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커피 잔 속에 위안이 있다(There's comfort in my coffee cup)."

- 빌리 조엘 -

 

살아 있어서, 그 노래, 그 목소리 듣게 해줘서 고마운 사람이 있다.

마이클 잭슨도, 휘트니 휴스턴도 박제된 지금, 이 봄밤. 이 목소리에 나는 위안과 평안을 얻는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내 마을엔, 내 커피하우스엔 이 노래가 울려퍼지면 좋겠다.

그 어느해 봄밤에.

 

2006년 도쿄돔 콘서트. "아리가또 도쿄"

 

땡스, 빌리 조엘.

당신도 늙었지만 살아있어줘서 감사합니다. 영어로 땡큐, 중국어 쉐쉐.

참 내일이네. 5월9일, 당신의 63세 생일, 완전 축하. 해피 버스 데이, 빌리 조엘. 

 

빌리가 노래했다.

"내 커피 잔 속에 위안이 있다. (There's comfort in my coffee cup)"

커피를 위안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런 그의 노래를 위안이라고 말하는 나.

 

빌리에게 커피는 그랬다.  

실패가 계속됐고, 생활고가 그의 생을 포박했다.

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 커피가 그를 붙들었다. 온기와 함께.

 

그의 손과 입을 통해 그의 안으로 들어간 커피는,

그의 마음을 데우는 동시에 신의 음율과 선율을 만들게 했다. 

 

'피아노 맨'은 그렇게 커피가 빌리의 몸을 빌어 낳은 작품이다. 

믿거나 말거나.  

 

빌리 조엘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나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커피 한 잔을 만들면서,

당신 하나만을 위해 연주하는 피아노맨이 되고 싶다.

 

커피 향, 참 좋다.

당신 향, 참 좋다.

 

5월9일, 봄밤 9시의 커피엔 그래서,

'피아노 맨'이라는 커피가 당신을 기다린다. 온기와 함께. 위안을 담아.

 

피아노 맨 한 잔, 하실래요?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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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온 편지
김용규 지음 / 그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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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것은 답장입니다. 이제는 케케묵은 골동품 같은 뉘앙스가 돼 버린 편지. 그 편지를 받아들고 찡했던 제 마음의 울림을 담은 답신이죠. 물론 앞서, 제 마음을 흔들었던 《숲에게 길을 묻다》에서 이어진 작은 인연 덕분이기도 하겠죠.


이 편지를 받은 저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숲이 뿜은 피톤치드를 그의 분신인 종이를 통해 받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선생님이 지닌 행운을 나눈 까닭이기도 할 겁니다. ‘제 스스로 찾은 기쁨과 즐거움의 삶의 시간을 재조립시키는 마법’을 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고요.

 

삶의 변곡점. 저도 제게 불쑥 다가왔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내 선택을 위해 모든 것을 뒤집는다는 것. 그 순간은 각자에게 다른 형태이자 내용이겠지만, 그때의 느낌, 여전히 잊지 못합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탈출을 감행했던 순간. 노예의 편안과 자본의 (거짓)평안을 거부하고 나섰던 순간. 그 순간을 다시 오롯이 기억해낸 것도 선생님의 책 덕분입니다.


여우숲을 떠올렸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뵀을 때 상상했던 그 숲.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접했던 그 숲. 숲 학교가 들어서고 만났던 그 숲. 한때, 서울, CEO... 선생님의 몸과 마음에 묻은 그 기억이 낙엽처럼 썩어서 새로운 삶의 흙이 됐고, 그 흙이 뿌려진 숲은 참 좋았습니다. 그제서 깨달았습니다. 흙 묻었다며 더럽다고 야단치던 도시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저는 그래서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백오산방. 선생님 스스로 짓고, 선생님의 삶을 고스란히 품은 그 집. 저는 아직 도시의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제 살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그리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것이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으면 더 행복하다는 것을.

