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서울대 교수 2명. 특히 한 명은 15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저자.

 

뭐, 스펙 하나는 끝내주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합인 것 같다만, 

 

그 잘난 이력 때문인지,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끊임없이 번들번들하게 난 척이 되고, 멘토질을 해대는데 공허하다.

그놈의 절친 타령은 뭘 그리 해대누. 그들과 절친이라고 눈도장이라도 찍으면 뭔가 달라져? 

 

청춘멘토 김난도? 사랑멘토 곽금주?

그냥 잘났다. 그뿐이다. 감흥, 없다. 감동, 없다.

 

그 공허함 속에서도 유독 빛나는 존재가 있으니. 다행이지.

 

유진 박. 눈 앞에서 유진 박의 공연을 본 것은 생애 처음인데, 그만 뿅 갔다. 

 

음악이 나오기 전, 수줍음과 서툶이 지배하던 유진 박은 음악과 함께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아니, 그는 악기다. 바이올린 그 자체다.

 

 

유진 박은 음악과 무대를 완전히 장악한다.

약간 벌어진 입. 음악과 완벽하게 조응하는 몸짓. 관객들을 향한 소통.

감동과 감흥은 그런 것이다.

 

서번트 증후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것 아닌 무대에서 그 자신을 연주하는 품새다.

 

유진 박, 멋지고 아름답다.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서울대 교수들이 내뱉는 공허함보다,

유진 박의 텅 빈 음악이 봄밤을 감동과 감흥, 흥분으로 감싼다.

 

역시, 음악의 힘은 세다.

당신에게도, 유진 박을 권한다.

기회가 닿는다면 놓치지 말고 만나길 바란다.

왜, 유진 박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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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

 

아침에 어머니에게 집안의 세 남자가 장미꽃 한 송이씩 안겼다.

 

어머니가 함박 미소를 짓는다. 이것들이 미쳤나? 생각하셨을 거다. ㅋ

 

그리고, 출근. 마을 사람들에게, 아니 마을 여성들에게 장미 한 송이씩. 

 

역시나 미소가 방긋방긋. 꽃커피도 한 잔씩.

 

꽃이 이 여성들을 웃게 했을까? 아니면 커피가?

 

아니면 꽃을 든 남자인 내가 미소 짓게 만들었을까?

 

 

글쎄 나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는 건 이것 하나.

 

구럼비 바위를 발파하고 이 세계를 잔인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남자들이다.

 

씨바, 꽂 같은 세상이다.

 

남인숙 작가 말처럼 제 정신 박힌 남자들 많지 않은 세상이다.

 

꽃보다 남자? 아니 수컷보다 꽃!

 

쉿, 이건 비밀인데, 나는 여자(들) 덕분에 산다. :)

 

여성의 날에도 아랑곳 없이, 남자들은 발파작업에 몰두한다. 

구럼비는 계속 운다. 눈물이다.

반성할 줄 모르는 수컷들 때문에 세상은 계속 슬프다.

 

이게 다, 엠뷔 십때끼 허~접같은 경우 때문이다. (알흠다운 김꽃두레 톤으로 읽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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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

구럼비가 우는 날. 43톤의 폭약으로 기어코 울리고야 만다.

무식하고 잔인하다. 야만적이다. 

 

64년 전 4.3항쟁을 재연하고야 만다. 

구럼비가 운다.  


기형도

그날은 (기)형도의 기일. 23주기인데. 

 

<꽃> 한 편 띄운다. 구럼비 때문이라도 꽃 한 잔 생각나는 봄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구럼비 때문에라도. 

 

 

내 

靈魂(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앓는 그대 庭園(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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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무지개 2012-03-08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면하면 안되는데..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되는 그런 아픈 날이네요..

책을품은삶 2012-03-08 19:37   좋아요 0 | URL
이 아픔. 잊지 않아야죠. 반드시!
 

인류와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역사를 바꾼 위대한 위인이자, 

같은 해(1809년) 같은 날(2월12일) 태어난,

(찰스 로버트) 다윈과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일보다,

 

어쩌다 그들과 같은 날짜에 태어난 나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보다,

 

오늘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흔드는 것은, 휘트니 휴스턴.

