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제리. 

내가 아는 제리는 셋이었다.  

우선, 톰과 제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제리가 아닐까 싶은데. 고양이 톰을 늘 골탕 먹이는 영리한 쥐 제리. '고양이 앞의 쥐'라는 인류의 편견을 부순, 재능 있는 쥐. 쥐 한 마리가, 세상의 권력도 바뀔 수 있다? 

두 번째, 제리. 제리 제리 고고. (이)승환 형의 노래다. 이 노래, 무척 좋아했었다. 지금도 좋아한다. 특히, 이 구절. "제리 제리 고고/ 락앤롤 고고/ 불타는 피아노/ 너만이 할 수 있어." 멋쟁이 제리를 향한 연서?   

너의 이름은 멋쟁이 제리
너의 피아노는 최고였지

사람들은 말했었지
엘비스도 문제없다고

너의 무대는 환상의 축제
사람들은 모두 열광했지

흥겨운 Rock `n Roll 리듬
정신없이 춤을 추었지

Jerry Jerry Go Go
Rock `n Roll Go Go

불타는 피아노
너만이 할 수 있어...  

셋째는, 제리 로이스터.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다. 8888577, 8년 연속 가을야구에 초대받지 못한 만년 꼴찌, 그래서 '꼴데'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던 팀을 부임 이후 3년 연속 가을야구로 진출시킨 부산 명예시민. 올해도 4위로 턱걸이했지만, 팀 창단 이래 처음이다.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역시 제리는 능력자의 이름?  

그리고, 최근 제리 하나가 더 붙었다.  

김혜나 작가의 [제리] . 어떤 제리일까. 궁금도 했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 작품이라는 레떼르보다 이 책을 사게끔 불씨를 당긴 것은,  

'요가'의 유혹이었다.

 

김혜나 작가와의 만남. 그녀는 요가 강사였다. 작가와 요가 강사. 독자와의 만남이 요가를 통해 이뤄진다는 이야기. 솔깃했다.  

왜 솔깃했냐고?  

여름의 초입에 만나뵀던 [문숙의 자연 치유]의 저자 문숙 선생님의 필살기(?) 중의 하나가 요가였다. 선생님을 통해 듣게 된 요가의 힘.  이전까지 요가는 그저 운동의 하나이면서, 명상이 가미된 뭐 그런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숙 선생님을 통해 듣게 된 요가는 달랐다.  

여기에 덧붙여, 일종의 카운터 블로. 고미숙 선생님과 함께 떠난 열하여행에서 알게 됐다. 고미숙 선생님이 요가를 하고 계신다는 것. 아니, 두 번의 요가.  

어찌 가만 있을쏘냐. 요가!  

제리를 만나러 가는 시간.  둑흔둑흔 쿵쿵.

 

요가는 뭐랄까, 새로운 신천지였다. 어떤 관념이 실체와 맞닥뜨리며 만나는 그런 놀라움 혹은 매력.  

김혜나의 [제리]는 어쩌면, 요가가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닐까 싶었다.

소설 속 제리는 소설 속 '나'에게 그랬다. "그저 하룻밤만의 쾌감을 안겨 준 채 떠나기로 예정된 아이"였지만, 나는 제리를 어쩔 수 없이 찾는다.  그 짧은 체험이 나는 요가가 김혜나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했다. 불쑥 나에게 다가온 제리가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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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 Salvador Allend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요즘 '칠레', 하면 무사귀환부터 바라게 된다.
알다시피,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33인의 광부 때문이다. 8월5일에 갇혔으니 한 달도 넘었다. 구출작업도 늦어졌다. 지난달 30일부터 시작됐는데, 3~4개월이 걸린단다. 다행이랄지, 8.8cm의 초큼한 구멍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있다. 그들이 부디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8.8cm의 구멍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엉뚱하고 미안한 호기심도 든다.-.-;; 

아울러, 그보다 더 험한(혹은 악랄한) 갱도에 빠진 우리를 생각한다.
칠레의 33인 광부는 구조된다는 기대라도 있지만, 현재의 내 심정은, 이땅의 갱도에선 아니다. 도리도리. 우리가 갇힌 갱도에는 8.8cm의 지름만큼도 안 되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하긴, 그거라도 어딘가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꽉꽉 막힌 화폐갱도에 갇혀 있다는 인식도 못하고 있으니까. 심약한 나는 궁시렁 대면서도 그 갱도에서 꾸역꾸역 지탱하고 있고. ㅠ.ㅠ

어쨌든 칠레를 와인으로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대한민국 자유무역협정(FTA) 최초 체결국인 칠레. 덕분에 싼값의 칠레 와인은 한국의 마트를, 한국의 식탁을 장악했다.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하지만, 칠레는 와인으로만, 길이로만 떠올리는 건, 뭔가 부족하다. 한국의 지난 현대사와도 겹쳐지는 어떤 핏자국 때문이다. 인민들의 피, 말이다. 우리에겐 대표적으로 80년 광주민주항쟁의 피가 있었듯이. 




