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멍
미처 몰랐으나 지난 주말에 알았던 사실 하나가 있어요. 감도 멍이 든다.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하늘나리 상한마을의 감에게 인공중력을 부여하던 날. 가을햇살에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익은 감을 땄어요. 땅에 내려앉은 감의 꼭지를 잘라 상자에 넣는 작업을 하던 내게, 농부님이 건넨 말씀. "허허, 그렇게 넣으면 감이 멍들어요." 

감 꼭지를 따서 상자에 툭툭 던지듯 집어넣던 나는, 아차차 했습니다. 감도 멍든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감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어요. 내 얼굴도 감처럼 발갛게 물들었습니다. 멍 때리다가 감에게 멍을 선사할 뻔한 내 과오 때문이지요.

가을하늘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을 스윽 쳐다봤습니다. 조심할게, 말했습니다. 그리곤 이후로는 감을 살살, 내려놓았습니다. 감이 웃습니다. 고마워, 멍 들지 않게 해줘서. 나도 고맙습니다. 내 마음의 멍을 달래줬으니까요.



 
2. 아픔
역시 곡성, 가을 낙엽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 고준이에게 물었습니다. 잎이 왜 떨어질까?

고준이가 혀 짧은 소리로 답합니다. "응... 아파서 떨어져." 

아이들, 하나 같이 시인이라더니, 시인은 사회의 아픔, 세상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라더니, 틀린 말이 아닌가 봅니다. 가을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지하는 고준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향한 애정이 묻은 아이의 대답에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 가을이 아픈 거구나. 가을이 아파서 잎은 떨어집니다. 낙엽은 그 아픔을 보여주는 징표인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도 아이일 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요. 어른이 되면서 우린 말짱 그것을 지웠나 봅니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사는 데 그 까짓 게 무슨 소용이냐며. 고준이 덕분입니다. 낙엽을 보면, 또 누군가 아프구나,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고준이가 시인의 면모를 내팽개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연,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겠죠.

헌데, 그거 아세요? 고준이의 그 말을 들으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아욱아욱, 당신이 아팠습니다.


  

3. 이호준
허영만 맛있게 잘 쉬었습니다. 호준이 형이 낸 책 제목입니다. 허영만 선생님과 함께입니다. 축하해 줬습니다. 형은 고맙다며, 홍보 좀 잘해 줘, 이럽니다. 씨익 웃었습니다. 형은 《식객》의 취재팀장입니다. 즉, 스토리를 허영만 선생님과 함께 궁리하고 짠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얘기했던 가요?

사실, 호준이 형은 내게 호돌이 형입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형을 그렇게 불렀거든요. 자주 만나진 않지만, 내가 사랑하는 형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좀 까칠한 성격이 돼 놔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닥 깍듯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 없다는 말도 종종 듣는 사람이고요. 그런 제가 형으로 인정하는 거의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형에게 물었던 기억이 나네요. 형, 허 선생님 품에서 떨어져 나와서 책 쓸 생각 없어요? 

형이 그럽니다. 옛날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충분히 좋아. 그런 욕심도 버렸고. 그리고 이렇게 책이 나왔습니다. 아직 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좋은 책입니다. 어떻게 장담하냐고요? 아, 제가 사랑하는 형이라니까요! ^^;(절 못 믿는다면 말고요!)

꼭 사서 읽어보세요! 《허영만 맛있게 잘 쉬었습니다 : 일본의 숨겨진 맛과 온천 그리고 사람 이야기》.



...   
그리고, 지금 얘기엔 숫자를 붙이지 않겠습니다.  
이 남자, 제가 한때 청춘의 시작과 끝이라고 지칭했던, 남자입니다.
18년 전, 1993년 10월32일의 전날, 길에서 세상에 작별을 고했던 남자.
사람들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히 지칭하는 날에 영화처럼 바람이 된 남자.

맞습니다. 리버 피닉스입니다. 23살로 모든 것을 끝낸 폭풍 집시. 그를 좋아했는지 당신에게 물어보질 못했습니다. 당신이 있었다면, 리버 피닉스에 대해 블라블라 말을 했을 텐데요. 그리고 뭣보다 당신을 위해 이날 특별하게 만든 나의 커피 '리버 피닉스'를 내려서 줬을 겁니다. 

