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운 좋게도, 공저자로 '꼽사리'를 꼈던 《100인의 책마을》.
책은 지난해 가을경 태어났으나, 그 속에 담긴 나는, 2년 전의 나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때와 또 다르다.
 편협하고 옹졸한 것은 여전하지만, 나는 달라졌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싫음(혹은 나쁨)과는 상관 없이.

책에 텍스트로 찍히기 전의 판본이다.
그러니, 정제되지 않은, 인터넷에서 좀 더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말도 있다.

올해, 나는 어떻게 달라지고, 변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다만 그때나 지금 달라지지 않은 건, 이 엄한 세상, 버티고 견뎌야 한다는 것.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큰 어긋남 없이 지켜나가고 싶은 마음.
그 마음 지키기가 가능하길. 

 

 
 

[저자 소개] 준수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만든 커피 한 잔에 미소 짓고,

공공성과 편협한 취향들이 공존하는 커피하우스의 일부가 될 날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고,

커피라는 콘텐츠로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하고,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의 고혹적인 자태를 좋아하고,

야구장에서 미친놈처럼 자이언츠 응원하는 것을 좋아하고,

몇 점의 구름이 그려진 청명한 하늘과 마주하는 것을 좋아하고,

비 오는 날,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음까지 함께 두드리면 좋아하고,

식물이 우거진 길을 거닐면 좋아하고,

편협하고 편파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과 글을 좋아하고,

좋은 재료로 만든 정성이 깃든 요리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다만, 사람을 믿지 않는다기보다 사람의 가변성을 믿으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

소원 중의 하나는, 나이테처럼 멋진 주름을 가진 노장이 되는 것.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랑지상주의자에 가까운 사람.



내 좋은 친구들, ‘F4’와 인사하실래요?  
 

자, 책에 얽힌 내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 여기, 한 청년의 민무늬 정신에 주름을 보탠 ‘F4’가 있어. 청춘 시절이 대개 그렇잖아. 방향을 몰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것. 아니 방향 자체를 상정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헐떡거리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어떤 한 순간에서 그 이후가 비롯되고야 마는. 모든 만남이 우연이듯, 책도 마찬가지야. 우연이 켜켜이 쌓여 인연이 되고, 그 인연으로 삶이 송두리째 바뀌고... 꽐라!~

아, 잡설 닥치라고. 좋아. 바로 그 F4를 알려주지. 《고종석의 유럽통신》(고종석 지음/문학동네 펴냄, 1995)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오후 4시의 평화》(조병준 지음/그린비 펴냄, 1998) 《B급 좌파》(김규항 지음/야간비행 펴냄, 2002) 《지구 위의 작업실》(김갑수 지음/푸른숲 펴냄, 2009). 그건, 곧 고종석이고, 조병준이며, 김규항인 한편 김갑수인. 책(글)과 사람이 다를 수도 있다고? 아,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내겐 그들이 지금 여기까지 내 인생의 F4라는 건 달라지지 않아.

F4가 꺼내놓은 지도. 그건 아직 청춘을 관통하는 내게, 방황과 방랑이 추적추적 대는 내 삶에 어떤 이정표를 제시해줬어. 군대 시절에 읽었던 《고종석의 유럽통신》, 사회로 본격 나가기 전에 만난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오후 4시의 평화》, 직장 생활 중 접했던 《B급 좌파》, 직장을 탈출하고 새 삶을 꾸릴 때 읽었던 《지구 위의 작업실》.

삶의 어떤 변곡점에서 만났던 F4, 그러니까 그들은 내 좋은 친구들. 그들은 내 젊음의 한때를 함께 했고, 위태하던 내 민무늬 정신에 위안과 방향을 제시해줬어. 어쩌면 나는 이들에 의지한 것이 아니었을까도 싶어. 살아온 날보다 많이 남은 살아갈 날에도, 믿고 기댈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하고.

사실 내 생각과 행동, 사고체계와 인식이 어디까지 고유한 내 것이고, 어디부터 주입되고 흉내 낸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 너도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일정 부분, 구획 지을 순 없지만, 이 친구들의 영향이 지대했을 것은 분명해. 지분이 얼마나 되냐고? 흥, 지분 따위 따지는 건, 경영권 다툼을 하거나 경제적 가치만을 최우선으로 치는 곳에서 하는 거라고! 꽐라~

물론, 지금 다시 보면, 그때와 다른 울림을 안겨다주기도 하지. 세월이 마냥 그때와 똑같은 시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도 다른 무게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안겨다 준 주름, 청춘의 변곡점을 기억해.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 평생 따라붙을 지도니까. 그들을 통해 나는 다시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까. 그래. 내 친구들 좀 더 자세히 소개해 줄게. 자~자, 인사해. 안녕, 준수의 친구들.


[이상 인트로, 다음 시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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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스포일러로 여겨질 수 있는 내용이 황해에 빠져 있음.)

