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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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1년 10월31일, 세계는, 인류는 또 하나의 기록을 새겼어요. 세계 인구, 70억 명을 넘어섰습니다. 60억 명에서 12년, 50억 명에 도달한지 24년 만입니다. 인구 증가는 점점 빨라집니다. 10억에서 20억까지는 100여 년이었지만, 20억에서 30억은 32년이 걸렸어요.

 

유엔인구기금(UNFPA)은 70억 인구를 언급하면서, 실제 인구는 5000만 명정도 적거나 많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의도된 잠정 수치이긴 한데, 급격한 인구증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취지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70억 명이라는 숫자, 쉬이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내 옆에 있었던 당신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70억 명 하나하나를 머리속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70억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 70억 개의 각자의 진실이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그런 한편으로, 산다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단상을 부여합니다. 70억 명의 한 명으로 태어나는 것, 참으로 소중한 탄생이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대부분 현실은 가혹합니다.


최근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인 <천일의 약속>에서 지형(김래원)의 아버지는, 아들 지형과 알츠하이머 환자인 며느리 서연(수애)이 애를 낳는다는 얘기에, 대책없이 무모하다는 말을 던집니다. 대부분 현실이라고, 다를까요? 통계 수치를 따지자면, 그 말, 현실적으로도 유효합니다. 장 지글러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을 접하자면 말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알려줍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2005년 기준, 10세 미만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갑니다. 3분에 1명이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잃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립니다. 아프리카에선 전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고요.


장 지글러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다룬 세계의 모습입니다. 그건 '빈곤'이라는 이름의 재앙입니다. 유엔의 정의에 의하면, 빈곤이란 기회와 선택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빈곤,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것이며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박탈하는 상태임에도, 지구는 속수무책입니다.


70억 인구. 그 가운데 30억 명이 하루 2.5달러의 돈으로 생을 간신히 지탱한다고 합니다. 즉, 우리 돈으로 3000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기나긴 하루를 버텨야 하는 것이죠. 더 나가볼까요? 100명 중 20명이 영양실조, 1명은 아사직전이랍니다.


존엄한 존재로 태어났건만, 살아감은 그렇지 않은 현실입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 세계의 농업생산력은, 120억 명에게 하루 2400~2700kcal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의 굶주림과 죽음을 수치로 접해야 할까요? 그들의 빈곤은 게을러서? 빈곤층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를 반복함으로써 더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로 몰아가고 있다? 어떤, 저 잘난 인간들은 그렇게 쉽게 말합니다. 자연도태설입니다. 전형적인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에 부자와 권력자들의 '가난한' 논리입니다.


허나 그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닙니다. 당신도 가슴 아파했던, 세계의 불공정함. 부의 편중과 가난의 대물림. 인구의 증가만큼, "굶주림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글러 역시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이 고민했던 세계의 불평등과 불공정함. 당신이 그래서 가고자했던 길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틈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당신이 선택했던 그 길. 그런 세계를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지구의 슬픔을 조금씩 달래주지 않나 싶기도 해요. 


식량 자체는 풍부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습니다. 구조적 기아입니다.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결과라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글러가 아들 카림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도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세계가 돌아가고 작동하는 원리를 알려줌과 동시에, 카림, 너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세계를 사유하거라.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세계의 굶주림에 대한 고민과 사유, 이것이 당신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계를 사유하게 합니다. 풍족한 식량을 갖고 있음에도 절반이 굶주리는 세계의 구조와 현실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회의하고 질문할 것.


《세계가 만일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에 나오지요. 100명 가운데 6명이 59%의 부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인입니다. 74명이 39%, 나머지 20명이 2%에 매달렸다는 통계적 현실. 또한 20%가 에너지의 80%를 사용합니다. 철저하게 파레토 법칙에 충실한 사회구조. 1%에 대한 99%의 저항은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99%의 저항이 세상의 구조에 금을 내기 위해 계속 돼야 할 이유입니다.


2011년 세계인구동향보고서에 의하면, 70억 인구 가운데 10~24세의 젊은층들은 세계적 경제위기, 교육기회의 박탈 등으로 '잃어버린 세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곧 미래를 잃어버릴 것이란 경고죠.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거짓 위로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놔둔다면 우리는 늘 잃어버린 세대를 반복적으로 만날 겁니다. 


