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2주

1.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드디어 개막됐죠?  

네,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현지시간으로 지난 10일 개막했습니다. 최근 다소 명성이 바래긴 했지만 칸, 베니스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영화젠데요, 오는 20일까지 11일간 펼쳐집니다. 개막작으로, 국내에도 4월 개봉이 계획돼 있는, 코언 형제의 <더 브레이브>가 상영됐고요, 공식 경쟁부문에는 16편이 진출해, 최우수작품상인 황금곰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칩니다.

- 우리나라 작품들, 어떤 작품들이 선보여질 예정인가요?

이번에 한국 작품은 무려 9편이나 출품됐습니다. 베를린영화제 역대 가장 많은 한국 영화가 선을 보이게 된 건데요, 공식 경쟁부문에는 이윤기 감독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가 유일하게 올랐습니다. 요즘 가장 핫한 배우죠. 현빈씨. 임수정씨와 함께 주연을 맡은 영화죠.

현빈씨가 출연한 또 다른 영화인 <만추>도 포럼 부문에 진출했습니다. 김태용 감독 작품인데요, 탕웨이와 멋진 앙상블을 보여주고 있고요. 같은 부문에 김선 감독의 <자가당착:시대정신과 현실 참여>, 박경근 감독의 다큐 영화 <청계천 메들리>도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단편 부문에도 2편이 선을 보였는데요,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 친동생이자 설치미술가인 박찬경씨와 함께 연출한 <파란만장>, 양효주 감독의 <부서진 밤>이 주인공들입니다. 파노라마 부문에는 이보다 많은 3편입니다. 이미 국내에도 개봉해서 많은 관객을 모았었죠.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를 비롯해서,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 전규환 감독의 <댄스타운>도 베를린에서 관객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배우들도 대거 베를린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는데요, 3월 군입대를 앞두고 출국 여부에 관심이 몰렸던 현빈씨는 오는 15일 출국해 폐막식까지 머무를 예정입니다. 이밖에 임수정, 이정현, 오광록씨도 참석을 확정했고요, <부당거래>에 출연한 류승범씨는 형이자 감독인 류승완 감독과 함께 영화제에 발을 디딥니다. 

- 수상이 점쳐지는 작품이나 배우는?

우선 황금곰상을 놓고 경합하는 작품들을 보면, 랠프 파인스가 연출ㆍ주연한 <콜리올라누스>를 비롯해 미국 감독 미란다 줄라이의 <더 퓨처>, 헝가리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 프랑스 미셸 오슬로 감독의 3D 실루엣 애니메이션 <밤의 이야기들>, 금융위기를 앞둔 투자은행 이야기를 담은 <마진 콜> 등이 올라와 있는데요, 베를린영화제가 정치 성향이 강한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금융 위기를 다룬 <마진 콜>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한국 영화들의 수상에 대한 기대 또한 있죠.

심사위원장은 스웨덴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과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유명 배우 겸 감독 이자벨라 로셀리니가 맡는다.

한국영화론 유일하게 경쟁부문에 진출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이윤기 감독이 베를린영화제와 인연이 깊습니다. 우선 2005년 <여자, 정혜>로 포럼 부문에서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받은 적이 있고요, 2006년 <아주 특별한 손님>, 2008년 <멋진 하루>를 모두 포럼 부문에 진출시킨 바 있습니다. 이 영화 주연인 임수정씨 역시 2007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특별상인 ‘알프레도 바우어상’을 받은 바 있고요.

뭣보다, 계속 언급하게 되는데요, 어메이징한 남자, 현빈씨가 두 편의 영화를 이번 영화제에 진출도 시켰겠다, 국내 팬들은 현빈씨의 수상 여부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울러 파노라마 부문에 진출한 <창피해>는 동성애를 그린 퀴어 영화인데요,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퀴어 영화에 수여하는 ‘테디상’의 후보로 꼽히고 있습니다.

2. 안타까운 소식이 이번 한 주 영화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는데요. 단편영화 <격정소나타>의 연출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최고은씨가 요절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죠?

우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서른두 살 젊은 나이로 숨진 최고은씨는 지난달 29일, 경기도 안양에 있는 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최고은씨가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고 있는 와중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수일을 굶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며칠 째 아무것도 못 먹고 있습니다. 남는 밥과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쪽지를 이웃집에 남겼는데요, 이 쪽지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최고은씨는 지난 2006년 <격정소나타>로 제4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하고 유망한 시나리오 작가로 주목받으며 활동했는데요. 그러나 집필한 시나리오들의 영화 제작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서 생활고에 시달려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화려한 줄 알았던 영화계의 또 다른 이면인, 열악한 환경에 대한 개선책도 좀 있어야할 것 같네요?

네, 말씀하신대로 영화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전부터 영화계에선, ‘누구 하나 죽어야지 영화산업 구조가 바뀔 것’이라는 자조 섞인 우려가 있었는데요,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고, 뒤늦게 제도 개선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영화계에서 시나리오 작가는 가장 낮은 위치 중의 하나인데요, 4대 보험 보장이나 최저 임금도 받기 힘든 상황입니다. 과거엔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 진행비를 받기도 했지만 2006년 영화산업의 거품이 꺼지면서 이마저도 사라졌고요. 적은 계약금을 받는데다, 영화 제작이 무산되면, 나머지 돈도 받기 힘든 구조인데다, 시나리오를 넘김과 동시에 저작권도 넘기는 것이라, 저작권 수입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한 작가는, “열정을 착취하지만 보상은 없는 기형적인 구조가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다”는 말도 했고요.

사실 최고은씨의 죽음은 영화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앞서 뇌출혈로 쓰러져 지하 전세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던 인디뮤지션인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 맞물려, 청년층의 분노가 솟구치고 있는 한편, 사회구조적으로 이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높습니다. 

영화노조는 지난 8일 성명서를 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실업부조제도의 현실화를 촉구했고요, 각 단체나 당국에서도 공론화와 제도 변화를 위한 움직임을 펴고 있는데, 제대로 된 제도와 정책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3. 2011년 새해, 우리영화의 흥행, 겨울 한파를 잘 견뎌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박스오피스와 설 연휴 개봉작들도 함께 정리해 주시죠.

설날연휴까지 낀 박스오피스에서는, 김명민, 오달수씨 주연의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 1위에 올랐습니다. 무려 110만명 이상이 찾았는데요, 누적관객수도 270만명을 넘어섰고, 이번주 예매율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어 무난히 3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2~3위는 관객 수에서 절반 이상 뚝 떨어진 50만명 대였는데요, <걸리버 여행기>가 2위, <평양성>이 3위로 4만 명의 근소한 차이가 났습니다. 4위는 <글러브>가 차지했는데요, 감동적이라는 입소문이 이어지면서 꾸준히 관객을 모으고 있습니다. 누적관객은 15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5위는 <상하이>가 차지했고요, 주목할만한 것은 차태현씨가 주연한 <헬로우 고스트>가 올해 첫 300만 관객 고지에 올라섰습니다.

이번주 개봉영화를 말씀드리면, 애니메이션 두 편이 눈에 띄는데요, 그림형제의 동명 원작을 각색한 3D 애니메이션 <라푼젤>이 개봉했습니다. 미국에선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1>을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요, 18년 동안 탑 안에서만 지낸 라푼젤이 도둑을 잡아 집밖으로 모험을 단행하는 이야깁니다.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모험담이고요, 이번주 예매율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참고로 라푼젤은 '상추'라는 뜻입니다.