김훈 작가였지, 아마. 세계의 기본 구조는 악과 폭력이라고. 세상의 온갖 야만성과 폭력은 사랑이나 희망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그 폭력의 근저에 ‘이권’이라는 것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이권을 향해 치닫고, 그것에 의해 조율된다. 이권 없이 세상은 옴짝달싹 않는다. ‘인맥’이라는 말속에도 그 이권의 냄새가 배여 있을 정도다.

아, 오해는 말자. ‘이권’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로, 이권의 모든 것을 말할 의도는 없다. 이권은 때론 세상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힘도 된다. 내게 가해지는 부당한 억압, 그것에 저항하는 것, 또한 거칠게 말해, 이권이다. 이권을 위해 저항하는 거다. 내가 불편하고 힘드니까. 이권을 향한 인간의 촉수는 본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은 이성이다.

물론, 스스로 노예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 그 이권은, 오로지 화폐의 규모나 집이나 자동차로 환산할 수 있는 화폐성을 뜻한다. 아마 그것을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로 치장할 가능성이 꽤 클 테지만. 

 
어쨌거나, <황해>를 보고선, 하나를 더하고 싶어졌다. 이권 외에도 플러스 원.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 그것은, 치정(癡情). ‘치정극’하면, 여느 아침드라마를 떠올리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다. 그 아침의 치정극이야,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조미료에 가깝지만, <황해>의 것은 세상의 근간이자, 퍼즐을 맞추는 메인 재료다. 숨겨진 레시피라고나 할까. 어쩌면, 우리가 감추고 싶은, 세상 깊은 곳의 추잡함 혹은 더러움.

황량한 멜로드라마 


이 영화, 폭력성 혹은 잔인함으로 얘기하는 수사들, 많다. 그것도 맞다. 허나, 나는 그것보다 로맨스로 봤다. 다만 그 앞에, ‘삭막한’ 혹은 ‘쩨쩨한’을 붙여야 되겠다. 어째 하나 같이 이곳의 수컷들은 삭막하고 쩨쩨한 존재들이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을 상상하거나, 이를 추궁한다. 구질구질한 궁상남(들). 그러면서 센 척, 있는 척, 대범한 척 한다. 억지로 자신을 감춰야 한다. 돈이 많으면 뭘 하나. 늘 불안에 떨고 이권만 먼저 생각한다.
(물론, 정부와 짜고 악행을 저지르는 여자도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어둡고 잔뜩 찌푸린 채 시작하고, 시종일관 이 톤은 유지된다. 옌볜의 택시기사, 구남(하정우)의 표정부터 그렇다. 빚더미에 짓눌려 있으면서 그는 한탕을 바라며 마작놀음에 매달려 있다. 아내는 돈 번다고 한국으로 갔는데, 깜깜무소식이다. 그런 그에게,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면정학(김윤석), 면가라고 불리는 개장수가 한 놈 담그고 오면, 빚을 갚아준단다. ‘공존’은커녕 ‘생존’만 희번덕대는 공간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밀항을 하고, 주소 하나만 들고 살인대상을 향해 구남은 황해를 건넌다. 열흘의 시간. 6만 위안에 목숨을 걸고, ‘살인자’라는 죄명까지 쓰건만, 구남에게 큰 고민은 없어 보인다. 노모와 아이도 있지만, 그는 빚과 아내 없는 현실, 부정한 상상이 빚어낸 삶의 피로감을 견딜 재간이 없다.

돌고 있다는 개병(광견병)이 그에게도 스며들었던 것일까. ‘어미를 물어죽이고 나중에는 제 아가리로 물어죽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물어 죽인’, 어릴 적 기르던 개를 닮아간다. 칼에 묻힌 피를 씻어낼 도리가 없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 흔들리던 아마추어 범죄자도 도리가 없다. 모든 상황이 그를 낭떠러지로 몰아간다.

 
애달프게 보고픈, 바람난 것이 아닌지 불안한 아내 찾자고, 빚진 돈 갚아 집안 꾸리고자 한 가장이었을 뿐인데,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 아, 이런 몹쓸 멜로드라마를 봤나. 사랑도 야만과 폭력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 사실이구나. 아니, 사랑은 야만과 폭력 앞에 쉬이 힘을 쓰지 못하는 구나. 아...

악의 다양한 얼굴


구남이 그렇게 입체성을 띠고 있다면, 구남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장본인, 면가는 악의 전형성이다. 이권에 눈 먼 극악한 인간의 단면이랄까. 면가는 오로지 하나만 본다. 내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 차갑고 단순하다. 그것을 본능이라 말할지 몰라도, 철저하게 이성에 의한 작동이다. 이권을 취하려면, 잔머릴 굴려서 앞뒤 재야 가능하다. 동정이나 연민? 그런 건 없다. 이성으로 그것도 몰아내니까.


면가는 끝까지 밀어붙인다. 소용없으면 죽인다. 살려주는 건 하나, 돈이 될 때, 돈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구남에게도 그러하며, 또 다른 폭력과 악의 축인, 김태원(조성하) 패거리에게도 그러하다. 이권의 취득 여부가 모든 행동의 기준이다. 그는 세상의 작동 원리를 온몸으로 체화한다. 소뼈다귀를 들고 사람을 후려치는 모습. 면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순 없다. 그 모습은 또한, 소뼈다귀만 안 들었을 뿐이지, 우리 사는 세상과, 우리와 다르지 않다.