지글러가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이 가진 미덕은 그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불행은 결핍이나 부족이 아닌, 분배와 구조의 문제라는 것.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 얼마나 적확한 직설인가요. 불공정하고 잔혹한 세계질서에 더 이상 눈 감고 귀 막고 살지 말 것을 권하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계를 사유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을 다시 생각합니다. 장 지글러가 주목했던 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당신의 고민이 맞닿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나는 그렇게 세계의 진실 혹은 속살을 마주하고, 나의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를 다시 돌아봅니다. 나는 그 착취구조에 협력하고 있진 않은가. 섬뜩합니다. 기존 질서가 유지돼서 피 흘리는 이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지금의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랬듯, 나 역시 다른 세계를 꿈꿉니다. 불공정하고 잔혹하며 착취가 일상화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아닌, 좀 더 진일보한 사회체제 속에서 굶주림의 해결을 위해 사회질서가 가장 먼저 작동하는 사회. 쿠바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의 말을 약간 변용하자면, 단 한 사람이라도 굶주린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자지 않는 사회. 그런 마음의 세상이라면, 나는 산다는 것을 좀 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세상이 오리란 확신 따윈 없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살고 싶진 않네요.

 

그래요, 책을 읽으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잘 있나요?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커피 한 잔과 함께 당신이 참 보고 싶은 하루입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당신과 내가 꿈꾸던 세상을 그리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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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으로 간 사나이 - A Man Who Went to Ma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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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오랜만이네요, 아가씨. 꽤 오랜 세월이 흘렀죠?

 

콧물 찔찔 흘리던 시절이었던가, 빡빡머리 시절이었던가, 교과서를 통해 아가씨와 목동의 이야기를 읽고 가슴 설렜던 기억이 짠하네요. 그래요, 알퐁스 도데의 <별>을 통해 아가씨를 처음 만났었죠. 첫 만남, 참 감미롭고 아름다웠었어요. 그 이야기를 만난 이후, ‘별’이라는 말을 듣거나 볼라치면,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순진해 빠진 목동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니까요.


그래서 그 이야기, 오랫동안 저장했었어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답고 순수한 외사랑 이야기로 말이죠. 아가씨는 여전히 아름다우시죠? 아가씨를 지켜주던 그 ‘이름 없는 목동’이 스무 살이 되도록 봤던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근처 백리 안에서 가장 어여쁘다고 했었던 기억도 나요.

 

그 미모, 세월이 지나갔다고 어디 가진 않았겠죠? 저는 아마 아가씰 본다면, <개그콘서트>의 <사마귀유치원>의 쌍칼처럼 음흉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얘기하겠죠. 나이가 들어도, 이~뻐~


참, 그 순진했던 목동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세요? 혹시 프로방스 지방 뤼르봉 산에서 여전히 양을 치고 있나요? 아가씨, 그 목동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기억나세요? “헤아릴 수 없는 별들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곱게 잠들어 있노라고…” 그때, 살포시 잠든 아가씨의 모습을 목동은 이리 묘사했었더랬어요.  


이 애틋한 묘사가 얼마나 많은 소년들을 녹였었는지, 아가씬 모르죠? 목동이 얼마나 부러웠다고요. 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가씨와 데이트하는 꿈을 꾸질 않나, 그 순수함을 갈망하질 않나... 뤼르봉산에서 나도 양치는 목동이 되고 싶더라니까요. 아가씨 옆에 있는 양들도 털이 섹쉬~해~

 

흠흠, 어쨌든 목동의 독백이 압권이었죠. 아가씨가 졸음에 겨워 무거워진 머리를 목동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고, 목동은 그 잠든 얼굴을 빤히 보면서 꼬박 밤을 새웠었는데, 목동이 그랬어요. “…가슴이 설렜지만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맑은 밤하늘의 보호를 받아,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았습니다.…” (참, 그 목동, 지랄방정을 떨었죠. 오직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면서, 속으론 이~뻐~ 하고 감탄(?)했을지도.ㅋ)

 

 

<별>은 그렇게 그 어린 마음들의 둥지에 자리를 틀었었어요.

