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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11년 10월31일, 세계는, 인류는 또 하나의 기록을 새겼어요. 세계 인구, 70억 명을 넘어섰습니다. 60억 명에서 12년, 50억 명에 도달한지 24년 만입니다. 인구 증가는 점점 빨라집니다. 10억에서 20억까지는 100여 년이었지만, 20억에서 30억은 32년이 걸렸어요.
유엔인구기금(UNFPA)은 70억 인구를 언급하면서, 실제 인구는 5000만 명정도 적거나 많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의도된 잠정 수치이긴 한데, 급격한 인구증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취지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70억 명이라는 숫자, 쉬이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내 옆에 있었던 당신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70억 명 하나하나를 머리속에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70억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 70억 개의 각자의 진실이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그런 한편으로, 산다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단상을 부여합니다. 70억 명의 한 명으로 태어나는 것, 참으로 소중한 탄생이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대부분 현실은 가혹합니다.
최근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인 <천일의 약속>에서 지형(김래원)의 아버지는, 아들 지형과 알츠하이머 환자인 며느리 서연(수애)이 애를 낳는다는 얘기에, 대책없이 무모하다는 말을 던집니다. 대부분 현실이라고, 다를까요? 통계 수치를 따지자면, 그 말, 현실적으로도 유효합니다. 장 지글러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을 접하자면 말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알려줍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2005년 기준, 10세 미만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갑니다. 3분에 1명이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잃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립니다. 아프리카에선 전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고요.
장 지글러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다룬 세계의 모습입니다. 그건 '빈곤'이라는 이름의 재앙입니다. 유엔의 정의에 의하면, 빈곤이란 기회와 선택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빈곤,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것이며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박탈하는 상태임에도, 지구는 속수무책입니다.
70억 인구. 그 가운데 30억 명이 하루 2.5달러의 돈으로 생을 간신히 지탱한다고 합니다. 즉, 우리 돈으로 3000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기나긴 하루를 버텨야 하는 것이죠. 더 나가볼까요? 100명 중 20명이 영양실조, 1명은 아사직전이랍니다.
존엄한 존재로 태어났건만, 살아감은 그렇지 않은 현실입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 곡물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는 전세계적 식량과잉의 시대. 세계의 농업생산력은, 120억 명에게 하루 2400~2700kcal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의 굶주림과 죽음을 수치로 접해야 할까요? 그들의 빈곤은 게을러서? 빈곤층 사람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를 반복함으로써 더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로 몰아가고 있다? 어떤, 저 잘난 인간들은 그렇게 쉽게 말합니다. 자연도태설입니다. 전형적인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에 부자와 권력자들의 '가난한' 논리입니다.
허나 그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닙니다. 당신도 가슴 아파했던, 세계의 불공정함. 부의 편중과 가난의 대물림. 인구의 증가만큼, "굶주림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글러 역시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이 고민했던 세계의 불평등과 불공정함. 당신이 그래서 가고자했던 길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틈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당신이 선택했던 그 길. 그런 세계를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지구의 슬픔을 조금씩 달래주지 않나 싶기도 해요.
식량 자체는 풍부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습니다. 구조적 기아입니다.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결과라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글러가 아들 카림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도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세계가 돌아가고 작동하는 원리를 알려줌과 동시에, 카림, 너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세계를 사유하거라.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세계의 굶주림에 대한 고민과 사유, 이것이 당신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계를 사유하게 합니다. 풍족한 식량을 갖고 있음에도 절반이 굶주리는 세계의 구조와 현실에 대해 나는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회의하고 질문할 것.
《세계가 만일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에 나오지요. 100명 가운데 6명이 59%의 부를 가졌고, 그들은 모두 미국인입니다. 74명이 39%, 나머지 20명이 2%에 매달렸다는 통계적 현실. 또한 20%가 에너지의 80%를 사용합니다. 철저하게 파레토 법칙에 충실한 사회구조. 1%에 대한 99%의 저항은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99%의 저항이 세상의 구조에 금을 내기 위해 계속 돼야 할 이유입니다.
2011년 세계인구동향보고서에 의하면, 70억 인구 가운데 10~24세의 젊은층들은 세계적 경제위기, 교육기회의 박탈 등으로 '잃어버린 세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곧 미래를 잃어버릴 것이란 경고죠.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거짓 위로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놔둔다면 우리는 늘 잃어버린 세대를 반복적으로 만날 겁니다.
지글러가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이 가진 미덕은 그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불행은 결핍이나 부족이 아닌, 분배와 구조의 문제라는 것.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 얼마나 적확한 직설인가요. 불공정하고 잔혹한 세계질서에 더 이상 눈 감고 귀 막고 살지 말 것을 권하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계를 사유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래요. 나는 당신을 다시 생각합니다. 장 지글러가 주목했던 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당신의 고민이 맞닿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나는 그렇게 세계의 진실 혹은 속살을 마주하고, 나의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를 다시 돌아봅니다. 나는 그 착취구조에 협력하고 있진 않은가. 섬뜩합니다. 기존 질서가 유지돼서 피 흘리는 이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지금의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랬듯, 나 역시 다른 세계를 꿈꿉니다. 불공정하고 잔혹하며 착취가 일상화된 자본주의적 질서가 아닌, 좀 더 진일보한 사회체제 속에서 굶주림의 해결을 위해 사회질서가 가장 먼저 작동하는 사회. 쿠바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의 말을 약간 변용하자면, 단 한 사람이라도 굶주린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자지 않는 사회. 그런 마음의 세상이라면, 나는 산다는 것을 좀 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세상이 오리란 확신 따윈 없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살고 싶진 않네요.
그래요, 책을 읽으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잘 있나요?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커피 한 잔과 함께 당신이 참 보고 싶은 하루입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당신과 내가 꿈꾸던 세상을 그리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