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가 주야장천 듣는 노래(들)가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늘, 이맘때, 12월8일 즈음해서 그래요.
맞아요, 존 레논이에요.
특히나 올해,
존 레논 30주기입니다.
ㅠㅠ 

 
그건, 별 도리가 없어요.
무방비입니다.

압력솥에서 밥 뜸들이기가 끝난 뒤, 신호가 오듯,
시간을 살면서 뜸을 들인 생체시계가 이맘때면 그렇게 작동합니다.

그러니, 주야장천으로 귀쏭쏭 뇌탁탁 노래는, 존 레논의 것이지요.

1980년, 마흔이었습니다. 
존 레논의 나이가 그랬어요. 1980년의 12월8일, 집앞에서 열혈팬을 자처한 마크 채프먼의 총탄에 불온했던 혁명적 몽상가는 저격을 당합니다. 탕탕탕탕.

몹쓸 '저격의 꿈'에 탄피처럼 내동댕이쳐진, 존 레논.
역설적이게도, 저격은 요절이라는 신화적 외피를 둘렀다지요.
특히나, 전지구의 정치경제 지형도를 바꾼 레이건 대통령 당선 직후였던 그 시절.
혁명적 아이콘의 죽음은, 시대의 변화를 예감한 징후적 사건이었음에 분명하겠죠.

아, 그러고보니 저도, 곧 마흔을 바라보는 시절.
물론 신화도 전설도 영웅도 될 생각이 추호도 없을뿐더러, 그럴 깜냥도 못되니,
어떻게든 무조건, 가아늘고 기일게, 버티고 견디는 것이 사명인 가장 보통의 남자. 


그 사랑, 중독됐습니다.
존의 노래(들)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훌륭하지요.
거기에다 그 노래가 품고 있는 혁명적 운동성과 실천을 생각하면, 어휴.

저 같이 소심쟁이 장삼이사야 그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을 품고 있는데,
뭣보다 저는, 그의 사랑(오노 요코에 대한!)에 중독당한 사람 중의 하나지요.

1966년 11월9일.
스물여섯, '예수보다 위대한' 밴드의 멤버였던 그의 시간은 그날 이후, 방향을 달리해 돌아갔다죠. 당시 서른셋의 오노 요코를 만났던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는 순간. 재밌게도, 오노는 당시 존이 비틀스의 멤버인지도 몰랐다더군요.

존의 시간은 그날 이후 오노를 향해 시침과 초침을 돌리게 됩니다.
음악 역시, 음악의 혁명에서 혁명의 음악으로.

알다시피, 그녀와의 만남은 비틀스 팬들이나 멤버들에겐 달갑지 않은 것이었죠.
존은 1969년 오노와 결혼했고(물론, 이후 한 번 헤어지도 했지만),
아울러 비틀스를 탈퇴했으며, 세상과 본격 싸우는 전사의 길을 걷게 되죠.

그 모든 것이, 이 죽일놈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나는 감히 생각합니다).

혁명이니, 불온이니 긁적였지만, 결국 존은 탐미주의자가 아녔을까요.
아름다운 사람에, 아름다운 세상에 탐닉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법이 없고, 재산과 소유가 없으며, 국경따위도 필요없는 세상을 몽상(혹은 망상?)했던 사람.
그 중심엔 '오 마이 러브', 오노 요코!!!

오죽하면 이리 말했겠습니까. "태어났노라! 살았노라! 요코를 만났노라!"
누군가는 아따, 이거 뭔 닭살 멘트여, 라고 살을 벅벅 긁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 사랑, 솔직히 부럽지 않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예술적·정치적 영감은 물론, 또 다른 세상을 향한 몽상적 영감까지도 불어넣고 받을 수 있는 동반자 관계. 그리하여, "우리는 같은 온도를 가지고 있군요!"라고 말할 수 있는 동맹적 사랑.

알다시피, 존의 압권적 퍼포먼스. 아아아!!!
유명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가 <롤링스톤>의 표지사진용으로 그들을 찍기 위해 찾아갔을 때, 존이 행한 그 사랑의 퍼포먼스.  

일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다시 꺼내볼까요?
사진을 찍으면서 애니가 존에게 묻습니다. "당신, 오노 요코를 얼마나 사랑해?"

존, 아무말 없이 옷을 훌러덩 벗습니다. 그리고 오노를 꼭 껴안듯 매달려선 입을 맞춥니다. 쪼오옥~ 그리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던지죠.
"봤냐? 이게 내가 오노를 사랑하는 방식이야."
 
아,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잡지표지 중의 하나인 <롤링스톤>의 1980년12월호 표지가 탄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랑의 마지막 징표가 되고 말았다지요. 
사진을 찍고 몇 시간후,
그 남자의 가슴에는 그 여자만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그 자리에 총알이 박히고 말았습니다...

사랑.
존과 오노의 것이 사랑의 모든 것이라거나, 사랑이라면 저 정돈돼야 한다며 땡깡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그들만의 것이겠지요.

그래도, 나는 오늘 그 사랑을 다시 떠올립니다.
아울러, 그 지독한 사랑을 '저격의 꿈'에 날려보냈어야 했을, 눈앞에서 사랑이 총탄이 맞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 오노 요코.
그렇게 홀로 남아 "존이 인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그를 위해 기도해달라"던, 지금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오노의 마음도 생각해봅니다.

눈이 나리고, 비가 흩날린 오늘, 12월8일.
당신을 생각했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커피를 내려주고, 함께 땅을 밟으며, 그 시간의 공기와 냄새를 오감을 열어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나의 상상은, 존과 오노의 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나는 다른 어떤 세상보다 당신이라는 세상에 편입하고 연대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장심이사입니다. 저격이나 암살 당할 깜냥이 아니기에, 나의 심장은 당신이라는 총알이 박힌 '저격의 꿈'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같은 온도를 지녔으니까요.
 

자, 그래요. 오늘 노래는, 존 박 아니고, 존 레넌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들려주고픈 이 노래, "
Oh my lov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로 시작하는 이 노래, Oh My Love.  ^^
 
당신에게 그 언젠가, 우쿨렐레를 띵가띵가 치면서 들려주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 어느해, 12월8일. 눈이 내린다면 더욱 좋을 그날, 존과 오노의 사랑을 만담처럼 나누며 들려주고 싶은 이 노래. 내 품에 안겨 잠든 당신에게, 나즈막이 들려주고 싶은 이 노래.
우리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탕탕탕탕.
 

참, 내일 개봉하는 <존 레논 비긴즈 : 노웨어보이>. 그러니까, '껌 좀 씹던' 시절의 , 비틀스 이전의 존 레논을 다룬 영화. 당신과 함께,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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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책을품은삶 > 어느 날인가 이 사랑을… : 겨울, 부암동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눈을 떠보니, 잔뜩 흐리다.
비가 올까, 걱정보다 비가 오길, 바란다.
그러고보니 새벽녘, 눈도 아주 살짝 다녀갔구나.

부암동 가는 날.
산책을 할 것이고, 중요한 미팅이 있다.
 
왜 흐려야 할 것이냐. 이유는 없다.
굳이 꼽자면, 눈을 떴을 때 바라본 하늘 때문인가. 
아님 어젯밤 술 취한 선배들의 주정을 들어주느라 마음이 지친 탓인지도.
선배는 속도 모르고, 저 놈은 늘 웃어서 좋다, 며 날 상대로 열변을 토해냈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은 나로선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왠지, 우산을 쓰고 빗소릴 들으며 부암동을 거닐고 싶다네.
이 찬 날씨에, 미친 게지. 그래, 아주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 법이지.
향미 짙게 깔린 커피 한 잔이면 또 되잖아. 부암동은 그게 가능한 동네니까.
 



백사실 계곡으로 향한다. 비는 나리지 않지만, 돌풍이 분다.
찬 기운과 맞물려, 시야를 가리고,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만든다.