 

한 여자를 지키는 남자의 마음 같은 거랄까. 어린 마음엔 그런 줄로만 알았죠. 목동은 진심이었을 거예요. 맑은 밤하늘의 보호가 정말 있었다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단맛 쓴맛 세상의 간을 좀 보고, 다시 <별>을 만나 그 상황을 되짚어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목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한 시대를 알 순 없지만, 당시는 봉건적인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여러 정황묘사를 보았을 때 말이죠. 아가씬, 그런 신분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신분 차를 감안했을 때, 산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아가씨에게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외의 것을 할 수 있었겠어요? 감히 그랬다가 당장 목이 날아가요. 그 신분제가 얼마나 엄격했으면, 엄연히 있었을 목동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고, 프로방스 지방 ‘어떤 목동의 이야기’라고만 돼 있을까요.


어린 시절엔 무심하게 지나쳤는데,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봐요~ 아가씨는 버젓이 ‘스테파네트’란 이름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목동은 이름이 없을까요? 목동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의미 없는 행위가 아님은 아시죠? 아, 혹시 모르시나? 워낙 귀한 분이라 그런 것까지는, 못~해? 

 

이거 한 번 보실래요? 한국의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詩에서 이리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목동은 왜 이름이 없었을까? 전 아직도 그게 궁금해요.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죠? 신분차별이 제도화된 시대에, 목동을 굳이 ‘꽃’이 되게 할 필요는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생각, 없었어요? 

 

제가 삐뚤어진 아이라 그런 거겠지만, 목동의 ‘이름 없음’이 괜히 아팠어요. 개인의 정체성을 무시한 것 같고, 차별을 내면화한 행위 같아서.  


신분제는 자기 집단과 선천적으로 다르고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집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이땅에서도 신분이 낮은 계급에겐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죠. 이름조차도 지을 수 없는 불가촉천민이 있었거든요. 목동이 그런 신분이었던 건가요? 양을 치는 목동이 그렇게 하찮았던 건가요?  

 

귀족가문의 교양 있는 영애였을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별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목동의 이름을 불러줬다면, 참 좋았을 뻔 했어요. 아가씨가 목동이라는 구체적 실존에 대한 존엄을 보여줬다면, <별>은 더욱 빛을 발했을 것 같은데.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지만, 아가씨만은 달랐다면, 목동의 마음이 더욱 잘 전달됐을 거라고요.ㅠ.ㅠ


그런데, 혹시 그것 생각해 보셨어요? 목동이 진짜 바랐던 것!

 

물론 아가씨가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나 신경은 없었겠지만, 전 목동이 사랑을 할 누군가가 필요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동의 순수함이 안타까운 건, 신분제라는 벽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에요. 순수가 순수 그 자체로 빛나기보다 사회적인 산물 같아서요.


아마도 그는, 아가씨를 뫼시면서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에 묶였을 지도 모르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스무 살 열혈 청년의 몸이 간직한 자연스러움을 표현하지 못한 거요. 물론 아가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고백을 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나잇대 남자의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표현되지 못한 것 같아요. 아가씬 어땠는지도 궁금하고요.

 

아, 말이 길었네요. 사실, 아가씨가 영화에도 짜짠, 나와서 반가웠었어요. 

 

<화성으로 간 사나이>.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 어깨에 기대, 밤하늘 별을 보고 코~자더니, 화성이야기로 돌아오셨더라고요. 서프라이즈~ 그런데, 보다보다 울화통 치밀어서 이렇게 닿지도 못할 편지를 써요. ㅠ.ㅠ

 

영화는,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아가씨의 가정환경이나 태어난 곳이 다르더군요. 귀한 아가씨에게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하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은 초라한 시골집을 고향으로 했고요. 스테파네트란 이름도 ‘소희’(김희선)라고 바꾸고 말이에요.

