항해'가 기다리나니. 

그래,
작별은,
'뜨거운 안녕'보단 '나직한 안녕'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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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블랙'.
그 블랙은 '유혹'이고, 나는 '매혹'당한다.
까맣고, 새까만, 그 까망의 유혹.
그렇다. 블랙, 나를 사로 잡는 '까만 유혹'은 그녀의 까만 머리결.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 앉은 까만 머리결이 물결처럼 출렁일 때,
나는 블랙 스네이크에 휘어감긴 듯,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듯,
아래로 쭉쭉 내리뻗은 새까만 블랙의 매력을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알 수가 없다.
그 블랙이야말로 '궁극의 블랙'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더구나, 그 블랙은 블랙 패션과도 너무도 어울린다.
물론, 그것은 콩깍지가 씌인 나의 동공 때문이 아닌가도 싶지만.
나는 그 머릿결을 그래서 '까만 유혹'이라고 부른다.
어느 하나, 삐져나간 것 없이 까맣게 물든 그녀의 머릿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블랙이 다른 어느 색깔보다 요염하고 관능적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녀의 까만 머릿결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나를 사로 잡는 차가운 블랙의 유혹,
그것은 바로 그녀의 까만 머릿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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