북악산길 산책로, 돌풍길.

물론 피해갈 일은 없다. 나는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길 뿐이다.
Autumn이 흘러가고, Art for Life가 흘러간다.
돌풍에도 그렇게 흘러간다. 나의 발걸음처럼.


흠, 개조심, 이라.
문앞에 찰싹 달라붙은 문구를 보면서, 생각한다.
개(는 사람을)조심(해야 한다).
개가 이 세계를 말아먹는 법은 없다.
인간이 개를 아낀다지만,
그것도 저 필요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개의 필요에 의해 사람이 간택되는 경우, 얼마나 될까.
그러니, 개야 조심해. 인간을. 언제 널 버릴 줄 모른단다. 


앙상하다는 표현, 밖에 없는 것일까.
저들은 사람들의 그 표현에 동의하고 있을까.
카메라는 돌풍에 흔들리는 그들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진 못한다.
저들은 돌풍에 순응하는 것일까, 아니면 버티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아파트가 아닌,
예쁜 집에 눈길 한 번 주면서. 
아, 비싸고 큰 집 아닌, 핸드 빌트 하우스에 살고 싶다.



두 갈래로 뻗은 나무야, 나무야,  
너의 목생(木生)에서 어떤 균열을 거쳤기에, 그리 되었니. 
물론, 그것이 나쁘다거나 옳지 않아서가 아니고, 나는 그저 궁금하구나.
 


느닷없는 기시감처럼 떠오르는 영화, <카모메 식당>.
그 숲의 정경도 다르며, 맥락도 다르건만, <카모메 식당>의 숲이 다가온다.
핀란드인들도 슬픔이 있는데, 어찌해 고요하고 편안하며 자유스러운가 묻자,
핀란드 청년은 답하지. "숲이 있어서!"


나는 아직, 야생멧돼지를 만난 적이 없다. 
야생멧돼지의 출몰이 잦아 정부가 대책을 마련했다는 최근의 뉴스. 
원인과 이유를 설명했지만, 나는 왠지 그것이 어떤 '징후'같다고 생각했다.
그 징후에 대해 당신에게 단편을 부탁하고 싶었던, 미처 전하지 못한 바람.
눈 밝은 당신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백사실 계곡에 당도하고,
부암동 주민, 김남희 작가의 동네 사랑이 뚝뚝 떨어진다. 
장장 6개월여에 걸쳐 복덕방 할아버지를 들들 볶고 귀찮게 하면서, 
마침내 부암동을 서식지로 삼고야 말았던 사람, 김남희. 참으로 부럽도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시부렁거린 '내먄(잘 살면 돼)' 아파트 광고의 천박함과 역겨움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닌, '어디(의 얼마짜리에) 사느냐'에 방점을 뒀기 때문.
내 보기에, 부암동은 서울에서 흔치 않게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고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동네다. 

영국 BBC가 로컬 라디오방송을 시작하면서, 이런 카피를 내보냈다.
"If you love where you live, Be part of It(당신이 사는 곳을 사랑한다면, 그 일부가 되세요)." 백사실 계곡에, 부암동에 탐닉한 김남희는 그래 보인다.


가만, 눈을 감는다.
계곡 사이를 유영하는 바람이 거세긴 해도, 나는 어떤 '흐름'을 느낀다. 

구름이 흐른다. 저기 하늘에서. 
바람도 흐른다. 나의 두 빰에서.
낙엽이 흐른다. 나의 발 밑에서. 
말들도 흐른다. 우리네 입가에서.
사람이 흐르고, 시간이 흐른다. 
모든 것이 흐르는 이곳, 부암동 백사실 계곡. 

 

아울러, 개도맹이 지금은 자취를 감춘 그 겨울, 부암동.
 
 

할머니가 뭔가 줍고 계신다. 
아마도 은행열매가 아닌가 싶지만, 그와 함께 할머니의 어떤 생도 함께 줍고 계신 것이 아닐까. 뭘, 줍고 계신가 여쭙고도 싶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백사실 계곡을 나오는 길, 할머니는 여전히 생을 줍고 계신다. 
나도 1인분의 생을 온전히 줍고 싶다...


《외로움이 외로움에게》의 김남희도, 그러니까, 
자발적 자기파괴자, 자발적 주변인, 자발적 시스템 낙오자 되시겠다. 
그녀는 '다른 삶'을 살아보라고 권한다. 시스템에서 벗어나보라고 촉구한다. 
강고한 시스템이라지만, 그것은 내 마음속의 노예가 만들어놓은 철창이다.
낙오되면 어쩌나, 싶지만, 죽지 않는다. 차츰 독을 빼고 있는 나는 그것에 적극 찬성표를 던진다.

'길을 떠난' 여자들이 있다. 
세간의 이른바 '안정'된 직장과 마약 같은 월급에서 스스로 벗어난 여자들. 
과감히 '이기적'이 되기로, 내가 행복해하는 길을 걷기로 작정한 여자들. 

그런 여자들을 몇몇 안다. 
길 떠난, 길을 걷는 여자들의 '힘'.
그리고 나는 (여자로서) 어떤 여자들을 사랑하거나 좋아했으며, 
(사람으로서) 어떤 여자들의 삶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김남희도 그런 경우다. 

물론, 그들은 약하고,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강자적 태도에 눈길 주지 않았다.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가치와 기준을 준거점으로 삼는다.

자신을 성찰하고 뒤돌아보며 자신과 이야기하고, 그속에서 즐거움도 찾을 줄 아는 그들이다. 나는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길'은 발걸음이 닿는 물리적인 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사가 아닌 동사인 길. 뚜벅뚜벅 당신이 걷는 그 길을 나는 지지하고, 옆에서 함께 흐르고 싶다. 

지난 7월, 김남희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여름.
다른 삶, 다른 길이 있음을 명시해달라고 부탁했었지. 
독을 빼고 있는 나는, 해독제 제조를 위해 다른 사람들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당신도 그래서 김남희보다 더 존재 자체로 고마운 사람.



그리고 4개월, 겨울의 시작, 부암동. 
부암동 주민인 그녀에게 일본의 '베델의 집'에 대한 인상 깊은 이야기.
좀 더 부연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시 흐른다. 

 

그리고 부암동에서의 중요한 미팅.
<카모메 식당> 같은 연대적 커피하우스를 꿈꾸는 내게,
어떻게 살 것인지, 사유할 수 있는 부암동 로망을 품은 내게,
얼떨결에 닥쳐온 어쩌면, 기회.

소셜 커피, 소셜 푸드 연대기, 부암동이 제격이건만, 고민이다.
현실적 여건의 불비함과 리스크를 짊어진 로망을 향한 도전 사이.
저기를 응시하던 이 녀석, 아마 어떤 고민들 틈에서 오도카니 있으려니.

 

겨울, 부암동은 그렇게 모든 것이 흐르는 공간.
나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당신에게 길을 묻고 싶다. 당신에게 걸어가고 싶다. 어느 날인가 이 사랑을...

참고로, 제목 '어느 날인가 이 사랑을'은,
주윤발, 종초홍 주연의 홍콩 영화 <반아틈천애>
(1989, 국내 개봉 제목 <타이거맨>)의 일본 개봉 제목이다.
주성철 기자(《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저자)를 통해 알았다.

그리고, 당신...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너는 잘못 날아왔다   



 선데이 모닝, 비가 나렸으면 좋겠다.

어쩌면 당신은,
암흑속에서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 그래, 선데이 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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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7일, 세계 빈곤퇴치의 날. 