다른 한편은, <프랑켄슈타인>과 <노틀담의 꼽추> 설정을 빌려온 <이고르와 귀여운 몬스터 이바>로 존 쿠색과 스티브 부세미 등이 목소리를 연기를 맡은 애니메이션입니다.

3주 전에 말씀드렸죠.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제작을 맡은 3D 해양어드벤처인 <생텀>도 극장에 걸렸습니다. 장엄한 해저를 배경으로 처절한 생존 게임이 펼쳐지고요, 예매율에선 3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참 좋아하는 여배운데요,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한 영화가 이달 에만 두 편 선보입니다. 먼저 애시튼 커처와 짝을 이룬 로맨틱 코미디 영화 <친구와 연인사이>가 먼저 개봉했고요, 두 남녀의 밀고 당기는 연애가 볼만합니다. 여성 팬들의 호감을 얻으면서 예매율에선 4위입니다. 
 
이밖에 1930년대 파리를 보여주는 뮤지컬영화인 <파리 36의 기적>과 40년간 근속한 기관사의 이야기를 다룬 <오슬로의 이상한 밤>이 개봉을 했고요, 앞서서 한국영화들이 대거 개봉하고 선전을 이어간 영향인지, 이번주에 개봉한 한국영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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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 Glov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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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하자.”
지금은 야구 비시즌. 야구팬들에겐 고역인 계절이다. 겨울이 싫은 건 아니지만, 야구가 없는 건 참 싫다. 그래서 영화 보는 도중 나는 벌떡 일어났다... 고 하면 뻥이지만, 그러고 싶었다. 가슴이 울렁거렸거든.

김상남(정재영)이 청각장애인 야구소년 차명재(장기범)에게 스케치북에 써서 건네는 말. “야구하자!” 아, 나도 저 말, 진짜로 하고 싶거든. 봄을 기다리는 이유. 야구. 야구하자! 이 영화 <글러브>는 그러니까, 염장(지르는) 영화다. 아니, 비시즌의 오아시스?


“야구는 마약이잖습니까.”
우리 돈 잘 버는 주원이 아니, 야구 잘했던 김상남의 친구이자 매니저 찰스(조진웅)는 안다. 비록 홈에 들어오다 다리가 부러져 야구를 그만둬야했지만, 그놈(김상남)을 통해 알게 됐다. 야구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뿔싸. 정부는 대마초를 금할 것이 아니라, 야구를 금해야 하는 거 아냐? 야구가 마약이라잖아! 대마초가 무슨 마약이니, 쯧. 담배도 차라리 금해라. 인민 건강에 더 악영향을 주잖아!

“정말로 이기고 싶은 거야?”(《H2》 중에서)
청각장애인 들로 구성된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는 타구 소리를 듣지 못해 낙구지점 포착에도 큰 애로가 있다. 타구와 함께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야구인데, 그들은 그러질 못한다. 전국대회 1승은 그래서 ‘꿈’이다. 어떡하든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은. 야구계의 말썽꾼 김 선수가 처음, 그들의 꿈을 비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말이다. 야구부에 열성인 음악 선생님 나 선생(유선)에게 아이들을 그냥 즐기게 하라고 툴툴대는 것도 야구를 알 만큼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기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즐기기 위해선 이겨야 한다. 김 선수도 결국 토하듯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망’없는 야구선수이지만 야구를 즐기는 히로(《H2》의 주인공). 그는 “뭐, 야구야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할 거지만. 난 동네야구든 뭐든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동네야구든 뭐든, 이기려고 던진다. 야구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소년에게, 야구를 즐기기 위한 방법은 이기는 것이다. 명재도 즐기고 싶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여기서 뭐가 자꾸 올라와요. 1승하고 싶어요.”

‘야구는 즐기는 것’이라고 자꾸 세뇌했다. 워낙 지는데 익숙한 내 야구팀(노떼 자얀츠)이니 그리 했을지도 모른다. 내 팀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대범한 척, 대인배인양 포장(?)했다. 하지만, 속 시원히 털어놓겠다. 진짜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지면 속상하고, 짜증난다. 이기면 세상을 다 가지는 거다. 정말로 이기고 싶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의 1승에, 그들의 야구 경기 승리에 목을 쭉 뺀 이유다.

히까리의 어머니는 히로에게 말했다. “정말로 이기고 싶은 거야? 히데오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속 시원해지려는 거 아냐? 히데오에겐 비밀이지만, 아줌만 히로 편이야.” 히로 편이기에, 우리 히로가 이기고 싶어 하는 것을 안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이겨야 한다. 1승, 거둬야 한다. 물론 정정당당하게. 불쌍하게 보고 봐준다면 더욱 용납 못한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상대는 도저히 이기기 힘든 강팀이 아니다. 바로 우리를 불쌍하게 보는 팀이다.”
김 선수의 이 불호령. 뻔한 것임에도, 임팩트 빠바방이다. 자존감. 김 선수는 그것을 안다. 무엇이 그들을 야구하게 하는지. 세상의 불쌍한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것. 아마도 그들은 김 선수를 통해 세상을 한 번 더 배웠을 것이다. 속에 담아두지 말고, 요구하고 권리를 내세워야 한다. 터트려야 한다. 그건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비장애인은 물론 장애인들도 요구해야 한다. 야구도 함께 하듯, 세상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김 선수의 이 불호령도 마찬가지다. “밟는 건 상관없는데, 일어설 힘마저 뺐으면 안 되잖아!”

“벙어리라뇨, 청각 장애인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이겠다. 영화는 자주 지적한다. 심각하지 않게, 웃음을 통해.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등 장애인을 비하하는 언어, 영화는 자연스럽게 추방하자고 권고한다. 더불어, 일반인, 정상인 따위의 말도 조심해야 하겠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장애인을 일반이 아닌,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구획 짓게 돼 버리니까.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왔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한다. 야구의 재미를 알아차린 소년들의 땀과 노력이 빛난다. 유명 야구선수인 김 선수의 눈빛 하나에도 그들은 온갖 신경을 곤두 세운다. 그만큼 그들은 야구를 하고 싶은 거다. 모두 잠든 새벽 시간에 볼을 던지고, 사인을 맞추고, 견제 연습을 하는 아이들. 그들은 소리칠 자격이 충분하다. “우리가 왔다! 너희를 짓밟아 주겠다. 꼭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나는 눈물을 꾹꾹 누르지 않았다. 그저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뒀다. 자연스러운 내 감정이었으니까. 나도 파이팅을 보탰다. <글러브>는 마냥 눈부시지만은 않지만, 그들의 소리없는 함성에 한 목소리 보태고 싶은 영화다. 누군가에겐 야구는 그렇게 새벽녘에 몸이 부서져라 던지는 공이다.



