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간 VS 6시간 -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에단 호크. 내가 좋아하는 이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세 시간은 책을 읽고, 세 시간은 일하는 것이 목표다.” 아마 이 말을 하면서 싱긋 웃었을 이 남자, 그 멋지고 뭉클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세상에 퍼뜨린 당사자답다. 아무렴, 지금, 현재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일, 아니겠나.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었고, 싶다. 세 시간 일하는 것. 그건 에단 호크가 배우라서, 가능한 얘기라고? 글쎄, 지금의 ‘일돼지’를 양산하는 구조, (풀타임) 일자리 창출 논리에 젖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IMF’라는 말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분위기, 안 봐도 비디오잖나.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국가적 지령이 하달됐고, 다른 생각 따위 사치였다. 오로지, 일, 일, 일. 어디 감히, 떽. 일하라, 일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오죽하면 ‘직업한국’(잡코리아?)라는 사이트도 생겼겠나.

군대 행정병 시절, 죽도록 행정업무 하는 것에 시달렸다. 다짐했다. 사회 나가면 절대 야근 따위 하지 않겠다! 그 다짐, 꺾어야 했다. 엄한 분위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리바리다웠던 거지. 죽도록 일했다. 오죽하면 ‘회사인간’이라는 소리 들었겠나. 오직, 회사와 일(집이 아녔다!). 당시 겪었던 개인적인 아픔을 잊기 위함이라는 명목까지 덧붙여, 일에 몰두했다. 간간이 일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건 미끼였다. “자발적인 노예가 돼라”는 시대적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

어쩌다 그리 했냐고? 핑계를 대자면, 베짱이(놀이)를 배격하고 개미(일)를 추앙하는 제도 교육의 병폐가 스며든 것 아니겠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던 어른들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 호모 파베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일해야 했다. 놀 줄 모르는 병든 현대인의 자화상.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그러니, 문제다. 호모 파베르 천국, 호모 루덴스 지옥. 아, 대한민국, 일하다 죽을 지어다. (‘2008 OECD백서’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연간 근무 시간은 2357시간으로 OECD회원국 중 최고. OECD평균은 1777시간, 무려 600여 시간 오버다!)

미안하다. 잠깐 옆길로 샌다. 아트 축구의 대명사, 지단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그에겐 축구가 ‘일’이었을 텐데, 거칠게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세상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가 아니겠나. 《8시간 vs 6시간》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삶에는 회사에서 하는 일 말고 다른 더 좋은 일들이 있어요.” 아니, 일 하는 인간이 미덕인 지금, 대체 무슨 일하다 하루아침에 잘리는 소리냐!  

호모 루덴스, 여가의 인간들

여기, “인간의 본성은 놀이”며, “일은 결코 내 삶에서 중심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다. 일 아닌 여가(혹은 놀이)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호모 루덴스. 1930년 12월, 대공황의 초입, 미국 배틀크리크 켈로그의 노동자들과 경영자였던 W.K.켈로그와 루이스 브라운 사장이었다. 놀이와 여가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운명과 목숨을 걸고,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람들.

《8시간 vs 6시간》은 그 이야기를 다뤘다. “필요와 불가피성을 넘어선 실질적 자유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위해 싸운 투쟁의 기념비”이자, “‘점진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이 직업상의 합리적인 혜택이라고 보는 노동계 전통의 후예들”을 다룬. 책은 그들을 매버릭(mavericks)이라고 지칭한다. 즉, 주류에 거스르는 사람, 이단자. 8시간제(노동)가 대세가 된 후에도 6시간제를 고수한 소수의 노동자들. 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고, 일보다 삶을 우선으로 삼던 사람들이다.   

책은 한편으로 먼 나라, 아주 머나먼 시대의 이야기 같다. 읽다 보면, 이런 한탄이 든다. 어쩌자고, 우린 일이 최우선인 시대에, 노예처럼 일에 굴종하며 살고 있을까. 대공황기, 고작 80년가량이 흘렀건만, 인류는 어쩌다 더 진보하지 못하고 퇴행했을까. 현대의 ‘과다 노동’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도록 내버려뒀을까.