1987년 10월17일, 세계인권선언(1948년)이 발표됐던 프랑스 파리의 트로카데로 11월11일 광장, 10만 명이 모여들었다. 빈곤퇴치운동에 평생을 바친 조셉 레신스키 신부(당시 70세)가 주도한 '절대 빈곤퇴치운동 기념비' 개막행사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5년 뒤, UN은 이날을 '세계 빈곤퇴치의 날'로 정하면서 절대적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국제적으로 함께 노력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빈곤퇴치는커녕 양극화가 심해진다.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겠다"고 호언장담 하신 대통령은 '경제'가 뭔지도 모르시고, 부유한 나라, 부강한 국가를 만들겠다고 립서비스만 일삼으신다.

차라리 한 사람도 굶는 사람을 없애겠다고 말해야 한다. "가난은 국가도 구제못한다"는 오래된 신화(?)는 거짓이다. 국가가 스스로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더럽고 비겁한 변명이다. 가난은 국가가 구제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개인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고? 조까라마이싱. 국가가 가난한 사람을 내비두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중차대한 도덕적 해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경제학'을 다시 리바이벌 하자면,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먼저 쓰러져가는 빈민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


"경제학의 목표가 많은 사람을 좀더 잘 살게 하는 것이라면, 먼저 가난한 이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교수) 
 

그러니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국가가 가난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경제학이 부자들만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장하준 교수는 지난해 4월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요구하라고 말했다.
그를 만난 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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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든 선거든, 각자가 의사를 표시하고 모여야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장하준을 만나다



알다시피, 우리는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고 마는 두발자전거 경제 체제에 있다. 멈춤 없이 내달려야 유지될 수 있는 경제시스템. 누군가의 이익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는 지금의 자본주의. 돈이 없으면 인간의 존재감과 자존감마저 말살당하고 마는 엄혹한 시대.

작금의 경제공황은 그런 시스템 내부에서 암약한 탐욕이 곪아 터진 것이다. 그러니까 공황의 초기, 금융위기라고 지칭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금융, 특히 부실규모를 파악하기조차 힘든 파생상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악성 바이러스를 퍼뜨리면서 우리의 탐욕을 조장했다. 그 설탕 묻힌 꽈배기 금융상품의 달콤한 감언이설은 우리의 이가 썩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지금은 이를 송두리째 빼야 할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그는 그런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강력히 경고해 왔다. 지금이 결국 그런 시기다. 실물과 격리된 채 따로국밥으로 퉁퉁 불어터진 금융 파생상품과 영미식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가 불러온 파국. 그가 인식하고 있는 현실은 무척 비관적이다. 최근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대공황보다 더 큰 위기”이며 “특히 파생상품이 많아서 끝을 짐작하기가 더 어렵고 위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사태가 좀 더 심각해져야 근본적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불온(!)한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답다. 개발도상국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흡혈귀 노릇을 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악행을 고발(?)한 그의 책은 대한민국 국방부에 의해 낙인이 찍혔다. 불온서적 꽝. 지나가던 개가 콧방귀를 꼈단다. 믿거나말거나. 덕분에 불온서적으로 지정됐던 책들이 더 잘 팔리는 현상을 낳는 긍정적 효과를 거두긴 했지만 말이다. 항간에는 국방부가 출판업계의 불황을 걱정한 나머지, 그런 노이즈 마케팅을 펼쳤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더불어 불온서적의 저자인 불온교수 장하준 교수도, 되레 지금-여기의 잘 나가는 ‘상품’이 됐다. 경제공황으로 심적 공황을 맞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되묻기 시작했다. 주류 경제체제인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파국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저발전의 원인을 문화적 비합리성이나 게으름 등에서 찾아 저들의 경제․사회적 지배를 공고히 한 서구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논박하는 장 교수의 얘기도 마침 먹혔다. 자본주의를 넘기 위한, 대안을 발견하기 위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불온교수 장 교수는 현 정부가 많은 문제를 품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통한 국가의 개입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가 시장의 ‘심판’이자, 혼자 튀려는 시장을 통제하는 ‘컨트롤 타워’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말마따나, “천사처럼 행동하는 정부는 없”지만,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요구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파국의 추가 진행을 막기 위한 방법도 그는 제시한다. 민주주의가 허용한 한도 내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운동을 하는 것. 블로그에 글을 쓰든, 선거를 통하든, 작은 힘을 하나둘 모아서 사회를 개선시키자고. 불가능한 소리라도 자꾸 요구하자고.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신자유주의에 역습을 가해야 한다. 학생식당의 밥값 인상에 반대해 데모를 펼쳐 결국 밥값을 내리게 한 가난뱅이의 ‘역습’마냥, 신자유주의에 똥침이라도 날리기 위해 우리에겐 지금 연대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복. 어째, 듣기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그리하여, 지난 14일 서울 홍대 민들레영토.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은 11인의 독자들이 소담하게 그와 마주 앉았다. 장 교수를 향한 지상파 방송3사의 인터뷰 구애를 이기고 장 교수를 차지한 운 좋은 독자들. 유병선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사회를 보고, 독자들의 질문에 이은 장 교수의 답변으로 진행된 화기애애했던 현장을 중계한다. 내 생각엔, 이건 1박2일의 코너가 마련됐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건 앞으로 읽는 여러분의 몫이다. 요구하라, 그러면 실행에 옮겨질 것이다.



Q. 책에서 실물경제를 강조해서 좋았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요.

장 교수 : 사실 방법론적으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과에 가보면 생물체 이해를 위해 DNA를 분석하거나 아프리카 고릴라 옆에서 지켜보기도 하죠. 어떤 이는 동물행태를 수학모델로 만드는 사람도 있고, 여러 방법을 써서 생명체를 연구합니다. 왜냐면 생명체는 복잡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경제도 엄청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방법이 공존해야 합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주류경제학자들이 우리 식으로 안하면 경제학이 아니다, 혹은 저급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복잡한 현상을 이해해야 하니까요. 다른 접근 방법도 필요하고 어떤 이론이 주류가 돼야 한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핵심 신고전파경제학도 신자유주의로 흘러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걸 이용해서도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이론을 뽑아낼 수도 있습니다.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가 대표적이죠. 모든 학파에는 배울게 있습니다.

책에서 실물경제를 강조한 것이 좋았다고 해서 감사한데, (웃음) 금융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금융이 없었으면 자본주의도 없었어요. 금융이 필요하되, 실물에서 자꾸 떨어져 나가니까 문제라는 겁니다.

외환시장이 제일 좋은 예죠. 전 세계적으로 외환거래를 볼까요. 무역이나 해외실물투자를 위한 돈과 세계 외환거래량을 비교하면 1대100입니다. 1년에 3일하면 (외환) 실물 수요는 충족되는 거죠. 나머지 362일은 외환거래를 위한 외환거래입니다. 투기거래라고 봐도 좋고요. 그 돈이 몰려다니면서 우리와 같이 기축통화도 없는 나라에서 환율 널뛰기 등과 같은 폐해를 일으키는 거죠. 그래서 저는 금융을 실물과 더 근접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거죠.

Q. 지금 전세계적으로 빈익빈부익부 심해지고 우리나라는 양극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선진국도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신자유주의 때문일까요, 다른 원인이 있을까요.

장 교수: 그 문제가 전세계적으로 심각합니다. 예외적으로 룰라대통령 들어서면서 빈부격차가 개선된 브라질 같은 국가들이 있긴 해요. 하지만 대부분 국가는 악화됐습니다. 그것이 꼭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게 신자유주의입니다. 1950년대를 보면 최고경영자와 일반노동자 월급 차가 30대1이나 40대1이었는데 지금은 스톡옵션이 아니면 300대1이나 400대1까지 차이가 나요. 스톡옵션을 포함시키면 1000대1까지도 갑니다. 이건 상층부로의 소득재분배를 위한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88만원세대니 비정규직이 문제인데, 유럽에서도 100유로세대가 있지만 우리만큼 문제가 안 되는 게 일단 비정규직 비율이 우리만큼 높지 않습니다. 또 복지제도가 잘 돼 있어 비정규직이라도 기본생활이 보장됩니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이 겪는 고통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거죠. 제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될 수 있으면 비정규직 안 쓰고 고용안정을 시켜줘야 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면 복지국가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차원의 고용안정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유럽식의 복지국가를 만들어서 기본생활이 보장되게 해야 합니다.

