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 Salvador Allend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요즘 '칠레', 하면 무사귀환부터 바라게 된다.
알다시피,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33인의 광부 때문이다. 8월5일에 갇혔으니 한 달도 넘었다. 구출작업도 늦어졌다. 지난달 30일부터 시작됐는데, 3~4개월이 걸린단다. 다행이랄지, 8.8cm의 초큼한 구멍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있다. 그들이 부디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8.8cm의 구멍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엉뚱하고 미안한 호기심도 든다.-.-;; 

아울러, 그보다 더 험한(혹은 악랄한) 갱도에 빠진 우리를 생각한다.
칠레의 33인 광부는 구조된다는 기대라도 있지만, 현재의 내 심정은, 이땅의 갱도에선 아니다. 도리도리. 우리가 갇힌 갱도에는 8.8cm의 지름만큼도 안 되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하긴, 그거라도 어딘가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꽉꽉 막힌 화폐갱도에 갇혀 있다는 인식도 못하고 있으니까. 심약한 나는 궁시렁 대면서도 그 갱도에서 꾸역꾸역 지탱하고 있고. ㅠ.ㅠ

어쨌든 칠레를 와인으로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대한민국 자유무역협정(FTA) 최초 체결국인 칠레. 덕분에 싼값의 칠레 와인은 한국의 마트를, 한국의 식탁을 장악했다.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하지만, 칠레는 와인으로만, 길이로만 떠올리는 건, 뭔가 부족하다. 한국의 지난 현대사와도 겹쳐지는 어떤 핏자국 때문이다. 인민들의 피, 말이다. 우리에겐 대표적으로 80년 광주민주항쟁의 피가 있었듯이. 




2010년 9월11일.
대한민국 국민인 내(으응? 증말? 대한민국에서 인정한대?)가 칠레를 떠올리는 건, 37년 전 그날 때문이다. 혁명적 사건이 좌절되고 말았던 그날.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이 총칼에 의해 피눈물 흘리고 말았던 그날. 이 한 맺힌 혈서적 유서를 보자.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내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1973년 9월11일 살바도르 아옌데
 

 

최근 칠레에선 아옌데 정권 탄생 4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970년,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일이었다.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 뿔테안경을 낀 샌님적 외모를 지닌 살바도르 아옌데 씨는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남아메리카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의 실현이었다. 덩실덩실~


워워, 이 포스를 느껴보라. 아옌데와 카스트로의 만남!

사회주의 정권은 33인의 광부가 갇힌 탄광과도 관련을 맺는다.
칠레의 노동운동은 광산촌 광부들에 의해 출발했다. 이들의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1917년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이 주도해 칠레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창당됐다. 이는 아옌데까지 명맥을 잇게 된다. 칠레는 와인이 아닌 구리가 왕이다. 세계에서 구리 생산이 가장 많다. 광업은 칠레에서 가장 큰 산업이다. 파블로 네루다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쨌든, 아옌데는 사회주의 경제개혁을 시행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인)이 선점하고 있던 구리광산을 전면 국유화했다. 구리광산의 수익은 사회적 자산으로 배당됐다. 은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지 및 농업개혁이 실시됐고, 어린이에 대한 무료 우유배급 등도 시행됐다. 사회주의는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고민했고, 당연히 있는 자가 아닌 없는 자를 위한 정책에 적극 앞장섰다.   

문제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열폭(열등감 폭발)이었다. 
사회주의 정권의 항해는 쉽지 않았다. 물가는 상상도 못할만큼 뛰었고, 생필품은 동이 났다. 1972~1973년 2년 연속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였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주의 경제개혁의 실패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농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칠레경제의 핵인 구리의 국제가격을 떨어트리고, 아우구스트 피노체트를 앞장 세워 군부 쿠데타라는 비열한 수를 뒀다. 1970년 9월11일, 미국의 하수인 피노체트는 산티아고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명박, 아니 겁박했다. 투항하라고.

하지만, 아옌데는 진짜 '리더'였다.   
속된 말로, 과장하자면, '식빵, 쪽 팔리느니 확 산화할란다!'. 그는 투항하지도 않았다. 망명을 택하지도 않았다. 그가 택한 것은 죽음.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총으로 그는 스스로 쾅!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모든 것이 압축된 그 말. 그는 칠레 속으로, 인민 속으로, 노동자 속으로 온전하게 스며들었다.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 땅에서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와 살짝 겹치기도 한다. 

그 이후의 참혹함도 아주 살짝 겹친다.
범죄자 피노체트가 1990년까지 17년 동안 독재적 대통령질을 해대는 동안, 3000여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다. 역시 범죄자 출신의 통치자가 대통령질을 하는 대한민국, 선량한 시민들은 범죄자로 내몰리고, 힘과 돈 듬뿍 가진 범죄자들은 총리나 장관(후보)으로 임명되며, 똥돼지는 왜 그렇게도 꿀꿀대는지. 토 나와!