김태원도 전형적이다. 약한 자에겐 강하고, 강한 자에겐 한 없이 약한 존재. 운수회사 사장이라는 그럴 듯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지만, 실은 그는 양아치이자 조폭이다. 형-동생 한다는 관계의 동생을 살인청부하고, 그게 밝혀질까 관련자들을 없애자고 안달복달이다. 눈앞에서 협박하는 면가 앞에선 설설 기지만, 뒤에선 살인을 교사한다. 그에겐 물론 이권 외에도 또 다른 살인의 이유가 있다. 사랑 아닌, 소유욕. 그건, ‘내 걸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이권의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니, 양아치나 조폭에게 의리 같은 게 있다는 건 착각에 가깝다. 그들이 부르짖는 의리 같은 건,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에 한한다. 의리 없이 뒤통수친다고 욕할 것도 없다. 그게 그네들 생리다. 의리라고 쓰지만, 이권이라고 읽는. 조폭 아닌 이들이라고 사실 크게 다르진 않다. 의리는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만 지키는 것이고, 의리는 많은 경우, 이권의 소소한 작동에 의해 지켜지고 유지된다.


면가나 김태원, 세상의 기본 구조다. 쉽게 ‘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캐릭터를 구축해 놨다. 감독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이라는 현실의 알레고리


한국은 그런 세상을 더욱 실감나게 절감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의도였건, 그렇지 않건, <황해>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은, 황량하고 건조하다. 강남구 논현동, 부산, 울산 등 어딜가도 그렇다. 현실의 알레고리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우선, 옌볜에 있는 조선족 구남에게, 한국은 돈 벌겠다고 간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내가 일했던 식당의 주인은, 아내의 행방을 묻는 구남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여기, 진짜 부부가 있는 것 같냐며.
그리고선,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구남이 직접 발 디딘 한국은, 동족이라곤 하나, 그것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수사임을 확인할 뿐이다. ‘우리’가 아닌 ‘그들’로 치부하는, 이주노동자에게 더 없이 가혹한 곳이 한국이다. 도움을 묻는 구남에게, 식당의 이주노동자는 냉랭하다. 이주노동자끼리도 별다른 교감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계급의 가장 아래 부분에 있는 이주노동자를 등치는 한국인, 그게 다 이권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나.


영화는 또, 먹는 장면을 통해 지금-여기의 살풍경을 비춘다. 극 중에서, 구남은 허겁지겁 먹는다. 살기 위해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살인을 위해 잠복하다가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소시지를, 도망 다니다가 한 폐허가 된 식당의 냉장고를 뒤져 깍두기를 걸신들린 듯 먹는다. 여기의 많은 이들은 생존을 명목으로 그렇게 주어진 것에만 매달린다. 어떻게든 눈앞의 것을 먹고 살아남으려는 생존본능만 번뜩인다.
 

경찰은 더 없이 무력하다. 지들끼리 총을 쏘고 맞고, 떼거지로 몰려들면서도 눈앞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을 놓친다. 화면을 화려한 스펙터클로 채우는 카체이싱 장면도, 알고 보면 경찰의 아둔함 덕분이다. 경찰의 무능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으나, 우리가 아는 많은 경찰이 그렇다. 총장 나으리께서 건설현장 함바집까지 신경을 쓰시는 마당이니. 무능하거나, 부패하거나. 지팡이?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물론, <황해>는 거칠고 건너뛴다. 2시간40여분의 러닝타임도 담지 못한 건너뜀이 있다. 그럼에도 그 속엔 에너지가 있다. 잔인함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엇. 그 표면적 잔인함에 묻거나 뒤에 숨은 세상의 어떤 구조들. 끝내 다시 건너지 못한 황해의 풍경은,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세상의 머뭇거림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기야, 건넌다고 해결이 됐을까. 마지막 장면은 뭔가 아쉬움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사족 같았다.

<황해>는 현실의 잔인무도함에 비한다면, 오히려 디스카운트된 영화다. 스크린이라는 필터를 통해 순화된. 굳이 이 영화에 잔인하다는 말을 붙이고 싶지 않은 이유다. 곳곳에서
‘악의 평범함’을 목도하는 마당에 무슨. 하물며, 내 안에도 악과 폭력이 있거늘. 내 안을 먼저 들여다볼 것을, 내 안의 개병을 먼저 살필 것을 권하는 영화, <황해>다. 우리도 지금, 황해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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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가 - 이나모리 가즈오가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다 서돌 CEO 인사이트 시리즈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신정길 옮김 / 서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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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일하는가.” 이 질문, 당연한 것이다. 물론, 삼신할머니의 랜덤으로 부모(의 재산)를 갉아먹으며 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으나. 일하는 모든 이라면, 꼭 필요한 질문이다. 그 '왜'는 삶의 이유와도 같은 맥락에서 답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한 답을 내놓기가 민망해진 시절이다. '왜 일하는가'에 대한 답이 증발한 시절이다. 이른바 백수 100만 시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하는 이 엄혹한 시절, 그런 질문은 개똥 처바른 사치처럼 느껴질 법하다.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차라리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다그칠 사람도 있겠다. 계절의 순환과 상관없이 취업한파라는 말이 1년 내내 휘몰아치는 풍경 앞에 배부른 소리라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겠다.

