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대로 나이 먹는 기술
'대하소설(roman-fleuve)'이라는 말을 처음 썼던, '사랑하는 기술'은 물론 '나이드는 기술'을 전수했던 프랑스의 문학가, 앙드레 모루아(1885.7.26~1967.10.9)는 말했다. "나이드는 기술이란, 뒤를 잇는 세대의 눈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로 비치게 하는 기술, 경쟁상대가 아니라 상담상대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다."
여자청소년 자립매장의 스무 살 안팎의 소녀들에게 커피(의 세계)를 알려주겠다고 커피멘토링을 맡았을 때, 이 말을 생각했었다. 작지만 꼭 그랬음하는 바람이었다. 철 없이 살지만, 철과 나이가 반드시 정비례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장애 아닌 도움을 주는 존재, 경쟁 아닌 상담상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했다.
어제, 그 중 한 청소년이 청소년쉼터 주간을 맞아 이사장상을 수상했다. 수상을 위해 국회로 갔다. 몇몇 어른의 외피를 둘렀으나 개념 상실한 철딱서니들이 연단에서 '가출 청소년' '위기 청소년' 운운하면서 잘난 척을 했나보다. 다행히 한 개념 어른이 '자립(을 준비하는) 청소년'이라고 정정해달라고 연단에서 말했나보다.
수상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이런 에피소드도 말해준다. 개념 상실 철딱서니의 말을 들었을 땐, 속이 어지간히 상했었나보다. 그런 개념 상실의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개념 어른이 당연히 잘 한 거라고 덧붙였다. 그렇죠? 선생님, 하고 확인하고 안도하는 모습.
다른 한 청소년은 물어볼 것이 있다며, 남자친구와의 연애를 상담한다. 표정에 나름 '한창 고민 중임'이라는 딱지가 붙어있기에, 성심껏 답을 해줬다. 여자사람과 수컷남자의 차이에 대한 농담 섞인 진담까지 덧붙여. 그랬더니, 역시 이런 건 나이 많은 사람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우와~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까지는 아닐지몰라도, 장애가 되진 않는구나, 상담상대로 생각해주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들이 날 만만하게 봐줬으면 좋겠다. 각각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얽힌 삶의 실체는 내가 들여다보기 힘든 심연이겠지만, 세상보다 어른에 치여 살았을 그들에게, 나는 그저 만만하고 군림하려 들지 않는 사람으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 제대로 풀지 못한 커피의 세계를 보여줘야 할 텐데...
2. 작은 것
강남역 시티극장이 롯데시네마 시티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더라. 결국, 롯데(시네마)가 장악했다는 말이다. 어딜 가나 극장은, CGV, 롯데시네마, 씨너스(메가박스)만 보이는 세상이 됐다. 멀티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모든 극장은 대기업 자본이 접수한 시대. 세 개의 브랜드에 'OOO점'과 같은 접미사만 거들뿐.
참, 재미없어졌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내뿜던 극장들은 어디로 갔을까. 물론, 예술영화관이라는 타이틀로 명맥을 유지하는 인디극장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상업극장들도 나름 아우라가 있었다. 허나, 자본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시장 장악과 질서를 원했나보다.
동네 근처에 20여 년 된 빵집이 있었었다. 그야말로 동네빵집. 목 좋은 곳에 오랫동안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곳인데, 작년이었나, 파리 바게뜨로 바뀌었다. 들리는 말로는, 파리 바게뜨의 작업(!)으로 건물주가 임대료를 팍팍 올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나갔다는데, 결국 그 자리엔 파리 바게뜨가 떡하니 앉았다. 그 많던 동네빵집들, 파리 바게뜨, 뚜레주르와 같은 돈지랄 브랜드들로 떡칠갑을 했다. 동네 사람들, 파리 바게뜨 안 가면 되는데, 가더라.
나는 아직 모르겠다.
20여 년을 함께 한 빵집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일까? 진짜 한국인들은 (대자본) 브랜드에 환장한 탓일까? 아님 다른 이유라도? 하긴, 커피도 마찬가지니까.
3. 시
그래, 동의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래 시인이었으나, 사육 당하고 먹고사니즘에 함몰되면서 시를 잃었고, 시인이었던 정체성을 내동댕이쳤다. 야만이 시(인)를 잠식했다. 시는 자신이 느끼는 것임에도, 이해해야 하고 타인의 시선을 요구하는 일이 잦은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4. 천천히 와
김지수 보그 기자는 이리 썼다. "누군가 당신을 향해 매번 '천천히 와'라고 말해준다면 그는 당신을 오래도록 사랑할 사람이다."
나는, 딱 두 사람에게 그랬던 것 같다.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가, 이런 게 아니라, 나는 내가 더 많이 사랑해서 내가 더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그녀들은 나를 떠났다.
천천히 오라는 나의 말이 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떠다니고 있었다. 겨울은 천천히 오지 않고, 불쑥 다가왔다. 천천히 오라고 가을은 말했지만, 겨울은 듣기 싫었나 보다. 천생 가을과 겨울은, 사랑하기 힘든 사이다. 그런 가을과 겨울이 사랑한다면? 눈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될 것이다. 겨울아, 천천히 와.
5. 센스 없음
황교익 선생님에 대한 글을 잘 읽었다면서, 화학첨가물 덩어리인 캐러멜 사탕을 건네는 센스라니. 그것도 2개씩이나.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예의 차린답시고, 주는 대로 덥석 받은 내 잘못도 있지만, 2번째 그 사탕 때문에 이빨 때워놓은 부분이 떨어졌다. 물론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으나, 좋은 의도가 늘 좋은 결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또 글에 써 놨는데도,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보고 그런 얘길 하시남? 센스 참 없는 여자다. 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