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니쉬 아파트먼트 - 할인행사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 로맹 뒤리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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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맞이했던 설날, 생각해보자. (싫다고? 동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 ‘명절’을 명분삼아 ‘고향’ 가는 길. 찾아갈 고향이 있건, 그렇지 않건 온 나라가 들썩들썩. 솔직히 고향 가는 길이 때론 ‘고역’이라는 사실, 가본 사람은 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잠시 떠나 ‘고향’을 갈구한다. 어떤 ‘이끌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무감’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안식처보다 전쟁터가 되는 고향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고향, 지긋지긋하다. 가느니 안 가느니만 못하다. 고향이 때론 지옥이 되는 풍경. 안식처 아닌 전쟁터가 되는 풍경. 뭐,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일년에 두 번 있는 민족대이동으로 사람들은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TV뉴스 앵커의 멘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그냥 듣기 좋으라는 덕담이다. 물론, 내가 ‘시티 키드’로 살아와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이, 솔직하게 말하자. 설날은 내게 그냥 ‘긴 휴일’일 뿐이다. 그것이 다다. 다른 건 없다. 물론 ‘고향을 다녀왔기 때문’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나와 달라서 그렇지, 인정한다. 


좀 더 외연을 넓혀보자. 고향에서 조국으로. “대~한민국”. 익숙하고 입이 기억하는 외침. 그건 일종의 이벤트다. 조국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나 애국심의 발로? 천만에. 그건 그저 (응원)구호다. 굳이 그 안에서 조국을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란 말이 아직 유효하다지만(나는 아니라서 뭐!), 요즘은 “이민가고 싶다”는 쪽이 대세가 아닌가 싶다.((박)그네가 이리저리 설치는 것 보면 짱나는 사람 참 많더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국적이기에 안고 살아갈 뿐, 전통적 의미의 ‘국가’(nation)는 구닥다리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국가’라는 개념이 새로운 시험대에 들어선 유럽의 풍경을 다룬다. ‘어느 나라의 나’보다 ‘개인으로서의 나’에 비중을 두는 시대. 유럽은 또 하나의 시대적 징후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화두다. 과연 유럽인들에게 국적은 무엇이며 ‘유럽’이라는 한 몸뚱이는 개인의 삶과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멀리서 바라본 유럽은 ‘국적’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립했다. 물론 아직도 과거의 국적 개념도 살아 있다. 1953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6개 나라에서 시작된 유럽통합체의 시발은 1999년 유로화라는 통화통합을 거쳐 2004년 5월 1일, 25개국 4억5000만명의 ‘한’ 유럽으로 확대됐다. 유럽연합, EU의 탄생. 철강과 석탄 시장의 통합을 근간으로 한 경제통합체는 어느덧 국경을 없애고 사회와 문화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물론 문제, 많다. 통화만 통합하고 국경 개념만 희석시켜서! 유럽의 재정위기가 이를 방증한다.) 


어쨌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이런 시대를 포착한다. 제목은 프랑스 속어다. 여러 문화가 섞인 채 모든 법은 무시되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 그 뜻에 맞춰 한 공간에 동거하는 이들의 국적, 하나같이 다르다. 각 나라의 스테레오 타입이 그대로 드러난 등장인물은 국제 정세의 메타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프랑스인 자비에가 유럽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실행되는 ‘에라스무스’를 통해 스페인에서 6명의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동거’하는 것, 유럽의 현 상황과 다르지 않다. 키 높이가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한 우산에 들어간 모습이라고 할까. 그 모습, 생각해봐라. 좀 우습지 않나? 냉장고에 각자의 구획을 나누고, 전화기 앞에는 각국의 언어로 “지금 학교 가고 없다”는 말이 붙어있다. 각자의 방도 마찬가지다.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태의 정리정돈과 방식이 좁은 숙소에 함께 둥지를 틀고 있다.