지금? 그래, 알다시피 일에서 소외되고, 자본에 종속됐다. 그런 사유야 어떻든, 어떤 일이든 해야만 존재를 지탱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왜 일하는지’ 더 고민하고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일을 한다는 것이, 이전과 다른 의미를 품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한다는 것, 단순화해보자. 먹고 살기 위해서? 맞다. 자아실현을 위해서? 역시 맞다. 더 중요한 것도 있다. 일을 함으로써 갖게 되는 자아존중감(자존감)? 그것도 맞다. 그렇다면, ‘어떤’ 일인가 이전에, ‘왜’ 일을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남들에게 증명하기 위한, 남들 보기에 버젓하거나 번듯한 일이 아닌,  ‘왜 일하는가’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 이 사람, “일본의 세계적인 기업가로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 중 한 사람이자 살아있는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왜 일하는가.” 풀자면, 이렇다. “‘세상에 태어나 한 번뿐인 삶인데, 지금까지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살아왔는가?’라고 되묻고 싶다. 나아가 내가 깨달은 ‘일하는 이유’와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왜 일해야 하는지, 일을 통해 무엇을 깨닫는지 알려주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려주고 싶다.”

저자인 이나모리상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마음을 갈고닦으며,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역설하고 있다. 원래 책 제목은 ‘일하는 방법’이며, 부제가, 왜 일하는가, 어떻게 일할 것이냐, 라는데, 국내 번역본에선 ‘왜’를 강조한 것도, 어쩌면 지금-여기의 엄혹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하는 방법 이전에, ‘왜’를 고민해보자는 의도가 아닐까.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답변. 그 말에 담긴 무게감을 나는 일하면서 절실히 느낀다. 세계에서,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를 채우는 것, 혹은 배를 곪지 않는 것이다. 한 예술가의 작품에서 본적이 있는 이 문구. "Most important thing in the universe is -> Full Stomach." 그럼에도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단지 그 때문일까. 이나모리상은 내면을 키우기 위해 일한다는 말을 한다.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들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뜯고뜯기는 것이 일상화된 자본주의가 아니냐, 라는 것으로 자신의 일에 면죄부를 씌운다. 나만 먹고살 수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남을 착취하고, 궁지로 몰아넣는 일이라도 나만 혼자 잘살면 끝인가.  

이나모리상의 자본주의는,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資本主義)와 다르다. 그의 자본주의는 ‘慈本主義’이다. 자비로울 자, 사랑할 자. 나는 그것을,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교”로 해석했다. 남에게 둔감해지지 않는 것. 삶의 미각에 묻은 씁쓸함을 외면하지 않는 것. 가능한 한 내가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닌 사회가 필요로 하고 해가 되지 않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했기에, 그는 세습에 반대했고, 은퇴한 뒤 그가 성공으로 이끈 회사에서 60억원 가량의 전별금을 준다니, 턱하니 대학에 기부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은 장삼이사가 쉬이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 역시 낙망과 좌절의 때를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말해보자. 행복해지기 위해 일한다. 그 행복.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누구나 사회 속에서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고 관계를 맺는다. 일은 결국 그러한 것이다. 혼자서 일할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일은 이뤄진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땀 흘려 번 돈 만이 진짜 이익이다.” 그건, 머리보다 몸으로 밀어붙여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금융공학, 즉 잔머리 굴려서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것을 싫어한 이유다. 금융공학을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금융공학이라는 말 뒤에 똬리를 튼 탐욕을 빗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일은 생활수단이기도 하지만, 이나모리상에겐 영혼을 닦기 위한 수양의 장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경영자로서 더 많은 세월을 산 그는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기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동기를 부여하고 인격이 중요하다고 봤다. 지금-여기의 많은 경영자들의 행태와 다른 포인트다. 그래서 성과급보다 작은 명예로 일하는 이들의 자존감과 일하는 이유를 부여했다. 사람이 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성과를 내지 못할 때 대우해주지 않으면 가라앉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함께, 꾸준히, 그렇게 가야한다는 것. 그는 그런 경영자였고, 일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그가 경영했던 교세라의 경영이념은 이랬다. ‘전 직원의 정신적, 물질적 행복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류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공헌하는 것.’ 즉, 경천애인(敬天愛人). 요즘 같은 엄혹한 시대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읊어댈지 몰라도, 결국 그것이 근본이고, 그가 존경받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업가로서 사회와의 접점, 혹은 사회적 책임을 놓치지 않았기에, 그는 오래 성공했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힘들고 신산한 시절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가 견고하고 숙련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나모리상도 그런 시절을 겪으며 자신의 철학을 다져갔다. 시련을 참고 견디는 힘이 커졌고, 일을 왜 하는지, 고민하면서 인격을 수양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기를 찾았다. 그의 일하는 철학은 '유의(有意)주의'라는 말로 대변된다. 의식하고 집중하는 것, 즉 뜻을 가지고 뜻을 기울일 것을 요구하는 것.