 

“가끔은 필요하지 않니? 얻어맞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으니까” (《H2》)
물론,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은 매번 얻어맞고 진다. 그렇다고 지기 때문에 야구를 포기해야 할 까닭은 아닌 게다. 얻어맞고, 또 얻어맞아도, 아까와 지금은 다르다. 야구는 멘탈 게임이며, 일구일구, 모든 것이 다르다. 야구공 하나에 실린 마음부터 모든 것이. 그들은 배우고 있는 거다. 야구를 통해. 지는 것을 통해. 또한 이기기 위해. 나의 영웅, 히로도 말했다. “대체로 스포츠란 이긴 시합보다 진 시합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법이니까.”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그들은 이미 야구를 시작했고 하고 있다. 상처는 이미 예견된 바다. 상처 입은 날들이 많아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만 받고, 동정만 받을 순 없다. 대개의 어른들은 위해주는 척 하지만, 실은 그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 자신의 이익과 마음을 위해서다.

‘GLOVE에서 G를 빼고, LOVE’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글러브>는 우직하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내용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김 선수와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이 맺는 관계가 그렇고, 김 선수와 찰스가 맺는 관계도 그렇다. 변화구 구사하지 않고 직구로만 승부한다. 아무렴, 그건 스트라이크다.

원장 수녀(물론 나중에는 바뀌게 되지만)를 비롯해 학교 운영위원회 어른들을 묘사한 것도 그렇다. 과장하자면, 지금 한국 교육계를 향한 일갈일 수도 있다. 학생들이 배제된, 일선 교사가 배제된, 교장 등 교육 정책가(정치꾼)들의 책상머리에서만 결정된. 그들의 나쁜 머리에서 나오는. 김 선수, 일선에서 애들 가르치다보니 잘 알게 되잖나. 그의 일갈이 유쾌통쾌상쾌했던 이유다. “인생을 살다보면 나의 의지보다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꿈을 포기해야 된다는 거, 아직 모르는 애들입니다. 이런 게 교육이면 뽕이고, 우리가 그런 어른이면 니 뽕이고, 학교가 그런 거라면 니미 뽕입니다.” 아, 정말 아쌀했다. 니미 뽕들.

야구는 그러니까, 사랑. 야구 안에 사랑있다. 뭔, <파리의 연인>인가 싶지만, 그만큼 뻔한 설정이지만, 고개를 끄덕댈 수밖에 없다. ‘GLOVE’에서 ‘G’를 빼자. ‘LOVE’. 야구 없는 시즌. 야구 없이 못살겠다는 아우성을 강우석 감독은 잘 캐치해줬다. 내 평가? 단순하다. 야구를 다뤘다. 그것이 다다. 나는 <글러브>를 강우석 최고의 작품으로 뽑는 아주 편파적인 판정을 내린다.



 

극중 김 선수의 스케치북 대사를 재인용하겠다.
“야구하자. 야구, 혼자 볼 때보다 같이 볼 때가 더 재미있다. 너, 알지?”

봄이 와야 하는 이유, 단순하다. 야구해야 하니까. 야구봐야 하니까.


참, 나는 가린다.
여자. 거칠게 말해, 세상에 여자는 딱 두 부류다. 야구 좋아하는 여자와 야구 안 좋아하는 여자. 야구 좋아하는 여자가, 진짜 여자다. 나는 그렇게 가린다. 니미 뽕이라고? 맞다. 나는, 니미 뽕이다. 니미 유치 뽕이다.^^;; 우헤헤~ 야구, 빨리 하자! 야구는 사랑을 싣고, 사랑은 야구를 싣고. 봄은 야구와 함께 온다. 봄은 야구로 시작된다. (남하당의 박영진 풍으로, 준수의 야구사랑을 매도하지 마아아~)




거듭 촉구한다.
야구하자!

1승도 하자,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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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 VS 6시간 -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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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에단 호크. 내가 좋아하는 이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세 시간은 책을 읽고, 세 시간은 일하는 것이 목표다.” 아마 이 말을 하면서 싱긋 웃었을 이 남자, 그 멋지고 뭉클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세상에 퍼뜨린 당사자답다. 아무렴, 지금, 현재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일, 아니겠나.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었고, 싶다. 세 시간 일하는 것. 그건 에단 호크가 배우라서, 가능한 얘기라고? 글쎄, 지금의 ‘일돼지’를 양산하는 구조, (풀타임) 일자리 창출 논리에 젖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IMF’라는 말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분위기, 안 봐도 비디오잖나.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국가적 지령이 하달됐고, 다른 생각 따위 사치였다. 오로지, 일, 일, 일. 어디 감히, 떽. 일하라, 일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오죽하면 ‘직업한국’(잡코리아?)라는 사이트도 생겼겠나.

군대 행정병 시절, 죽도록 행정업무 하는 것에 시달렸다. 다짐했다. 사회 나가면 절대 야근 따위 하지 않겠다! 그 다짐, 꺾어야 했다. 엄한 분위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리바리다웠던 거지. 죽도록 일했다. 오죽하면 ‘회사인간’이라는 소리 들었겠나. 오직, 회사와 일(집이 아녔다!). 당시 겪었던 개인적인 아픔을 잊기 위함이라는 명목까지 덧붙여, 일에 몰두했다. 간간이 일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건 미끼였다. “자발적인 노예가 돼라”는 시대적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

어쩌다 그리 했냐고? 핑계를 대자면, 베짱이(놀이)를 배격하고 개미(일)를 추앙하는 제도 교육의 병폐가 스며든 것 아니겠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던 어른들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 호모 파베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일해야 했다. 놀 줄 모르는 병든 현대인의 자화상.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그러니, 문제다. 호모 파베르 천국, 호모 루덴스 지옥. 아, 대한민국, 일하다 죽을 지어다. (‘2008 OECD백서’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연간 근무 시간은 2357시간으로 OECD회원국 중 최고. OECD평균은 1777시간, 무려 600여 시간 오버다!)

미안하다. 잠깐 옆길로 샌다. 아트 축구의 대명사, 지단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그에겐 축구가 ‘일’이었을 텐데, 거칠게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세상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가 아니겠나. 《8시간 vs 6시간》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삶에는 회사에서 하는 일 말고 다른 더 좋은 일들이 있어요.” 아니, 일 하는 인간이 미덕인 지금, 대체 무슨 일하다 하루아침에 잘리는 소리냐!  

호모 루덴스, 여가의 인간들

여기, “인간의 본성은 놀이”며, “일은 결코 내 삶에서 중심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다. 일 아닌 여가(혹은 놀이)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호모 루덴스. 1930년 12월, 대공황의 초입, 미국 배틀크리크 켈로그의 노동자들과 경영자였던 W.K.켈로그와 루이스 브라운 사장이었다. 놀이와 여가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운명과 목숨을 걸고,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람들.

《8시간 vs 6시간》은 그 이야기를 다뤘다. “필요와 불가피성을 넘어선 실질적 자유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위해 싸운 투쟁의 기념비”이자, “‘점진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이 직업상의 합리적인 혜택이라고 보는 노동계 전통의 후예들”을 다룬. 책은 그들을 매버릭(mavericks)이라고 지칭한다. 즉, 주류에 거스르는 사람, 이단자. 8시간제(노동)가 대세가 된 후에도 6시간제를 고수한 소수의 노동자들. 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고, 일보다 삶을 우선으로 삼던 사람들이다.   

책은 한편으로 먼 나라, 아주 머나먼 시대의 이야기 같다. 읽다 보면, 이런 한탄이 든다. 어쩌자고, 우린 일이 최우선인 시대에, 노예처럼 일에 굴종하며 살고 있을까. 대공황기, 고작 80년가량이 흘렀건만, 인류는 어쩌다 더 진보하지 못하고 퇴행했을까. 현대의 ‘과다 노동’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도록 내버려뒀을까.