물론, 한국은 그런 시대 겪지 않았다. 바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노동 착취의 시간을 관통했다. 어쩌면 노동 단축의 시대를 맞이해야 할 필연성이 부여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현대 세계에서는 과다 노동이 당연하다’는 통념에 반박하는 증거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추가적인 두 시간”을 가졌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p.18)  

켈로그 노동자들은 대공황기를 시작으로 2차 대전 등을 거쳐 1984년까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을 단순히 적게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에 맞서 왔던 것이다. ‘(경제적) 불가피성’의 논리가 세를 키워 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산업화된 노동의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여가)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널리 알렸다. 즉,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일이 하루 중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이 아니게 되면, 일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갈 수 있었다. 곧, 일이 삶에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하는 척 하지 않고 부차적인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p.269)

일이 모든 것을 삼키고, 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이 시대. 과연 우리에게 직업과 일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삶에서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볼 것을 권한다. 그들에겐 하루 2시간의 시간이 그것을 만들었다.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제. 8시간 노동이 붙박이처럼 고정관념이 된 우리에게 2시간의 차이가 삶의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다만, 좀 약하다. 6시간제를 경험한 켈로그 노동자들이 2시간의 추가 시간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풀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카데믹하게 접근했다. 연구와 설문, 설명 등 학자적 태도로 일관한 것이 가독성을 해친다. 따옴표도 지나치게 많고, 괄호도 너무 많다. 

추가 2시간, 삶을 탐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일은, 직업은 다른 더 좋은 일들을 위한 수단이었다. 추가적인 두 시간 덕에 그들은 회사 일과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무와 갈등과 통제의 바깥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들은 삶을 좀 더 깊고 의미 있게 탐구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대공황 시절, 배틀크리크의 켈로그에는 이런 노동자들이 다수였나 보다. 그들은 6시간제 반대자를 ‘일돼지’, ‘야근 돼지’, ‘이기적’, ‘돈벌레’ 등으로 묘사하며, ‘고립된 집단’이나 ‘부적합자’로 생각했다니 말이다. 일이 삶의 최우선으로 저당 잡힌 지금, 일을 안 하면 ‘게으름뱅이’, ‘낙오자’ 등으로 묘사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들에겐 여가가 그랬다. ‘삶에서 가장 진지하고 풍성한 활동이 벌어지는 시간이자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시간.’ ‘하찮고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낭비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삶을 가꾸어야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지금과 분명 다른 시대적인 여건과 환경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선구자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것이라면, 산업화의 병폐에 대해 노동계급이 제시해 왔던 치유책이 ‘노동시간의 점진적인 단축’이었다는 것이다. 켈로그의 6시간제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어받은, 삶에서 진짜 자유의 의미를 찾고자 한 탐구자들이었다. 하긴, 지금의 우리는 잊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배틀크리크에서 이들은 힘든 노동과 산업 진보의 보상이 더 많은 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충족되면 노동은 더 나은 것들에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비전을 재확인한 마지막 노동자들이었다. “오로지 풀타임만”이라는 경영진과 노조의 새 수사법에 맞서,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을 하고 “불가피성/필요성”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그에 도전했다.”(p.324)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죽을 때까지 개처럼 일할 자유’다. ‘영원히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삶을 좀먹는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직업은 세속의 종교가 됐다. 일자리,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과연 풀타임 이상으로 매일 그것에 목을 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아는 인간으로서 맞는 것일까.

“직업은 사람들에게 정체성, 구원, 삶의 목적과 방향성, 공동체의 소속감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고된 노동”을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삶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마고 약속한다.”(p.32)

매버릭들은 문화적 굴종이 줄고, 문화적 부흥, 즉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 여가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라는,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틀렸다. 6시간 노동자들은 말했다. “일터를 떠나면 그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죠. 내 자신의 일을 하고 내 삶을 사는 시간이에요.”(p.284) 내 삶을 사는 시간. 이 말은 뭔가, 짜릿하다. 인간이니까. 

조지 버나드쇼와 줄리언 헉슬리는 20세기 말이면 노동시간이 최대 2시간으로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물론, 그 예측은 맞아 떨어지지 못했다. 허나 그것을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 없다. 그들도 이렇게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암세포처럼 창궐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당시, 이처럼 소비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 노동이 차지하는 지위의 변화 등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자유, 호모 루덴스의 언어!