 

당장은 아니지만, 성급하게도 저는 이미 제 살 집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살짝 알려드리자면, 수운잡방입니다. 조선 중종 때 안동 출신 김유가 지은 전통 요리서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특별한 요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제 사는 곳에서 그렇게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만 커피를 비롯해 요리를 대접하고 싶거든요. 


제 소박한 바람은 그것입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조금 더 선연하게 그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게 다 선생님을 비롯한 바람잡이들 때문(!)입니다. 백오산방을 비롯, 몇몇 분들이 살 집을 스스로 짓고 그 안에서 스스로 노래하는 풍경을 자꾸 접해서 그렇습니다. 그 분들, 그렇게 살 집을 스스로 짓고, 농사도 짓고, 숲과 자연에 기대 온전한 자신만의 삶을 모색하고 실험하십니다. 저는 그것에 마구 끌리는 학생인 셈이죠.


물론 저는 바지런한 농사꾼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천성이 한량이라, 온 몸과 마음을 쏟아야 할 농사꾼의 자질에 턱도 없이 모자라서죠. 다만 텃밭을 어떻게든 가꿀 생각입니다. 커피도 퉁퉁 볶을 생각이고요. 그리고 선생님의 기조를 빌리려고요. 내가 만든 농작물과 볶은 커피를 돈으로만 사려는 사람에게 팔지 않을 심산입니다. '따라쟁이'라고 호통 치진 마세요. 하하. 그냥 선생님 생각에 동조하는 한 사람이라고 여겨주세요. 


더구나 그건 제가 결국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였다고요. 커피 얘깁니다.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면서,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다녀오면서, 저는 그만 ‘형님’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을 중요시 여겼던 제게, 산지를 직접 다녀온 경험은 또 다른 축복이자, 배움이었습니다. 커피열매 한 톨에 담긴 자연과 농부들의 노고, 하얗게 피는 커피 꽃과 빨갛게 혹은 노랗게 익는 커피 열매의 향기에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커피를 팔 수 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물론 충분하지만, 제 수운잡방엔 더 까탈로 대하고 싶었습니다.


쉽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일회성 결심이 아닌 삶을 송두리째 바꿀 때부터 스멀스멀 스며든 사유입니다. 불가능할 거라고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덕분입니다. 선생님 말씀, 기억합니다. “작은 확신을 실현하는 것조차 온 생애가 필요하다.” 더불어 이것도. “하찮은 소망의 실현도 만만치 않다.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억압을 설득하고 깨 부셔야만 얻게 되는 전리품인 탓이다.”


아무렴요. 그래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은 언제나 힘들고 쉬이 오지 않는 법이잖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겨울나기’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겨울이 온 것을 알지 못하기에 오는 우리의 불행, 겨울엔 간결해지며 버티고 견뎌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금의 이상야릇하게 뜨거운 봄도 겨울을 견뎠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그리하여 선생님이 말씀하신 성장의 방식, 아니 방식이라기보다 철학에 저도 좀 더 근접조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그만큼 투철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좀 더 크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단단하게 다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비료나 농약을 주어 단기적 성과를 얻는 방식이 아닌 이 땅을 써야 할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아마 농사꾼이자 숲학교 교장인 선생님도 그렇지만, 커피를 만드는 저도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에서 말씀하신 것 기억하실 거예요.


“상대적으로 모양은 조금 못났어도 자연의 수많은 은혜로 빚어지는 농산물의 건강한 맛을 인정할 줄 아는 소비자, 여느 공산품처럼 모든 농작물도 최종 가격만을 통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아닌, 땅과 햇빛과 바람과 물과 다른 무수한 생명들과의 관계가 빚어내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모든 것의 수고로움에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소비자를 만나야 합니다.”(p.68)


사실 저는 이들 소비자 앞에 굳이 ‘착한’이라는 수사를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간’보다는 ‘사람’일 테고, 그저 우리들의 동지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얼마 전 들은 얘기인데, ‘농부로부터’라는 유기농 가게가 있습니다. 그곳엔 ‘생긴 대로 좋아’라는 코너가 있는 모양입니다. 외모지상주의를 타파하는 이 코너, 흠집이 난 과일을 모아서 싸게 파는 자리라고 합니다.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네요.