2010년 9월11일.
대한민국 국민인 내(으응? 증말? 대한민국에서 인정한대?)가 칠레를 떠올리는 건, 37년 전 그날 때문이다. 혁명적 사건이 좌절되고 말았던 그날.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이 총칼에 의해 피눈물 흘리고 말았던 그날. 이 한 맺힌 혈서적 유서를 보자.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내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1973년 9월11일 살바도르 아옌데
 

 

최근 칠레에선 아옌데 정권 탄생 4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970년,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일이었다.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뿔테안경을 낀 샌님적 외모를 지닌 살바도르 아옌데 씨는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남아메리카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의 실현이었다. 덩실덩실~


워워, 이 포스를 느껴보라. 아옌데와 카스트로의 만남!

사회주의 정권은 33인의 광부가 갇힌 탄광과도 관련을 맺는다.
칠레의 노동운동은 광산촌 광부들에 의해 출발했다. 이들의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1917년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이 주도해 칠레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창당됐다. 이는 아옌데까지 명맥을 잇게 된다. 칠레는 와인이 아닌 구리가 왕이다. 세계에서 구리 생산이 가장 많다. 광업은 칠레에서 가장 큰 산업이다. 파블로 네루다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쨌든, 아옌데는 사회주의 경제개혁을 시행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인)이 선점하고 있던 구리광산을 전면 국유화했다. 구리광산의 수익은 사회적 자산으로 배당됐다. 은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지 및 농업개혁이 실시됐고, 어린이에 대한 무료 우유배급 등도 시행됐다. 사회주의는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고민했고, 당연히 있는 자가 아닌 없는 자를 위한 정책에 적극 앞장섰다.   

문제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열폭(열등감 폭발)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의 항해는 쉽지 않았다. 물가는 상상도 못할만큼 뛰었고, 생필품은 동이 났다. 1972~1973년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였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주의 경제개혁의 실패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농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칠레경제의 핵인 구리의 국제가격을 떨어트리고, 아우구스트 피노체트를 앞장 세워 군부 쿠데타라는 비열한 수를 뒀다. 1970년 9월11일, 미국의 하수인 피노체트는 산티아고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명박, 아니 겁박했다. 투항하라고.

하지만, 아옌데는 진짜 '리더'였다.   
속된 말로, 과장하자면, '식빵, 쪽 팔리느니 확 산화할란다!'. 그는 투항하지도 않았다. 망명을 택하지도 않았다. 그가 택한 것은 죽음.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총으로 그는 스스로 쾅!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모든 것이 압축된 그 말. 그는 칠레 속으로, 인민 속으로, 노동자 속으로 온전하게 스며들었다.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 땅에서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와 살짝 겹치기도 한다. 

그 이후의 참혹함도 아주 살짝 겹친다.
범죄자 피노체트가 1990년까지 17년 동안 독재적 대통령질을 해대는 동안, 3000여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다. 역시 범죄자 출신의 통치자가 대통령질을 하는 대한민국, 선량한 시민들은 범죄자로 내몰리고, 힘과 돈 듬뿍 가진 범죄자들은 총리나 장관(후보)으로 임명되며, 똥돼지는 왜 그렇게도 꿀꿀대는지. 토 나와!



올해 초,  아주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 <칠레 전투:비무장 민중의 투쟁> 상영 얘기다. 지난 1998년 제3회 인권영화제를 통해 비로소 정식 소개된 이 영화는, 3부작으로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개혁과 최후, 노동자들의 투쟁 등을 다루고 있다. 지난 1월에 인권운동사랑방이 함께 보자고 했는데, 아 시간이 맞질 않아 좌절.

지난 2005년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제6회 전주국제영화제. <칠레전투>의 감독, 파트리시오 구스만이 역시나 연출한 <살바도르 아옌데>를 보지 못했다. 구스만 감독은 이렇게 말했단다. "바로 그 시기에 살바도르 아옌데가 더 좋은, 더 자유로운 유토피아를 나의 조국에 실현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인생을 결정지은 인물이고,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뭣보다, 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아옌데.
또 다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자식들 저녁상을 준비하는 노인의 입을 통해 "그것은 정말 위대한 유토피아를 위한 꿈이었다." 인민의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저런 말은, 아마 직접 듣는다면 먹먹~할 거다. 



아옌데의 꿈은 아직 살아있으라.
칠레 인민의 피 같은 칠레 와인을 마신, 33인 광부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대한민국의 한 찌질한 청년이 바라는 바다. 사회주의정권 탄생 40주년 기념식에서 
아옌데 대통령의 딸인 이자벨 아옌데 상원의원 왈. "아버지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렇게, 나는 믿고 싶다. 

아울러, <칠레전투>의 2부 끝장면, 이런 내레이션(자막)이 나온다. "아옌데는 죽었지만 칠레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글 머리에서 이 땅의 흉악한 갱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기대? 희망? 그 따윈 없다고 도리질을 쳤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진 감출 수가 없구료.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지름 8.8cm도 되지 않을 구멍이라도.   