국민들도 그래야만 진취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어요. 지난 10여 년 동안 의사, 변호사가 엄청난 인기직종이 됐습니다. 그전에도 인기였지만 외환위기 전까지는 지금만큼은 아니었어요. 경제학 상식으로 이해 안 가는 게 의사, 변호사가 늘어서 상대보수가 떨어졌는데도 되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고용이 너무 불안하다보니 그래요.

부모들도 공대나 과학자 같은 것 말고 자격증 따서 의사가 돼서 안정된 삶을 살라고 요구합니다. 개인적으로 2번이나 수술을 통해 살아나서 의사는 존경하고 고마운 직업이지만, 어느 나라도 70~80%가 의사가 적성인 국가는 없습니다. 자원 배분이 왜곡되고 있는 거죠. 신자유주의에 의한 소득불균형이나 삶의 불안감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Q. 한국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정부가 큰 권력을 가진 한편, 거기서 폐해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보면 고용안정이나 양극화 해소를 위해 국가에게 권력 주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신자유주의가 잘못됐다면 다른 대안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장 교수 : 저는 고등학교 1학년2학기까지 한 대통령 밑에서 살았어요. (웃음) 요즘 젊은 세대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겠지만, 대학 때는 사복전경과 같은 장소에서 도시락도 먹고 그랬어요. 그렇게 살아서 독재에 대해 우려도 이해합니다. 지금 정부는 형식상으로는 민주화된 정부지만 안으로는 아니다보니, 정부에 그런 권력을 주는 게 옳으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정부밖에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그걸 싫어하죠. 그들이 전문가 운운하는 것도 국민들 얘기를 듣기 싫다는 겁니다.

신자유주의가 묘한 게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반민주적인 게 많다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통한 국가 개입밖에 없다고 봐요.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규제 없이는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방향 자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그랬는데, 그러려면 왜 대통령을 한 거예요? 우리는 반대로 불행한 정치적 역사 때문에 개입과 독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걱정은 이해하지만 너무 그렇게 생각하면 반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요.

Q. 중국과 러시아가 발전과정에서 처음엔 석탄 등을 많이 써서 지구온난화가 확대된 것 같은데요, 아프리카가 러시아 모델 등을 따라간다면 전지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장 교수 :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마 지금까지의 기술패러다임으로 온 세계가 작동되면 지구 환경이 견디질 못하겠죠. 대기 중 온실가스는 추산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65~85%가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비롯된 건데, 그래놓고선 개발도상국의 산업화를 제한하면 문제가 되죠.

예를 들면, ‘동네의 식량공급이 제한돼 있고 남은 게 없으니 먹지마라’, 후진국들한테는 그렇게 들리죠. 그걸 공평하게 하려면 선진국이 후진국에게 돈을 주던지, 친환경기술을 싼 값에 공급해주던지, 친환경기술을 촉진하고 후진국 환경에 맞는 기술을 만들어주던지 해야죠. 그런데 사실 선진국들, 그런 거 안 하거든요. 그러면서 산업화 말라고 하면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부당하게 느껴지는 거죠.

또 후진국 입장에서는 해결하기 힘든 게 친환경기술 개발할 능력이 없다는 거죠. 선진국들이 역사적 책임을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정말 (지구온난화)문제가 심각해지면, 강제력으로 후진국의 산업화를 방해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쪽으로 가면 안 되겠죠.

지금 당장은 중국을 제외하고는 인도도 산업화 정도가 낮아서 그런 나라들이 산업화를 한다고 지구환경에 아주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20~30년 후면 그런 나라들도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그런 때가 오기 전에 시스템을 만들고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제가 환경문제 전공은 아니라서 어디까지 얼마만큼 해야 한다 말은 못하겠습니다.


Q. 미국에서 이번에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관료들은 올드보이들이 귀환했습니다. 미국 행정부 인선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지요. 또 개도국한테는 유치산업이 유리하고, 선진국에겐 자유무역이 유리하다면, 그 선이 어느 정도에서 정의될 수 있는지요.


장 교수 : 폴 볼커(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인)는 레이건 시절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위원을 하면서 통화주의를 앞장서서 했던 사람이고, 로렌스 서머스(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는 미 재무부 차관하면서 IMF때 우리에게 자본시장을 개방하라고 윽박지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비서실장인 람 이메뉴엘은 공식적으로 월가 헌금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모아놓고 (금융시스템을) 고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딘 베이커(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소장)라는 사람은 그걸 보면서 “오사마 빈 라덴을 데려다가 테러를 뿌리 뽑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도 한심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전과 똑같이 하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한쪽으로 쏠려 있는 사람들이라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기본적으로 회의가 들어요. 오바마는 원래 좌파도 아니지만 (정부에) 데려다 놓은 사람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집니다. 월가 이해를 대변하는 사람들이라. 상황이 (지금과) 많이 바뀌어서 그 사람들이 나가고 스티글리츠 교수와 같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 전에는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유치산업이 언제까지 유효한 거냐. 사실 이건 선진국에도 나라에 따라서는 유치산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뒤늦게 특정산업을 발전시키려는 경우에 말이죠. 가령, 유럽은 에어버스를 만들 때 엄청 보조해줬어요. 지금은 에어버스가 보잉을 뛰어넘는 회사가 됐지만, 당시 유럽 입장에서는 항공이 유치산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죠.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디에 속하는지 보면, 국민소득, 제조업 생산성 등을 미국에 비교하면 40~50%정도 되는 나라에요. 그런 나라 같으면 아직 (유치산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준이 70~80% 가면 그땐 개방해서 자극을 주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는 거고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유치산업 보호를 포기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Q. 우리 경제 현실을 보면 시장 안전판 역할을 할 공공적 성격의 금융기관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산업은행의 민영화에 대한 견해와 방향을 듣고 싶습니다.

장 교수 : 우리나라 산업은행은 영어로 하면, 개발은행(Development Bank) 입니다. 상업은행들은 길게 꿔주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단기금융을 주로 하죠. 외국에서도 개발은행 중에 산업은행은 잘 한 경우로 평가하고 있어요. 중화학공업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요. 그런 산업은행이 투자은행(IB)을 해야 한다고 요즘 얘기하는데, 걱정하는 건 IB는 산업은행이 원래 해왔던 것, 미국 IB들이 19세기말에 했던 기능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IB는 레버리지 높여서 금융을 위한 금융을 하는 곳인데, 저는 (산업은행이) 그 모델을 따르면 안 된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것을 뛰어서 민영화하는 게 능사냐는 거죠. 제가 산업은행 민영화 법안을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장기융자는 누가 할 것인지 모르겠네요. 그나마 있던 중소기업은행은 ‘중소’를 빼고 기업은행으로 만들고, 산업은행을 투기적 IB로 만들겠다니. 저는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할 기능이 뭔지, 옛날에 잘 한 게 뭔지 비춰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과거 ‘재벌과 대타협해서 공생하는 게 좋다’고 하셨는데, 가령 지금의 삼성은, 사회적으로도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당근과 채찍을 써야할까요.

