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거문고 줄 꽂아놓고 - 옛사람의 사귐
이승수 지음 / 돌베개 / 2006년 9월
평점 :
공허하다!
친구와 만나 몇 시간 노닥거리며 즐거워하고 맘껏 웃는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엔 왠지 모를 공허함이 찾아온다. 이 공허함의 정체는 뭘까? 혹시 즐거운 시간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인가. 친구와 함께 있다가 혼자 있으려니 외로움이 더욱 극대된 까닭일까. 확실한 건 그런 종류의 허무함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진심과 진심이 오고가며 소통하는 즐거움이 아닌, 허무한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냈기에 갖게 되는 공허함일거다.
친구와의 사귐은 말 그대로, 나의 진심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옛 사람들은 친구를 '제2의 나'라도 하였으며, '나의 전부와 바꿔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던 것이다. 진심이 통하는 친구에 대한 고사로 유명한 '知音'이란 고사는 그래서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며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그건 그만큼 현대인들이 피상적인 인간관계만 맺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런지.
나 또한 그런 인간관계만을 맺고 살아왔다. 그래서 누굴 만나든 그 때는 즐겁지만, 헤어지곤 나선 그 전보다 더한 허무와 외로움을 느낀다. 내 스스로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 지음을 만나려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나에게 그런 친구가 없음이, 이런 피상적인 인간관계만 지속됨이 원망스러웠다. 그건 혹 하나님이 나의 행복을 질투하여 내린 천형처럼 말이다. 그런 가운데 읽은 이 책은 나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주었다.
이 책은 표지가 맘에 들어 읽게 되었다. 단순히 조선 시대 인물들에 대한 평일 거라 생각하며 읽게 되었던 거다. 하지만 첫 페이지를 읽고 나선 보물을 찾을 것 같은 쾌재를 질렀다. 별기대 안 하고 나간 모임 자리에서 첫 사랑을 만난 것 같은 그런 쾌재 말이다.
이황과 이이의 사제간의 우정담, 허균과 매창의 성을 뛰어 넘는 우정담, 나빙과 박제가의 국적을 뛰어넘는 우정담 등 어찌보면 이걸 우정이라고 볼 수 있나 하는 우정담을 소재로 택하여 그들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그와 더불어 현대인의 편협한 집단의식을 비판했다. 옛 사람의 우정관은 나이도 국적도 사상도 뛰어넘어 그 사람 자체만을 놓고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우정이 아닐까. 사람의 진심을 알아야 진심이 통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린 어느 순간 사람을 사람 자체로 놓고 판단하기 보다 그 사람의 배경, 환경, 주위 평판 등에 의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그런 유형의 전형적인 사람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또 남자가 아니면, 또 나와 엊비슷한 나이가 아니면 친구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편협한 우정관을 가지고 있었으니, 진정한 우정이 나에게 다가올리 만무하였다. 즉, 피상적 인간 관계는 내가 무의식 중에 의도했던 것일 뿐, 하늘이 질투하여 내린 천형이 아니었다. 나의 생각을 바꾸고 나의 관계 맺기 방식을 바꾸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이래서 맞는 말인가보다, 이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 나의 관계 맺기의 맹점을 찾아냈고 고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모처럼만에 가슴 뭉클한 우정담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이렇게 좋은 책이었는 줄 알았으면 좀더 빨리 만났으면 오죽 좋았을까. 나의 지음은 어느 곳에 있을까 하며 찾기에 분주했던 나의 생각을 버리고 내가 그런 종자기 같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하겠다. 서로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마저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도록 말이다. 나의 지음을 만나서 진심과 진심이 통하는 이야기할 것을 생각하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