 

목동은 별반 바뀐 것 없이 환생한 것 같았습니다. 아, 중요한 변화라면 목동에게 ‘승재’(신하균)란 ‘이름’이 부여됐더군요. 사랑을 지키는 파수꾼 노릇을 자처하는 건 여전했지만 말입니다. 첫사랑을 평생 가슴 속에 간직하는 순수한 남자. 우와~ 목동의 이미지, 딱 그대로이더군요. 아가씨는 이미 이렇게 환생할 거라는 것, 다 알고 있었죠?

 

아가씨, 근데 그거 아세요? 호르몬에 대한 일부 연구결과. "‘사랑’의 유효기간은 2년뿐,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현상은 더 이상 화학반응의 작용을 멈춘다."

 

그리 따지자면, 목동은 그 오래 전부터 얼마나 사랑을 이어간 거죠?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가씨는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죠? 전생에 나라를 구하거나 곗돈을 타지 않는 이상,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쨌든 세월이 바뀌어도 동화로 엮어진 것은 비슷하더군요. 극적인 장치는 더 곳곳에 포진해 놓고 말이에요. 수몰 직전의 외딴 산골마을, 시골과 도시로 이분화된 심성의 갭, 엇갈리는 엇박자의 사랑... 특히 설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영상까지 감안한다면 말이죠. 책을 보며 상상만 했던 그런 장면이~ 우와, 이~뻐~ 아가씨도 완전 이~뻐~

 

아가씨도 세월따라 변신을 시도했는데, 제가 당시 10대의 심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까닭일까요? 세월이 흐르면 원래 그리 되는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닙니다, 아니고요. 아가씨(소희)나 목동(승재)의 이야기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채로 이어졌기 때문이에요.  

 

시골과 도시. 무슨 1960~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인 시대도 아닌 마당에, 그 둘을 떡하니 갈라놓고 심성을 그리 후지게 대비시켜 놓다니요. ‘농촌=순수, 도시=비정’ 이런 도식적인 방정식은 식상하고 진부한데다 너무 상투적이지 않아요? 그런 구도, 아 정말 무성의해 보여요. 

 

아울러, 아가씨(소희)의 소원대로 승재가 나루터를 지키고 화성으로 떠난다는 발상은 꼭  ‘관객모독’하는 느낌까지 받게 해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목동 대신 우체부하면서 멀쩡하게 잘 지내던 양반이, 아무리 아가씨가 한때의 좋은 감정을 그대로 묻어달라고 했기로서니, 그걸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로서니. 아, 짜증~

 

이야기, 한여름 밤의 꿈같았습니다. 아가씨의 사랑, 승재의 사랑, 그 사랑 모두 매력없고 흡입력도 없습니다. 아가씨는 승재가 화성에서 영원히 아가씨를 바라보며 산다는 말을 곧이 받아들일 것도 없잖아요. 혼자 웃고 앓다가 예견된 결말처럼, 죽음으로 마무리하다니. 죽음이 무슨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사랑을 위한 죽음을 그렇게 희화화하는 건 억지스러웠어요.

 

아가씨나 목동의 변신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신분사회의 관습과 전형을 그대로 옮겨왔단 생각도 들더군요.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진 대신 유사신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대입시켜 보자면, 서울로 이주한 ‘주인마님’을 향해 시골에 남은 ‘비복’이 처량한 신세한탄을 하는 것 같은? 그리고 그 유사신분제의 벽 앞에서 꼬꾸라진 나약한 영혼에겐 원래 의도했을 ‘순수’의 때깔도 별로 드러나질 않아요.  


이전과 다름없는 동화(童話)인데, 세상 간을 좀 봤다고, 예전처럼 그 내용에 동화(同化)되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아가씨나 목동은 그대로인데, 저만 달라진 것 같아요. <별>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아프면서도, 그 행간에 묻은 봉건적 신분제의 구조를 읽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해요.


<별>은 이제 제겐, 맥없는 별빛 소나타 같은 이야기가 됐습니다. 괜히 아가씨의 부아가 치밀 소리를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가씨도 마냥 온실 속의 화초로만 자라진 않았겠죠?

 

목동의 안부도 궁금하지만, 그 사람 여전히 신분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있진 않을까, 걱정도 돼요. 좋습니다. 털어놓죠. 제겐 이제, 과거의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없습니다. 목동의 순수도 시대착오적이고요.

