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으로 간 사나이 - A Man Who Went to Ma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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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오랜만이네요, 아가씨. 꽤 오랜 세월이 흘렀죠?

 

콧물 찔찔 흘리던 시절이었던가, 빡빡머리 시절이었던가, 교과서를 통해 아가씨와 목동의 이야기를 읽고 가슴 설렜던 기억이 짠하네요. 그래요, 알퐁스 도데의 <별>을 통해 아가씨를 처음 만났었죠. 첫 만남, 참 감미롭고 아름다웠었어요. 그 이야기를 만난 이후, ‘별’이라는 말을 듣거나 볼라치면,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순진해 빠진 목동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니까요.


그래서 그 이야기, 오랫동안 저장했었어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답고 순수한 외사랑 이야기로 말이죠. 아가씨는 여전히 아름다우시죠? 아가씨를 지켜주던 그 ‘이름 없는 목동’이 스무 살이 되도록 봤던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근처 백리 안에서 가장 어여쁘다고 했었던 기억도 나요.

 

그 미모, 세월이 지나갔다고 어디 가진 않았겠죠? 저는 아마 아가씰 본다면, <개그콘서트>의 <사마귀유치원>의 쌍칼처럼 음흉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얘기하겠죠. 나이가 들어도, 이~뻐~


참, 그 순진했던 목동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세요? 혹시 프로방스 지방 뤼르봉 산에서 여전히 양을 치고 있나요? 아가씨, 그 목동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기억나세요? “헤아릴 수 없는 별들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곱게 잠들어 있노라고…” 그때, 살포시 잠든 아가씨의 모습을 목동은 이리 묘사했었더랬어요.  


이 애틋한 묘사가 얼마나 많은 소년들을 녹였었는지, 아가씬 모르죠? 목동이 얼마나 부러웠다고요. 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가씨와 데이트하는 꿈을 꾸질 않나, 그 순수함을 갈망하질 않나... 뤼르봉산에서 나도 양치는 목동이 되고 싶더라니까요. 아가씨 옆에 있는 양들도 털이 섹쉬~해~

 

흠흠, 어쨌든 목동의 독백이 압권이었죠. 아가씨가 졸음에 겨워 무거워진 머리를 목동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고, 목동은 그 잠든 얼굴을 빤히 보면서 꼬박 밤을 새웠었는데, 목동이 그랬어요. “…가슴이 설렜지만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맑은 밤하늘의 보호를 받아,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았습니다.…” (참, 그 목동, 지랄방정을 떨었죠. 오직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면서, 속으론 이~뻐~ 하고 감탄(?)했을지도.ㅋ)

 

 

<별>은 그렇게 그 어린 마음들의 둥지에 자리를 틀었었어요.

 

한 여자를 지키는 남자의 마음 같은 거랄까. 어린 마음엔 그런 줄로만 알았죠. 목동은 진심이었을 거예요. 맑은 밤하늘의 보호가 정말 있었다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단맛 쓴맛 세상의 간을 좀 보고, 다시 <별>을 만나 그 상황을 되짚어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목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한 시대를 알 순 없지만, 당시는 봉건적인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여러 정황묘사를 보았을 때 말이죠. 아가씬, 그런 신분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신분 차를 감안했을 때, 산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아가씨에게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외의 것을 할 수 있었겠어요? 감히 그랬다가 당장 목이 날아가요. 그 신분제가 얼마나 엄격했으면, 엄연히 있었을 목동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고, 프로방스 지방 ‘어떤 목동의 이야기’라고만 돼 있을까요.


어린 시절엔 무심하게 지나쳤는데,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봐요~ 아가씨는 버젓이 ‘스테파네트’란 이름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목동은 이름이 없을까요? 목동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의미 없는 행위가 아님은 아시죠? 아, 혹시 모르시나? 워낙 귀한 분이라 그런 것까지는, 못~해? 

 

이거 한 번 보실래요? 한국의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詩에서 이리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목동은 왜 이름이 없었을까? 전 아직도 그게 궁금해요.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죠? 신분차별이 제도화된 시대에, 목동을 굳이 ‘꽃’이 되게 할 필요는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생각, 없었어요? 

 

제가 삐뚤어진 아이라 그런 거겠지만, 목동의 ‘이름 없음’이 괜히 아팠어요. 개인의 정체성을 무시한 것 같고, 차별을 내면화한 행위 같아서.  


신분제는 자기 집단과 선천적으로 다르고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집단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이땅에서도 신분이 낮은 계급에겐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죠. 이름조차도 지을 수 없는 불가촉천민이 있었거든요. 목동이 그런 신분이었던 건가요? 양을 치는 목동이 그렇게 하찮았던 건가요?  

 

귀족가문의 교양 있는 영애였을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별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목동의 이름을 불러줬다면, 참 좋았을 뻔 했어요. 아가씨가 목동이라는 구체적 실존에 대한 존엄을 보여줬다면, <별>은 더욱 빛을 발했을 것 같은데.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지만, 아가씨만은 달랐다면, 목동의 마음이 더욱 잘 전달됐을 거라고요.ㅠ.ㅠ


그런데, 혹시 그것 생각해 보셨어요? 목동이 진짜 바랐던 것!

 

물론 아가씨가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나 신경은 없었겠지만, 전 목동이 사랑을 할 누군가가 필요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동의 순수함이 안타까운 건, 신분제라는 벽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에요. 순수가 순수 그 자체로 빛나기보다 사회적인 산물 같아서요.


아마도 그는, 아가씨를 뫼시면서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에 묶였을 지도 모르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스무 살 열혈 청년의 몸이 간직한 자연스러움을 표현하지 못한 거요. 물론 아가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고백을 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나잇대 남자의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표현되지 못한 것 같아요. 아가씬 어땠는지도 궁금하고요.