장 교수 : 2003~2004년인가 SK소버린 사태 때, 재벌과 사회적 대타협하는 것을 얘기했어요. 도덕적 당위론적 차원이 아니라 현실론적으로 가능한 방법 중 전국민에게 좋은 방법을 고민하다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2005~2006년 한겨레에 기고하던 시기인데, 에버랜드 전환사채와 관련해 칼럼을 썼어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댓글에 이런 글이 있었죠. ‘외국에 오래 있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삼성은 사카린 밀수를 한...’ 2003년부터 거르지 않고 언론에 기고를 했지만 독자댓글에 반응한적 없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했어요. (웃음)

그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세상에 깨끗한 자본이란 없습니다. 서양 자본들은 식민지를 착취해서 돈을 모은 거고 온갖 부정을 다 저질렀습니다. 카네기도 사설탐정 총으로 노동자들을 쏴 죽였어요. 그렇게 따지자면 차라리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게 낫습니다. 저는 동조하지는 않지만, 일관성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소액주주 운동도 훌륭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소액주주 운동하는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래서 현실 가능한 방법 중에 뭐가 제일 좋겠냐고 생각하다보니 그런 주장을 내놨죠.

하지만 그것도 지금은 맥락이 바뀌고 있습니다. 자통법(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서 재벌들도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려고 꾀하고 있어요. 당시는 그게 아니었거든요. 당시의 맥락을 보면 법을 바꿔서 자본들한테 다른 양보를 받아내야 한다는 거였죠. 복지가 될 수도 있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올바른 행동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얘길 한 거죠. 재벌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도 없고, 이걸 이용해야 하는데, 제 가치관으로는 복지국가 받아내는 게 맞다고 본 겁니다.
 



Q. 국가재정이 악화되는데 감세가 바람직한지, 1% 특권층한테 당신네들 혼자 성공한 게 아닌데 그것을 계속 강화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각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사다리 걷어차기’처럼, 우리도 자국 이익 때문에 걷어차고 차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장 교수 : 정부는 부유층 감세 등을 통해 지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적으로 본다면 경제위기 상황에서 수요를 부양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정부재정 적자를 확대하는 게 맞을 수 있어요. 이를 위해 세금을 깎아주거나 지출 늘리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세금을 깎아주기보다는 지출을 늘려야 합니다. 경제규모에 비해 복지지출이 너무 형편없습니다. 국내총생산(GDP)대비 복지지출이 높게 봐도 9%가 안 되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평균 23%보다 낮은 것은 물론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적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낮아요. 가난한 사람들의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 정부가 감세하겠다는 것은, 부자들한테 돈을 벌 수 있는 인센티브 더 줘야 부를 창출해서 모든 사람이 잘 살게 할 거라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경제성장이 잘 된 국가는 하나도 없어요. 1978년 중국처럼 지나친 평등주의를 풀어줘서 잘 된 적은 있지만, 더 불평등하게 만들어서 잘 된 적 없습니다.

부자도 혼자 잘 나서 성공한 것도 아니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기가 진 빚이 뭔가 생각하면 무조건 세금을 덜 내겠다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겠죠?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감세하겠다고 하는 건, 이런 비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 옆집의 잘 사는 살찐 사람이 다이어트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나라도 사다리는 이미 차기 시작했습니다. 선진국들만큼 공격적이지 않지만 WTO가면 선진국 편에 서서 얘기합니다. 또 우리도 선진국의 해적판을 보고 자랐는데, 지금 중국, 베트남에게 우리 것을 베낀다고 뭐라고 그러죠. 안 그랬으면 하는 게, 역사적으로 한국의 독특한 위치 때문이에요.

지금 선진국들은 동아시아에 비해 경제성장을 느리게 해서 예전에 자기네들 국가가 가난했을 때,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지적재산권 도용하면서 성장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본도 그 세대는 이미 지나갔고 대만이나 싱가포르는 국제무대에서 정치적으로 목소리나 역할을 낼 수 없는 나라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라가 유일하게 한국인데, 한국이 그걸 안 끊으면 누가 끊겠어요.


Q. 책 마무리를 희망적으로 쓰셨습니다. 슈퍼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덕성도 다른 상품처럼 가격만 맞으면 사고팔 수 있고, 도덕적 의무도 사고팔 수 있는데, 너무 낙관적으로 쓰신 것은 아닌지요.

장 교수 : 학생들한테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요. 20세기 초 사상가인 그람시는 이런 말을 했죠. 이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현실은 냉혹히 판단하되,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조금씩이라도 발전합니다. 노예, 여성투표권 등 옛날에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이뤄졌어요.

사실 금융위기가 일어났는데도 덮고 넘어가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꾸기는 힘들지만 당장 안 되면 아이들 세대에서라도 좋아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현실을 몰라서 그러는 것보다는, 한 분이라도 (얘기를) 들어 주신다면 그런 분들이 모여서 사회가 좋아지고 바뀌지 않을까요. 



Q. 지금 정부는 비전도 없고 신자유주의를 가속화하려고 하는데, 이를 막으려면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 밖에 없는 것인지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다면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요. 

장 교수 : 민주주의에서 정부가 잘 못하면 국민의 책임이죠. (웃음) 어려운 문제입니다. MB를 찍은 많은 분들이 신자유주의 강화를 위해 그렇게 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죠. 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계속 알려야 합니다. 보궐선거나 지자체 선거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고 주변을 설득해야 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 김수행 교수님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많은 이야길 나눴습니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 운동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글 쓰고 강의하는 것이 사회적 의무라고 생각하고요. 다른 자리에 있는 분들은 다른 형태로 할 수 있겠죠. 언론사에 충고나 비난을 할 수도 있고,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 다 같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습니다. 블로그를 통해서건, 선거를 통해서건, 의사를 표시해야죠. 개인의 힘은 작지만, 그것이 모여서 전체의 힘이 됩니다. 서 있는 자리가 각자 다르지만 작은 힘이라도 하나둘 같이 모여야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습니다.

Q. 옛 말에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금융위기를 보면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위기는 모두에게 조금씩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유동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금융이 공익성을 방기하고 수익만 추구하는 탐욕을 드러낸 거죠. 이번 위기의 요인과 전개를 어떻게 보시며,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장 교수 :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한다’는 말이 사실 맞는 말인데, 현실은 그렇게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국민들이 세금을 내서 메워주고 있거든요. (웃음) 실물과 괴리된 금융을 만들어서 이 지경까지 온 겁니다. 유동성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규제를 완화해서 주고, 만든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품을 규제당국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런 파생상품들이 없어지고 소비자들도 그런 걸 안 써야 합니다.

선진국에서 의약특허 논쟁이 벌어졌을 때, 한 큰 제약회사 임원이 신문에 기고를 해서 ‘왜 우리가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해야 하냐’고 적었어요. 그러나 저는 (그 회사가) 그런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기업체보다 사회적 책무가 더 크니까 규제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IB나 헤지펀드는 사실상 은행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규제를 더 받는 게 맞습니다. 사회적 책무를 봐서도.

어쨌든 천사처럼 행동하는 정부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고민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적 낙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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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 17 - 소장판-완결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A. 말하자면, 나는 야구소년이었다.
야구를 잘했냐고? 선수였냐고? 워워. 일단 내 말부터 찬찬히 듣고 얘기하자. 

내 기억이 닿는 한, 가장 먼저 접한 스포츠는 야구.
글을 읽기 시작한 때부터 소년은, 야구라면 무조건 읽었다.
집에 배달되는 스포츠신문(일간스포츠)의 야구부터 챙겨봤을 정도.

오죽하면 그 어린 나이, 소년은 야구를 스크랩했다.
그땐 고교야구가 지금과 달리 대세였는데. 고교야구를 꼼꼼히 챙겨 오려서 스크랩북에 고이 붙이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소년. 물론 프로야구가 대세가 되면서 옮겨탔다. 

그러니까, 조그셔틀로 생의 기억을 최대한 돌려보면,
내 생애 최초의 Addiction은 야구였다, 야구. 

B. 야구를 사랑한다면, 아이러브 Baseball.
방송 프로그램 홍보가 아니라, Baseball은 소년 시절의 거의 모든 것이었다.
내 사랑, Baseball. 

학교가 끝나면 매일 같이 야구였다. 비가 오면 하늘이 미웠다.
아버지를 졸라 야구 장비를 마련하고 끝내 유니폼까지 맞췄다.
(어린이날 선물로 받은 회색유니폼에는 'LOTTE'라는 딱지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프로야구를 보기 위해 가족들은 종종 구덕야구장을 찾았다. 와우, 야구장, 참 크고 멋있다. 소년에겐 야구장이 그랬다.   