다른 9.11 이야기

덧붙여, 대개의 사람들 뇌리에 박힌 9월11일의 사건은, 그렇지, 2001년 9월11일. '9.11'이라는 이름의 아마도, 21세기 최초의 전인류적 트라우마. 어느덧 9주기가 됐다. 명복을 빈다. 

아울러, 1906년의 9월11일. 올해로 104주년이 된 셈인데, 무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운동(사티아그라하)'를 본격 펼친 날이다.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며 평화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오늘 2010년의 9월11일. 예스24의 파워문화블로그 간담회에 갔다. 뭐, 오로지 떡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간 속물적 인간인 나는, 늘 그러하듯 존재감 없이 떡밥만 먹고 돌아오긴 했는데, 한 분이 던진 한 마디가 영 불편해서 오늘 글을 이렇게 길게 늘여놨다. 

역시나 졸렬하고 편협한 포스팅인 셈인데, (내 승질이 못돼서 그렇다!) 물론 그 분의 생각과 다를 뿐, 그 분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비판은 해야겠다. 오해는 마시라. 그 분이 나쁘다는 뜻도 아니요, 그 분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한지는 모른 채 하는 얘기다.

자기 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문화(를 다루는) 블로그는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듣기 나름일텐데, 나는 그 뉘앙스가 더 정치적으로 느껴졌다. 정녕,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에 숨은 뜻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인 걸까, 궁금했다.

지금 이 엄혹한 시대, 문화·예술이 어떻게 정치에 휘둘리며, 정치적으로 억압 당하는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인 걸까. 인류사에서 문화·예술이 어떻게 정권과 기득권의 통치 도구로 이용됐으며, 문화·예술이 어떻게 기득권에 저항했는지를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문화'라는 말이 붙었다는 이유로, 정치색을 띠지 말라? 아주 협소한 의미의 정치를 갖다붙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은 자신의 글을 부정하라는 말 같아서 영 마뜩찮았다. 더구나, 물론 나는 잡문날품팔에 불과하니 '파워'니 '리더'니 하는 레떼르와는 동떨어진 블로거이나, 예스24에서 강조한 파워와 리더로서의 오피니언 블로거라면, 그런 말씀은 완전 의외다. 


문화나 예술은 한 시대의 산물이요, 시대나 정치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문화나 예술이든, 어떻게든 일정 부분 정치색을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위대한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 말씀으로 그것에 대한 언급은 맺겠다. 

"작곡가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다. 인간적인 고뇌, 압제, 부당함이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 고통이 존재하고, 오류가 존재하는 그곳에 나는 내 음악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음악과 권력』 중에서) 



결론은 이렇다.
여름은 위태롭고, 커피향이 서서히 깔릴 즈음의 계절인 9월.
그 어느해 9월에, 나는 칠레 사람들을 만나고, 칠레의 공기를 흡수할 테다. 

그때 나는,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만나고, (11일)
빅토르 하라를 노래(Venceremos·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하며, (16일)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를 읊는다. (23일) 
칠레 와인, 그리고 칠레 커피를 곁들여서.
 
내 어느해 9월은, 칠레가 익어가는 계절. 
떠나요~ 둘이서~ ^.~ 


그리고, 외쳐요. 벤세레모스!!! 

 

* 오해마시라. 나는 이 영화(다큐)를 아직 못 봤다. 보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렇다면 별점은 뭐냐고? 저 별 5개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기리는, 추모하는 나의 마음이라고만 알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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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의 책마을 - 책세이와 책수다로 만난 439권의 책
김용찬.김보일 외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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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의 말마따나,
취향은, "삶의 미세한 결들 속에 숨은 매력적이고 거추장스러운 문제"이다.  

누구든 취향이 있겠지만,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거나 알려고 하는 노력은 부족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많은 이들이 자신을 아는 일에 생각만큼 충실하지 않다. 아마도, 지금 사회가 강요하는 '스펙'과 '사이클'에 자신을 맞추다보니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나 싶다. 삶의 미세한 결을 내동댕이치고 마는. 

어쩌다, 혹은 운좋게도 공동 저자로 참여하게 된 책에 대해 씨불거리는 것은 다소 남세스로운 일이겠다. 그냥 하나객담(실없고 하찮은 이야기)으로 여겨주면 되겠다. 

1. 우선, 글을 싣게 된 과정. 한때, '원튀'(원고 먹고 튀는 사람)이 아닐까, 의심도 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일을 당해본 입장에선, 트라우마인 게지. 아무리 허섭한 글일망정, 거기엔 내 마음과 시간과 내가 있으니까. 그런 일을 당할 경우, 절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식빵(신발), 꽃 같다. 된장." 
 
거의 1년여 전에 청탁을 받았다. 낑낑대며 긁적이다가 글을 넘겼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처럼 말하기에, 그리 믿었다.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못 믿을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깜깜 무소식이었다. 청탁자의 블로그에도 비밀글로도 물어봤으나, 답도 없다.  

'신발, 당했나...'하는 생각이 들고, 걍 포기하고 있을 무렵, 연락이 왔다. 처음 내는 책이다보니,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늦어졌단다. 그리고 진도가 빨라지더니 뚝딱뚝딱. 뭐, 우여곡절 끝에 나왔다.  