 

그러니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듣는 것밖에 없다.

 

듣고 또 듣고 흥얼거리고 또 흥얼거린다.

 

케빈 코스트너가 묻는다. "YOU, OK?"

나는 답한다. "I'm Not OK!"

 

나도, "Wait!"라고 외치고 싶다. 휘트니를 향해.

아직 휘트니는, 그 목소리를 박제할 때가 아니다.

나는, 우리는 세기의 목소리를 잃고 말았다.

 

1992년 12월의 겨울, 스무살이 채 되기 전의 어린 준수는,

'보디가드'가 되고 싶었다. 그땐 그랬다...

 

안녕, 휘트니...

당신의 노래가 때론 부서지고 흩어진 내 마음을 보듬고 지켜줬다. 

그러니, 안녕, 내 마음의 보디가드여...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듣는 것. 당신의 목소리와 노래를 듣는 것.

그것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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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2-02-1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은임의 FM영화음악 1992년 12월 달의 방송을 듣고 있는데 바로 이 노래가 나왔어요. 참 아이러니하고, 참 슬프고, 안타깝고 그러네요. 음악은 여전히 좋건만 사람이 아까워요...ㅜ.ㅜ

책을품은삶 2012-02-15 00:04   좋아요 0 | URL
아, (정)은임 누나의 이름을 함께 거론하시다니요..ㅠ.ㅠ
휘트니 누나가 하늘에 가서, 은임 누나에게 방송 얘길 꺼낼지도 모르겠네요.

음악만 남았네요.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의 슬픔도 함께...
 

운명을 넘어 혁명을 꾀한 사진 예술가, 티나 모도티

 

멕시코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를 다룬 영화, <프리다>. 섹시한 배우로 각인됐던 셀마 헤이엑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프리다 칼로를 표현함으로써 화제가 됐었다. 프리다에 가렸지만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다. 프리다의 연인, 디에고 리베라가 아니다. 극중에서 프리다와 춤을 췄던 여자. 자유분방하면서 혁명을 꿈꾸는 사진가로, 애슐리 주드가 연기했던 티나 모도티.

 

 

나는 <프리다>처럼 <티나>라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가이자 사진작가, 그리고 사랑의 화신이었던 티나 모도티를 다룬. <프리다>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듯, 티나를 다룬 영화는 그녀를 되짚어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되짚어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혁명. 닥치고, 혁명! 


티나 모도티, 독립적이면서 사랑을 갈망했던 여인


에드워드, 부드럽게 당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봅니다. 오늘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당신을 느낄 수 있게. 여기 홀로 앉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오. 에드워드, 당신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는지! 아침까지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베고 누워 있었답니다.

그런데 날 깨운 게 그것의 희미한 향기였을까요? 아니면 거기서 발산되는 듯한 당신과 내 욕망의 혼? 그래요. 어떻게든 달성하고픈 욕망에 취하면서도 그걸 두려워하고 미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이겠지요.

(《티나 모도티》, p.86, 티나 모도티가 에드워드 웨스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8.16~1942.1.5)는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나 사진에 입문했다. 1919년이었다. 앞서 그녀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로보와 사랑했었다. 로보를 통해 많은 예술가를 만나 예술과 사회, 인문을 습득했던 그녀였다. 멕시코 문화를 보길 원했던 로보가 현지에서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녀는 웨스턴의 모델이자 조수가 됐다. 이어, 그의 뮤즈이자 아내가 됐으며 티나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사진관을 운영했고, 멕시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혁명 후기 멕시코 문화계의 유명 인사였다. 프리다와 디에고를 만나게 해준 이도 티나였다. 당시 프리다는 티나를 숭배했던 소녀였다. 문화계 모임에서 티나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했다. 허나 웨스턴은 결국 그녀를 떠났다. 자신의 아들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에드워드가 떠난 뒤, 멕시코에서 사진의 길을 걷고 있던 1928년. 그녀는 쿠바출신의 망명정치가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를 만난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연인이 된다. 티나는 특히 멜라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그녀는 사랑이 인도한 길을 자연스레 따랐다. 로보가 알려준 예술, 에드워드가 보여준 사진, 안토니오가 제시한 혁명. 그 모든 것이 티나의 것이 됐다. 티나는 사랑 덕분에 존재했던 것일까. 티나를 사랑을 자기 것으로 흡수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듬해, 안토니오는 정적들로부터 암살당했다. 티나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도 악의적이었다. 화려하고 이지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을 향한 세상의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정적인 이미지에 저항해서 싸우고 싶었다. 한 번은 “미국에선 美가 모든 것의 기준”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안토니오의 저격은 그녀에게 팜 파탈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미지의 저주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혁명을 향한 전진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사랑과 혁명은 그래서 통한다. 사랑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티나 모도티, 운명과 싸워 혁명을 꾀했던 여인