그 사람, 유작이 곧 선보일지 모른답니다. 피닉스가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영화 <다크 블러드> 필름을 재편집하고 있다네요. 조지 슬루저 감독과 제작사가 의기투합해 이를 추진하면서 리버의 동생인 호아킨 피닉스에게도 도움을 청하고 있답니다. 잘 되면, 내년에 볼 수 있을 거라지만, 유족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어요. 글쎄, 상업적인 목적이 가미됐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이미 찬란했던 그의 영화들이 반짝반짝 존재하는 마당에, 이 영화가 그 영화들 반열에 오를 것 같지는 않은 막연한 생각. 그래도 스크린에서 그의 미공개 유작을 본다면, 아주 살짝 좋을 것 같습니다.

참, 그것 아세요? 리버가 1993년 10월의 마지막 날, 선셋대로에 눕지 않았다면, 리버가 출연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토탈 이클립스>를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캐스팅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그의 급작스런 요절로 사람이 바뀌었다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는 크리스찬 슐레이터가 리버를 대신했고, <토탈 이클립스>, 맞아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대신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가 됐을 겁니다. 디카프리오의 랭보, 충분히 아름다웠고 좋았지만, 랭보 그 자체였을 리버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랭보와 리버, 생각만 해도 짜릿한 조합이죠. 

이건 저만 알고 있었던, 일종의 놀이였는데요. 랭보의 태어남(10월20일)과 죽음(11월10일) 사이, 딱 중간에 리버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 <토탈 이클립스>의 조합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던 혼자만의 아쉬움! 그러고 보니, 리버 역시 스크린의 시인이었죠. 존재감 자체로 詩가 되는 배우.

작년 오늘은, 스크린으로 <허공에의 질주>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 보니, 호돌이 형이 몇 년 전부터 말했었습니다. "준수야, 언제가 됐든 10월의 마지막 날 리버 피닉스 예약한다." 호돌이 형을 위해 언제든 준비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꼭 주고 싶었던, 꼭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도 '리버 피닉스'였어요. 하하.

그래요, 오늘. 10월32일의 전날, 잘 지내나요?  

제가 특별히 오늘을 위해 만든, 리버 피닉스 한 잔 하실래요? (레시피는 비밀이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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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하늘나리 상한마을.

가을하늘에 걸린 감을 흔들었다.
감이 부끄러운가 보다. 얼굴에 발갛게 물이 들었다.  

감은 여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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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책을품은삶 > 황교익 선생님의 일리!

1. 황교익 일리
서울시장이 원순씨로 바뀌는 밤, 황교익 선생님과의 막걸리 담화. 역시나 유익했고, 벅찼던 시간. 선생님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을 의심하라는 것. 그리고 최소한 우리가 먹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인지 알라는 것. 거대 식품복합체는 이미 우리의 입과 위를 장악했다. 어떡할 것이냐.  
 

이마트는 이제 논농사까지 짓기 시작했단다. 소작농을 고용해서 이마트 쌀을 생산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젠 당신의 선택이다. 당신의 먹을 것 모두가 이마트에 있다. 그것은 원스톱이 아니다. 이마트에 의해 사육당할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해야 할 문제다.

거대 식품복합체는 잘 알려주지 않는다. 당신이 먹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브랜드만 보고 먹게끔 만든다. 반가공식품이 창궐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먹거리의 공포는 자본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고, 자본이 저지른 악행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감히 정리하건대,
자신이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러하기 위해서, 뭣보다 거대 식품복합체의 탈정치화 마수에서도 걸려들지 말 것.
그들은 먹는 것이 정치와 무슨 상관이냐고 반박한다. 다 수작이다. 먹는 것은 곧 정치다.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먹고 누가 덜 먹을 것인가, 누가 좋은 것을 먹고 누가 나쁜 것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

먹거리가 정치가 아니라고 하는 작자들은 그렇게 해야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울 수 있다.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문제가 비정치적인 일인 듯이 여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의 먹을거리 유통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201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보자면, 재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강자로 군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p.275)

애들 먹는 것 갖고 장난 친 5세 훈이를 비롯한 협잡꾼들의 음모가 발가벗겨지는 순간이다. 서울시장에 낙마한 것은 당연하고, 보궐에서도 맥을 못춘 것은 정치를 우습게 봤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여하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재각성과 재사유가 필요하다. 슬로푸드, 로컬푸드 모두 그것이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이뤄졌으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채식주의 혹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맥락과 상통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 자체가 가진 정치성과 운동성을 배제하고 탈정치화 시켜서 모든 것을 보니, 왜곡이 있을 수밖에.