자유. 내가 책에서 가장 짜릿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 단어였다. 8시간제와 6시간제를 비교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도 ‘자유’ 혹은 자유와 관련된 어휘였다고 한다. ‘자유’, ‘자유 시간’, ‘자유로운 저녁’, ‘무엇 무엇을 할 자유로운 시간’, ‘무엇 무엇을 할 수 있음’, ‘무엇 무엇을 할 기회를 가짐’과 같은 말들. ‘자유의 언어’가 지배적인 화법이었다. 즉, “매버릭들은 추가적인 두 시간이 문화적 자원이며, 기존의 문화를 확장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시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p.296)

아마도 그들은 자유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거나, 본능적으로 따랐던 듯싶다. ‘단지 돈만이 아닌 가치들’, ‘재미’, ‘세상을 탐험하는 것’,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는 것’ 등 호모 루덴스로서의 성정이 온전하게 발휘될 수 있었나 보다.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와 정신. 잘 짜인 놀이 세계가 아닌 스스로 여가와 놀이를 통해 자유를 구현할 수 있었던 사람들. 시장지배와 교환관계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일상적으로 하던 활동들이, 자유의 언어를 통해 아름답고, 즐겁고, 더불어 즐길 수 있고, 아낌없이 나눌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 활동으로 변모했다. 자유의 언어는 이러한 활동에 의미를 부여했듯이 그런 활동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서비스에도 의미를 부여했다.”(p.128)

지금 대부분의 우리는 더 많이 일하지만 더 적게 받는다. 기술적으로는 발달했는데, 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을까, 고민해본 적 없는가. 컴퓨터를 쓰면서 과연 일이 더 줄었는가, 생각해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더 늘지 않았는가.

그때와 지금, 자유시간과 돈의 비중도 바뀌었다. 지금은 이른바 ‘시간 궁핍’이다. 돈은 있더라도 시간이 나지 않는 상황. 예전에는 돈은 없어도 풍요로울 수 있었다. 시간이 많으니 여가나 전통적인 활동은 DIY로 이뤄졌다. 돈 처들인 ‘잘 짜인 놀이 세계’에 돈 들여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진보, 삶에서 어떻게 노동을 줄일 것인가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는, 여가가 강력한 동기 부여 기제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 같다. 국내에도 유한킴벌리, 포스코 등의 사례가 속속 생기고 있는데, 좀 더 담론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고.

뭣보다 켈로그의 경우, 경영자들도 현명하고 개념이 박힌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브라운 사장은 노동 강도 강화, 장인 정신의 상실, 지루함, 단조로운 반복 등 노동자들이 느끼는 불만에 6시간제가 답이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즉,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흡수해서 흩어 없애고 노동자들에게 활력도 주는 피뢰침이었다.”(p.62)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건 대수였겠지. “(6시간제 덕분에) 사람들이 덜 피로해졌고 일도 더 잘할 수 있었어요. (일에) 흥미도 더 가질 수 있었고요.”(p.141)

당대에도 켈로그의 6시간제는 국가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대공황기에 벌어진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운동 내내(이 운동은 결국 실패했다), 노동계는 <켈로그>의 6시간제 실험을 일자리 나누기의 실제 사례로, 기업에게는 이윤을, 노동자에게는 자유 시간을, 실업자에게는 일자리를 주는 모범사례로 들었다.”(p.107)

모두에게 좋은 제도였고, 좋은 예로 자리를 잡는 듯했다. ‘일’이 아니라 ‘자유시간’이 삶의 중심이 될, 미래로의, 진보로의 길을 닦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는 임금 총액 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늘렸고, 노동자들은 자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 점을 반겼다.

당시 <인콰이어러> 기사의 결론은 이랬단다.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진짜 여가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6시간제로 날마다의 일상이 바뀌었다. 일과 의무에서 자유가 중심인 삶으로 바뀌었다. 물론, 자유는 새로운 두려움들도 수반했다. 그것은 제도 교육의 탓도 있다. 여가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제도 교육도 그렇지 않은가. 오로지, 좋은 직업, 좋은 일, 그 ‘좋은’에 들어간 뜻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혹은 번듯한, 보수가 많은, 혹은 삶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그런 뜻이지만 말이다.

6시간제의 쇠퇴와 몰락에는 결국 현실 정치의 힘이 개입했다. 그건, 결국 돈으로 시장 지배를 꾀한 자본주의자들의 모략이었던 것 같다. 루스벨트가 일자리 ‘창출’을 적극 내밀었고,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개념이 밀리면서 해방적 자본주의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앞장 서 추진했던 기업들은 비판을 받았고, 돈 앞에 무력했다.