한때 나는 동네야구계에서 군림(?)했다.
동네 형들이 '야구하기'를 그닥 좋아하지 않은 까닭에, 내가 왕고였다.
어린 동생들을 겁박(?)해 에이스 노릇까지 하면서 치고 달렸다.
물론 포볼공장 공장장이었다. 동생들은 투덜거렸지만, 끝까지 '쌩'깠다. 

지금은 그런 모습 보기 힘들지만, 참 많이도 도망다니고 어른들에게 혼났다.
아파트 유리창을 깨고 차에 흠집을 냈기 때문이다.
밥보다 야구였다. 조명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공을 던졌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때, 세상은 'Baseball Heaven'이었다. 

C. 물론, 즐김이 우선이었다.
무조건 야구가 좋았던 시절. 그러다 불이 붙었다.
내 자연스레 응원하던 연고팀 노떼 자얀츠(롯데 자이언츠)가 1984년 코리안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 완전 극적인 우승이었다. 

마지막 7차전에서 역전 3점홈런을 때린 유두열 아저씨.
내 같은 반 급우의 외삼촌이었다. 녀석까지 덩달아 영웅이 됐다.  

Champion. 그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처음 알았다. 아, 세상엔 이런 희열도 있구나. 그리고 8년 후, 다시 희열이 찾아왔다. 

1992년, 서울에 올라온 촌놈이 한국시리즈 5차전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노떼와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의 경기.
끝내줬다. 4승1패, 다시 한 번 Champion. 
아, 나의 10대는 그렇게 행복하였노라. 


D. 야구만화, 신난다 재미난다.
야구소년에게 야구보기, 야구하기만큼 좋아하는 것이 생겼는데, 그것이 야구만화.
생애 첫 만화부터 야구만화였다. 이현세 작가의 ≪제왕≫.
(그전부터 만화를 봤지만, 만화방에서 본 최초의 만화가 ≪제왕≫이었다!)

만화방 골수분자였던 나는, 야구만화라면 '닥치고 본책 사수'였다.
내용 따위, 작가 따위 거의 가리지 않고 넘겼다. 이유 따로 있나, 야구앞에.

그렇게 당시 나의 Desire는 야구였다.
그렇다고 정식 선수가 되길 바란 것은 아녔다.
난 이미 동네야구 선수였고, 야구인이었으니까! 누가 뭐래도! 

세상, 아니 한국의 모든 야구 만화를 섭렵하다가 만났던 이 작품.
≪H2≫!

훅~ 갔다.
이전까지 본 모든 야구 작품들을 무위로 돌릴만큼의 강력한 포스!
야구 만화의 모든 것. 세상 모든 야구작품을 합쳐도 따라오지 못할 폭풍간지.

내 생애 가장 뭉클하고 짜릿했던 야구만화였다.  
아니 '야구'를 빼도 무방할 정도의 내 생애 최고의 만화를 만났다. 심봤다~~~

E. 히로(≪H2≫의 주인공)는 나의 영웅(Hero).
깜빡 지나친 첫사랑에게, 
"너한테 야구를 빼면 뭐가 남니"라는 말을 듣는 '본투비 야구소년', 히로. 

나는 히로에 푹 빠졌고, 내 모든 감정을 이입했다.
아마 당시 내 감정은 이랬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히로로 태어나고 싶다.' 

야구소년 히로가, 야구인 준수에게 미친 Effect는 예사롭지 않았다.
말하자면, 히로 Effect.   

한 번 보자.
그의 절친, 고교야구 최강 타자 히데오의 야망 스케줄은 이렇다. 

* 갑자원 - 프로야구 - 신인왕 - 올스타 출장 - 개인 타이틀. 팀우승 - 많은 기록을 남기고 은퇴 - 해설자에서 감독까지 

와우~ 고교야구 스타 플레이어이자 최고 타자다운 스케줄이다.  

어허, 하지만, 나의 히로는 상대적으로 야망(?) 없는 플레이어다. 

 "뭐, 야구야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할 거지만. 난 동네야구든 뭐든 괜찮아." 

'야망의 세월'따윈 필요없는, 허허실실 낭만적 한량 같으니.  
동네야구라도 상관없다는 그 태도. 나는 그 태도가 한없이 좋았다.

더구나, 비키니에 혹하고, 성인잡지라면 눈 반짝이는 십대의 야구소년이라니.
(<- 흠, 이건 십대의 나와 아주 비슷했다!)   

서울이라는 정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한다는 강박이 짓누르던,
야망을 채우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경쟁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시절에,
아, 그러지 않을 수도 있구나.     

물론, 히로는 "야구하고 있으면 꽤 멋진" 야구소년이자 남자다. 

오진때문에 잠시 멈췄던 야구 엔진에 다시 시동을 걸면서,
히로도 히데오와 똑같이 이런 딱지를 붙인다. 

목표
갑자원 

히로는 말하자면, 야심가다.
히데오처럼 어떤 지위를 확보하거나 성취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야구가 좋아서, 어떻게든 야구를 하는 일이 점지된 소명임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래서, 히로가 되고 싶었다.
나의 행보도 조금씩 변모해갔다.
히로가 나의 영웅인 까닭이다.

F. ≪H2≫, My Favorite!
히로 덕분이다.
히로에 푹 빠진 덕분에 내 마음이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다.
재미에서도 ≪H2≫는 극강이다.
감동에서도 ≪H2≫는 작렬이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그래서 되레 흠좀무(흠 좀 무서운걸)?  

감히, 아다치 미츠루 작가는 천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그의 야구만화는 보는 이를 들끓게 만든다. 감정을 엄청 흔든다. 

사실 그의 만화 모든 작품은 내용이 빤~하다.
딱 보면 답 나온다. 구도 또한 진부하다.
그런데도, 그의 세심한 터치는 그 모든 단점을 깔아뭉갠다. 

≪H2≫는 아주 유명한 작품이고, 좋아하는 사람도 엄청 많다. 
그럼에도, 혹 당신이 이 작품을 안 봤다면, 무조건 무조건이다. 

하루까는 히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후회되니? 히까리를 히데오한테 소개한 것." 

히로는 곰곰 생각하지만, 나는 일말의 망설임없이 말할 수 있다.
"후회하지 않아." 

아니, 뭘 후회하지 않아?
당신에게 이 작품을 소개한 것!
내 사랑을, 내 Favorite을 당신에게 소개한 것!!
 
G. 다시 ≪H2≫를 꺼낸 것은,
'이제 겨우 플레이볼 했을 뿐이야'라는 글 덕분이다.
이 글에서 나는 정말이지 어찌할 수 없는 무한 희열을 찌리릿.
꺄오~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그 블로거의 글을 나는 무척 좋아하는데, 
내 사랑하는 ≪H2≫를 그 역시 좋아하다니!

내가 마음에 품고 소중하게 간직한 것을,
누군가 역시 그렇다고 하면 그 사람이 무지 친근해뵈고, 가까워진 그런 느낌.
그가 나와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게 괜히 흐뭇해지는 그런 것.

그러니, 그가 말한 ≪H2≫에 대한 이 이야기도 덧붙여야겠다. 
"청춘이라 부르기에도 너무 아깝고 여린, 그래서 더 눈부신 시절의 이야기.
사랑과 우정 '사이'를 그득히 채우고 있는 백만 번의 스윙 같은 만화다."