아울러, 소울푸드의 개념적 정의. 직역하여, 내 영혼을 사로잡은 음식이 아니다. 소울푸드는 흑인들의 恨과 역사가 담긴 음식을 지칭한다. 고향을 떠나 강제로 노예로 끌려와서, 고난의 시절을 함께 한 음식이다. 음식의 맛이 아닌 내 안의 절박한 이야기가 담긴. 가령, 고 최진실 누나의 수제비 같은.

《식객》의 비하인드 스토리 또한 흥미진진. 허영만 선생님이 짜장면 만화에 실패(?)하고, 제대로 된 음식만화를 만들고자 황 선생님을 찾았다. 황 선생님 또한  《맛의 달인》과 같은, 우리나라 음식만화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만화가를 찾고 있던 차. 두 사람의 만남. 황 선생님은 자신이 그동안 모은 자료를 조건없이 주셨단다. 그리고,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서 오랜 추가 취재를 통해 국민만화 《식객》이 탄생했다.

황 선생님은 스토리나 원작자는 아니지만 원안제공자 정도는 되겠다. 허영만 선생님이라는 걸출한 만화가와 이야기를 뒷받침한 호준이형의 꼼꼼한 취재 근간에 황 선생님의 오랜 음식 연구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나도 커피로 그러고 싶었다. 황교익 선생님처럼. :)
커피가 가진 정치성을 제대로 읽고 독해하여, 커피문화박물지를 만드는 것. 
아님 커피문화속물지라도?ㅋ

2. 커피대세
연 이틀, 지인들의 전화벨. 주변에 커피를, 정확하게는 커피하우스(혹은 이를 통한 사회적기업)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만나서 조언을 해달란다. 이전에도 커피하우스를 두루뭉술 하고 싶어하거나 간을 보는 사람들을 만난 적 있었으나, 이번엔 당장이라도 할 것 같은 사람들인 것 같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알겠지만, 커피가 어쨌거나 대세.

글쎄, 내 기본적인 입장은, 태어날 때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커피하우스는 로망이 될 수 없다고 말린다. 개인이 커피하우스를 하지 말아야 할 백만 스물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 덕에 포기한 사람만 뻥쳐서 백만 열아홉 명이다.ㅋ

그래도 나는,
건강하고 즐거운 먹을거리와 공정무역 커피를 품은 작은 커피하우스들이 연대를 맺어 커피하우스가 줄 수 있는 작고 사소한 위안을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을 놓지 않는다. (거대)자본으로부터 독립돼 자기만의 색깔과 표정을 내건 인디 커피하우스들의 동네적 연대! 돈 지랄 브랜드(프렌차이즈)들의 노동착취형 획일적인 커피점과 다른 지향의 인디 커피하우스들. 그들이 내린 좋은 커피가 이 세상을 좀 덜 슬픈 곳으로 만들리라는 믿음.

공정무역과 관련해 연대하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온 한 쇼핑몰 운영자와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노아의 방주도 무색할 정도인 태국은 걱정이다. 태국의 공정무역 커피 수입을 추진하고자 했던 지인의 계획도 홍수에 떠내려갈까 염려도 되고. 태국산 공정무역 커피를 맛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바람도 덩달아?   

참, 서울과 강릉에는 커피축제가 지금 한창이다. 서울 정동에 나가봐도 좋고, 강릉을 찾아도 좋다. 혹시 만난다면 가볍게 눈 인사라도. ^.~    
 

 

3. 홍수
'방콕 엑소더스'가 현실화되고 있다. 주말이 기점이란다. 태국 정부도 포기했다는 얘길 들으니, 결국 국민들을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속단도.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이었다. 임금이 나라를 버리고 피난을 갔었지. 한국전 당시 이승만이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고. 버릴 줄만 알았지, 거둘 줄 모르는 놈들이 통치권자가 되면, 아래 것들만 죽어나는 법이다.  
 