그래서, 사유하는 것이 맞다. 일을 하는 이유. 이나모리상의 ‘慈本主義’는 ‘공생주의’와도 통한다. 주변과 성과를 나누는 기쁨을 가지는 것. 그것은 질이 다른 기쁨이자, 아름다운 기쁨이다. 기존의 자본주의는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며, 경쟁에서 이길 것만을 강요하지만, 이나모리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일을 하는 회사도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월급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나를 알리고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나누는 무대였다.

그는 행복한 삶을 이리 말한다. “돈이 많아도 친구가 없으면 외롭고, 자격증이 많은 것도 아니요, 가방끈이 긴 것도 아닌,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그것은 일하면서 사유하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행간에는 그 사유할 것을 권하는 흔적이 묻어있다. 내가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사회와 어떤 접점을 이루고 혼자 아닌 어떻게 함께 잘 살 것인가. 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 일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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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3.0 - 김광수 소장이 풀어쓰는 새시대 경제학
김광수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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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시대다.  마냥 어렵다고만, 현실 정합성이 떨어지는 이론이라고만 치부했던 시절이 아니다. 일상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던 경제학은, 어느덧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아마 일상적 경제생활의 변화나 의식의 변화가 그 이유일 터인데,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은 현상이다. '일상의 경제학', 그 비슷한 이름으로 각종 경제학 강의가 이뤄지고, 남녀노소 누구 할 것 없이 재테크에 열중한다. 합리성을 띤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길 열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대로 된 경제학을 사유하고 있을까. 경제학 내에서의 하위 카테고리나 스펙트럼 또한 엄청 넓을 텐데, 현실 속으로 파고든 '경제학'을 고민하는 시선들은 올바른 전제를 갖고 이뤄지고 있을까. 

세간의 널리 퍼진 오해 혹은 오류 중의 하나. 어쩌면 제대로 된 경제학을 사유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그것. 정치와 경제는 분리돼 있다, 혹은 분리돼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전제다. 잘못된 전제로 인해 일상의 경제학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경제를 논하고 문제를 풀 때, 정치를 대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무식'에 가깝다.  

아마도 잘 알 것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죽지도 않은 것을 살리겠다는, 엉뚱한 프레임의 구호로 대중들의 마음에 파고든 작자의 논리가 그러한 것이다. '실용'이라는 고갱이 없는 수사로 그는 대중을 현혹하는 주술을 퍼트렸고, 그것이 먹혔다. 3년 여의 시간. 경제가 정치와 외따로 떨어져 작동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경제 쥐뿔도 모르는, 무식한 MB적 구호는 현실 정합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 경제학. 과문한 나는, 경제학을 이리 이해한다.

“의식주 생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삶과 연관된 기본에 대한 이야기.” (김수행 마르크스경제학자)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먼저 쓰러져가는 빈민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앨프리드 마셜 영국 경제학자)
“경제학의 목표가 많은 사람을 좀 더 잘 살게 하는 것이라면, 먼저 가난한 이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 교수)

물론, 학교나 직장, 사회가 그리 알려주지 않는다. 특히나 지금-여기에선, 많은 이들이 경제학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것을 보통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다만, 생각해보자. 경제학이 애당초,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탄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자명하지 않나.  

그러니, 경제학을 생각하고 고민한다는 건, 단순히 돈이나 화폐로 계산되는 수치에 매몰됨을 뜻하지 않는다. 경제가 정치나 교육 문제 등과 분리해서 작동되는 것도 아니다. 일상의 경제(학)를 다룸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교육(이라고 쓰고, 사육이라고 읽는) 등과 관계맺고 있음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집을 살 때도 교육의 문제가 끼어들고, 물건을 살 때도 우리는 공정무역, 사회적기업 등 윤리나 사회를 생각하는 경험도 한다. 경제는 그만큼 모든 것과 잇닿아 있고, 특히나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나, 경제(학)를 모르오’라고 커밍아웃하는 거나 다름없다.   

《경제학 3.0》은, 그것을 지적한다. 경제는 혼자 따로 노는 것이 아니며, 지금의 경제 현상을 어떻게 보고, 우리가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지 고민할 것을 권한다.  지금-여기의 우리가, 경제학을 어떻게 현실과 연결시켜야할지 사유해보자고 화두를 던진다.  

