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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평점 :
나에게 어느 편인지 묻는 당신에게,
김형태 변호사, <변호인>을 보고 이런 말을 썼다. “영화 <변호인> 시절에는 극히 일부를 빼고는 판사고 검사고 기자고 형사고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줄은 알았다. 지금은?” 그는 답변도 잇는다. 정의는 사라지고 편가르기만 남았다. 그의 말이 맞다. 누구편인지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됐다. 아니 누구편인지만 중요한 세상이다. 공자든 소크라테스든 그 누가 지당한 말씀을 하시든 “넌 누구 편?”이라고 닦달할 뿐이다. 비겁하다. 내 스스로의 규율이나 율법은 없다. 편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경찰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본부에 강제 난입했었다. 명분은 전국철도노조 지도부 검거였다. 실패했다. 그러나 경찰, 아니 정확하게 이성한 경찰청장은 “실패한 작전이 아니”란다. 대명천지, 강제 난입도 어이없는 판국에 실패가 아니라고 딱 잡아뗀다. 한발 더 나아간다. 작전의 책임 라인이 줄줄이 승진했다. 치안감 인사는 경찰청장이 추천한 인물에 대해 청와대가 최종 결정한단다. 라인, 줄. 그래 역시 편이다. 우리 편 정실인사. 비겁하다. 과연 일선 경찰관들은 순순히 이 인사를 받아들일까. 그들은 경찰인 것을 부끄러워하진 않을까.
《공범들의 도시》에서 표창원이 토로한 대목이 겹쳤다. 경찰관을 괴롭히는 것. 내부에서 상사들의 불합리한 대우, 그리고 부하 직원을 마치 노예나 몸종처럼 부리려는 태도, 인격 무시 등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했다. 그러니 궁금했다. 과연 이 어이없는 난입 작전을 따라야했던 일선 경찰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경찰을 향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마음은 어떨까. 그런 것과 무관하게 이뤄지는 윗대가리들의 ‘자리 잔치’는 과연 정당한가.
우린, 참 비겁한 사회, 비겁한 세상에 산다. 적당히 비겁하면 세상이 즐겁다지만, 적당함은 이미 넘어섰다. 뻔뻔함과 후안무치, 안하무인이 지배한다. 《공범들의 도시》는 그것을 확인한다. 뭣보다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그렇게 불려서는 안 될, 세력들이 망쳐놓은 세상. 표창원의 토로에 ‘동의’한다며 손을 들 수밖에 없다. “결국 옳고 그름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우리 사회의 비겁한 관행 때문이라고 보거든요.”(p.172) 김어준이 그랬다. 남자는 비겁하지만 않아도 섹시하다고. 그래서 표창원, 우리 시대 가장 섹시한 남자라고 했다. 표창원은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아마도 천직이라고 여겼을 경찰을 뛰쳐나왔다. 김어준의 말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한 사회의 수준을 측정하는 여러 기준이 있다. 그 중에 중요한 이런 기준이 있다. 그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가장 비난받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권리를 보호받느냐. 한국 사회는 그런 면에서 낙제점이다. 수준이 바닥이라는 얘기다. 격차 사회의 궁극을 보자는 듯, 한국 사회는 벌어지기만 한다. 결국 편을 가른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통증에 교감하고 동감하지 못한다. 오로지 타자화나 시혜만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고통의 경험에 근거를 둬야 한다. 윤리적 태도는 거기서 나온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아는 ‘능력’이 있어야 고통 받는 사람과 같이 아파할 수 있다. 고통은 따라서 도덕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고통을 없앨,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닌, 진통제만 원한다.
지금-여기엔 고통을 함께 감내하고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느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 《공범들의 도시》는 우리의 텅 빈 사유를 꼬집는다. 뜨끔했다. 책은 노르웨이의 경우를 든다. 지난 2011년 7월, 폭탄과 총기난사로 77명을 숨지게 한 테러범 블레이비크에 대한 판결. 그는 22년형을 선고 받았다. 당연히 말이 나왔다. 저런 놈을 우리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나? 어디라고 이런 말, 나오지 않을까.