 

“겉모양새로 가치를 결정하는 시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에는 우리가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 한 겹 더 늘어납니다.”


한량이 바라는 포인트가 저기 있습니다.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 한 겹 더 늘어난다는 것. 나중에, 제가 꼭 숲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있는 곳이 어디든, 제가 견지하고 싶은 것을 담은 이 편지를 한 번씩 들춰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하신 이 말씀, 기억하실 겁니다.  “숲 생활 3년 만에 나는 풀도 나무도 강아지도 모두 생명인 것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놈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저도 언젠가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남의 인생을 살지 않게, 자기다움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조금씩 만들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편이라는 겨울이 아직 남아 있지만, 저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견디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을 얻었고, 이런 편지에 감흥 할 줄 아는 사람도 됐습니다. 아주 가끔은 스스로 버티고 견뎌준 것이 대견해서 토닥토닥해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대표하기보다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을 꾸준히 지치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 편지, 잘 간직하겠습니다.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여우숲, 참 좋았습니다. 산과 바다, 바람소리는 잘 있는지요? 참 이 책을 읽고 궁금했는데요. 절룩거리던 자자. 눈에 밟히더군요. 자자의 숨결이 깃든 그 여우숲, 저는 참 좋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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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이웃, 함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서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100%의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하여

'앞으로 4년'을 상정하며, 세상을 달뜨게 만들었던 행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결과야 어쨌든 일상은 다시 바퀴를 굴리고, 삶은 환호 혹은 환멸을 품은 채 뚜벅뚜벅 마을살이를 하게 되겠지요.

선거가 끝나고 난 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를 떠올렸습니다. 그냥 느닷없이. 알다시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인데요. 열여덟 소년과 열여섯 소녀. 그다지 잘 생긴 소년도 아닌, 그리 예쁜 소녀도 아닌, 어디에나 있을 법한 외롭고 평범한 소녀와 소년. 둘은 이 세상 어딘가에 100퍼센트 자신과 똑같은 소녀와 소년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죠.  

소년과 소녀. 길모퉁이에서 딱 마주치고, 100퍼센트의 여자아이,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임을 확인합니다. 놀라고 꿈만 같은 두 사람, 공원 벤치에 앉아 질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죠. 두 사람, 이미 고독하지도 않고요. 아, 그렇지 않나요? 100퍼센트의 상대를 찾고 100퍼센트의 상대가 자신을 찾아준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백만 명의 사람들, 백만 가지의 이유로 우울하지만, 백만 가지의 이유로 그 우울을 견디고 산다고.

누군가는 지독한 환멸을 견디는 날이 계속될지 모르지만, 또 압니까.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의 사람을 만나게 될는지. 그것이 어쩌면 마을살이 아닐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당신, 느닷없이 다가온 환멸, 어떻게 견디시나요? 14일, 우리 종로 서촌에 가서 '품애'도 만나고 벚꽃 잔치도 참여하면서 함께 노닐어보는 건 어때요?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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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이웃, 함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서울

당신과 함께하는 마을봄밤

19년 만에 내렸다는 4월의 봄,눈. 눈과 마음에 담으셨어요? 봄은 그렇게 변화무쌍하고 바람도 불어줘야 제멋 아니겠어요?^^; 의심할 여지없이, 봄이 내렸습니다. 좀 더뎌도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마세요. 당신 설마, 이 봄에 컴퓨터 앞에 코 박고서 '닥치고 일'만 하는 건 아니겠죠? 장석남 시인은 "봄밤엔 바람 나네"라고 노래했는데, 무릇 봄밤을 즐겨야 마을이라는 꽃도 활짝 피리란 사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제게 봄은 김수영 시인의 '봄밤'의 읊조림과 함께 오는데요. 한 번 들어보실래요?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일찍이 괴테 선생 가라사대.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