 

어쩌다보니, 불만투성이 작별의 편지가 되었지만, 그만큼 과거 <별>을 사랑했었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봐주세요. 더 이상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마음에 담지 않기로 한 남자의 아쉬운 작별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이젠 고합니다.

 

굿바이, 스테파네트.

 

(P.S. 제가 패러디를 해서, 어른이여러분을 위한 쌍칼 아저씨판 <별>을 만들면 어떨까요? 허락해 주실래요? 제가 너무 음흉하고 발랑 까졌죠? ^^;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의 (신)하균이 형은 <브레인>과 완전 180도 다른 표정이에요. 놀라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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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끊고 성적이 올랐어요 - 자기주도학습 4000시간의 실험과 기적
정영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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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인사십'(마흔)을 목전에 둔 동창들과 모임을 할라치면, 화제는 더 이상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즉, 중년을 향하고 있는 우리들은 '나'를 은폐엄폐하거나, 순정한 자신의 욕망은 골방으로 밀어넣는다. 아니, 실종됐다. 고작 말하는 욕망은, 따지고 들면 자신의 것이 아니다. 주류사회가 요구하는, 그래서 주입된 타자의 것이다. 

 

이제 그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류는, 집(아파트 시세)이나 직장(에서의 출세나 퇴직시점) 혹은 아이들에 대한 것이다. 좋은 아빠(의 조건 등)를 드물게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교육, 아니 정확하게는 사교육 비중이 가장 높다. 영어유치원이 어떠니, 학원이 어떠니, 교육비가 어떠니, 등등이 물결을 치고 꼬리를 문다. 이것은 결국 집, 주식 등과도 불가피하게 연관을 맺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이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느냐, 대부분 그것도 아니다. 그저, 이러저러해서 돈이 얼마가 들더라, 이 정도다.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는 나로선, 그 대화에서 약간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온갖 걱정 앞에 내가 끼어든다. 사교육의 무쓸모, 선행학습의 폐단 등을 주창하는데, 그들은 늘 이렇게 종결한다. "니도 결혼하고, 애 낳아서 키워봐라." 철 없는 소리, 멋 모르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는 그들의 충고(?)다. (이런 고마울 데가. 청순하게 욕 나와주신다. 샤방.)

 

그러나, 그들의 충고에 마냥 동의할 수 없다. 비록 나는 아이가 없어도, 그들의 아이들은 곧 나의 조카들이다. 나는 조카들이 이 무지한 아빠들의 손아귀에서 사육당하길 원하지 않는다. 나의 동창들이라지만, 그들은 깨놓고, 이미 사교육의 노예다.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며 자신의 교육관을 갖고 있지 못하다. 생각하지 않는 죄. 

 

그들은 사교육이라고 일컫지만, 정확하게 그것은 사육이다. 학교로도 모자라, 세상이 아닌 학원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에 아이들을 가둔다. 그 아이들, 양계장에 갇혀 알만 낳는 난형성 닭과 무엇이 다른가. 거칠게 말해서, 자신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부모 맞나?

 

나는 그들 일부에게 이 책을 권한다. 너희들이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보내는 학원, 그것이 과연 일류 아이를 만들까? 학원 끊어도 죽지 않아! 학원 다니지 않는다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아. 학원 다니지 않아도 성적이 내려가긴커녕 올라갈 수 있어.

 

그 명제, '거짓' 같다고? 아니 '참'으로 증명한 것이 이 책이다. 2010년 5월, 고1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진 위험한 실험. EBS 다큐프라임 < 공부의 왕도 >는 '사교육 없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을까'를 놓고 4000시간에 걸쳐 실험을 했다.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한지,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에 대한, 21명이 참가한 담대한 실험이었다.  

실험은 학원부터 끊는 사교육 정리부터 시작했다. 학원에 길들여진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도록 만들었다. 당연히 불안증 따랐다. 이땅은 남들 다 하는데 안하면 불안이 증폭되는 사회 아니던가. 학생뿐 아니라, 부모, 교사까지 사교육 불안증이 닥쳤다. 그렇다면 실험은?