물론, 한국은 그런 시대 겪지 않았다. 바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노동 착취의 시간을 관통했다. 어쩌면 노동 단축의 시대를 맞이해야 할 필연성이 부여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현대 세계에서는 과다 노동이 당연하다’는 통념에 반박하는 증거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추가적인 두 시간”을 가졌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p.18)  

켈로그 노동자들은 대공황기를 시작으로 2차 대전 등을 거쳐 1984년까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을 단순히 적게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에 맞서 왔던 것이다. ‘(경제적) 불가피성’의 논리가 세를 키워 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산업화된 노동의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여가)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널리 알렸다. 즉,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일이 하루 중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이 아니게 되면, 일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갈 수 있었다. 곧, 일이 삶에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하는 척 하지 않고 부차적인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p.269)

일이 모든 것을 삼키고, 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이 시대. 과연 우리에게 직업과 일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삶에서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볼 것을 권한다. 그들에겐 하루 2시간의 시간이 그것을 만들었다.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제. 8시간 노동이 붙박이처럼 고정관념이 된 우리에게 2시간의 차이가 삶의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다만, 좀 약하다. 6시간제를 경험한 켈로그 노동자들이 2시간의 추가 시간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풀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카데믹하게 접근했다. 연구와 설문, 설명 등 학자적 태도로 일관한 것이 가독성을 해친다. 따옴표도 지나치게 많고, 괄호도 너무 많다. 

추가 2시간, 삶을 탐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일은, 직업은 다른 더 좋은 일들을 위한 수단이었다. 추가적인 두 시간 덕에 그들은 회사 일과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무와 갈등과 통제의 바깥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들은 삶을 좀 더 깊고 의미 있게 탐구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대공황 시절, 배틀크리크의 켈로그에는 이런 노동자들이 다수였나 보다. 그들은 6시간제 반대자를 ‘일돼지’, ‘야근 돼지’, ‘이기적’, ‘돈벌레’ 등으로 묘사하며, ‘고립된 집단’이나 ‘부적합자’로 생각했다니 말이다. 일이 삶의 최우선으로 저당 잡힌 지금, 일을 안 하면 ‘게으름뱅이’, ‘낙오자’ 등으로 묘사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들에겐 여가가 그랬다. ‘삶에서 가장 진지하고 풍성한 활동이 벌어지는 시간이자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시간.’ ‘하찮고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낭비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삶을 가꾸어야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지금과 분명 다른 시대적인 여건과 환경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선구자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것이라면, 산업화의 병폐에 대해 노동계급이 제시해 왔던 치유책이 ‘노동시간의 점진적인 단축’이었다는 것이다. 켈로그의 6시간제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어받은, 삶에서 진짜 자유의 의미를 찾고자 한 탐구자들이었다. 하긴, 지금의 우리는 잊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배틀크리크에서 이들은 힘든 노동과 산업 진보의 보상이 더 많은 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충족되면 노동은 더 나은 것들에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비전을 재확인한 마지막 노동자들이었다. “오로지 풀타임만”이라는 경영진과 노조의 새 수사법에 맞서,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을 하고 “불가피성/필요성”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그에 도전했다.”(p.324)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죽을 때까지 개처럼 일할 자유’다. ‘영원히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삶을 좀먹는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직업은 세속의 종교가 됐다. 일자리,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과연 풀타임 이상으로 매일 그것에 목을 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아는 인간으로서 맞는 것일까.

“직업은 사람들에게 정체성, 구원, 삶의 목적과 방향성, 공동체의 소속감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고된 노동”을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삶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마고 약속한다.”(p.32)

매버릭들은 문화적 굴종이 줄고, 문화적 부흥, 즉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 여가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라는,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틀렸다. 6시간 노동자들은 말했다. “일터를 떠나면 그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죠. 내 자신의 일을 하고 내 삶을 사는 시간이에요.”(p.284) 내 삶을 사는 시간. 이 말은 뭔가, 짜릿하다. 인간이니까. 

조지 버나드쇼와 줄리언 헉슬리는 20세기 말이면 노동시간이 최대 2시간으로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물론, 그 예측은 맞아 떨어지지 못했다. 허나 그것을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 없다. 그들도 이렇게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암세포처럼 창궐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당시, 이처럼 소비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 노동이 차지하는 지위의 변화 등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자유, 호모 루덴스의 언어!

자유. 내가 책에서 가장 짜릿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 단어였다. 8시간제와 6시간제를 비교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도 ‘자유’ 혹은 자유와 관련된 어휘였다고 한다. ‘자유’, ‘자유 시간’, ‘자유로운 저녁’, ‘무엇 무엇을 할 자유로운 시간’, ‘무엇 무엇을 할 수 있음’, ‘무엇 무엇을 할 기회를 가짐’과 같은 말들. ‘자유의 언어’가 지배적인 화법이었다. 즉, “매버릭들은 추가적인 두 시간이 문화적 자원이며, 기존의 문화를 확장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시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p.296)

아마도 그들은 자유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거나, 본능적으로 따랐던 듯싶다. ‘단지 돈만이 아닌 가치들’, ‘재미’, ‘세상을 탐험하는 것’,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는 것’ 등 호모 루덴스로서의 성정이 온전하게 발휘될 수 있었나 보다.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와 정신. 잘 짜인 놀이 세계가 아닌 스스로 여가와 놀이를 통해 자유를 구현할 수 있었던 사람들. 시장지배와 교환관계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일상적으로 하던 활동들이, 자유의 언어를 통해 아름답고, 즐겁고, 더불어 즐길 수 있고, 아낌없이 나눌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 활동으로 변모했다. 자유의 언어는 이러한 활동에 의미를 부여했듯이 그런 활동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서비스에도 의미를 부여했다.”(p.128)

지금 대부분의 우리는 더 많이 일하지만 더 적게 받는다. 기술적으로는 발달했는데, 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을까, 고민해본 적 없는가. 컴퓨터를 쓰면서 과연 일이 더 줄었는가, 생각해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더 늘지 않았는가.

그때와 지금, 자유시간과 돈의 비중도 바뀌었다. 지금은 이른바 ‘시간 궁핍’이다. 돈은 있더라도 시간이 나지 않는 상황. 예전에는 돈은 없어도 풍요로울 수 있었다. 시간이 많으니 여가나 전통적인 활동은 DIY로 이뤄졌다. 돈 처들인 ‘잘 짜인 놀이 세계’에 돈 들여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진보, 삶에서 어떻게 노동을 줄일 것인가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는, 여가가 강력한 동기 부여 기제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 같다. 국내에도 유한킴벌리, 포스코 등의 사례가 속속 생기고 있는데, 좀 더 담론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고.