 


티나는 언제나 주어진 운명에 싸워야했다. 그녀의 외모에서 덧씌워진 부당한 이미지도 그랬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열여섯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재봉부터 시작했다. 연극·영화에도 몸을 담았고, 사랑을 통해 예술가?작가들과 교류했다. 주어진 대로만 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예술이 혁명을 도울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티나의 예술세계에 혁명은 중요한 오브제였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가난한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멕시코에서 그녀의 예술세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의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이 티나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를 도덕적 감정의 핵심으로 꼽았는데, 티나의 작품은 그런 도덕적 감정을 동반한다. 다큐멘터리적 요소 없이도 클로즈업해서 찍은 ‘손’시리즈. 그것은 예술과 혁명을 동시에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에 거주한 1923~1930년에 찍은 250여 컷에 잘 형상화돼 있다. 멕시코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시기, 그녀는 그런 시대를 온몸으로 흡수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에 1929년 12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첫 개인전. 노동자들을 위한 관람시간을 특별 배려했고, 마지막에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연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녀의 혁명이 계속 꽃피진 못했다. 전시회를 마치고 6주 후 돌아온 것은 멕시코 정부의 추방 명령이었다. 그녀가 속한 사회주의 단체에서 대통령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혐의를 벗었지만 그녀는 멕시코를 떠났다.

 

사진에 우호적이었던 독일이 다음 행선지였다. 케테 콜비츠, 게오르그 그로츠 등과 교류했고, 그들 모임의 회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치가 있는 독일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뭣보다 그녀가 사용하는 그라플렉스 카메라의 필름을 구하기 힘들었다. 독일에선 라이카 카메라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어 그녀가 찾은 곳은 모스크바였다. 그녀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로버트 카파, 헤밍웨이 등과 예술적 교류를 나눴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비토리오 비달의 혁명동지로 활동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등과 정치적 혁명 동지애도 나눴다.

 

혁명은 여전히 그녀의 오브제였다. 스탈린의 비밀경찰로도 활동했지만, 권력투쟁과 스탈린의 편집증에 질린 그녀는 소련을 떠나 스페인 내전 지원을 나섰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그녀는 사진을 접었다. 자신의 혁명적 이상과 배치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번역과 공산주의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2년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였다. 마흔 다섯. 이른 죽음이었다.

 


티나 모도티. 재단사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사진작가의 모델로, 모델에서 사진가로, 사진으로 혁명을 담는 투사로,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가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세상을 누빈 여인. 그녀에게 사진은 시대를 기록하는 도구였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시대정신을 내용으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의 작품은 사후 더욱 큰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의 소더비 경매. 그녀의 작품 <장미>는 16만5000달러에 팔렸다.


시절은 점점 더 노동자에게 각박해진다. 99%의 피눈물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예술과 혁명의 접점을 본 티나 모도티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세기가 평가절하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에게서, 혁명을 되짚어보자. 행동하자. 점령하자.


사랑과 혁명은, 각자의 다른 이름이다.


(※참고자료 : 《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해냄 펴냄), 위키백과, 한겨레, 티나 모도티 팬사이트(http://cinemarx.cafe24.com/tina), 위민넷)

 

 

[문화예술잡지 뷰즈 21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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