동의한다.
그러니 그 사람도, 나도 Guarantee한다! ≪H2≫를.
당신도 ≪H2≫를 보면, 동참하고 싶을 게다.
아니면? 그럼 당신은 우리와 다른 족속인 게지.ㅋ  

어떤 작품이든,
사귀어 보니 겉만 멋있는 게 아니었던 히까리처럼 추첨운이 따를 수도 있고,
하루까처럼 멋있다싶은 사람은 거의 다 겉만 번지르르한 뻥튀기일 수도 있지만,
이번엔 뻥튀기가 아닐거야.
아, 내가 guarantee한다니까! 

H. ≪H2≫의 'H'는 히로와 히데오의 이니셜, '2'는 두 사람을 가리킨다.
두 영웅은 확연히 '다르다'.
어느 누구를 응원하고, 누구에게 감정이입할 것인지는 당신의 몫이다. 

물론, ≪H2≫, 히까리와 하루까를 가리킬 수도 있다. 

짧은 가을 떠나보내고, 예기치 않게 겨울이 훌쩍 다가온 시간.
사랑으로 받은 상처, 사랑으로 치유하라는 말이 있듯,
야구로 받은 상처, 야구로 치유하는 것일까. 

내 손에는 ≪H2≫가 쥐어져 있고,
나는 다시 플레이볼할 내년 시즌을 고대하는 '기다림 모드'로 바뀌고 있다.

내 가을야구는 안타까운 참사로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야구인이다. 

그래서 나는,
야구는 9회말 2아웃에서도 역전될 수 있음을,
야구는 3할만 치면 엄청나게 잘 치는 것임을, 
야구는 시즌이 끝나면 다시 시즌이 올 것임을,
여전히 믿고 있다. 

나는 이 긴 겨울을 버티고 견딜 것이다.
죽지 않는다면, 내년 시즌까지 존재한다면,
나는 여지없이 호들갑에 오두방정을 떨어대면서,
당신도 익히 예상하듯, 이리 씨불댈 것이다. "봄은, 야구와 함께 온다." 

그 모든 것은,
야구 뿐 아니라, 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생이 움푹 파인 순간,
≪H2≫의 그들이 그랬던 마냥,
나는 당신 손을, 당신은 내 손을 잡는 것임을, 믿고 있다. 

I 믿 You! 

H2.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   
많은 사람이 알고, '이제 겨우 플레이볼 했을 뿐이야'에서도 언급됐다시피, ≪H2≫의 자장에서 비롯된 노래다. 

덧붙이자면, 그 노래 가사는,
히로가 히까리에게 느끼는 감정,
히까리가 히로에게 느끼는 감정,
히까리가 히데오에게 고백하는 감정 등으로 엮여있다.

≪H2≫를 보고,
<고백>을 들으면 그 노래 더 팍팍 꽂힐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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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아리에티 - The Borrowe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내 심장의 일부를 말하기 전, 이 얘기부터 하지요.

얼마 전,
한때 야큐계를 풍미했던, 구대성(이라 쓰고, 대성불패라 읽는다!)의 은퇴 경기.


 

아, '쿠옹'도 이렇게 떠나는구나.
우리의 한 시절도 이렇게 접히는구나.
'대성불패(臺晟不敗), 안녕', 을 마음속으로 외치던 날입니다.


헌데 이날,
나를 '가장' 뭉클하게 만든 건, 한 여성팬의 피켓 문구였다지요.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가슴이 찡찡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극강의 상찬이 있을까요. 흑ㅠ.ㅠ
생을 송두리째 야큐에 바친 야큐선수의 은퇴경기에 피켓문구로서 가장 좋은 예.

'모태야큐'가 아니라면, 친구의 꼬드김이 아니라면,
야큐를 보고, 야큐장을 찾게 된 어떤 계기가 있을 겁니다.

야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이가,
TV에서 야큐 경기가 펼쳐지면 '대체 뭐가 재밌다고 저런 걸 보나'싶던 이가,
어느 순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야큐에 빠지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떤 특정 선수의 활약상 때문이기도 할 것이라고요.

그 여성에겐 그 대상이 '대성불패'였던 것이죠.
그 어떤 수치나 수상 경력보다 은퇴선수의 심금을 가장 울리지 싶은 저 말.
"당신 때문에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아, 저요? 전 모태야큐, 모태노떼(자이언츠)였다지요.^^)



미안. 서론이 길었죠? ^^;

이 영화, <마루 밑 마루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The Borrowers).
보고선 쿨쩍훌쩍 했습니다.ㅠ.ㅠ 조금 있다 얘기하겠지만, 쿠옹의 은퇴에 최고의 상찬이었던 그 피켓문구가 자연스레 떠오르더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신상입니다.

메리 노튼의 소The Complete Borrowers(국내제목 :《마루 밑 바로우어즈》)가 원작이죠. 하야오 할아버지가 젊은 날 읽고, 품고 있던 아이템입니다. 40여년을 삭힌 내공, 과연 하야오 철학과 잘 맞물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기획과 각본만 하야오 할아버지가 맡았다는데, 지브리의 최연소 감독인 서른일곱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연출은 하야오 할아버지의 자장에 있습니다. '하야오'라는 이름이 여전히 각인된 작품이라는 얘기죠. 
 


 

자, 이 초상이 바로 아리에티입니다. 보는 순간, 훅~ 갔습니다. 곧 '여신 포스'를 발산할 것 같은 요정 포스의 그녀는, 14살입니다. '아니, 14살짜리가 왜 저래?'하면서 같이 보던 친구에게 툴툴(?)거렸습니다. 성숙하다못해 섹시하다니. 요정은 저런 거야, 응?


물론, 그렇게 아리에티가 그려진 것은 다 이유가 있더군요. 씨네21의 김혜리 기자가 전한 아리에티 탄생의 비화(?). "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은 “<아리에티>를 연출하기로 결정한 다음 프로듀서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처음 받은 주문은 아리에티를 아주 관능적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며 미소짓는다. 뚜렷한 로맨스 일화가 없음에도 아리에티의 이같은 분위기는 영화에 줄곧 첫사랑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아하, 아무렴. 아리에티의 관능에 매혹되지 않는 자, 유죄!

아리에티는 10cm 작은 생명입니다. 현재 지하 700m 갱도에 갇힌 칠레의 33인 광부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름 8.8cm의 구멍보다는 약간 큰 10cm. 그들은 크기만 다를 뿐, 사람의 형상과 똑같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되죠. 그들에게 인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위험한 존재'거든요.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한 것도, 인간에게 존재가 '뽀록'났기 때문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일까요. 자신들의 종족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리에티 가족. 걱정작렬하는 엄마, 아빠는 아리에티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인간에게 틀켜선 안 돼. 그리되면 우리 종족은 멸망이란다. 멸족 여부를 고민하는 그들의 대화를 듣자니, 나는 인간(!) 땜시 멸족(멸종)한, 혹은 멸족 위기에 처한 생명(들)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숭악함 때문에 사라져 가는 지구의 어떤 이들.

괜히 미안해집니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의 탈을 쓰고 있잖아요. 만물의 영장'이라며 지구의 쥔장처럼 행세하는 인간은, 때때로 수시로, 기고만장에, 안하무인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말, 이 애니에서는 실감납니다. 작은 생명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은 한 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오롯이 '공포'라지요. 아,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에겐 공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우리의 요정, 아리에티의 눈으로 인간남자(소년) '쇼우'를 처음 봤을 때의 방식부터, 시계의 초침소리는 어찌나 큰지, 공포감 작렬입니다. 문 여닫는 소리도 천둥치는 것 같고, 작은 생명들이 부엌과 방, 테이블을 오갈 때의 거리감과 모험도 장난이 아닙니다.

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죠.
익숙한 우리네 인간 세계임에도, '아, 저런 시각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다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요구합니다. 그것 참, 나쁘지 않습니다. 묘합니다. 짜잔.