사실 그것보다, 다음달 아버지를 캄보디아 여행 보내드리려 했는데, 홍수 때문에 어떡하나 싶다. 이럴 때일수록 캄보디아 관광산업이 붕괴되지 않도록, 여행을 보내드려야지. 이성적인 판단이야 그렇지만, 노인네라서 혹시나가 앞선다. 나도 소인배라.ㅠ.ㅠ 더구나 방역이 잘 되는 나라가 아니라서 노인네, 음...

차라리 이 핑계로, 내가 6년 만에 캄보디아 두 번째 여행을? ^^;


4.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
27일, 12년 반 동안 나를 키워준 칼럼이 끝을 맺었다. 홍세화 칼럼.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려니 칼럼을 끝낸다'는 말씀을 듣고, 궁금했는데, 아, 감격적인 무대 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보신당 당 대표로 출마하셨다. 서울마포당협 당원 세화씨의 출마의변,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를 읽으면서 울컥했다. 출마의변에 밝혔듯, 분명 상처 받으실 터이지만, 그것이 비인간적인 도가니에서 함께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면!

선생님, 12년 반 동안 고맙습니다. 그리고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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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도 자본에 의해 조작된 먹거리에 오염돼 있지 않은가!
    from 맺고,따고,볶고,내리고,느끼고,사랑하라! 2011-12-03 00:18 
    많은 사람들이, 먹는 문제에서만큼은, 지난 시절보다 경박해졌다. 경박하게도, '경박'이라는 단어를 쓴까닭은, 그만큼 먹는 문제가 절박하기 때문이다.경박과 절박 사이, 도대체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한 사례를 보자. 롯데마트의 통큰치킨.통큰 시리즈의 첫 시작은 센세이션이었다.값싸고 양 많은, 이런 수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했고,많은 사람들은 꼴딱 넘어갔다.그토록 애용하던 동네 치킨집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면서.WBC건, 월드컵이건, 올림픽이건, 자신들에게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소설가 유재현의 쿠바 기행문 《느린 희망》이었다. 쿠바인들의 수도 아바나에 발을 디디기 직전, 인상적인 표지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표지판은 이렇게 말한단다.  

"모든 쿠바인들의 수도에 오셨습니다."  

'쿠바'의 수도가 아니라, '쿠바인'들의 수도. '人'이라는 말 하나만 덧붙였는데, 그 느낌이 확 다르다. 국가가 아닌 사람을 앞세우는 발상이라니, 놀랍고 재밌다. 아마도, 체 게바라가 쿠바 사람들과 함께 이룩한 쿠바 혁명의 영향이 아닐까, 나는 진단했었다. 

그 뒤, 어디라도 갈라치면 나는 그곳의 표지판을 본다. 허나, 아직 쿠바를 만나지 못한 탓일까. 나는 다른 어디에서도 사람을 앞세우는 표지판을 보진 못했다. 어설프게라도 우리의 공정무역 커피하우스에선 'OOO OO지역 사람들이 만든 커피'라고 알려주면서 자족하는 정도랄까.  

물론 동티모르라고 다르진 않다. 비행기에서 땅에 발을 디디자, 제일 먼저 반기는 말은 'WELCOME TO TIMOR-LESTE'다. 동티모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래도 저 말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아, 진짜 동티모르 사람들이 사는 곳, 동티모르 커피가 자라는 곳에 왔구나.  

하늘은 맑았고, 구름은 복스러웠다. 우리의 발걸음을 환영해주는 듯한 태도라고, 멋대로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동티모르에서 동티모르에 온 사람들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건넨다면, 동티모르 커피 한 잔을 주면서 이리 말하리라. 

"여러분이 마시는 동티모르 커피가 자라는 나라에 오셨습니다." 

 그 '커피'라는 말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땅, 햇빛, 구름, 비, 안개 등과 같은 자연 그리고 사람들. 한 잔의 커피는 그렇게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연처럼 휘말리고 결합한 관계의 결정체다. 그 관계는, 다시 "커피 한 잔 하자"는 말로 새끼를 친다. 관계는 관계를 낳는다.   