결과는, 올레~ 아이들이 달라졌다! 교사도 달라지고, 부모도 달라졌다. 모두가 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달라졌다기보다 원위치를 찾았다. 학원을 안 가니, 어찌할 바 모르던 학생들이 스스로 움직였다. 공부할 이유를 찾았다. 자연 성적도 올랐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결과가 나왔다. 아이들에게 미소가 퍼졌다.

이 실험, 사교육(이라고 쓰고 사육이라고 읽는)공화국에 건네는 파열음이다. 책을 보면 학원은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학원은 악(惡)이다. 아이가 스스로 서지 못하게 만드는 악. 그것은 결국 인생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그러니까 명백하다. 학원, 끊어도 산다.

 

아무리 그래도 학원 안 보내면, 뒤처지는 것 같다고? 책을 좀 더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책은, 그러니까 실험은 증명한다.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성적이 올랐다. 물론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개별 특성에 맞춰 자기주도학습을 하도록 만드는 것.

 

우리의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지쳐 있다. 세계 어느 나라 학생들보다 더 오래 교실에 붙잡혀 있는데도 학원까지 가야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참으라고 하니, 대한민국은 점점 미쳐가고 늙어간다. 그러다보니 만날 필요한 것이 위로가 될 수밖에.

 

독학이 아니다. 자기주도학습이다. 삶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고 자신이 꾸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부모들은 왜 그것을 잊고 사나? 시행착오도 삶을, 자기주도학습을 만드는 과정이다.

 

책은 자기주도학습의 목표도 뚜렷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단순히 성적을 올리기 위함이 아니다.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이들의 생은 길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부모의 조급함이 아이를 미끄러지게 만든다. 시간이 필요하다. 책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전으로 돌아가면 결국 시간 낭비. 성과를 얻기 전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고 책은 강조한다. 긴 여정, 무수히 많고 다양한 일들이 생겨나겠지만, 그것 모두 인생이다.

 

나는 내 동창들이 자신들의 이야기, 즉 '나'에 좀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곧 아이들이 스스로 생을 꾸릴 수 있게끔 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아이, 학원 보낸답시고, 자기들 등골도 휘어지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망가진다. 이 무슨 '너 죽고 나 죽고'의 시나리오인가. 학원이야말로 '등골 브레이커'가 아니고 뭔가.

 

남인사십, 그네들이 삶에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땅은 더 이상 지쳐선 안 된다. 학원부터 끊자. 아이들은 성적 오르고, 어른들은 성적(性的)으로 왕성해질 수 있다. 최근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 성관계 횟수는 주 1.04회로 조사대상 13개국(34세 이상 남녀) 가운데 최하위였단다. 대한민국의 활력을 돋게 하기 위해, 학원을 끊자. 상관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자신에게 집중했던 동창들 좀 찾고 싶다. 예전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녀석들과 만나고 싶다. 그들을 학원에 뺏긴 현실은 슬프고 우울하다. 그들 대부분, 아직 모른다. 학원 때문에 자신의 생에서 그 자신이 유폐되고 실종됐음을. '나'라는 서사를 잃은 그들 때문에 나도 덩달아 슬퍼진다. 미친 존재감까지 바라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의 총명함을 되찾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나 여기 있다'고, 그 존재만이라도 드러내다오. 

 

아 여보게, 정신차려 이 친구야. 우린,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고! 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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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11년 만난 여자들 중에 가장 예쁜, 아니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를 봤다. 올해가 며칠 남았지만, 글쎄, 바뀔까? 그리 된다면 물론 좋지만, 보는 순간, 속으로 우와~ 했다. 동공은 커지만 귀는 쫑긋, 심장은 빠담빠담.

 

물론 속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고, 다른 이들도 함께 한 자리라, 그저 외모와 아우라가 모든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1년 동안 봤던 모든 여자를 압도하는 지성과 아름다움.

 

美, 그 자체. Beauty, PSO!