그런데 책에는 없지만, 공 노르웨이 총리는 그런 반응에 이리 답했다. “우리는 더 큰 민주주의와 더 큰 사랑으로 이런 것들을 방어할 것이다. 당신이 원하듯 증오로 막지 않을 것이다.” 글쎄, 모르긴 몰라도 아마 여기라면 이런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었을까. 블레이크비의 형량이 적니 많니를 놓고 불붙은 여론에 암말 않고 묵묵부답이지 않았을까. 표창원 교수는 분명하게 사회적 합의를 강조했다. 냉정한 형벌 집행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나 인격체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주고, 여론의 분노 감정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민주적 사법 절차를 통해서 아주 차분하게 단죄를 한 거죠. 물론 그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덧붙여 신창원의 경우를 빗댄 것은 아하~ 무릎을 치게 만든다. 신드롬과 현상으로까지 다다랐던 신창원의 탈주 행각. 범죄자에게 왜 환호를 했을까. 그리고 그를 향한 형 집행은 정당했는가. 좁게는 사법적 정의에 대한 물음표. 본인의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탈주한 2년 동안 경찰을 농락했다는 괘씸죄가 22년 6개월형을 추가로 선고하게 했다는 심정적 확신이 우리에겐 자리잡고 있다. 명확한 범죄행각을 펼쳐주신 재벌가 회장님들에게 내려진 형 집행만 봐도 그것은 명확해진다. 하나 같이 똑같다. 재벌 회장님들은 우리와 다른 족속이자 종족임을 그렇게 확인시켜줘야 하나?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이 거짓임을 반복적으로 상기하는 것은 이 나라는 정의가 없는 나라임을 공표하는 셈이다.
“있는 놈들이 모든 것들을 다 좌지우지하고, 결국은 정의라는 것은 이긴 자들의 논리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일반 서민들에게 법 지키고, 도덕 지키고, 윤리 지키라고 하겠냐고요.”(p.129)
그래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 우리 사법부, 전문성이 없다, 동네 아저씨들 모임이다. 사법고시? 조까라 마이싱! 그렇게 힘들게 법전을 들이팠다는 사람들이 범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법맹이 됐다. 자기편이 누구인지부터 살피고 어디 줄에 서야하는지 눈치부터 본다. 법보다 편.
그러니 타인이 어떻게 되든 말든 타인을 고의적으로 파괴시키고도 내가 이익을 얻겠다는 재벌 회장님들이 행하시는 형태의 범죄와 생계형 범죄를 구분하지 못한다. 피해자들에게 피눈물 나게 하는 범죄 행각에도 눈을 감는 건, 결국 그들이 남의 고통과 통증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통 환자’임을 증명하는 꼴이다. 시파, 우리는 단적으로 그런 환자들에게 이 땅의 정의를 맡기고 있는 셈이다. 정의가 소멸하고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물론, 그들만 탓할 것, 아니다. 결국 우리도 공범임을 이 책은 쓰라리게 알려준다. 그것에 통증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인간이다.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경우를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다. 악의 평범성. 유대인학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공무원으로서 철저하게 맡은 직무를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법적 정의가 무너진 체계와 사적 이익에 복무하는 공권력의 탈선을 보면서도 무력한 우리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바로 ‘공범’이다.
《공범들의 도시》, 우리 사회의 수준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표창원이 영국 유학길을 통해 접한 경험이 눈에 밟힌다. 영국의 경찰은 한 여고생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한국까지 연락을 해서 찾아왔다. 표창원은 이를 국가 철학의 문제, 사회 전반의 인식의 문제라고 표현했다. 한국을 끌어내리고자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 측근을 사면시키고자 국가권력을 사용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인정은커녕, 실패한 작전에 대한 징계는커녕, 승진을 시키는 것이 제대로 된 사회일 턱이 없다.
“이 사람들은 정의가 우습다는 거잖아요. 그까짓 것, 그 정의 지킨다고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이며 이익이 얼마나 될 것이냐, 이런 차원에서 들여다보니까요. 정의에 비용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사회에서 어쨌든 정의에 관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고, 묻힐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엄중한 문제이고,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고, 그 이후의 비용만 해도 얼마나 많은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는데요.”(p.129)
우리의 현실을 후벼 파는 책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와 맞물려 더욱 쓰라리게 다가온다. 국가(정부)란 무엇인가. 지금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인간은 왜 사는가. 우리, 이렇게 공범이 돼서 죄를 자꾸만 쌓아가도 좋은가. 이 리뷰를 그 잘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본다면, 내게도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넌 누구의 편이냐”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일지도 모르지. 사실 따윈 상관없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제시하면서 그 사실과 이유를 들이대도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남을 ‘종북’이라고 부르면 편하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본 한나 아렌트에게 ‘악(惡)’의 동의어는 무사유였다. 생각하지 않고 누구의 편인지부터 묻는 너에게, 해 줄 말은 이것이다.
조까라 마이싱.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