동티모르 사람들의 수도에 있는 딜리공항은 작고 소박했다. 한국의 어느 작은 도시의 공항보다 더 작고 낡았다. 시골의 터미널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낯섦과 설렘이 한 공간에서 뒤엉킨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동티모르를 느껴본다.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공기가 목구멍을 넘어간다. 그렇다고 커피 냄새가 날리는 없다.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피부가 약간 더 검은 사람들이 공항을 메우고 있다. 몇 년 전의 내전 탓인지, 군복 비슷한 것을 입은 요원도 보이고, 시골 터미널의 어수선함을 닮았다. 그들이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 같진 않다. 다만 아이들의 시선은 다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애처로움을 품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여행객에게 다가서는 아이들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십 수년 전, 인도에 처음 발을 디딜 때, 나는 그것에 무척 당황했었다. 기브 미 원 달러. 몇 명의 아이들이 나를 에워싸고는 하나같이 외쳤다. 어찌할 바를 몰라, 줘야 할 지 말아야 할 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 것인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됐던 인도의 첫밤이었다.  

뭣보다, 그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원하는 바도 아니요, 돈벌이를 위해 어른들에게 등을 떠밀려 나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어떻게 해야 동정을 살 수 있는지, 곧 스스로 알아차린다. '아이가 아이답게 자랄 수 없는' 환경은 아이를 어른이 되게 만든다. 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에서 고단하고 애처로운 삶의 면모를 엿봐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딜리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있었다.  양동화 전국YMCA전국연맹 간사와 현지인 조디. 이 낯선 땅에서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안도할 일이기도 하다.  

5년 전, YMCA가 동티모르에서 공정무역 커피사업을 전개할 무렵, 양 간사는 산지 개발과 커뮤니티 조성을 위해 이곳에 왔다. 이십대 후반에 동티모르를 자원한 양 간사는 어느덧 삼십대가 돼 있다. 국내에서 두 번 가량 본 적이 있어 나와는 구면이다. 건강한 얼굴의 그녀를 보니 좋았다.

그 옆의 조디. 잘 생기고 착하게 생긴 청년이다. 인도네시아 출신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동티모르에서 YMCA의 공정무역 커피사업을 위해 일하고 있단다. 영어조차 쉬이 알아듣지 못해 의사소통이 쉽지 않지만, 우리는 지구인 아니던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웃음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인사를 대강 마치고, 두 대의 차에 나눠타고 딜리공항을 떠난다. 며칠 후면 다시 만날 곳이겠지만, 여기(사는 곳)가 아닌 어딘가에 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확인하게 되는 장소가 공항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됐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장소 또한 목적지의 공항이다.  

그곳을 떠난다. 딜리 시내를 향한다. 동티모르의 첫 기착지인 마우베시를 향하는 길이다. 험한 길을 달려야 하는 여정, 오프로드용 차는 왠지 믿음직하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조디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차창을 통해 가난이 덕지덕지 묻은 풍경이 지나간다. 여느 동남아시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모습 또한 엇비슷하다. 섬나라이며, 오세아니아에 속한다지만, 그 모습은 영락없이 동남아시아인이다. 물론, 그들은 그런 나의 이방인적인 시선에 불쾌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 일본, 중국 사람을 구분 못하지만, 우리는 작은 차이를 통해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수도라지만, 높은 건물도 없고, 도로 포장도 시원찮다. 바깥 풍경은, 만만디 그 자체였다. 덥고 가난한 나라의 여유로움 혹은 나른함이 도시를 휘감고 있었다. 느릿했고, 무심한 듯 흘러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노점상이 진을 치고 있었고, 허름하고 청결해 뵈지 않는 상점들도 도열해 있다. 집도 대충 지은 듯 허술해 뵌다. 이런 시각은 아마 지나치게 깔끔하고 정결하게 구획된 자본의 질서에 익숙해진 탓일 게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나는 하나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밖을 바라본다. 나와 동티모르는, 동티모르 사람들은 어떤 우연으로 이렇게 마주한 것일까. 어떤 우연한 일들이 함께 할까. 궁금하고 설렜다.  