결국, “일돼지들이 이겼다.” 2차 대전 뒤 노사 합의로 일자리를 줄이고, 입지가 확고한 소수의 노동자에게 풀타임 노동시간을 유지해주기로 한 결정에 대한 한 노동자의 회상이었다. 노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이 더 많이 받는 것이라며 시간과 임금을 연결하던 노동계의 언어는, 시간과 임금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도록 만든 ‘단절의 화법’으로 바뀌었다.

“어빙 번스타인은 복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주는 여러 혜택에도 결국에 허물어진 이유는 작업장에서의 통제력과 [경영에의] 민주적 참여라는 노동자들의 근본 열망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p.151)

이 책, 6시간 노동제에 대한 피상적인 나의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일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수단일 텐데, 그 수단에 거의 모든 것을 뺏기다시피 많은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지금의 일에서, 나는 어떻게 자유와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또 “나는 일해야 돼”라는 말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대한 다른 책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선하는 화법이 아닌지, 되씹어본다. 그렇다. 이런 말이 창궐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책은 2차 대전 즈음 이런 말이 생겼고, 1950년대에 광범위하게 유통된 것으로 본다. 이 말은 가족이나 지역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거부하는 데에도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나는 일해야 돼”는 도적적인 언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켈로그> 남성들에게 후퇴의 외침이었다.”(p.247)

내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나는 W.K.의 좋은 예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회사를 일궈 나가면서 W.K.는 돈을 가치 있게 쓰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공장 사람들과 지역사회와 미시건 주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p.80)

노동시간 단축은 그런 것의 일환이었다. 그는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들을 지었고, 레저 서비스도 제공했다. W.K.는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와 공공의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유에 미래가 있으려면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했다. ‘자유롭고 공공적인 생활’에 대한 지원, W.K.의 전설과 희망. 나는 나와 몇 명이 함께 할 일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을 지닌, 즐거운 먹을거리가 있는 곳.

조직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회사. 회사가 개인의 삶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회사. 자유에 대한 비전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

과연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도 치를 떨었던 ‘회사인간’에서 나는 물론, 함께 하는 노동자들도 제대로 벗어나야 한다. 브라운과 W.K.처럼. 일을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자, 더 짧은 노동시간, 확장된 임금 지급액을 진보로 여긴 그들처럼.

곧, ‘유쾌한 6시간제’ 씨의 26주기가 다가온다. 1985년 2월8일 사망했거든. 실은, 난 6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에단 호크처럼 3시간만 일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도 4일제로. 난 참, 구제불능인가 보다. 그러니, 노조나 만들고, 상사나 경영진 들이 싫어하지.  

올해, 노동자 사장이 될 내게 그 2시간의 여가가 주어진다면 우쿨렐레가 최우선이다. 그리곤 매장에서 콘서트를 열 테다. 소식 듣거든, 오시라. 공정무역 커피와 유기농 디저트가 무료다. 물론, 6시간제를 찬성하는 매버릭들만 입장 가능하다! 일돼지는 오지 마시라. 구제역, 옮길지 모르니까. 지금 이 나라는, 소, 돼지를 ‘살처분’(이 말, 나는 반댈세!)하고 있는데, 진짜 살처분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일 하라’고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는 시장만능 사회지도층 자본가들의 대가리에 든 똥들.

잘 가세요, 내 좋은 친구여 - “옛 친구 6시간제에게

너에게 정이 무척 많이 들었구나. 

슬프지만 정말이야.

너는 우리 가족들이 더 가까워지게 해 줬지.

하지만 8시간제 씨가 말하기를, “나가서 일해!”

그가 이겼지.

하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어.

이제 너는 떠나고 우리는 너무 슬프구나.

너와 함께 우리 친구들도 떠나가니까!

“너” 없이는 “그만 두겠다”는 의리 있는 친구들 말이야.

이렇게 너는 우리를 떠나 우리의 설립자인 “K씨” 곁으로 가는구나.

우리의 몸은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너는 우리 몸에도 너무 잘 해 줬으니까.

그리고 이제 침묵의 시간. 눈물을 흘리자.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노력할거야.

그리고 이제 비타민을 꺼내고, 의사에게 전화를 하자.

8시간이 우리 “모두”를 잡았으니까.

- 슬픔에 잠겨서, 이나 사이즈 Ina Sides가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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