 

아, 말이 길었네요. 사실, 아가씨가 영화에도 짜짠, 나와서 반가웠었어요. 

 

<화성으로 간 사나이>.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 어깨에 기대, 밤하늘 별을 보고 코~자더니, 화성이야기로 돌아오셨더라고요. 서프라이즈~ 그런데, 보다보다 울화통 치밀어서 이렇게 닿지도 못할 편지를 써요. ㅠ.ㅠ

 

영화는,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아가씨의 가정환경이나 태어난 곳이 다르더군요. 귀한 아가씨에게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하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은 초라한 시골집을 고향으로 했고요. 스테파네트란 이름도 ‘소희’(김희선)라고 바꾸고 말이에요.

 

목동은 별반 바뀐 것 없이 환생한 것 같았습니다. 아, 중요한 변화라면 목동에게 ‘승재’(신하균)란 ‘이름’이 부여됐더군요. 사랑을 지키는 파수꾼 노릇을 자처하는 건 여전했지만 말입니다. 첫사랑을 평생 가슴 속에 간직하는 순수한 남자. 우와~ 목동의 이미지, 딱 그대로이더군요. 아가씨는 이미 이렇게 환생할 거라는 것, 다 알고 있었죠?

 

아가씨, 근데 그거 아세요? 호르몬에 대한 일부 연구결과. "‘사랑’의 유효기간은 2년뿐,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현상은 더 이상 화학반응의 작용을 멈춘다."

 

그리 따지자면, 목동은 그 오래 전부터 얼마나 사랑을 이어간 거죠?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가씨는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죠? 전생에 나라를 구하거나 곗돈을 타지 않는 이상,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쨌든 세월이 바뀌어도 동화로 엮어진 것은 비슷하더군요. 극적인 장치는 더 곳곳에 포진해 놓고 말이에요. 수몰 직전의 외딴 산골마을, 시골과 도시로 이분화된 심성의 갭, 엇갈리는 엇박자의 사랑... 특히 설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영상까지 감안한다면 말이죠. 책을 보며 상상만 했던 그런 장면이~ 우와, 이~뻐~ 아가씨도 완전 이~뻐~

 

아가씨도 세월따라 변신을 시도했는데, 제가 당시 10대의 심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까닭일까요? 세월이 흐르면 원래 그리 되는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닙니다, 아니고요. 아가씨(소희)나 목동(승재)의 이야기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채로 이어졌기 때문이에요.  

 

시골과 도시. 무슨 1960~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인 시대도 아닌 마당에, 그 둘을 떡하니 갈라놓고 심성을 그리 후지게 대비시켜 놓다니요. ‘농촌=순수, 도시=비정’ 이런 도식적인 방정식은 식상하고 진부한데다 너무 상투적이지 않아요? 그런 구도, 아 정말 무성의해 보여요. 

 

아울러, 아가씨(소희)의 소원대로 승재가 나루터를 지키고 화성으로 떠난다는 발상은 꼭  ‘관객모독’하는 느낌까지 받게 해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요? 목동 대신 우체부하면서 멀쩡하게 잘 지내던 양반이, 아무리 아가씨가 한때의 좋은 감정을 그대로 묻어달라고 했기로서니, 그걸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로서니. 아, 짜증~

 

이야기, 한여름 밤의 꿈같았습니다. 아가씨의 사랑, 승재의 사랑, 그 사랑 모두 매력없고 흡입력도 없습니다. 아가씨는 승재가 화성에서 영원히 아가씨를 바라보며 산다는 말을 곧이 받아들일 것도 없잖아요. 혼자 웃고 앓다가 예견된 결말처럼, 죽음으로 마무리하다니. 죽음이 무슨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사랑을 위한 죽음을 그렇게 희화화하는 건 억지스러웠어요.

 

아가씨나 목동의 변신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신분사회의 관습과 전형을 그대로 옮겨왔단 생각도 들더군요.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진 대신 유사신분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대입시켜 보자면, 서울로 이주한 ‘주인마님’을 향해 시골에 남은 ‘비복’이 처량한 신세한탄을 하는 것 같은? 그리고 그 유사신분제의 벽 앞에서 꼬꾸라진 나약한 영혼에겐 원래 의도했을 ‘순수’의 때깔도 별로 드러나질 않아요.  


이전과 다름없는 동화(童話)인데, 세상 간을 좀 봤다고, 예전처럼 그 내용에 동화(同化)되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아가씨나 목동은 그대로인데, 저만 달라진 것 같아요. <별>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아프면서도, 그 행간에 묻은 봉건적 신분제의 구조를 읽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해요.


<별>은 이제 제겐, 맥없는 별빛 소나타 같은 이야기가 됐습니다. 괜히 아가씨의 부아가 치밀 소리를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가씨도 마냥 온실 속의 화초로만 자라진 않았겠죠?

 

목동의 안부도 궁금하지만, 그 사람 여전히 신분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있진 않을까, 걱정도 돼요. 좋습니다. 털어놓죠. 제겐 이제, 과거의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없습니다. 목동의 순수도 시대착오적이고요.

 

어쩌다보니, 불만투성이 작별의 편지가 되었지만, 그만큼 과거 <별>을 사랑했었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봐주세요. 더 이상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마음에 담지 않기로 한 남자의 아쉬운 작별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이젠 고합니다.

 

굿바이, 스테파네트.

 

(P.S. 제가 패러디를 해서, 어른이여러분을 위한 쌍칼 아저씨판 <별>을 만들면 어떨까요? 허락해 주실래요? 제가 너무 음흉하고 발랑 까졌죠? ^^;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의 (신)하균이 형은 <브레인>과 완전 180도 다른 표정이에요. 놀라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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