당신도 그렇게 봄을 만끽하고 있겠죠? 하얀 속살을 드러내 목련의 야릇함과 물오른 초록이 흥건한 버드나무의 살랑거림,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벚꽃과 분홍빛의 알싸한 유혹적 자태를 드러낸 철쭉의 향연. 그렇게 우리, 마을에서 함께 봄을 즐겨보아요. 마을공동체 BI와 슬로건 공모, 잊지 마시고요.  

그리고 빨간동그라미 쳐놓으셨죠? 4월7일, 프로야구가 레알 봄을 엽니다. 마을 평상에서 함께 프로야구 보아요. 응원하는 팀은 각자 달라도! 아참, 같은 날 마을미디어넷에 참여하고 있는 김수경 양이 결혼(식)을 한대요. 김수경 양을 아는 마을 주민들은 꼭 축하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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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메이데이.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상한 수사는 박정희의 사악한 계략(!)이었고, 어쨌거나 5월1일은 노동을 생각한다. '노동'을 저 멀리 어디 외계인들이나 하는 짓거리나 수사로 생각하는 족속들에겐 참 불편한 날이다. 노동이라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돈거니 같은 족속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어머니, 누나와 함께 '가정'을 이뤄 오손도손 알콩달콩 살고 싶은 바람을 가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소년은 열여섯 생일을 앞두고 있다. 이 소년의 꿈,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Boys, Be Ambitious'와 같은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꿈, 경쟁에서 싸워 이기고 적자생존에서 살아남는 법만 가르치는데 혈안이 된 우리 사회의 익숙한 풍경에선 낯설다.

 

기억하는가, 열여섯.

어떤 꿈이었는지 몰라도, 한창 꿈을 꿨던 시기였다고 생각되는 나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대학입학이 '신화창조'니 하는 말로 오염돼 있긴 해도.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이 열여섯 소년, 리엄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가난은 그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다. 엄마는 열여섯번째 생일에 교도소에서 석방될 예정이다. 돈을 모으기 위한 열여섯의 '고군분투기'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가혹하다. 그리고 지독하게 현실이다.

 

 

<스위트 식스틴>.

'달콤한 열여섯살'이라는 제목, 예상대로 반어법이다. 켄 로치 감독답다. 이 명민한 좌파는 노동의 현실, 부패한 자본주의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영화엔 지독한 현실에 대한 그의 분노가 묻어난다. 영화로 세상과 싸우는 그의 열혈이 언제나 나는 반갑다.

 

전작인 <빵과 장미> 통해

그는 '세계화'에 짓눌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다뤘다. <스위트 식스틴>은 기본 뼈대는 갖고 간다. 개인과 가정을 통해, 그리고 이번엔 열여섯을 통해 자본주의를 다시 말한다. 이 열여섯이 꿈꾸는 평범한 가정생활. 그것이 자본주의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경을 보자.

글래스고 변두리의 그리녹. 한때 선박 제조로 유명했으나 쇠퇴한 도시다. 후기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소외지대. 주민들은 도리 없이 도시의 운명을 따른다. 하층 노동계급. 즉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계급인'으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서 열여섯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빤하다.

 

마약!

학교에서 퇴학당한 리암이 평범한 가정생활을 위해, 쇠락한 도시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엇. 언급한 대로 그 이유, 가상하다. 감옥에 있는 엄마와 미혼모인 누나, 조카와 함께 사는 '꿈'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이 순탄할리는 없다. 어른들의 세계가 열여섯에게 호락호락할 턱이 있나. 리암은 마약 때문에 수시로 곤경에 휘말리고 사태 해결은 미적지근하다. 좌충우돌하지만 답은 없다. 막막하다. 