가까이, 지난 10년을 돌아보자. 과연, 우리는 어떤 경제학을 토대로 어떤 경제를 구축했는가. 집(주택)문제부터 의료, 노동, 노후, 교육 등 일상의 경제와 관련된 것에서 우리는 나락을 경험했다. 부동산 투기 열풍과 나날이 늘고만 있는 가계 부채.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생산적인 경제는 없었다. 거품 경제가 삼켜버린 사회. 실업에 처한 청년의 좌절은 물론, 믿었던 국가로부터도 배신당한 국민적 좌절(용산 사태)도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경제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정치인과 관료에 의해 넝마가 됐고, 오랫동안 쌓아온 경제 구조마저 한순간 허물어졌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비정규직이 생겼고, 청년들은 더 이상 이 사회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사교육은 활개를 쳤고, 집은 사는(living) 곳이 아니라, 사야할(buying) 곳이 됐다.   

돌이켜보라. 이것은 정치의 문제였다. 김광수 소장도 그것을 지적한다. “우리의 모든 삶은 정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사교육비가 급증하는 것도, 대학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도 모두 정치적 결정에 의한 것이다. 어떤 정당 또는 대통령이 어떤 교육 정책을 시행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p.237)

경제가 정치와 무관한 것이라고 문제해결을 뒤로 미루지 말자고 김 소장은 강조한다. 정책을 펼치는 국가 관료들과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 야합이 이뤄낸, 아울러 그에 끌려다닌 우리들의 시행착오. 물론, 장삼이사의 무식이나 무능은 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대통령, 정부, 정치권의 집단적 무식(무능)은 나라를 말아먹는다.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순 없다.

구조적으로 메스를 들이대는 일이 필요하다. 공정하고 올바른 경제시스템의 운영을 위해,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실패와 위기의 주모자들에게 계속 이를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관습과 경험을 차단하고, 경제학의 새로운 정립에 나설 수 있는 눈 밝은 사람과 정치를 선택해야 한다.  

기업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우리를 먹여 살리지 않는다. 기업이 잘 돼야 노동자들이 먹고 산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기업은 기업의 배만 불리고,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 실업을 빌미로 일하는 사람을 겁박하고, 윽박지른다.  

그리하여 문제는, 정치다. ‘경제가 정치와 무관하다’는 인식은, 정치권력을 계속 잡기 위해 노회한 자들이 주입한 수사다. 경제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하다. 경제학의 임무와 고민의 핵심에는 정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물갈이가 있다. “위기에 빠져 있는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21세기 지식정보화 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여야 정치권과 기성세대의 물갈이를 통한 세대교체가 정치 개혁의 핵심이 돼야 한다.”(pp.257~258)  

아울러,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지금 이 시대에 부각되고 있는 '희소성'.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는 경고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임금은 더 오르지 않고, 이윤도 오르지 않고,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 상태라도 유지하려면 또 모두 죽도록 일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그 경고(정체상태론)는 이미 현실이 됐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러나 이 순간에서도,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역사에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므로, 이 상태가 우울한 상태가 아닌 '조화 상태’(harmonized state)'가 될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제학을 단순히 보지 말 지어다. 우리 시대의 경제학은 정치적 상상력은 물론 문학적 상상력까지 동반하면서 작동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삶과 연관된 기본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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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 김효진씨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레드카펫을 밟는다는 소식이 있네요. 김효진씨가 출연한 영화 <창피해>가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됐죠?  

 

네, 김효진씨가 생애 처음으로 레드카펫을 밟게 됐습니다. 김효진씨는 김수현 감독이 연출한 <창피해>에서 주연을 맡았는데요, <창피해>가 제61회 베를린영화제 비경쟁부문인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됐습니다. 이 파노라마 부문은 예술성과 상업성을 두루 갖춘 작품이 선정되는데, 총 18편이 상영됩니다.  

김효진씨는 <창피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윤지우 역할을 맡았는데요, 소매치기 소녀 강지우(김꽃비 분)를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김효진씨는 이번 초청 소식에 대해 “세계적인 영화제에 초청 받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설렌다. 수상에 상관없이 굉장한 영광”이라고 소감을 전했고요.

아마, 앞서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바 있는 김효진씨의 연인인 배우 겸 감독인 유지태씨가 무척 좋아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드네요.  

- <창피해>, 어떤 영환가요? 


2004년, <귀여워>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장선우 감독을 비롯해서 예지원씨 등이 출연해서 호평을 받았던 작품인데요, 이 작품을 연출했던 김수현 감독의 7년만의 신작입니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상영이 됐는데요. 전반적으로 평이 좋습니다.  

앞서 주인공 이름도 잠시 언급을 드렸는데,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지우가 등장한다. 강지우, 윤지우, 정지우. 세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고요, 동성애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 자체보다는 여자의 심리를 다룬 영화이기도 하고요, 여성들의 사랑, 기억, 성장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여성들에겐 특히 공감할 부분이 많지 않을까 싶네요. 또 여성을 알고 싶은 남성들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김수현 감독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일반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 좀 더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가치 있게 표현해보고 싶어서 동성애 영화를 선택했다고 하네요. 재밌는 건, 두 편의 영화 모두 제목이 귀여워, 창피해, 세 글자인데요, 다음 작품은 어떤 제목이 나올지 살짝 기대됩니다. 
 

- 우리나라영화 중 또 어떤 작품이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어떤 작품들이 선보여질 예정인가요?