뭣보다 켈로그의 경우, 경영자들도 현명하고 개념이 박힌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브라운 사장은 노동 강도 강화, 장인 정신의 상실, 지루함, 단조로운 반복 등 노동자들이 느끼는 불만에 6시간제가 답이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즉,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흡수해서 흩어 없애고 노동자들에게 활력도 주는 피뢰침이었다.”(p.62)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건 대수였겠지. “(6시간제 덕분에) 사람들이 덜 피로해졌고 일도 더 잘할 수 있었어요. (일에) 흥미도 더 가질 수 있었고요.”(p.141)

당대에도 켈로그의 6시간제는 국가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대공황기에 벌어진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운동 내내(이 운동은 결국 실패했다), 노동계는 <켈로그>의 6시간제 실험을 일자리 나누기의 실제 사례로, 기업에게는 이윤을, 노동자에게는 자유 시간을, 실업자에게는 일자리를 주는 모범사례로 들었다.”(p.107)

모두에게 좋은 제도였고, 좋은 예로 자리를 잡는 듯했다. ‘일’이 아니라 ‘자유시간’이 삶의 중심이 될, 미래로의, 진보로의 길을 닦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는 임금 총액 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늘렸고, 노동자들은 자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 점을 반겼다.

당시 <인콰이어러> 기사의 결론은 이랬단다.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진짜 여가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6시간제로 날마다의 일상이 바뀌었다. 일과 의무에서 자유가 중심인 삶으로 바뀌었다. 물론, 자유는 새로운 두려움들도 수반했다. 그것은 제도 교육의 탓도 있다. 여가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제도 교육도 그렇지 않은가. 오로지, 좋은 직업, 좋은 일, 그 ‘좋은’에 들어간 뜻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혹은 번듯한, 보수가 많은, 혹은 삶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그런 뜻이지만 말이다.

6시간제의 쇠퇴와 몰락에는 결국 현실 정치의 힘이 개입했다. 그건, 결국 돈으로 시장 지배를 꾀한 자본주의자들의 모략이었던 것 같다. 루스벨트가 일자리 ‘창출’을 적극 내밀었고,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개념이 밀리면서 해방적 자본주의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앞장 서 추진했던 기업들은 비판을 받았고, 돈 앞에 무력했다.

결국, “일돼지들이 이겼다.” 2차 대전 뒤 노사 합의로 일자리를 줄이고, 입지가 확고한 소수의 노동자에게 풀타임 노동시간을 유지해주기로 한 결정에 대한 한 노동자의 회상이었다. 노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이 더 많이 받는 것이라며 시간과 임금을 연결하던 노동계의 언어는, 시간과 임금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도록 만든 ‘단절의 화법’으로 바뀌었다.

“어빙 번스타인은 복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주는 여러 혜택에도 결국에 허물어진 이유는 작업장에서의 통제력과 [경영에의] 민주적 참여라는 노동자들의 근본 열망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p.151)

이 책, 6시간 노동제에 대한 피상적인 나의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일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수단일 텐데, 그 수단에 거의 모든 것을 뺏기다시피 많은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지금의 일에서, 나는 어떻게 자유와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또 “나는 일해야 돼”라는 말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대한 다른 책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선하는 화법이 아닌지, 되씹어본다. 그렇다. 이런 말이 창궐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책은 2차 대전 즈음 이런 말이 생겼고, 1950년대에 광범위하게 유통된 것으로 본다. 이 말은 가족이나 지역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거부하는 데에도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나는 일해야 돼”는 도적적인 언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켈로그> 남성들에게 후퇴의 외침이었다.”(p.247)

내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나는 W.K.의 좋은 예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회사를 일궈 나가면서 W.K.는 돈을 가치 있게 쓰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공장 사람들과 지역사회와 미시건 주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p.80)

노동시간 단축은 그런 것의 일환이었다. 그는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들을 지었고, 레저 서비스도 제공했다. W.K.는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와 공공의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유에 미래가 있으려면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했다. ‘자유롭고 공공적인 생활’에 대한 지원, W.K.의 전설과 희망. 나는 나와 몇 명이 함께 할 일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을 지닌, 즐거운 먹을거리가 있는 곳.

조직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회사. 회사가 개인의 삶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회사. 자유에 대한 비전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

과연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도 치를 떨었던 ‘회사인간’에서 나는 물론, 함께 하는 노동자들도 제대로 벗어나야 한다. 브라운과 W.K.처럼. 일을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자, 더 짧은 노동시간, 확장된 임금 지급액을 진보로 여긴 그들처럼.

곧, ‘유쾌한 6시간제’ 씨의 26주기가 다가온다. 1985년 2월8일 사망했거든. 실은, 난 6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에단 호크처럼 3시간만 일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도 4일제로. 난 참, 구제불능인가 보다. 그러니, 노조나 만들고, 상사나 경영진 들이 싫어하지.  

올해, 노동자 사장이 될 내게 그 2시간의 여가가 주어진다면 우쿨렐레가 최우선이다. 그리곤 매장에서 콘서트를 열 테다. 소식 듣거든, 오시라. 공정무역 커피와 유기농 디저트가 무료다. 물론, 6시간제를 찬성하는 매버릭들만 입장 가능하다! 일돼지는 오지 마시라. 구제역, 옮길지 모르니까. 지금 이 나라는, 소, 돼지를 ‘살처분’(이 말, 나는 반댈세!)하고 있는데, 진짜 살처분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일 하라’고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는 시장만능 사회지도층 자본가들의 대가리에 든 똥들.

잘 가세요, 내 좋은 친구여 - “옛 친구 6시간제에게

너에게 정이 무척 많이 들었구나. 

슬프지만 정말이야.

너는 우리 가족들이 더 가까워지게 해 줬지.

하지만 8시간제 씨가 말하기를, “나가서 일해!”

그가 이겼지.

하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어.

이제 너는 떠나고 우리는 너무 슬프구나.

너와 함께 우리 친구들도 떠나가니까!

“너” 없이는 “그만 두겠다”는 의리 있는 친구들 말이야.

이렇게 너는 우리를 떠나 우리의 설립자인 “K씨” 곁으로 가는구나.

우리의 몸은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너는 우리 몸에도 너무 잘 해 줬으니까.

그리고 이제 침묵의 시간. 눈물을 흘리자.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노력할거야.

그리고 이제 비타민을 꺼내고, 의사에게 전화를 하자.

8시간이 우리 “모두”를 잡았으니까.

- 슬픔에 잠겨서, 이나 사이즈 Ina Sides가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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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선물 - 커피향보다 더 진한 사람의 향기를 담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히말라야 커피로드 제작진 지음 / 김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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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신다.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내음이 코를 자극하더니, 입에서 퍼지는 향미가 뇌를 깨움과 동시에, 목구멍을 타고 마음을 적신다. 몸과 마음, 커피는 곳곳에 박힌다. 커피가 주는 선물이다. 아, 행복하다. 커피야, 고마워.

그와 함께 때론, 나는 울컥한다. 방금 마신 커피 때문만은 아니다. 선물 같은 이 커피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렇다. 커피 한 잔이 내게 오기까지 거쳐 온 수고를 생각하면 그렇다. 커피농사를 짓는 사람부터, 방금 커피를 따라 준 사람까지. 물론, 커피라는 농작물이 자랄 수 있게 해 준 흙, 안개, 햇빛, 바람, 비, 나무 등 모든 자연에 대해서도. 내게 행복을 주기 위해, 지구의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있다. 이 커피 한 잔에 말이다. 참으로 고맙다.

