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스포일러로 여겨질 수 있는 내용이 황해에 빠져 있음.)

김훈 작가였지, 아마. 세계의 기본 구조는 악과 폭력이라고. 세상의 온갖 야만성과 폭력은 사랑이나 희망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그 폭력의 근저에 ‘이권’이라는 것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이권을 향해 치닫고, 그것에 의해 조율된다. 이권 없이 세상은 옴짝달싹 않는다. ‘인맥’이라는 말속에도 그 이권의 냄새가 배여 있을 정도다.

아, 오해는 말자. ‘이권’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로, 이권의 모든 것을 말할 의도는 없다. 이권은 때론 세상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힘도 된다. 내게 가해지는 부당한 억압, 그것에 저항하는 것, 또한 거칠게 말해, 이권이다. 이권을 위해 저항하는 거다. 내가 불편하고 힘드니까. 이권을 향한 인간의 촉수는 본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은 이성이다.

물론, 스스로 노예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 그 이권은, 오로지 화폐의 규모나 집이나 자동차로 환산할 수 있는 화폐성을 뜻한다. 아마 그것을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로 치장할 가능성이 꽤 클 테지만. 

 
어쨌거나, <황해>를 보고선, 하나를 더하고 싶어졌다. 이권 외에도 플러스 원.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 그것은, 치정(癡情). ‘치정극’하면, 여느 아침드라마를 떠올리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다. 그 아침의 치정극이야, 그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조미료에 가깝지만, <황해>의 것은 세상의 근간이자, 퍼즐을 맞추는 메인 재료다. 숨겨진 레시피라고나 할까. 어쩌면, 우리가 감추고 싶은, 세상 깊은 곳의 추잡함 혹은 더러움.

황량한 멜로드라마 


이 영화, 폭력성 혹은 잔인함으로 얘기하는 수사들, 많다. 그것도 맞다. 허나, 나는 그것보다 로맨스로 봤다. 다만 그 앞에, ‘삭막한’ 혹은 ‘쩨쩨한’을 붙여야 되겠다. 어째 하나 같이 이곳의 수컷들은 삭막하고 쩨쩨한 존재들이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을 상상하거나, 이를 추궁한다. 구질구질한 궁상남(들). 그러면서 센 척, 있는 척, 대범한 척 한다. 억지로 자신을 감춰야 한다. 돈이 많으면 뭘 하나. 늘 불안에 떨고 이권만 먼저 생각한다.
(물론, 정부와 짜고 악행을 저지르는 여자도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어둡고 잔뜩 찌푸린 채 시작하고, 시종일관 이 톤은 유지된다. 옌볜의 택시기사, 구남(하정우)의 표정부터 그렇다. 빚더미에 짓눌려 있으면서 그는 한탕을 바라며 마작놀음에 매달려 있다. 아내는 돈 번다고 한국으로 갔는데, 깜깜무소식이다. 그런 그에게,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면정학(김윤석), 면가라고 불리는 개장수가 한 놈 담그고 오면, 빚을 갚아준단다. ‘공존’은커녕 ‘생존’만 희번덕대는 공간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밀항을 하고, 주소 하나만 들고 살인대상을 향해 구남은 황해를 건넌다. 열흘의 시간. 6만 위안에 목숨을 걸고, ‘살인자’라는 죄명까지 쓰건만, 구남에게 큰 고민은 없어 보인다. 노모와 아이도 있지만, 그는 빚과 아내 없는 현실, 부정한 상상이 빚어낸 삶의 피로감을 견딜 재간이 없다.

돌고 있다는 개병(광견병)이 그에게도 스며들었던 것일까. ‘어미를 물어죽이고 나중에는 제 아가리로 물어죽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물어 죽인’, 어릴 적 기르던 개를 닮아간다. 칼에 묻힌 피를 씻어낼 도리가 없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 흔들리던 아마추어 범죄자도 도리가 없다. 모든 상황이 그를 낭떠러지로 몰아간다.

 
애달프게 보고픈, 바람난 것이 아닌지 불안한 아내 찾자고, 빚진 돈 갚아 집안 꾸리고자 한 가장이었을 뿐인데,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 아, 이런 몹쓸 멜로드라마를 봤나. 사랑도 야만과 폭력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 사실이구나. 아니, 사랑은 야만과 폭력 앞에 쉬이 힘을 쓰지 못하는 구나. 아...

악의 다양한 얼굴


구남이 그렇게 입체성을 띠고 있다면, 구남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장본인, 면가는 악의 전형성이다. 이권에 눈 먼 극악한 인간의 단면이랄까. 면가는 오로지 하나만 본다. 내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 차갑고 단순하다. 그것을 본능이라 말할지 몰라도, 철저하게 이성에 의한 작동이다. 이권을 취하려면, 잔머릴 굴려서 앞뒤 재야 가능하다. 동정이나 연민? 그런 건 없다. 이성으로 그것도 몰아내니까.