네, 우선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내년 2월10일에 개막하고요, 현재까지 <창피해>를 포함해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이 확정된 한국영화는 4편입니다.현재 계속 상영되고 있는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도 <창피해>와 마찬가지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이 됐고요, <창피해>는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된 모든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를 후보로 하는 ‘테디상’ 수상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모차르트 타운> <애니멀 타운> 등을 연출한 전규환 감독의 타운 3부작의 완결편, <댄스타운>도 같은 섹션 상영이 확정됐는데요, 이 영화는 탈북자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울러, 다큐멘터리인 <청계천 메들리>도 초청을 받아,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영화를 상영하는 포럼 부문에서 상영될 예정입니다.

이밖에 경쟁부문 진출작은 이달 말 즈음에 발표될 예정인데요, 베를린영화제는 2편의 미공개 한국영화를 시사했는데, 경쟁부문 초청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참고로, 한국영화는 2008년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을 마지막으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선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2. 2010년은 비틀즈와 특히 존 레논 팬들에게는 특별한 해란 생각이 드는데요. 팝의 전설, 존 레논 타계 30주기를 기리는 영화 <존 레논 비긴즈-노웨어보이>가 개봉됐죠?

1980년 12월8일 오후, 존 레논와 오노 요코의 집 앞에서 네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오전에 존 레논에게 사인을 받았던 한 남성팬이었는데요, 그 총성 네발로 한 시대의 아이콘이 눈을 감았습니다. 당시 마흔 살이었죠. 비틀스의 전 멤버, 음악가이자 혁명가였으며, 사상가였던 존 레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존 레논이 태어난 지 70년, 사망한 지 30년이 되는 해인데요, 비틀스 시절 ‘When I'm sixty four’라는 노래가 있는데, 음악잡지인 <롤링스톤>과 인터뷰를 할 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64살이 되면 오노 요코와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 존 레논이 뭐라고 했을까요?

“아일랜드 해안가에 사는 멋진 노부부이거나 그 비슷한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의 광기를 스크랩해놓은 책을 보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64살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일랜드 해안가에 사는 비슷한 사람도 못 됐습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광기를 스크랩해놓거나 스크랩하려고 하고 있네요.

<존 레논 비긴즈-노웨어 보이>도 그 중의 하나가 되겠는데요, 시쳇말로 껌 좀 씹었던 시절의 존 레논을 다루고 있습니다. 존 레논을 중심으로 비틀스라는 전설은 어떻게 탄생했나, 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와 이모, 폴 매카트니와의 만남 등이 나옵니다. 물론 실재와 달리 영화적으로 구성한 부분도 있는데요, 존 레논이나 비틀스 팬들이라면 더 큰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또 다른 흥미있는 포인트들이 있는데요, <러브 액추얼리> 보셨죠? 이맘때면 숱하게 돌려보실 텐데요, 그 영화에서 짝사랑하는 소녀의 관심을 받기 위해 드럼을 연습하고, 특히 사랑 운운하던 꼬마 샘, 기억나실 거예요. ‘토마스 생스터’라는 이름이 이 꼬마 배우가 <존 레논 비긴즈-노웨어 보이>에 훌쩍 자란 모습으로 나오는데요, 존 레논의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던 폴 매카트니로 나와서, 잘 자라줘서 고마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참고로 존 레논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냐면, 그의 고향인 영국 리버풀은 공항 이름을 존 레논 공항으로 바꿨고요, 존 레논의 페이스북 공식페이지 팔로워는 120만명이 넘습니다. 

   
3. 우리나라가 자국 영화 점유율 세계 6위라는 발표가 있었는데요. 이런 부분들이 할리우드 영화산업 전략까지 변화하게 만들고 있는 느낌입니다. 비영어권 국가의 지역 색이 뚜렷한 작품에 대한 할리우드의 투자가 늘고 있죠?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영화> 12월호에 따르면, 작년이죠, 2009년 기준으로 자국영화 점유율 상위 10위권 국가가 나왔는데요, 1위가 인도로 92%였습니다. 이어 미국이 91.9%로 2위, 일본이 56.9%로 3위, 중국과 터키가 4, 5위에 올랐습니다. 한국은 6위였는데요, 점유율은 47.1%였고요, 이어 태국, 프랑스, 스웨덴, 독일 순이었습니다.

여기서, 인도는 의외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인도는 미국보다 더 많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제작하는 국가기도 하고요, 인도의 극장에 가시면 관객들이 자국영화를 보면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자국영화를 선호하는 관객이 많습니다.

어쨌든 할리우드는 자국영화를 선호하는 해외관객들의 취향과 입맛에 맞춘 콘텐츠를 생산하는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영화시장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중국이나 자국영화 점유율이 높은 인도, 한국, 일본 등을 공략하기 위해 비영어권 국가의 지역색이 뚜렷한 작품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고요, 합자나 합작 형태가 많고요, 비영어권 스타를 캐스팅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다국적용 콘텐츠 제작에 나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할리우드 메이저영화사의 투자를 받은 <황해>나 액션 영화 <지 아이 조>에 출연한 이병헌 씨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4. 이번 주 박스오피스, 개봉작들도 함께 정리해 주시죠.