나는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다. 멋으로 맛을 내는 사람이고자, 오늘도 커피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나는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누구나 자신의 직업이나 관심을 통해 세계를 읽고 해석하듯, 나도 그렇다. 커피 그 자체와 함께, 커피를 둘러싼 다양한 세계에 나는 촉각을 세우고, 사유하고자 노력한다. 아마 그 덕분일 것이다. 내가 다루고 만지는 커피는, 공정무역 커피다.

말하자면, 커피노동자인 나는, 내가 만드는 커피가 누군가의 하루를, 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커피가 어떻게 세계를 연결시켜주고, 어떻게 온 것인지 알았으면 하는 바람도.

커피 강의를 할 때마다 언급하고, 이전 글을 통해서도 언급한 적도 있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 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탁자에 앉아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수확한 커피를 마시거나,
중국 사람들이 재배한 차를 마시거나 서아프리카 사람들이 재배한 코코아를 마신다.
우리는 일터로 나가기 전에 벌써 세계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나는,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당신은 그렇게 이미 신세를 지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세계의 누군가에게 신세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커피 향미가 더욱 짙게 다가온다. 사실, 이건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우린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교에서 늘 이런 말을 들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니가 먹는 이 밥을 만든, 벼농사를 지은 농부의 노고를 생각해 봐라.” 나도 그랬고, 많은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들었겠지만, 같은 맥락이다.

참농부가 여기 있었네

《히말라야의 선물》을 보고, 그래, ‘농부’의 뜻을 재차 다졌다. 누구보다 땅님의 힘을 믿고, 바람님, 해님, 물님, 별님, 안개님 등 자연이라는 큰 선생님의 뜻을 받들고 합일점을 찾는 분, 농부님. 네팔에 있다고 다르랴, 커피를 다룬다고 다르랴. 더구나, 그들은 잔머리 굴리지 않는다. 편하고 손쉬운 방법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몸으로 밀어붙인다. 몸에서 우러난 철학이랄까. 교과서나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다. 땅을 일구고, 커피나무를 기르며, 유기농법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다.

책의 저자이자 EBS다큐프라임 <히말라야 커피 로드>를 찍은 이들의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은 유기농법이야말로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한 농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은 해본 적도, 하고 싶지도 않다는 말레 마을 농부들. 이런 고집 속에서 단순히 커피 수확량을 늘리기보다는 깨끗한 커피, 건강한 커피를 키워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p.141)

거참, 돈독 든 화폐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뻘짓하고 자빠졌다. 많이 팔아서 많이 남겨야 미덕이지, 뭔 깨끗한 커피, 건강한 커피란 말인가. 화학 농약 화끈하게 뿌려줘서, 수확 빠방하게 하고 봐야지. 뭐어, 천연 비료? 천여언 비료오~ 그럼 소는 누가 키워? 소는? 하고 버럭할 일이다.

뭐, 그런다고 여기 말레 마을 사람들, 끄떡할 사람들도 아니다. “사람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화학 농약입니다. 우리는 화학 농약은 전혀 쓰지 않아요. 우리는 약초로 천연 비료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식물에게도 절대로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피를 정말 깨끗하게 만듭니다.”(p.141)

그러니까, 배운 놈들이 더하다는 말, ‘틀린’ 말이 아니다. 말레 마을표 유기농 비료를 만드는 이쏘리의 경우처럼, 여기의 커피 농부들은 편하고 빠른 방법 대신 느리지만 자연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땅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그 땅이 건강한 커피나무를 길러낸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땅에서 배운 현자들.

하다못해, 열네 살 커피 농부 수커바르도 이리 말한다. “만약에 제가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건강에 해를 끼칠 거예요. 그래서 좋은 유기농법을 이용해 커피 농사를 짓고 싶어요.”(p.254)


아, 이런 커피, 당신이라면 마시지 않을 텐가? 내 알기로 많은 공정무역 커피가 그렇다. 내가 다루고 만드는 공정무역 커피 역시. 나도 그래서, 종국엔 농부하고 싶다는 거고. 어린 커피나무를 쓰다듬으며 두 손 모아 “커피가 이 땅에서 잘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피 농부의 모습을 지녔던 이쏘리처럼.

커피, 말레 마을의 모든 것

열한 가구가 사는 말레 마을. 어쩌다 커피나무를 재배하게 됐지만, 마을 인민들은 저자들이 마을에 발 딛기 전까지, 커피가 어떤 맛인지, 어떻게 먹는 것인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몰랐다. 처음엔 커피를 환영하지도 않았고, 그저 생계에 도움이 될까,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 하나둘 시작한 것이 커피나무 재배였다.

허나, 이젠 커피가 그들의 삶에 깊이 삼투했다. 그들에게 커피가 어떤 존재이냐면, 희망의 다른 이름이요, 최고의 치유약이며, 돈이었다. 또 행복을 가져다주고, 공부를 할 수 있게 한다. 친구 같은 존재요,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이끈다. 가족이자, 미래며, 약속이다. 인생의 전부이자, 의무요, 아름다움이다. 슬픔과 상처를 이기는 방법이다.

우리가 무심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담긴 마음과 삶이다. 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허나,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크나큰 차이다.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진다. 그것은 곧 행동과 실천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히말라야의 햇빛과 안개, 그리고 농부들의 정성 어린 손길을 머금고 마침내 말레 마을 올해의 첫 커피가 완성되었다. 한국에서 무심히 마시던 한 잔의 커피. 그 안에 말레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이렇게나 깃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p.304)

특히나,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이야기’가 잔뜩 묻어있기 때문이다. 열한 가구, 모든 가구마다 커피에 얽힌 사연과 이야기가 읽는 이를 툭툭 건드린다. 모든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다큐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인공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다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말레 마을이 좀 더 특별했던 이유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커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스물다섯 미나 판데의 이야기가 가장 아릿했다. 남편을 사별하고, 다섯 살에서 아홉 살까지의 모두, 만주, 마야, 머니스 등 먹성 좋은 네 아이를 키우는, 말레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가족. 황무지와 사투를 벌여, 맨손으로 커피 밭을 일군 스물다섯 억척여인의 분투가 말이다.


 

그 미나가 이파리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막대기, 즉 죽은 커피나무에 물을 주는 이야기와 사진에서, 나는 커피의 쓴맛을 알싸하게 느껴야 했다. 물 준다고 살아날리 없는 커피나무에 물을 줄 수밖에 없는 그 마음 때문에. 가족에게 유일한 희망의 끈인 커피를 놓치지 않으려는 그 마음 때문에 말이다.

말레 마을의 가장 어린 커피 농부이자, 가장 좋은 커피를 재배한 수커바르, 가진 것 없이 가난하나, 식구들이 헤어지지 않고 모여 사는 게 가장 큰 소망인 다슈람, 산사태로 육십 그루의 커피나무가 죽고, 단 한 그루에서 희망을 바라본 이쏘리, 커피와 가족을 위해 열 살짜리 아들을 스승으로 글을 공부하는 서른여덟의 문맹 아빠, 로크나트 등. 모두가 그렇게 커피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투영하고 있었다.

커피 한 잔으로 맺는 관계

아, 다시 묻겠다. 이런 커피, 당신이라면 마시지 않을 텐가? 커피가 그냥 커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커피에 묻은 이야기, 삶, 세계가 커피 향을 더욱 북돋지 않는가 말이다. 책은 굳이 공정무역임을 내세우진 않는다. 자연스레 공정무역이 왜 필요한가를 말레 마을 인민들을 통해 스며들게 한다. 그게 최선이다.