면가는 끝까지 밀어붙인다. 소용없으면 죽인다. 살려주는 건 하나, 돈이 될 때, 돈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구남에게도 그러하며, 또 다른 폭력과 악의 축인, 김태원(조성하) 패거리에게도 그러하다. 이권의 취득 여부가 모든 행동의 기준이다. 그는 세상의 작동 원리를 온몸으로 체화한다. 소뼈다귀를 들고 사람을 후려치는 모습. 면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순 없다. 그 모습은 또한, 소뼈다귀만 안 들었을 뿐이지, 우리 사는 세상과, 우리와 다르지 않다.


김태원도 전형적이다. 약한 자에겐 강하고, 강한 자에겐 한 없이 약한 존재. 운수회사 사장이라는 그럴 듯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지만, 실은 그는 양아치이자 조폭이다. 형-동생 한다는 관계의 동생을 살인청부하고, 그게 밝혀질까 관련자들을 없애자고 안달복달이다. 눈앞에서 협박하는 면가 앞에선 설설 기지만, 뒤에선 살인을 교사한다. 그에겐 물론 이권 외에도 또 다른 살인의 이유가 있다. 사랑 아닌, 소유욕. 그건, ‘내 걸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이권의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니, 양아치나 조폭에게 의리 같은 게 있다는 건 착각에 가깝다. 그들이 부르짖는 의리 같은 건,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에 한한다. 의리 없이 뒤통수친다고 욕할 것도 없다. 그게 그네들 생리다. 의리라고 쓰지만, 이권이라고 읽는. 조폭 아닌 이들이라고 사실 크게 다르진 않다. 의리는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만 지키는 것이고, 의리는 많은 경우, 이권의 소소한 작동에 의해 지켜지고 유지된다.


면가나 김태원, 세상의 기본 구조다. 쉽게 ‘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캐릭터를 구축해 놨다. 감독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이라는 현실의 알레고리


한국은 그런 세상을 더욱 실감나게 절감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의도였건, 그렇지 않건, <황해>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은, 황량하고 건조하다. 강남구 논현동, 부산, 울산 등 어딜가도 그렇다. 현실의 알레고리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우선, 옌볜에 있는 조선족 구남에게, 한국은 돈 벌겠다고 간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내가 일했던 식당의 주인은, 아내의 행방을 묻는 구남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여기, 진짜 부부가 있는 것 같냐며.
그리고선,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구남이 직접 발 디딘 한국은, 동족이라곤 하나, 그것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수사임을 확인할 뿐이다. ‘우리’가 아닌 ‘그들’로 치부하는, 이주노동자에게 더 없이 가혹한 곳이 한국이다. 도움을 묻는 구남에게, 식당의 이주노동자는 냉랭하다. 이주노동자끼리도 별다른 교감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계급의 가장 아래 부분에 있는 이주노동자를 등치는 한국인, 그게 다 이권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나.


영화는 또, 먹는 장면을 통해 지금-여기의 살풍경을 비춘다. 극 중에서, 구남은 허겁지겁 먹는다. 살기 위해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살인을 위해 잠복하다가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소시지를, 도망 다니다가 한 폐허가 된 식당의 냉장고를 뒤져 깍두기를 걸신들린 듯 먹는다. 여기의 많은 이들은 생존을 명목으로 그렇게 주어진 것에만 매달린다. 어떻게든 눈앞의 것을 먹고 살아남으려는 생존본능만 번뜩인다.
 

경찰은 더 없이 무력하다. 지들끼리 총을 쏘고 맞고, 떼거지로 몰려들면서도 눈앞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을 놓친다. 화면을 화려한 스펙터클로 채우는 카체이싱 장면도, 알고 보면 경찰의 아둔함 덕분이다. 경찰의 무능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으나, 우리가 아는 많은 경찰이 그렇다. 총장 나으리께서 건설현장 함바집까지 신경을 쓰시는 마당이니. 무능하거나, 부패하거나. 지팡이?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물론, <황해>는 거칠고 건너뛴다. 2시간40여분의 러닝타임도 담지 못한 건너뜀이 있다. 그럼에도 그 속엔 에너지가 있다. 잔인함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엇. 그 표면적 잔인함에 묻거나 뒤에 숨은 세상의 어떤 구조들. 끝내 다시 건너지 못한 황해의 풍경은,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세상의 머뭇거림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기야, 건넌다고 해결이 됐을까. 마지막 장면은 뭔가 아쉬움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사족 같았다.

<황해>는 현실의 잔인무도함에 비한다면, 오히려 디스카운트된 영화다. 스크린이라는 필터를 통해 순화된. 굳이 이 영화에 잔인하다는 말을 붙이고 싶지 않은 이유다. 곳곳에서
‘악의 평범함’을 목도하는 마당에 무슨. 하물며, 내 안에도 악과 폭력이 있거늘. 내 안을 먼저 들여다볼 것을, 내 안의 개병을 먼저 살필 것을 권하는 영화, <황해>다. 우리도 지금, 황해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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