 

허나, 내게만 치명적이라면 그녀가 결혼을 했단다. 우르르르, 하늘에 구멍이 뿡~ 뚫리고 있었다. 이른바, 나이 먹은 여자들이 불평 혹은 불만을 내지르곤 한다. 세상의 멋진 남자들은 이미 다른 여자들이 채갔어. 그때 내 심정이 그랬다.

 

아, 세상의 아름다운 여자, 美는 이미 다른 남자들이 채갔구나. 저런 여자와 사랑하고 결혼하려면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해야하는 거지?결혼이라는 제도는 참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구나. 스쳐지나가며 놓친 것들도 때론 얼마나 소중한가 말이다. 2011년, 그렇게 간다.

 

 

사십

서울 사는 몇몇 고등학교 동창들. 송년회랍시고 어제 모였다. 얘길 나누다, 내년 사십이 된단다. 맞다. 내가 그 얘길 꺼냈다.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 한 녀석은, 누군가는 사십이 되는 새해 첫날, 온몸의 마디마디가 다 쑤시고 몸부터 달라진다는 얘길 꺼낸다. 우스개였는데도 녀석들 눈빛이 후~하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 그들의 거의 모든 관심사는 아이(교육)와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혹은 출세·승진).

 

뭔 말을 하다가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을 슬쩍 꺼냈더니, 헛소리하지 말라는 구박만 날아든다. '기본 소득' 얘기도 좀체 통하지 않는다. 나의 절망과는 다른 자포자기다. 그들은 이미 세상의 진보와 꿈따윈 사치처럼 생각하는 세대가 됐다. 슬픈 일이다. 사십이어서 슬픈 게 아니라, '나'는 지워지고 가족위주로만(가정적인 것이 아닌!) 사고하면서 세상을 사유하지 못하는 샐러리맨들이어서. 슬픈 내 동창들의 추억이여.

 

슬퍼도 다시 한 번 오지 않을, 사십이여. 사십, 그냥 이 쇼를 즐겨라(Just enjoy the show!). 인생은 미로 같고 사랑은 수수께끼 같으니까. 잘 얻어먹었으니, 녀석들에게 건네는 나의 선물, < The Sh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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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4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욜 열리는 수요 집회가 1000회를 맞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한 평화비도 세워졌고.

 

20년이다. 20년.    

1992년1월8일 수요일, 당시 일본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집회의 나이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 만20년이 된다.

 

그래, 20년, 1000회.

연 인원 5만 명 규모로 커지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사실 자랑스러운 기록은 아니다. 되레 서글프고 억울하다. 

20년, 1000회를 바꿔말하면,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생존해 계시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도 234명에서 63명으로 줄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눈치 보시느라 그런지, 사과나 배상 요구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었거나 말거나, 그런 피해 국민이 집회를 하거나 말거나. 대한민국 정부의 초지일관.

 

다만 위안이라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희망 승합차'를 마련했다는 것.

낡고 잔고장 많은 승합차를 새로 바꿨단다. 시민들이 푼돈을 모아 그리 했다.

실은 협의회에서 자동차회사들에 후원을 요청했다. 

올해 돈 엄청 긁어모았다는 현대차가 0순위였겠지. 

그런데 '회사 이미지와 맞지 않다'면서 후원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건 어떤 맥락인가!

보다 못한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서 한두푼씩 모아 할머니들의 승합차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국가나 대부분 기업은 '사회'와 동떨어져 따로국밥처럼 노는 잡놈들 같다.

 

수요집회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수요일마다 할머니들과 인민들이 집회를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더구나 이런 추운 겨울날에!

그냥 집회 말고 잔치나 축제 같은 거나 한다면 모를까.

집회가 없어지는 날은 바로,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 이뤄졌단 뜻 아니겠는가.  

그런데, 평화는 이토록 모질고 슬픈 과정을 거쳐야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63명의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그 과거는 씻은 듯이 없어지는 것인가. 개새끼들.

 

세상은 절망이 아닌 적이 없다만, 절망을 삶의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오늘 또한 허그데이니까, 마음으로라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꼬옥 안아주시압.

  

평화롭고 착한 멜로디를 지닌 모차르트의 '아다지오 E장조 K.261' 들으시면서, 

편안한 겨울밤. 굿럭,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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