 

 

세상은 한없이 가혹하다. 

이런 말, 너무 무성의해 보이나 이만큼 진실을 드러내는 말도 없다. 리암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평범한 가정 하나 꾸려보겠다는데, 세상은 하층계급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않다. '해고가 곧 살인'인 지금의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다. 노동은 언제든 대체가능한 것으로 치부되고, 개별성은 무시당한다. 차이가 있다면, 비극은 십대의 소년에게도 혓바닥을 불쑥 내밀고 있다는 것 정도?

 

물론 켄 로치 아저씨가 마냥 암울하진 않다.

온통 잿빛이지만, 십대 고유의 생기발랄과 에너지마저 집어삼키진 못한다. 이 덕분에 불편한 연민의 시선을 거둘 수 있다. 켄 로치의 시선이 그래서 좋다. 동정심을 과격하게 드러내지 아니한다.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들, 그냥 세상에 아우성을 내지른다. 발걸음도 경쾌하다. 나쁘지 않다.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세상을 맞춘다. 교조적인 교훈이나 훈화 따위의 흔적? 그렇다. 없다. 그런 건 켄 로치의 전공이 아니다.

 

쨍하고 해뜰 날, 온다.

리암은 우여곡절 끝에 집을 장만한다. 엄마는 출감을 하고 파티를 연다. 이젠 뭔가 되는가 싶다.  그러나 다음날, 엄마는 낭비만 일삼고 철 없는 애인의 집으로 훌쩍 떠난다. 가족이 함께 사는 꿈은 신기루일 뿐이다. 소박하게 그 꿈만 이루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리암이건만, 삶은 다시 가혹함을 강요한다. 제길할.  

 

산산조각 난 꿈.

아, 어쩌란 말이냐. 리암은 세상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열여섯에게 이리 가혹해도 되는가, 세상아!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처럼 견고하다. 쫓기는 몸으로 전락하는 달콤해야 할 열여섯. 그 아름다운 시절의 생일, 어둠으로 채색될 뿐이다. 그게 과한 욕심이었나. 조금만 제대로 된, 시궁창보다 약간 나은 삶을 원했을 뿐인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사회구조는 견고하다. '인생 역전'은 자본주의의 혓바닥 놀림이다. 언제나처럼 악순환은 하층민의 몫이다. 노동만으로 삶 하나를 부지하는 것도 사치란 말인가. 富가 그렇하듯 범죄나 가난 역시 이젠 세습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방점은 '충분히'다.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화폐의 노림수는 명백하다. 너만 노력하면 돼. 사회는 손 놓고 있다. 미친 거다. 켄 로치 아저씨.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마약문제로 인한 가정파탄 등의 문제는 이 사회가 병들어 있고 붕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공적인 이슈는 사생활을 갉아먹는다. 세상 어느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고립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다.”

 

노동을 혼자이게 만들지 마라.

열여섯을 영원히 밖으로 내몬 사회는 희망이 없다. 쌍용차, 재능교육, 콜트콜텍, 코오롱, 유성기업 등을 내모는 이 사회는 어떤가. 노동을 한 없이 불온하고 불쌍한 것으로만 내모는 이 사회는 제대로인가. 켄 로치 아저씨는 외친다.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들어라.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닌,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로 전환하라.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은 이미 하나의 사회문제가 아닌 고착화된 사회구조가 됐다. 로또만이 희망인 사회?  

 

열여섯 아니 마흔은 여전히 꿈꾼다.

노동만으로 충분히 먹고사는 삶.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살았으면 됐지, 이놈의 세상은 계속 다그치기만 한다. 정권교체로 끝날 것이 아니다. 여전히 강고한 시스템을 등에 업은 놈들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켄 로치 아저씨, 말했다. 착취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 시스템을, 그래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노동이 인정 받는 길이리라. 켄 로치가 그러하듯, 나도 당신의 노동을 감탄한다.

 

우리는 그렇게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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