테튬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최하위권인 나라의 사람들. 오랜 식민의 기억과 독립의 짜릿함도 잠시, 그들은 어쨌든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존재들이다. 이방인의 해묵은 관점으로 그들을 재단하려는 사고를 막아야 했다. 나는 이것만은 세상 누구에게나 똑같으리라 믿는다.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변치 않을 사실.  

그러고보면 그들과 우리는 똑같은 '하루'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동티모르 사람들의 삶에 틈입한 이방인이지만, 서로 우연한 일들에 휘말린 동지다. '커피'라는 관계의 창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만난 것이다.  

동티모르가 내 삶의 사정권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내가 이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동티모르라는 말이 나오면, 나는 솔깃했고, 더듬이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는 말했다. "타인의 사정에 무심한 개인은 뿔뿔이 나뉜 자신의 영역 안에서 그들만의 진실을 쌓기 마련이다."  

아마 그랬다면, 나는 동티모르를 그저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위험한 나라'라고만 생각하고 어떤 더듬이를 세울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은 내 삶에 동티모르를 끌어들였고, 나 역시 동티모르 사람들의 역사에 아주 작고 사소한 흔적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런 풍경에서도 차 안에서는 즐겁다. 옥천에서 장애인들을 고용해 빵을 만드는 하 대표님의 구수한 입담 덕분이다. 운전을 하는 조디의 옆자리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데, 그들은 대화를 한다. 뒷자리에서 그걸 보면서 신기했다. 서로를 알아듣고, 이야기를 나눈다. 동티모르는 또 다른 신기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낯선 땅이라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점점 더 크게 자리를 잡아간다.  

 

딜리의 바다를 봤다. 저 바다는 내 고향 바다와 잇닿아 있을 것이다. 이십 수 년 전 봤던 그 바다가 흘러흘러 지금 여기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딜리를 차츰 벗어난다. 길이 점점 더 울퉁불퉁해지더니 산악지대로 차츰 접어든다. 모험은 본격적으로 이제부터다. 커피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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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티모르 커피로드]③ 포르투갈 성주는 왜 동티모르에 눌러 앉았나?
    from 맺고,따고,볶고,내리고,느끼고,사랑하라! 2011-11-19 02:57 
    탐사가 진행될수록 사물들에 대한 더욱더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꽉 채울 것이다.- 에드워드O.윌슨,《바이오필리아》 차가 꿀렁거린다.수도 딜리의 풍경과또 다르게,산지는 어쩔 수 없이 역시 산지다.꾸르릉꾸르릉. 차의 꿀렁거림은 당연한 것이다.처음만난 이방인을 등짝에 태우기까지 했으니, 차라고 오죽하겠나.나
 
 
 

1. 제대로 나이 먹는 기술
'대하소설(roman-fleuve)'이라는 말을 처음 썼던, '사랑하는 기술'은 물론 '나이드는 기술'을 전수했던 프랑스의 문학가, 앙드레 모루아(1885.7.26~1967.10.9)는 말했다. "나이드는 기술이란, 뒤를 잇는 세대의 눈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로 비치게 하는 기술, 경쟁상대가 아니라 상담상대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다."

여자청소년 자립매장의 스무 살 안팎의 소녀들에게 커피(의 세계)를 알려주겠다고 커피멘토링을 맡았을 때, 이 말을 생각했었다. 작지만 꼭 그랬음하는 바람이었다. 철 없이 살지만, 철과 나이가 반드시 정비례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장애 아닌 도움을 주는 존재, 경쟁 아닌 상담상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했다. 

어제, 그 중 한 청소년이 청소년쉼터 주간을 맞아 이사장상을 수상했다. 수상을 위해 국회로 갔다. 몇몇 어른의 외피를 둘렀으나 개념 상실한 철딱서니들이 연단에서 '가출 청소년' '위기 청소년' 운운하면서 잘난 척을 했나보다. 다행히 한 개념 어른이 '자립(을 준비하는) 청소년'이라고 정정해달라고 연단에서 말했나보다. 

수상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이런 에피소드도 말해준다. 개념 상실 철딱서니의 말을 들었을 땐, 속이 어지간히 상했었나보다. 그런 개념 상실의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개념 어른이 당연히 잘 한 거라고 덧붙였다. 그렇죠? 선생님, 하고 확인하고 안도하는 모습.