따져보면,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첫 책이다. 이전에 역시 공저로 나온 책들은 뭐랄까, 대회 수상작들 모음집이니 이벤트성이랄까. 허허, 내가 박힌 책이 나오는구나. 별 일이 다 있구나. 근데, 책으로 나온 나를 읽어보니, 아 신발, 쪽 팔려. 이런 졸필을 책으로 내놓다니. 끙. 괜히 다른 저자들에게도 초큼 미안시럽더라. 

2. 뭐, 쪽 팔리고 미안한 건 그렇고. 23명의 공저자. 꽤 많은 사람들이다. '책세이(책+에세이)와 책수다로 만난 439권의 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러프하게 말해, '이 책(들)은 내 삶에 어떻게 삼투압했나'이다.  

각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 사람이 나온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으나, 취향이 나온다. 삶이 묻어난다. 괴테가 그랬다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저자들이 읽은 책들이 곧 저자를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책을 보면 된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일정부분 그 사람이다. 취향이다. 곧, 그 사람의 삶의 결과 매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책은 편차가 심하다. 저자가 스물셋이나 되다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균질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거부감이 있다. 읽고 나서, 글에 묻은 결이 영 아니어서, 왜 실었을까, 의문도 생기는 글도 있다. 물론 불균질함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롤러코스터 타듯 재미있을 수도 있다.  

나의 글도 그런 면에서 숙청의 대상이겠다. 글에 언급한 선생님들, 내 인생의 F4에게 참으로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일부 그런 글이 보여서, 다른 좋은 저자들의 글을 갉아먹지 않았나 싶다.  

오해는 말자. 당연히 좋은 글도 풍성하다. 혹, 책을 읽게 된다면, 별로 믿을만하진 않은 권유지만, 은이후니님의 <나는 천천히 가기로 했다>, 김원국님의 <환경 활동가, 그 열정의 이름으로> 등은 책과 삶이 맺는, 책보다 중요한 삶이 알차게 담겼다. 강추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다들 힘들게 나를 담아서 썼을 거다. 좋은 결과물을 내놓은 저자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저자도 있을 것이다. 힘들게 책 낸 과정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으니, 편집자나 출판사에 대고 뭐라고 할 공저자의 입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인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글 쓰고 책 만드는) 노동의 가치와 결과물로 나온 책의 가치는 별개의 것이라고. 

3. 이 책이 단순히 책수다로 끝나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곧 공저자들이 언급한 책에 대한 호기심과 읽기로 이어지면서 삶과 세상에까지 삼투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성각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책보다 더 놀랍고 대단한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그리고 이 책에 추천사를 써주신 장석주 시인도 이런 말씀을. "독서인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가끔 언급했지만, 책 많이 읽는다고 자랑질하는 인간이 나는 영 미덥지 않다. 그래, 니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댔는데, 뭘 어쩌라고. 책읽기를 통해, 진짜 세상과 만나야 하고, 삶과 융화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성각 선생님도 역시 이 말씀도 빠지지 않고 하셨다. "책에만 빠져 있는 삶이 매우 한심하고 불쌍하다." 

날림글을 끼워넣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100인의 책마을≫은 책이 세상에서 어떯게 존재하고 존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각 저자의 삶이 묻은 책을 통해 어떤 세계를 위해 살아가고 노동해야 할 것인지도 고민하게 한다. 뭣보다 각 저자의 취향을 엿보는 재미도 있다. 아, 이 사람은 이런 결을 가지고 있구나. 내 옆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나? 그 사람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어보라.

나의 허섭한 글은 곧 블로그를 통해 공개하겠다.

* 표지의 캘리그래피. 좀 마음에 안 든다. 힘이 느껴지질 않는다. 100인이나 되는 책마을인데도. 책마을을 드러내는데도 미흡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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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신체 - 우리 몸이 들려주는 기이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
량얼핑 지음, 김민정 옮김 / 미래의창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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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이런 우스개, 누구나 들어봄직하다. “너는 엉덩이로 생각하니?” 혹은 “저 자식은, 뇌가 엉덩이에 달린 것 아냐?” 아무렴. 엉덩이가 얼굴이 아닐진대, 어떻게 생각을 하고 뇌가 있겠느냐마는. 이 우스개, 그냥 뾰로롱~ 나온 것이 아니었도다.

《매혹의 신체》가 알려준 엉덩이는, ‘표정이 살아 있는 제2의 얼굴’이다. 그래, 엉덩이가 하반신에 있다는 이유로, 형이하학(!)을 들이대는 편견은 그만. “남성의 신체가 여성의 감상 대상이 되면서 엉덩이는 마치 얼굴과 동일한 심미적 주체가 되었다.”(p.169) 이젠 엉덩이도 주목받는 시대다. ‘엉짱’, 인터넷 등을 통해 들어본 단어렷다.  ‘엉덩이 짱’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 엉덩이는, “성적, 미적 의미에서 봤을 때 엉덩이는 이제 화려한 얼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p.173) 맞잖아~ 얼짱. 엉짱. 