 

 

 

자비에는 이런 동거 숙소를 ‘문화의 용광로’라 부르지만 실상 ‘샐러드’에 가깝다. 녹아서 하나로 융합되는 용광로보다 각자의 모습대로 뒤섞이면서 맛을 내는 샐러드가 더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들은 억지로 ‘하나’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때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지만 샐러드 맛이 변질되도록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지혜’다. 그곳이 공동체 공간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단결보다는 느슨한 연대를 택하는 이들의 행동양식이다. 그들에게는 ‘단일민족’이라는 허황된 구호가 없다. 그들의 공간이나 구성원이 위험에 처할 찰나, 머리를 짜내고 함께 움직인다. 집 주인이 월세를 올리자 그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방이 없음에도 룸메이트를 뽑는다. 그리고 방이 아닌 침대를 나눠 쓰는 놀라운(!) 생활력을 발휘한다.

 

또 이런 예도 있다. 영국인 깍쟁이 웬디가 미국인 악사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웬디의 남자 친구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파국을 막기 위해 똘똘 뭉치는 나머지 하우스 메이트들. 예기치 못한 해결책은 폭소를 유발하는 한편 빗나간 엇박자들도 앙상블을 이룬다. 흥미롭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우스 메이트, 국적은 달라도 마음은 통한다.  


자신의 경험과 여동생의 유학생활을 잠시 엿본 기억을 버무려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 유럽의 정체성을 굳이 한마디로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유럽화’라는 이름으로 어느 하나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혼란을 방치한 채 그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모습을 솎아낸다. (물론, 지금의 유럽은 경제 위기 앞에 조화를 이루지 않고, 형제국의 위기를 나 몰라라, 외면한다!)


감독은 은근히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비꼰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하나의 규범을 강조한 미국의 세계화는 곳곳에서 파국을 불러왔다. 주주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불렀다. 자본주의의 위기. 결과는? 반세계화의 움직임! 극중, 카탈루냐어로 수업하는 교수에게 불평하는 동료에게 한 학생, 이렇게 말한다. “세계화는 공동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거야.” 이것은 감독이 말하고 싶은, 유럽이 지향하는 한 우산 속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이리라.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극 정성으로 조잘거린 한국 사회, 반성해야 한다. 세계화랍시고 뭘 했나 봐라. 고작 영어 잘 하는 것이 세계화? 미국식 아니 월 스트리트의 표준을 전세계의 표준인양 강조하는 사대주의!

  

 

2명 이상의 조직(혹은 사회), 아니 한 개인 안에서도 혼란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1년 동안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과 동거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자비에, 파리의 거리를 거닐며 자신을 성찰한다.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을 합한 것이 바로 나이다. 나는 혼란에 빠진 유럽인일 뿐이다.” 그는 한 뼘 성장했다. (물론 자비에가 은행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는 모습은 작위적이고 끼워 맞춘 혐의가 짙다! 그 정도는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지만.)


나는 혼란이라는 단어를 억지춘향식으로 갖다붙여 대동단결을 외치는 일련의 구호를 이해할 수 없다. 때론 역겹다. 토할 것 같다.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을 짓누르거나 통합하려는 의도에도 동의할 수 없다. ‘국론 분열’이니 ‘국민 혼란’이니 하는 레토릭으로 하나의 노선만이 살 길 인양 호도하는 세력들, 에라이 침도 뱉아주마. 퉷. 개인의 지향성이나 신념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 나라 맞아?


국적에서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각자의 정체성을 간직하면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통합 혹은 연대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날. ‘한국인’보다 ‘세계인’이라는 단어가 더욱 자연스러운 그런 날. 국적을 묻는 질문에 세계 시민이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 묵고 싶은 그런 날. 여러 문화가 섞인 채 모든 법은 무시되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에서 사는 그런 날. 나는 그런 날들의 세계에 사는 자취생.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아니. 나는 대한민국민 아닌 세계시민으로 살고 싶다!

내가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는 것은 그런 세계시민으로서의 활동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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