우선 박스오피스에서는, 지난주 예상 밖으로 예매율 1위를 달렸었죠. 이선균, 최강희 씨 주연의 <쩨쩨한 로맨스>가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습니다. 47만명을 동원했고요, 이번 주에는 연말을 앞둔 신작들의 공세에 밀려, 예매율에선 4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위는 장동건씨의 할리우드 진출작 <워리어스 웨이>였는데요, 21만명 이상이 이 영화를 봤네요. 이어 스카이라인, 이층의 악당이 3, 4위에 올랐고요, 한국영화인 부당거래, 초능력자 등은 10위권 내에서 계속 선전했습니다.

이번주는 라인업이 더 화려해집니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본격적인 성수기에 진입했다고 봐도 될 텐데요. 첫사랑 찾고 싶은 분들, 혹은 지금 옆구리 시린 분들에게 반가운 영화입니다. <김종욱 찾기>입니다.  

창작뮤지컬로서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계속 공연 중인 동명의 작품이 있죠. 뮤지컬의 원작자이자 연출가였던 장유정 감독이 영화계에 데뷔를 했는데요, 주연들도 빵빵합니다. 임수정, 공유 씨가 여자,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아서 첫사랑 찾는 작업을 함께 하는데요, 기존 이미지와 달리 임수정씨는 털털하고, 공유씨는 소심하고 귀엽습니다. 참고로, 김종욱은 극중 첫사랑의 이름이고요. 예매율에선 <나니아 연대기:새벽 출정호의 항해>와 2~3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나니아 연대기, 판타지 블록버스터 3강 중의 하나죠. 나머지 2개는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이고요, 지금 개봉한 <나니아 연대기:새벽 출정호의 항해>는 시리즈의 3번째입니다. 이번 영화는, 원작자인 C.S.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 7부작 중에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책을 각색한 건데요, 해양 판타지로 펼쳐집니다. 3D로 보실 수 있고요, 화려한 볼거리와 스펙터클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귀가 솔깃합니다. 조니 뎁과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투어리스트>입니다. 화려한 액션이 펼쳐지는 영환데요, 아찔한 스턴트와 물위에서 펼쳐지는 보트체이스 액션 등이 두 주연배우의 화학작용과 더불어 재미를 안겨줍니다. 현재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고요.

혹시 살아있는 상태에서, 관에 갇힌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야말로 생매장인데요, 이를 소재로 한 아주 창의적인 작품입니다. 제목이 <베리드>입니다. 영화 런닝타임 내내 관속에서만 벌어지는 일들로 채워지는데요, 그것이 전혀 지루하거나 관습적이지 않습니다. 몸을 뒤틀기도 힘든 공간과 희박한 공기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베리드>고요.

지난 여름,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음악으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고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게 해 준 기적의 오케스트라를 다룬 <엘 시스테마>라는 다큐영화가 큰 관심을 끌었는데요, 이번에는 아프리카 기적의 합창단을 다룬 <하쿠나 마타타:지라니 이야기>도 개봉했습니다. 참고로 하쿠나 마타타라는 말은, 모든 게 잘 될 거야, 라는 뜻입니다.

이밖에 한국영화인 <서서 자는 나무>와 <2AM SHOW>도 선보였고요, 9일부터 한해 독립영화를 아우르고 결산할 수 있는 서울독립영화제가 개막했습니다. 17일까지 열리고요,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 참조 : 씨네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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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1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영화 창피해를 봤던 사람으로
간만에 검색하다 (우연히)블로그 방문하게됐어요.
포스팅하신거에 창피해를 보고싶단 언급이 몇구절있더군요..

(갑작스런말일수도있지만)
실제 동성애에 대해 혹 편견없이
열린맘으로 이해하시나요?
저는 이반(동성애자)을 개인의 개성이고, 취향이라 생각하며 이해해요. 편견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는거야말로
이상하다생각해요. 왜냐면 육체적인성이 아닌 마음이나 영혼에 끌리는게 진정한 사랑이라생각하니까요.
여튼 제가 쪽지드린이유는, 편견과닫힌맘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혹시 열린맘을 가지신분이면 소통하는 친구되고싶어서요.

책을품은삶 2012-04-27 23:57   좋아요 0 | URL
아 답이 늦었네요. 지송.^^;;;

동성애, 편견이 없다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 각자가 성격이 다른 것과 같은 거죠. 혹은 좋아하는 영화 취향이 다른 것.

그러니 동성애, 뭐 이상하다 아니다 생각할 것도 없고요.

되레 동성애에 대해 괜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 사회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동성애는 결코 나쁘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며, 나쁘거나 혐오스러운 거라면 제수씨를 성추행하거나 논문을 표절하는 그런 것. 정말 나쁜 놈들이죠. -.-+

더 나쁘고 못돼 처먹은 건, 그런 놈들을 비호하고 옹호하는 작자들. 미친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