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멍
미처 몰랐으나 지난 주말에 알았던 사실 하나가 있어요. 감도 멍이 든다.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하늘나리 상한마을의 감에게 인공중력을 부여하던 날. 가을햇살에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익은 감을 땄어요. 땅에 내려앉은 감의 꼭지를 잘라 상자에 넣는 작업을 하던 내게, 농부님이 건넨 말씀. "허허, 그렇게 넣으면 감이 멍들어요." 

감 꼭지를 따서 상자에 툭툭 던지듯 집어넣던 나는, 아차차 했습니다. 감도 멍든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감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어요. 내 얼굴도 감처럼 발갛게 물들었습니다. 멍 때리다가 감에게 멍을 선사할 뻔한 내 과오 때문이지요.

가을하늘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을 스윽 쳐다봤습니다. 조심할게, 말했습니다. 그리곤 이후로는 감을 살살, 내려놓았습니다. 감이 웃습니다. 고마워, 멍 들지 않게 해줘서. 나도 고맙습니다. 내 마음의 멍을 달래줬으니까요.



 
2. 아픔
역시 곡성, 가을 낙엽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 고준이에게 물었습니다. 잎이 왜 떨어질까?

고준이가 혀 짧은 소리로 답합니다. "응... 아파서 떨어져." 

아이들, 하나 같이 시인이라더니, 시인은 사회의 아픔, 세상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라더니, 틀린 말이 아닌가 봅니다. 가을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지하는 고준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향한 애정이 묻은 아이의 대답에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 가을이 아픈 거구나. 가을이 아파서 잎은 떨어집니다. 낙엽은 그 아픔을 보여주는 징표인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도 아이일 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요. 어른이 되면서 우린 말짱 그것을 지웠나 봅니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사는 데 그 까짓 게 무슨 소용이냐며. 고준이 덕분입니다. 낙엽을 보면, 또 누군가 아프구나,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고준이가 시인의 면모를 내팽개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연,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겠죠.

헌데, 그거 아세요? 고준이의 그 말을 들으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아욱아욱, 당신이 아팠습니다.


  

3. 이호준
허영만 맛있게 잘 쉬었습니다. 호준이 형이 낸 책 제목입니다. 허영만 선생님과 함께입니다. 축하해 줬습니다. 형은 고맙다며, 홍보 좀 잘해 줘, 이럽니다. 씨익 웃었습니다. 형은 《식객》의 취재팀장입니다. 즉, 스토리를 허영만 선생님과 함께 궁리하고 짠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얘기했던 가요?

사실, 호준이 형은 내게 호돌이 형입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형을 그렇게 불렀거든요. 자주 만나진 않지만, 내가 사랑하는 형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좀 까칠한 성격이 돼 놔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닥 깍듯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 없다는 말도 종종 듣는 사람이고요. 그런 제가 형으로 인정하는 거의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형에게 물었던 기억이 나네요. 형, 허 선생님 품에서 떨어져 나와서 책 쓸 생각 없어요? 

형이 그럽니다. 옛날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충분히 좋아. 그런 욕심도 버렸고. 그리고 이렇게 책이 나왔습니다. 아직 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좋은 책입니다. 어떻게 장담하냐고요? 아, 제가 사랑하는 형이라니까요! ^^;(절 못 믿는다면 말고요!)

꼭 사서 읽어보세요! 《허영만 맛있게 잘 쉬었습니다 : 일본의 숨겨진 맛과 온천 그리고 사람 이야기》.



...   
그리고, 지금 얘기엔 숫자를 붙이지 않겠습니다.  
이 남자, 제가 한때 청춘의 시작과 끝이라고 지칭했던, 남자입니다.
18년 전, 1993년 10월32일의 전날, 길에서 세상에 작별을 고했던 남자.
사람들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히 지칭하는 날에 영화처럼 바람이 된 남자.

맞습니다. 리버 피닉스입니다. 23살로 모든 것을 끝낸 폭풍 집시. 그를 좋아했는지 당신에게 물어보질 못했습니다. 당신이 있었다면, 리버 피닉스에 대해 블라블라 말을 했을 텐데요. 그리고 뭣보다 당신을 위해 이날 특별하게 만든 나의 커피 '리버 피닉스'를 내려서 줬을 겁니다. 

그 사람, 유작이 곧 선보일지 모른답니다. 피닉스가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영화 <다크 블러드> 필름을 재편집하고 있다네요. 조지 슬루저 감독과 제작사가 의기투합해 이를 추진하면서 리버의 동생인 호아킨 피닉스에게도 도움을 청하고 있답니다. 잘 되면, 내년에 볼 수 있을 거라지만, 유족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어요. 글쎄, 상업적인 목적이 가미됐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이미 찬란했던 그의 영화들이 반짝반짝 존재하는 마당에, 이 영화가 그 영화들 반열에 오를 것 같지는 않은 막연한 생각. 그래도 스크린에서 그의 미공개 유작을 본다면, 아주 살짝 좋을 것 같습니다.

참, 그것 아세요? 리버가 1993년 10월의 마지막 날, 선셋대로에 눕지 않았다면, 리버가 출연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토탈 이클립스>를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캐스팅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그의 급작스런 요절로 사람이 바뀌었다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는 크리스찬 슐레이터가 리버를 대신했고, <토탈 이클립스>, 맞아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대신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가 됐을 겁니다. 디카프리오의 랭보, 충분히 아름다웠고 좋았지만, 랭보 그 자체였을 리버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랭보와 리버, 생각만 해도 짜릿한 조합이죠. 

이건 저만 알고 있었던, 일종의 놀이였는데요. 랭보의 태어남(10월20일)과 죽음(11월10일) 사이, 딱 중간에 리버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 <토탈 이클립스>의 조합을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던 혼자만의 아쉬움! 그러고 보니, 리버 역시 스크린의 시인이었죠. 존재감 자체로 詩가 되는 배우.

작년 오늘은, 스크린으로 <허공에의 질주>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 보니, 호돌이 형이 몇 년 전부터 말했었습니다. "준수야, 언제가 됐든 10월의 마지막 날 리버 피닉스 예약한다." 호돌이 형을 위해 언제든 준비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꼭 주고 싶었던, 꼭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도 '리버 피닉스'였어요. 하하.

그래요, 오늘. 10월32일의 전날, 잘 지내나요?  

제가 특별히 오늘을 위해 만든, 리버 피닉스 한 잔 하실래요? (레시피는 비밀이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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