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메이데이.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상한 수사는 박정희의 사악한 계략(!)이었고, 어쨌거나 5월1일은 노동을 생각한다. '노동'을 저 멀리 어디 외계인들이나 하는 짓거리나 수사로 생각하는 족속들에겐 참 불편한 날이다. 노동이라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돈거니 같은 족속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어머니, 누나와 함께 '가정'을 이뤄 오손도손 알콩달콩 살고 싶은 바람을 가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소년은 열여섯 생일을 앞두고 있다. 이 소년의 꿈,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Boys, Be Ambitious'와 같은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꿈, 경쟁에서 싸워 이기고 적자생존에서 살아남는 법만 가르치는데 혈안이 된 우리 사회의 익숙한 풍경에선 낯설다.
기억하는가, 열여섯.
어떤 꿈이었는지 몰라도, 한창 꿈을 꿨던 시기였다고 생각되는 나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대학입학이 '신화창조'니 하는 말로 오염돼 있긴 해도.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이 열여섯 소년, 리엄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가난은 그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다. 엄마는 열여섯번째 생일에 교도소에서 석방될 예정이다. 돈을 모으기 위한 열여섯의 '고군분투기'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가혹하다. 그리고 지독하게 현실이다.

<스위트 식스틴>.
'달콤한 열여섯살'이라는 제목, 예상대로 반어법이다. 켄 로치 감독답다. 이 명민한 좌파는 노동의 현실, 부패한 자본주의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영화엔 지독한 현실에 대한 그의 분노가 묻어난다. 영화로 세상과 싸우는 그의 열혈이 언제나 나는 반갑다.
전작인 <빵과 장미> 통해
그는 '세계화'에 짓눌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다뤘다. <스위트 식스틴>은 기본 뼈대는 갖고 간다. 개인과 가정을 통해, 그리고 이번엔 열여섯을 통해 자본주의를 다시 말한다. 이 열여섯이 꿈꾸는 평범한 가정생활. 그것이 자본주의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경을 보자.
글래스고 변두리의 그리녹. 한때 선박 제조로 유명했으나 쇠퇴한 도시다. 후기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소외지대. 주민들은 도리 없이 도시의 운명을 따른다. 하층 노동계급. 즉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계급인'으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서 열여섯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빤하다.
마약!
학교에서 퇴학당한 리암이 평범한 가정생활을 위해, 쇠락한 도시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엇. 언급한 대로 그 이유, 가상하다. 감옥에 있는 엄마와 미혼모인 누나, 조카와 함께 사는 '꿈'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이 순탄할리는 없다. 어른들의 세계가 열여섯에게 호락호락할 턱이 있나. 리암은 마약 때문에 수시로 곤경에 휘말리고 사태 해결은 미적지근하다. 좌충우돌하지만 답은 없다. 막막하다.

세상은 한없이 가혹하다.
이런 말, 너무 무성의해 보이나 이만큼 진실을 드러내는 말도 없다. 리암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평범한 가정 하나 꾸려보겠다는데, 세상은 하층계급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않다. '해고가 곧 살인'인 지금의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다. 노동은 언제든 대체가능한 것으로 치부되고, 개별성은 무시당한다. 차이가 있다면, 비극은 십대의 소년에게도 혓바닥을 불쑥 내밀고 있다는 것 정도?
물론 켄 로치 아저씨가 마냥 암울하진 않다.
온통 잿빛이지만, 십대 고유의 생기발랄과 에너지마저 집어삼키진 못한다. 이 덕분에 불편한 연민의 시선을 거둘 수 있다. 켄 로치의 시선이 그래서 좋다. 동정심을 과격하게 드러내지 아니한다.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들, 그냥 세상에 아우성을 내지른다. 발걸음도 경쾌하다. 나쁘지 않다.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세상을 맞춘다. 교조적인 교훈이나 훈화 따위의 흔적? 그렇다. 없다. 그런 건 켄 로치의 전공이 아니다.
쨍하고 해뜰 날, 온다.
리암은 우여곡절 끝에 집을 장만한다. 엄마는 출감을 하고 파티를 연다. 이젠 뭔가 되는가 싶다. 그러나 다음날, 엄마는 낭비만 일삼고 철 없는 애인의 집으로 훌쩍 떠난다. 가족이 함께 사는 꿈은 신기루일 뿐이다. 소박하게 그 꿈만 이루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리암이건만, 삶은 다시 가혹함을 강요한다. 제길할.
산산조각 난 꿈.
아, 어쩌란 말이냐. 리암은 세상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열여섯에게 이리 가혹해도 되는가, 세상아!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처럼 견고하다. 쫓기는 몸으로 전락하는 달콤해야 할 열여섯. 그 아름다운 시절의 생일, 어둠으로 채색될 뿐이다. 그게 과한 욕심이었나. 조금만 제대로 된, 시궁창보다 약간 나은 삶을 원했을 뿐인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사회구조는 견고하다. '인생 역전'은 자본주의의 혓바닥 놀림이다. 언제나처럼 악순환은 하층민의 몫이다. 노동만으로 삶 하나를 부지하는 것도 사치란 말인가. 富가 그렇하듯 범죄나 가난 역시 이젠 세습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방점은 '충분히'다.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화폐의 노림수는 명백하다. 너만 노력하면 돼. 사회는 손 놓고 있다. 미친 거다. 켄 로치 아저씨.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마약문제로 인한 가정파탄 등의 문제는 이 사회가 병들어 있고 붕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공적인 이슈는 사생활을 갉아먹는다. 세상 어느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고립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다.”
노동을 혼자이게 만들지 마라.
열여섯을 영원히 밖으로 내몬 사회는 희망이 없다. 쌍용차, 재능교육, 콜트콜텍, 코오롱, 유성기업 등을 내모는 이 사회는 어떤가. 노동을 한 없이 불온하고 불쌍한 것으로만 내모는 이 사회는 제대로인가. 켄 로치 아저씨는 외친다.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들어라.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닌,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로 전환하라.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은 이미 하나의 사회문제가 아닌 고착화된 사회구조가 됐다. 로또만이 희망인 사회?
열여섯 아니 마흔은 여전히 꿈꾼다.
노동만으로 충분히 먹고사는 삶.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살았으면 됐지, 이놈의 세상은 계속 다그치기만 한다. 정권교체로 끝날 것이 아니다. 여전히 강고한 시스템을 등에 업은 놈들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켄 로치 아저씨, 말했다. 착취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 시스템을, 그래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노동이 인정 받는 길이리라. 켄 로치가 그러하듯, 나도 당신의 노동을 감탄한다.
우리는 그렇게 노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