엉덩이로 생각한다는 말은, 한편으로 조금의 진실이다. 글쓰기를 잘 하고픈 사람들에게, 어떤 작가는 권한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생각하는 엉덩이. 뇌는 엉덩이에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참, 몰랐는데, 아프로디테는 희랍어로 ‘아름다운 엉덩이’라는 뜻이란다. 음, 아프로디테라는 말, 아무 여자에게나 붙여주면 안 되겠다. 엉덩이 확인부터 우선. 뺨이나 맞지 않으려나. 쿨럭.

#2. 내가 서식하는 집의 남자들은 앉아서 소변을 처리한다.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들. 일본 남성이 그렇고, 독일 남성이 그렇다고 책은 확인해주는 와중에, 건강에도 좋다고 말해준다. 빙고. 사실, 앉아서 소변을 누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변 방울이 변기 주변이나 밖으로 튀어 나와 욕실을 더럽히기 때문. 결국 청소의 문제가 가장 큰데, 또 하나의 이유를 붙여준다.

“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남자들이 여자들처럼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은 방광활동에 상당히 도움이 되며 건강에 좋은 자세라고 한다.”(p.213)

건강에 좋다. 몸에 관련해서, 대개의 사람들이 민감해지는 코드다. 그 이유 하나 더 붙음으로써, 나는 내 행위에 과감히 정당성을 부여한다. 역시, 난 통속적인, 너무도 통속적인 존재. 과연 나는 몸을 얼마나 알고 있기에.

#3. 마음(정신)이 몸(육체)보다 우위라고 강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때 제도권 교육권에 있었다. 몸을 홀대하던, 그래서 육체 따윈 중요하지 않다던 강요. 물론,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몸에 대한 담론을 읽었다. 몸의 미학. 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는 정신의 압박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고 있다. 

《매혹의 신체》는 말마따나, 몸을 찬양한다. 정확하게는 몸을 좀 더 알 것을 권한다. 

“이를 통해 내가 깨달은 점은 우리의 신체하나하나가 찬란함이요 위대한 전기라는 것이다. 신체의 각 부분은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대소변을 보는 것조차 많은 의미가 함축된 소중한 행위임을 알게 되었다.”(p.6)


한 시인이 했던 이 말까지 곁들인다. “왜 인간은 색을 존중하면서 눈은 존중하지 않으며, 소리는 존중하면서 귀는 존중하지 않는가. 길은 존중하면서 두 다리는 존중하지 않고, 음식은 존중하면서 위는 존중하지 않는가. 뇌는 존중하면서 고환은 존중하지 않으며, 말리는 것은 존중하면서 배출하는 것은 왜 존중하지 않는가.”(p.6)

이건 또 어떤가. “귀는 심사관이고 눈은 감찰관이며 입은 출납관이고 코는 감별관이고 눈썹은 목숨을 주관하는 장관이다.”(p.101)

암, 그렇고말고. 몸은 마음의 그릇이다. 몸 없이 마음은 개뿔. 아, 잊지 말 것은 있다. 지금 우리가 대개 맞닥뜨리는 몸은, 그러니까 대다수 거대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몸은, 자본이 포장하고 덧입힌 돈뚱아리다. 그것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휘둘려서도 안 된다. 아, 나는 박가희(애프터스쿨)의 몸이 보여주는 매혹이 정말 좋다. 흐흐.

#4. 이브 엔슬러 원작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처음 봤을 때,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그 메시지는, 남자인 내게도 통렬했고, 반성하게 만들었다. 제도권 교육권의 자장에 있던 나로선, ‘보지’가 음탕하고 음란한 단어인 줄로만 알았다. 표준어에 버젓이 올라간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세상은 꼭 죄를 짓는 양 만들었다. 미친 세상. 역시나, 아니었다.

자지도 그렇지만 보지의 수난은 더 잘못된 상황을 잉태했다. 음지에서 오래 웅크린 탓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 “오랜 세월 여성의 성기를 직접 거론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불안감, 어색함, 경멸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된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결국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다.”(pp.30~31)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더불어 수많은 남성들도 한편에선 희생자였다. 프로그래밍이 잘못된 탓에, 잘못을 저지르고 삶을 망가뜨리는 결과까지 빚게 됐으니. 보지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며, 언어의 의한 인식의 종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세상의 문이었다. 

보지가 그렇다면, 유방은 어떨까. 시대에 따라 사회적 변화가 따른다. 유방의 사회사를 들춰 봐도 꽤나 재밌을 것 같은데, 여기서도 일부가 언급된다. 과거 양육의 의무를 졌던 유방은 지금, 육감적인 성적 대상으로 변모했다. 중력마저 무시한 채 위로만 솟아오르는 봉긋한 자태를 자랑하고 싶은 욕망. 성형외과는 그 산이 거침없이 치솟아야 한다고 권한다.