다른 한 청소년은 물어볼 것이 있다며, 남자친구와의 연애를 상담한다. 표정에 나름 '한창 고민 중임'이라는 딱지가 붙어있기에, 성심껏 답을 해줬다. 여자사람과 수컷남자의 차이에 대한 농담 섞인 진담까지 덧붙여. 그랬더니, 역시 이런 건 나이 많은 사람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우와~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까지는 아닐지몰라도, 장애가 되진 않는구나, 상담상대로 생각해주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들이 날 만만하게 봐줬으면 좋겠다. 각각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얽힌 삶의 실체는 내가 들여다보기 힘든 심연이겠지만, 세상보다 어른에 치여 살았을 그들에게, 나는 그저 만만하고 군림하려 들지 않는 사람으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 제대로 풀지 못한 커피의 세계를 보여줘야 할 텐데...     


2. 작은 것
강남역 시티극장이 롯데시네마 시티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더라. 결국, 롯데(시네마)가 장악했다는 말이다. 어딜 가나 극장은, CGV, 롯데시네마, 씨너스(메가박스)만 보이는 세상이 됐다. 멀티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모든 극장은 대기업 자본이 접수한 시대. 세 개의 브랜드에 'OOO점'과 같은 접미사만 거들뿐.

참, 재미없어졌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내뿜던 극장들은 어디로 갔을까. 물론, 예술영화관이라는 타이틀로 명맥을 유지하는 인디극장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상업극장들도 나름 아우라가 있었다. 허나, 자본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시장 장악과 질서를 원했나보다.

동네 근처에 20여 년 된 빵집이 있었었다. 그야말로 동네빵집. 목 좋은 곳에 오랫동안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곳인데, 작년이었나, 파리 바게뜨로 바뀌었다. 들리는 말로는, 파리 바게뜨의 작업(!)으로 건물주가 임대료를 팍팍 올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나갔다는데, 결국 그 자리엔 파리 바게뜨가 떡하니 앉았다. 그 많던 동네빵집들, 파리 바게뜨, 뚜레주르와 같은 돈지랄 브랜드들로 떡칠갑을 했다. 동네 사람들, 파리 바게뜨 안 가면 되는데, 가더라. 

나는 아직 모르겠다.

20여 년을 함께 한 빵집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일까? 진짜 한국인들은 (대자본) 브랜드에 환장한 탓일까? 아님 다른 이유라도? 하긴, 커피도 마찬가지니까. 

  
3. 시
그래, 동의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래 시인이었으나, 사육 당하고 먹고사니즘에 함몰되면서 시를 잃었고, 시인이었던 정체성을 내동댕이쳤다. 야만이 시(인)를 잠식했다. 시는 자신이 느끼는 것임에도, 이해해야 하고 타인의 시선을 요구하는 일이 잦은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4. 천천히 와
김지수 보그 기자는 이리 썼다. "누군가 당신을 향해 매번 '천천히 와'라고 말해준다면 그는 당신을 오래도록 사랑할 사람이다." 

나는, 딱 두 사람에게 그랬던 것 같다.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가, 이런 게 아니라, 나는 내가 더 많이 사랑해서 내가 더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그녀들은 나를 떠났다.

천천히 오라는 나의 말이 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떠다니고 있었다. 겨울은 천천히 오지 않고, 불쑥 다가왔다. 천천히 오라고 가을은 말했지만, 겨울은 듣기 싫었나 보다. 천생 가을과 겨울은, 사랑하기 힘든 사이다. 그런 가을과 겨울이 사랑한다면? 눈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될 것이다. 겨울아, 천천히 와.  

 
5. 센스 없음
황교익 선생님에 대한 글을 잘 읽었다면서, 화학첨가물 덩어리인 캐러멜 사탕을 건네는 센스라니. 그것도 2개씩이나.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예의 차린답시고, 주는 대로 덥석 받은 내 잘못도 있지만, 2번째 그 사탕 때문에 이빨 때워놓은 부분이 떨어졌다. 물론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으나, 좋은 의도가 늘 좋은 결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또 글에 써 놨는데도,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보고 그런 얘길 하시남? 센스 참 없는 여자다.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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