공정무역이 최선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하냐고 되묻는다면, 물론 뜸을 들일 수밖에 없다. “공정무역(Fair Trade)은 저개발국 생산자에게 정당한 몫, 공정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한다는 목적 아래 펼쳐지고 있는 운동”(p.226)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기존의 시장질서체제 내에서 작동 가능한 모델이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이 당장 이들의 경제적 가난을 타파할 수는 없다. 세상의 빈곳을 약간 메우면서, 더 나은 체제를 고민하는 단계라고나 할까.

허나, 이것마저도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커피는 세계(교역과 경제시스템)의 불공정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품 중 하나다. 그건 좀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지만, 이 책은 그것까진 다루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흠은 결코 아니다. 우선은,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져야 한다. 선물을 함께 나눠야 한다.

누구든 꿈꾸는 유기농 삶. 말레 마을의 커피 농부들을 통해 그것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덕분에 우리 마음도 은근 유기농이 된다. 더 질 좋은 커피, 더 깨끗한 커피를 키워내겠다는 말레 마을 인민들의 꿈이 있기에, 우리는 더 질 좋은 커피, 더 깨끗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커피를 골라야 하는지 좀 더 자명해지지 않는가. 다른 커피가 불공정하다는 건 아니지만, 커피 한 잔이 어떤 세계를 품을 수 있는지, 나와 당신의 커피 한 잔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 안다면, 커피가 더 맛있게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자부심까지 살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정무역에 대한 오해 중의 하나라면, 비싸지 않느냐는 건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좀 더 알아봐라.

유기농 커피는 제각각 익는다. 인위적인 처방이 아닌 자연 법칙 그대로 따르다보니 한 나무 안에서도 열매가 익어가는 속도가 다르다. 한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다 똑같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니, 공정무역 커피도, 익어가는 속도가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와 닿아서 실천하는가 하면, 다른 이는 와 닿아도 실천이 느릴 수 있고, 혹자는 와 닿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을 것이다.

커피 열매가 익기까지 기다림의 미덕이 있듯,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일상에서 필요하듯, 우리는 지난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공정무역이 빈곤을 단박에 벨 수는 없으며,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 허나,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만드는 커피를 마신다면, 앞으로 커피는 댁들이 평소 알던 그런 커피가 아냐. 커피 장인(농부)이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심은 커피콩으로, 바리스타가 그 노력과 마음에 자신의 마음과 노동까지 담아 빚어낸 선물인 거다. 그게 바로 내가 아는 커피의 관계(학)이다.

“혼자서는 갈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힘을 합쳐 준비해야 하는 것이 커피로드”(p.307)라고 했다. ‘커피 한 잔 마시기까지의 길’(커피로드)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연관돼 있고, 신세를 져야 하는지 알겠지?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랬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 커피 한 잔으로 우리는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커피의 역사》의 저자인 하인리히 E.야콥의 말도 하나 인용하자면, “한 잔의 커피는 경이롭고 놀라운 관계의 집합체이다.”

커피 한 잔 마시자는데 왜 그렇게 까다롭냐고. 그러니까, 세상 너무 띄엄띄엄 보지 마라. 확~ 수틀리면, 카푸치노(거품) 키스해 줄 테니까. 언제든 말만 해라. 참, 카푸치노가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시크릿 가든>에서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사회지도층과 가난한 계층이 카푸치노 키스로 하나가 됐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렇게 계층, 인종 등으로 분리된 사회를 카푸치노 사회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의 사회가 그런 셈이겠지. 돈 있는 놈과 돈 없는 분으로 나뉜, 거품 가득 낀 사회.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자세한 카푸치노 이야기도 들려주마. 오늘은 이만하고, 그래, 커피 한 잔 하자. 널 위해 만들어주마. ‘준수의 선물’이다. 너와 난, 그렇게 관계를 맺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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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 Brokeback Mountai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토요일(1/22) 방송될 울산 MBC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
비록 나는 그것을 들을 수 없지만, 노래를 신청했다. 틀어준다더라.
아무렴, 나는 예언자는 아니지만, 2011년 1월22일 늦은 오후의 어느 한 때,
대한민국 울산의 공기 중에는 이 노래가 공명할 것이다,
He Was A Friend Of Mine」.

울산의 내가 모르는 누군가는, 이 노래를 듣고, 이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히스 레저.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그와 나는 모르는 사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통하는 사이일 것이다.

오늘, 귀 기울여 들었던 유이한 노래,
He Was A Friend Of Mine」와 거위의 꿈」.
이 글을 접한 당신도 아마 울산(과 그 인근)에 있지 않다면, 라디오를 통해선 듣지 못할 터,
플레이 버튼을 살짝 눌러 이 노랠 들어도 좋겠다. 그저, 그 사람을 짧게라도 떠올려보는 시간.


그런데 왜 연고도, 관련도 없는 울산이냐고? 그건 개인적으로 물어라. 아프지 않게.ㅋ :P




히스 레저, 그 아름다운 사랑의 초상
3년 전, 서른 즈음에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를 추모하며

1월22일. 커피 한 잔을 준비한다. 커피야 매일같이 마신다지만, 이날은 약간은 다른 커피야. 특별한 레시피로 준비하는 건 아니다. 다만, 마음 한 스푼이 더 들어가지.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ristretto)’1)를 뽑고, 스티밍한 우유, 한 점을 찍는다. 메뉴의 이름은, ‘브로크백 마운틴’. 시간과 양에서 제한된 채 추출됐으나, 맛이 진하고 짙은 풍미를 지닌 리스트레토. 거기에 덧붙여진 한 점은, 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한 동경이야.  


 

맞아. 그 커피 위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지? 광활한 산맥과 함께 떠오르는, 히스 레저(본명. 히스클리프 앤드루 레저). 서른 즈음, 요절한 배우예술가. 마음 한 스푼은 다름 아닌, 히스 레저에 대한 추모심이야. 아마 ‘콩’도 함께여야 할 것 같은 커피 한 잔의 시간. 3년 전, 2008년 1월22일 히스 레저가 영영 떠났어. 남겨진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그가 없는 삶을,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다. 당신과 함께 커피 한 잔, 나눈다.

아름다운 청년, 히스 레저

커피 한 잔에 콩, 끝이 아니야. 사실 하나 더 있어.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거기엔 아름다운 얼굴이 있으니까. 아마, 그건 마음이 아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마다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런 말을 남겼어. 히스가 떠난 직후인 제14회 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시상식,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영화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소감을 통해 히스를 거론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는 완벽했다. 나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는 이미 인생에서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했다.” 아름다운 청년, 히스 레저. 죽어서도 호명된 그의 이름에는 그렇게 아름다움이 묻어있구나.



 

아름다운 누군가는 그를 향해, “I Swear...”를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잊지 않겠다는 그 맹세는, 사실 히스의 것이었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히스가 분한 에니스는 잭(제이크 질렌할)의 옷을 보면서 그렇게 나지막하게 뱉었지. 아마, 이 영화를 가슴으로 본 사람이라면, 히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선, 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다시 돌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그 슬픔을 가슴으로 삼킨 그 얼굴이 떠올랐다.