브라자(브래지어)도 그렇다. 책은 브라자를,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자 광분한 욕망의 시대가 다가옴’을 알리는 신호로 봤다. 고대사회엔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슴을 자유롭게 드러내어 출산과 색정을 동시에 표현했으나, 중세가 되면서 육체를 천시하는 기독교 사회의 영향으로 유방은 음지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직, 유방은 해방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몸을 아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듯하다. 스스로를 거대한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며, 그것을 통해 정신은 더 넓은 세계를 유영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몸으로부터의 자유는 그렇게. 몸을 둘러싼 역사와 담론, 혹은 자신만의 이야기에 집중한다면, 세계를 그대 품안에. 별은 내 가슴에. (으응? 뭥미?) 

#5. 사랑하면 예뻐 보인다고? 사랑하면 눈이 빛난다고? 진짜란다. 우리 몸 가운데, 아주 감성적인 신체 장기인 눈 때문이다. “그 매력은 내면 깊숙한 곳에 깔린 정감에서 나온다. 사랑에 빠진 눈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을 때 동공의 색이 가장 짙고 눈물선의 분비가 많아져 촉촉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p.98) 반짝반짝 눈이 부셔, 예예예예~♪

저자는 그래서, 순결한 마음을 지니면 맑고 깨끗한 눈을, 세련된 교양을 가지면 우아한 눈빛을, 낭만적 정서를 가지게 되면 매혹적인 눈초리를 갖게 된단다. 물론, 100% 싱크로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성형의 왕국, 한국이다. 그까짓 눈쯤이야. 첫 눈에 혹했다고 올인 하지 말지어다. 심장도 때론 오작동을 일으키고, 눈도 분장이 가능한 시대니까.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아니. 반짝반짝 눈도 다시 보자. 그래도, 좋으면 오케이. 좋은 걸 어떡해.

사랑, 그것은 냄새라고도 말한다. 사랑의 향기에 집중해보란다. “미국의 한 언론에서도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데 ‘냄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일종의 ‘번식’ 욕구에 따라 이뤄지는 남녀 간의 사랑에서는 두뇌와 오감이 고도의 협력 작용을 통해 짝을 찾도록 만들며 이 중에서도 첫 판단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냄새라고 한다.”(p.73)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내 여인의 향기에 때론 혹했던 나. 페르몬? 천만에. 그저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냄새였을 뿐. 그녀(들)도 나의 냄새를 얘기했다. 그렇다고 방귀도 튼 사이? 물론, 그랬던 우리도 있었다. 하하.  

참, 귀걸이를 선물하는 남자.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이런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부락 간 강제 결혼이 유행하던 시절, 남자는 여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귀에 구멍을 뚫고 가는 철사를 걸어 침상 머리맡에 묶어뒀단다. 이후 귀에 작은 철사 고리를 단 여자는 이미 남편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즉, ‘유부녀 징표’였다고 할까. 물론, 지금의 귀걸이는 여성들의 필수 액세서리 혹은 신분과 권세를 과시하는 수단에 가깝다. 아니면 별 다른 의미 없이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선물이든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가 떠오른다. 정말 예뻤다. 스칼렛 요한슨. 그 정도라면 나는 평생 귀걸이를 선물할 생각, 충분히 많다. 내 여자니까! 

#6. 역시, 난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직 많구나~ 싶더라. 많은 여자들이 왜 목 주름을 펴려고 애를 쓰는지 몰랐다. 책은 말해준다. 여성의 3대 둘레인 가슴, 허리, 엉덩이의 시작이자 출발점인 목은, 눈꺼풀 외에 나이를 가늠하기 가장 좋은 부위란다. 목은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훨씬 빨리 노화된다. 내부 근육이 위축되면 목 피부는 쉽게 주름지고 쳐진단다. 그러니, 가만 둘 수가 있나. 목에 주름이 진다면, 슬픈 여자야!

여자들이 목이 주름지고 쳐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이유를 알았다. 사회적으로 억압된 16세기에도 여성들이 심혈을 기울여 목을 관리하며 목의 성적 매력을 중시했다고 할 정도니, 여성들이 목에 대해 목숨 걸어도, 이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아울러, 목과 달리 여성의 신체 부위 중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부위가 바로 다리란다. 떠올려보니 그렇다. 다리가 미끈하고 잘 빠졌다 싶어 보니, 헉, 중장년층 여성이라 후덜덜. 와, 저렇게 관리를 잘 했나 싶었더니, 다리는 꼭 그럴 것은 아닌가보다. 얼굴에 비해 다리는 세월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느니. 다리 피부를 떼어내서 얼굴이나 목에 이식하고픈 사람도 생기겠다. 정말?  

아울러 이 말, 참 감각적이네.
“허리야말로 여인의 핵심이자 무대의 영혼이다.”(p.161)
유후~ 남자의 허리만 중요한 것이 아녔고낭~ 무대의 영혼에 빠지고 싶어라~ 

#7. 그리고 이것, 아리송하다. 2000년, 홍콩. 《서유기》의 주인공 네 명, 즉 사오정,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를 후보로 결혼 대상자를 선정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단다. 결과가 놀랍다. 삼장법사 0%, 예상했던 결과다. 사오정 15%, 뭐 그럴 수도.