그 건 역시 지브리, 곧 하야오 할아버지의 대부분 작품이 관통하는 인간에 대한 관점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어요. 인간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숭악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성찰을 은연중에 요구하기도 하는.

아마, 이 애니를 보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다보니 극중 악당 비스무리한 역할을 맡은 집사 여자를 통해서일 겁니다. 아마 가장 보통의 인간을 대변하는 존재일 그녀는, 딱히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캐릭터지만, 어느덧 감정이입이 된 아리에티 가족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탓에 그리 느껴지게 됩니다. 그녀를 통해 어떤 죄의식도 없이 다른 생명(심지어 같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아,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야~



이런 것도 있어요. 아리에티와 그 가족이 인간에게 '빌리는' 각설탕, 티슈, 빨래집게 등의 '전리품'은 우리의 일반적인 용도와 달리 활용이 돼요. 아하, 세상 모든 것의 용도가 하나로 묶인 것은 아니구나.

뭣보다, 아리에티와 그 가족의 생존방식인 '빌리기'에서 나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감탄했어요. 찌리릿. 커피 한 잔 찐~하게 마시고 싶더라고요. 애니의 원제, 원작의 제목을 잠깐 볼까요? '빌려서 생활하는(더부살이)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 혹은 '빌려 쓰는 사람들(The Borrowers)'.

아리에티와 가족은,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훔치'는 행위를 '빌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것을, 아주 조금씩 빌려 가면서 생존을 유지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인간에게 큰 손해가 닥치는 것은 아니죠. 있는 둥 없는 둥,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들에게 나눠주는 형국입니다.


이런 빌리고 빌려 주는 관계에서, 인간과 자연 혹은 세계가 지닌 관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 빌려 쓰는 주제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존재인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미래로부터, 어떤 생명들로부터도. 작은 생명이 인간에게 그러하듯, 인간은 자연(지구)로부터 그러하지요. 인간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아리에티 가족과 자연 모르게 필요한 것을 빌려 가는 인간들.

김혜리 씨네21 기자는 또한 그것을 '이삭줍기의 도덕'이라고 말합니다.
"가진 것 없고 약한 사회 구성원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남아도는 재화를 공짜로 취해 생존을 유지하도록 용인하는 세계가 <아리에티>의 이상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빌리는 일과 훔치는 일이 다름을 수차례 강조한다. 한데 ‘빌리기’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아리에티>는 문명의 이기가 필요없는 수렵과 채취의 야생으로 돌아간 소인 소년 스피라를 통해 쓸쓸한 대답을 제시한다." 



 

솔직히 나는 의심해요. 지금 이 시대, 더 이상 '빌리기'와 '이삭줍기'가 힘을 발할 수 있을까. 한 예를 들어볼까요? 한때 우리에게도 '대지의 여신'이 있었잖아요. 여신의 뜻을 받들고 자연의 힘을 빌어 먹을 것과 살 곳을 빌려서 살았죠. 그런데 지금 시대는 여신을 경멸하고 아예 겁탈을 했죠. '소유'라는 명목으로 빌리기가 아닌 훔쳐 버리고야 만 시대.

그리고 다르다 싶으면 무조건 박멸하고 내쫓고야 말지요. 집사 여자의 행태처럼.해충박멸 회사까지 불러들인 그녀를 보면, 기업(자본)을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이른바 '문명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집시 추방 조치를 보세요. 21세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아닐까요. 날짜만 바뀌었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직 20세기일지도 몰라요.

많은 것이 사라졌으며 멸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소년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잔인하게 대놓고 말합니다. "너희는 곧 멸종할 거야. 그건 섭리야." 그런데, 그 말이 꼭 인류를 향해 하는 말처럼 들린 건 왜일까요. 그 말을 내뱉은 인간소년 쇼우야말로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잠깐 <마루 밑 아루에티>의 결말에 도달해서,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이 애니는 인간의 위협으로부터 아리에티 가족이 무사히 빠져나가는 '해피 엔딩' 구조를 취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더라고요. 이 애니는 느슨하게 뻔한 이야기 공식이 아닌 나름 반전(?)의 형태를 가지거든요.



자, 생각해 볼까요. 인간이 아닌 작은 생물의 세계를 그나마 긍정하고 함께 살기를 바랐던 쇼우. 하지만 그는 큰 수술을 앞두고 이미 생의 의욕을 잃은 조숙한 아이입니다. 아리에티 가족이 '인형의 집'을 새로 얻게 되지 않을까, 허술하게도 생각했으나 그들은 쇼우의 집을 아예 떠납니다. 더 이상 '인간에게 빌리기'를 거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자연주의적, 생태주의적 삶을 사는 듯한 스피릿을 따라간 것을 보면 말이죠. 

인간과 공존하기보다 자신들만의 종족과 뭉쳐 살기를 선택한 아리에티 가족. 결과적으로 인간이 그들을 내쫓은 셈이죠. 그나마 공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인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멸종 운운하다가 던진 이 말. "죽는 건 너희가 아니라 나야." 어쩌면, 이는 지브리가, 혹은 하야오 할아버지가 인간을 향해, 더 이상 희망으로 포장된 감언이설에 휘둘리지 말자고 건넨 말 아닐까요. 죽는 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야. 된장, 식빵~ 




 

하지만, 절망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희망이 그렇듯.
대성불패 쿠옹을 맨 처음 꺼낸 이유도 이젠 말씀 드리죠.
아리에티 가족이 새로운 곳에서 자신들의 종족을 만나 잘 정착했는지, 쇼우가 수술을 잘 마쳤는지는 모릅니다. 이 애니는 그것까지 펼쳐 보이질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점을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이 불친절함(?)이 외려 좋았습니다.
"인간이라고 다 무서운 건 아니"라며 인간소년 쇼우를 옹호하던 아리에티의 말에서 '절망의 구'에서 탈출하려는 소수의 모습을 봤다면,

떠나는 아리에티에게 쇼우는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아리에티 고마워. 너 덕분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

 

죽기로 결심한, 죽을 것을 예감한 누군가도 아주 작은, 10cm에 불과한 생물의 존재에서 힘을 얻을 수 있구나. 8.8cm의 지름도 33인을 살게 하지 않는가. 살아가야 할 이유,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은, 당신이 잘 볼 순 없지만, 당신 옆의 하찮은 무엇일 수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속물이자 평범한 악이었던 내가 지금까지 건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건강하게 이 사회에 썩어 들어가길" 바란 그녀의 말이었듯 말이죠.

쇼우가 수술을 잘 마치고 살아있을까,를 내게 묻는다면, 음, 고개를 도리도리흔들 것 같아요. 매정하고, 냉정한 답변일지 몰라도,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하지만, 아리에티가 수술을 앞둔 그에게 준 '살아갈 용기' 덕분에 그저 맥없이 눈을 감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니 몰라도 좋을 것은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 작은 존재가 준 선물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아울러 아리에티 가족은 몇 안 되는 자신의 종족들과 계속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아리에티가 멸망 운운하던 쇼우에게 했던 이말처럼 말이죠.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다들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 아리에티 가족을 보면서 새삼 생각했습니다.

잘 보이진 않아도, 자그만 생물들이 지구상에는 무지하게 많고 그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구나. 잘 빌려주고 잘 빌려야겠구나. 우리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인간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무수한 점들에 의해서 꾸준히 돌아가는구나.

아, 혹시 멀쩡하게 있었는데, 없어진 게 있다면 아마 바로우어즈가 빌려간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세효~ 아, 애니를 본 뒤 후유증이라면, '내 심장의 일부, 아리에티'가 침대 밑에 혹은 의자 밑에 행여나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는 건데, 아파트는 바로우어즈가 살기엔 참 좋지 않은 환경이에요. 된장. 

* 참, 장난감에 숨을 불어넣은 픽사의 <토이스토리3>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픽사와 지브리, 미국과 일본, 더 크게는 서양과 동양의 어떤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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