도리가 없잖나. 당신이라면 어떤 얼굴을 떠올렸겠나. 유작 직전의 작품이 됐지만, <다크 나이트>의 조커? 글쎄, 그가 조커역을 맡아 지나치게 몰입, 정신적인 혼란을 겪었다는 말도 있었다만, 그건 배우가 가진 일종의 숙명이었을 터. 온전하게 배우였던 그가, 조커를 즐겼을망정, 그것을 마지막 얼굴로 삼고자 했을 리는 없지 않았을까.

차라리,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가 제격이지 않아? 완벽에 가까운 배우, 다니엘도 완벽하다고 격찬했던 그 얼굴 말이야. 어쨌거나 <브로크백 마운틴>의 잔상이 그를 온통 지배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음 그래,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계속 얘기하자.


아픔, 사랑의 다른 판본

아마도 그건, 사랑, 그것도 세상에서 파멸당한 사랑 때문이었을 거야. 사랑했지만,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채, 안으로만 삭혀야만 했던 사랑. 해서는 안 될 사랑, 그런 게 있어선 안 되잖아. 물론, 세상의 윤리는 때론 사랑을 속박해. 울타리를 쳐놓지. 브로크백에 풀어놓은 양들처럼 말이야. 방목하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의 소유고, 정해진 틀을 벗어나선 안 되지. 그저, 울타리가 넓을 뿐.

하지만, 사랑에 필요한 건 세상의 윤리가 아니잖아. 사랑에 오로지 사랑의 윤리만 있으면 되잖아. 사랑을 정의할 수 없는 마냥, 사랑의 이치는 단순하다. 당사자의 선택이 돼야 한다는 것.

사랑은, 기실 세상의 윤리가 갖다 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누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가’의 문제야.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함께하면 그건 옳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그른 것이다.(이건 명로진의 말에서 빌어왔다.) 사랑은 세상의 윤리가 가늠하거나 잣대를 들이댈 것이 아니다. 옆에서, 혹은 당사자도 아닌 이가, 너의 사랑이 이러쿵저러쿵, 말짱 헛것이고, 헛말이다. 닥치고 꺼져라, 외쳐도 좋을 터.


당신도 알다시피, 히스는 사랑하는 모습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안 감독의 연출이었다고는 하나, 히스가 아닌 다른 에니스는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그는 닥치고 꺼져라, 고 외치지 못했어. 이른바 ‘도둑 사랑’ 혹은 ‘몰래한 사랑’.


 

돈 많은 잭이 그 따위 시선에 ‘F word’를 날리자고 했으나, 에니스를 칭칭 감은 세상의 윤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지. 겁이 난 거야. 돈 없는 노동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이란 건, 그닥 우호적이질 않거든. 그것이 사랑이라도 말이다. 사랑에도 혐오가 있는 건, 참 꼴불견이야, 그렇지 않아?

결국 그 사랑, 파멸 당했다. 브로크백은 그저, ‘시크릿 가든’이었던 거지. 둘만의 사랑을 간직했지만, 실상은 마법도 없고, 체인지도 없는. 현실에선 인어공주는 거품이 될 뿐이야.

하늘은 가끔, 지상의 위대한 연인을 질투해,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이곤 한다. 히스도 아름다운 사람을 먼저 하늘로 데려가곤 하는 하늘의 습관에 불려간 건 아닐까. 하늘은 그렇게 제 욕심을 채우곤, 지상에 슬픔과 아픔만 똑 남기더라. 그건 꼭 남은 사람들의 몫인 양. 사랑이 한편으론 곧 아픔이요, 슬픔이라는 것을 알라는 하늘의 뜻인가. 커피가 탄다. 쓰지만 강한 풍미를 느끼고 싶다. 커피 한 잔에 농축된 아픈 사랑의 흔적.


Heath is not here, but…

에니스는 터뜨리지 않고 꾹꾹 누르고 삼키던 사람이었어. 가슴에 돋는 칼로 사랑과 슬픔을 자르던. 히스는 그런 에니스로 각인된 것이 어떨 진 몰라도,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고전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를 본 뜬 이름부터, 그는 깊은 강이 되고 싶었다. 호주 출신으로 할리우드의 공세에 잡아먹히지 않은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예술적 영혼 덕분이 아녔을까. 


당신은 봤는지 모르겠네. 그는 <아임 낫 데어>에서 ‘밥 딜런’의 어떤 한 모습을 그렸어. 그는 세상에 없는 모습을 구현하지 않았음에도, 영화 제목처럼, ‘I'm Not There’를 실현하고야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그를 스크린에서 불러낼 재간은 없어. 디지털 매직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해도 그건, 히스가 아니다. 그는 이제 박제된 히스로만 재현될 것이다. 성장도 노화도 멈춘 그때 그 모습으로만. 



 

히스는 거기도 여기도 없다. 허나, 나와 당신뿐 아니라, 그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개인의 물결이 넘실댈 거야. 그러니, 그는 비록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명복을 빌거나 어쩌다 히스가 그리워지는 날에 영화를 돌려보고, 추모를 공유하는 일밖에 없을지라도. 브로크백이 안겨준 에니스와 잭의 사랑에, 당신과 내가 ‘사랑 확신범’으로서 응원할 수밖에 없어도.

아울러 마틸다 레저, 히스가 세상에 남긴 딸. 그 아이는 올해,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지, 아마. 히스라는 아빠 없는 생이지만, 잘 버티고 견뎌나가길. 세상의 악행에 쉬이 굴하지 않고, 거칠고 더러운 공공연한 비밀을 품은 세계를 어떻게든 헤쳐 나가길. 사람의 있을 곳이란, 이렇게 커피 한 잔에도 있구나. 그래, 안녕 에니스, 안녕 히스 레저. 참, 노래는 <브로크백 마운틴> OST에 담긴,
He Was A Friend Of Mine」. 커피 참, 진하다.  [뷰즈 기고 원문 약간 수정]

p.s. 20일, 어제 용산 2주기. 아직 용산참사는 끝나지도, 아픔이 아물지도 않았다.
故 이상림, 양회성, 한대성, 이성수, 윤용헌 님과 당시 경찰이었던 김남훈 님,
명복을 빈다.

여전히 아픈 건, 그 '사람(들)'을 죽인 주체가, 그들이 믿고 살던 국가였다는 거다.
'사람 아닌' 김석기(당시 서울경찰청장)는 1월10일 오사카 총영사로 내정됐다.
거참, 시기도 그렇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이 국가의 정신줄은 대체. 
그러니, 한국엔 '정부'가 없다. 몰염치한 '회사'만 있고. 어메이징하다.



 

마침, 오드리 헵번과 겹치는 이유다.
그녀가 스크린의 요정,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사람'인 이유가 있다.
19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그녀는 1992년 9월 소말리아를 방문, 말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배우일 때보다 더 많은 정열과 생을 다하면서 구호 운동에 헌신한 그녀의 이 말은, 구호와 기부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북돋았다.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체화한 그녀였다. 스크린의 요정이자 은막의 여왕으로 받은 사랑, 어떻게 돌려줘야 하는지를 알았던 아름다운 사람.

오드리 여사는, 1993년 1월20일 세상을 떠났다.
구호활동에 매진하다 건강이 악화됐고, 직장암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들에게 들려준 유언이나 명언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실은 그녀가 좋아한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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