놀라운 건, 이것. 손오공 10%, 저팔계 75%. 아니, 장난처럼 답을 한 여성도 있겠지만, 어째 이런 일이. 얼굴 양쪽에 붙은 두 개의 배춧잎, 귀를 얘기한 챕터에서 나왔는데, 저자는 “늘 손오공한테 쥐어 잡히는 큰 귀가 현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아니, 코도 아니고 귀? 코야 옛날부터 성적 능력과 연관된 미신이 많으니 그렇겠거니 하겠지만, 귀란다, 귀. 흠, 당신이 여자라면, 고개 끄덕일 만한가? 저팔계에 한 표? 아, 궁금해. 나도 저팔계가 돼 볼까나? 흠, 큼큼.

* 《매혹의 신체》는 루쉰 이후 중국 저자의 이름으로 처음 읽은 책이지 싶다. 다른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흠, 내가 그렇게 중국 저자에게 인색했던가, 싶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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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 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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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면서,
세계를 넓히는 계기도 제공했던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


그런데, 
이번 월드컵 경기를 보는 와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니 사실, 이상한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게 됐고, 그런 나를 보는 것이 왠지 불편했고, 고민도 됐다.

문제는, 일본과 파라과이의 16강전.
한국은 이미 16강전에서 패배했고, 더 이상 과격하고 광적인 대~한민국을 보고 듣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크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던 경기였는데, 어쩌다 보게 됐다.

그런데, 그 경기를 보면서 중간에 나는 푸드드득~했다. 
일본이 지기를 바라고 있는 거다. 일본이 파라과이 진영에서 공을 차고 있으면 불안했고, 파라과이가 일본을 공격하면 골을 넣으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거다.

아니, 왜지? 의문이 뭉게뭉게. 
왜 나는 일본이 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 아시아인으로서,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팀 모두가 떨어진 마당에 아시아의 마지막 보루인 일본이 이겨야지, 가 이성이라면,
이 쪽발 쉐이들, 아시아의 축구맹주 조센징이 떨어진 마당에 뉘들이 감히 뷁! 이라는 감정일텐데,

후자가 경기를 보는 그 순간을 지배했다.
된장, 나도 어쩔 수 없는 조센징이구나, 하는 생각이 아련하게 들었고,
그걸 느끼면서도, 나는 승부차기에서 일본 선수가 실축하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했다.

경기가 끝났다. 일본이 졌다.
라리사 리켈메를 등에 업은 파라과이의 승이 아니라, 일본이 진 것이다!
속은 후련했다. 한도의 한숨 같은 것.
하지만, 이 감정이 머리속에선 불편함으로 둥지를 텃다. 

나는 일본문화에 대해 되레 호감을 가진 편이다.
커피와 카페 문화, 스토리텔링의 향연, 오감을 만족시키곤 하는 영화나 만화, 알흠다운 내 어떤 여신들. 기회가 된다면 일본을 자주 방문하면서 일본과 더 친해지고 싶은 바람도 있다. 과거에 접촉했던 일본인들도 하나같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더구나, 나는 민족주의에 별반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국경 따위도 불만이다. 국경은 곧 한계를 상정하는 것 아닌가.
다른 세계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왜 그런 울타리로 막아버리는 건가.
누구나 원한다면 이중 국적, 아니 다중 국적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데도 왜!!!
이게 다 제도권 교육, 특히 국사교과서 때문에 그런 거야, 라고 치부하고,
일단 접었지만 찝찝하던 찰나, 만났다.

다시 만난 임지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임지현 지음|휴머니스트 펴냄).

임지현, 그 이름 때문에 만났다.
만들어진 민족주의가 아닌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을 주창하는 역사학자.
처음 임지현 교수를 접했던《우리 안의 파시즘》,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 안에 똬리를 튼 파시즘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계기.
그의 이름을 둘러싼 논란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는 20대의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번 책 역시 만들어진 역사인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으라, 는 기존 율법 차원에서는 과격한(!) 주장을 펴고 있는데,

책의 기조는 역시나 한결 같다. 18명의 과거사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띠는 가운데, 이성을 마비시킨 채 기득권의 체제유지수단으로 작동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민족주의가 각 인물의 시대나 상황 속에서, 혹은 그 인물의 내면과 행동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콕콕 찝는다.

일본, 집합적 유죄!

아 참, 일본과 파라과이의 16강 전으로 돌아가자. 책을 통해 나는 그 불편함의 정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한일 관계, 임지현의 표현에 따르자면, 식민주의적 죄의식이 작동하는 굴절의 메커니즘.