올해 초,  아주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 <칠레 전투:비무장 민중의 투쟁> 상영 얘기다. 지난 1998년 제3회 인권영화제를 통해 비로소 정식 소개된 이 영화는, 3부작으로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개혁과 최후, 노동자들의 투쟁 등을 다루고 있다. 지난 1월에 인권운동사랑방이 함께 보자고 했는데, 아 시간이 맞질 않아 좌절.

지난 2005년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제6회 전주국제영화제. <칠레전투>의 감독, 파트리시오 구스만이 역시나 연출한 <살바도르 아옌데>를 보지 못했다. 구스만 감독은 이렇게 말했단다. "바로 그 시기에 살바도르 아옌데가 더 좋은, 더 자유로운 유토피아를 나의 조국에 실현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인생을 결정지은 인물이고,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뭣보다, 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아옌데.
또 다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자식들 저녁상을 준비하는 노인의 입을 통해 "그것은 정말 위대한 유토피아를 위한 꿈이었다." 인민의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저런 말은, 아마 직접 듣는다면 먹먹~할 거다. 



아옌데의 꿈은 아직 살아있으라.
칠레 인민의 피 같은 칠레 와인을 마신, 33인 광부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대한민국의 한 찌질한 청년이 바라는 바다. 사회주의정권 탄생 40주년 기념식에서 
아옌데 대통령의 딸인 이자벨 아옌데 상원의원 왈. "아버지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렇게, 나는 믿고 싶다. 

아울러, <칠레전투>의 2부 끝장면, 이런 내레이션(자막)이 나온다. "아옌데는 죽었지만 칠레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글 머리에서 이 땅의 흉악한 갱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기대? 희망? 그 따윈 없다고 도리질을 쳤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까진 감출 수가 없구료.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지름 8.8cm도 되지 않을 구멍이라도.   

다른 9.11 이야기

덧붙여, 대개의 사람들 뇌리에 박힌 9월11일의 사건은, 그렇지, 2001년 9월11일. '9.11'이라는 이름의 아마도, 21세기 최초의 전인류적 트라우마. 어느덧 9주기가 됐다. 명복을 빈다. 

아울러, 1906년의 9월11일. 올해로 104주년이 된 셈인데, 무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운동(사티아그라하)'를 본격 펼친 날이다.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며 평화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오늘 2010년의 9월11일. 예스24의 파워문화블로그 간담회에 갔다. 뭐, 오로지 떡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간 속물적 인간인 나는, 늘 그러하듯 존재감 없이 떡밥만 먹고 돌아오긴 했는데, 한 분이 던진 한 마디가 영 불편해서 오늘 글을 이렇게 길게 늘여놨다. 

역시나 졸렬하고 편협한 포스팅인 셈인데, (내 승질이 못돼서 그렇다!) 물론 그 분의 생각과 다를 뿐, 그 분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비판은 해야겠다. 오해는 마시라. 그 분이 나쁘다는 뜻도 아니요, 그 분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한지는 모른 채 하는 얘기다.

자기 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문화(를 다루는) 블로그는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듣기 나름일텐데, 나는 그 뉘앙스가 더 정치적으로 느껴졌다. 정녕,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에 숨은 뜻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인 걸까, 궁금했다.

지금 이 엄혹한 시대, 문화·예술이 어떻게 정치에 휘둘리며, 정치적으로 억압 당하는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인 걸까. 인류사에서 문화·예술이 어떻게 정권과 기득권의 통치 도구로 이용됐으며, 문화·예술이 어떻게 기득권에 저항했는지를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문화'라는 말이 붙었다는 이유로, 정치색을 띠지 말라? 아주 협소한 의미의 정치를 갖다붙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은 자신의 글을 부정하라는 말 같아서 영 마뜩찮았다. 더구나, 물론 나는 잡문날품팔에 불과하니 '파워'니 '리더'니 하는 레떼르와는 동떨어진 블로거이나, 예스24에서 강조한 파워와 리더로서의 오피니언 블로거라면, 그런 말씀은 완전 의외다. 


문화나 예술은 한 시대의 산물이요, 시대나 정치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문화나 예술이든, 어떻게든 일정 부분 정치색을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위대한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 말씀으로 그것에 대한 언급은 맺겠다. 

"작곡가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다. 인간적인 고뇌, 압제, 부당함이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 고통이 존재하고, 오류가 존재하는 그곳에 나는 내 음악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음악과 권력』 중에서) 



결론은 이렇다.
여름은 위태롭고, 커피향이 서서히 깔릴 즈음의 계절인 9월.
그 어느해 9월에, 나는 칠레 사람들을 만나고, 칠레의 공기를 흡수할 테다. 

그때 나는,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만나고, (11일)
빅토르 하라를 노래(Venceremos·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하며, (16일)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를 읊는다. (23일) 
칠레 와인, 그리고 칠레 커피를 곁들여서.
 
내 어느해 9월은, 칠레가 익어가는 계절. 
떠나요~ 둘이서~ ^.~ 


그리고, 외쳐요. 벤세레모스!!! 

 

* 오해마시라. 나는 이 영화(다큐)를 아직 못 봤다. 보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렇다면 별점은 뭐냐고? 저 별 5개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기리는, 추모하는 나의 마음이라고만 알아주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