그러니까, 나는 내가 받은 제도권 교육의 '국사'를 통해, 제국주의의 후예인 일본인 전체를 '집합적 유죄'로, 한국인은 '집합적 무죄'로 간주하는 인식이 박혀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개개인의 행동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본인이냐 한국인이냐에 따라 좌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섬뜩한 이야기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사실 이 논리예요. 너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했는지에 상관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는 그 논리 말입니다. 식민주의적 죄의식이야말로 전형적인 집합적 유죄의 논리지요."(p.48)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해 식민주의 역사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본인이 죄인이라는 식의 집합적 유죄를 수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일본 축구팀을 일본과 동일시하면서, '죄인인 뉘들이 한국 축구팀도 좌절한 8강에 감히 어떻게!'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식민지 과거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고, 나는 국사라는 교과서를 통해 일본의 민낯을 접했던 세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국사가 펼친 민족주의의 주술에 묶여 살 수밖에 없는가. 일본 축구팀의 선전을 부러 무시해야 하는 건가. 일본이 잘 되면 배가 아파야만 하는가.  

임지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럽에서는 국사를 넘어서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으며, 국가간에도 국사를 떠나, 국경을 넘어 각 지역의 삶과 직접 연관되는 문제의 해결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체르노빌에서 비롯된 핵발전소 사업이 그랬으며, 우리에게도 중금속 미세먼지를 잔뜩 안고 한반도를 공습하는 중국의 황사 문제를 거론한다.

"주권의 신성불가침성과 민족주의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는 한, 황사문제 등을 풀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은 빈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 우리의 삶이 처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국경에 갖혀 있는 우리의 상상력을 민족주의의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합니다. 국사 패러다임을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국가의 경계 속에 가두고 질식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단 상상력을 해방시켜봅시다."(p.381)

역시, 문제는 상상력이다. 어딜가나 그놈이 문제다. 어떤 상상력이 어떤 미래를 불러오게 될지 알 순 없지만, 지금 역사에게 필요한 것도 상상력이란다. 그래야 나는 그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국사의 파장에서 벗어나려면 필요한 것도 상상력. 언제 일본팀의 경기를 다시 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이 책 덕분에 나는 조금씩 그 주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기대보다 더 흥미진진한 부분이 존재했다. 아는 인물의 경우는, 몰입도가 상당히 높았다. 속살까지 훔쳐본 기분이랄까. 해당 인물에 대한 앎이나 이해가 부족했던 탓이었겠지만, 임지현이 특히나 애정을 둔 듯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러했으며, 체 게바라가 그러한 한편,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흥미진진. 

알고 싶다, 마르코스!

뭣보다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마르코스였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신비로운 인물. 새로운 정치집단의 권력 장악이 아니라 권력의 작동방식이 바뀌는 것이 혁명이라고 역설했던 인물.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닌 현실을 만들어가는 담론적 실천이라는 생생한 예를 보여준 마르코스의 말. 열광에 반대하는 사파티스타의 전통 또한 마음에 들었다.

"기존의 체제는 사람들이 이미 결정된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때 안정된 재생산구조를 유지하지, 결코 힘에 의해서만 작동하지는 않지요. 혁명을 국가권력의 쟁취라는 정치의 영역에서 일상생활과 문화의 영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던 당신의 시도가 소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혁명은 단지 권력을 장악한 정치세력의 교체에 그치고 말 뿐이지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이야말로 사파티스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당신의 말은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pp.244~245)

책에서 지적했는데, 현재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건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과거'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도 그렇다. 사람들의 실천을 지배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인식한 현실이라는 것.

선거에서 표를 던지거나 특정한 정책이나 문화적 제안을 지지하는 등의 사회적 실천을 지배하는 것은 일상의 경험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고정관념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봤고 경험했다. 아직까지도 그것이 이 사회에서 통용된다. "국사는 흔히 이데올로기의 편이다. 한국 민족, 일본 민족, 폴란드 민족, 유대 민족 등을 동질적이고 단일한 실체로 본질화시키기 때문이지요." (p.374)

꼭 세계를 넓혀야 될 의무는 없다. 좁은 세계에서 복작거리다 뒤져도 그만이다. 하지만, 세계를 넓히는 것은 삶을 좀 더 풍성하게 재밌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기반을 제공한다. 엄청 큰 것은 없다.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우습고. 18명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터셉트해서 살짝 훔쳐본다고 생각하고 봐도 좋겠다.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당신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나 인물이 나오면 그 재미가 쏠쏠찮다.

알퐁스 도데, 다시 생각해봐라


참, 그리고 왠지 반가웠던 이야기. 나는 계급적 폭력 때문에 알퐁스 도데의 《별》을 무척 싫어하는데(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다면 다시!), 임지현은 알퐁스 도데의 반동성(!)을 알려준다.  

왜 일본과 한국에서 알퐁스 도데가 그렇게 유명하고, 일 제국주의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던 《마지막 수업》이 왜 한국 교과서에도 실려서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는지, 그 궁금증을 풀어준다. 언어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교재! 뭐, 연좌제는 아니지만, 악시옹 프랑세즈라는 프랑스 극우파 조직에 알퐁스 도데의 아들이 중요한 활동가로 있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까지.  

옛 기억속에 혹시 알퐁스 도데가 아름답게 미화돼 있다면, 부디 다시 생각해보시라. 《별》이 진짜 아름다운지, 《마지막 수업》이 정말 감동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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