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 - ‘모두’의 페미니즘에서 누락된 목소리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미키 켄들 지음, 이민경 옮김 / 서해문집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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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해방되어야 하는 존재에서 투쟁하는 존재를 지나 이제는 각자의 투쟁을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제목이다. 처음 페미니즘을 더듬더듬 배울 때 페미니즘의 근원을, 그로부터 파생된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구십구퍼센트 백인 여성의 이름으로 쓰여있었다. 새내기 페미니스트에게 백인/비백인의 나눔은 체감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일단 그조차도 귀한 경전같아서 남김없이 흡수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태초에 말씀이 있게 된다, 백인 여성의 말씀이.
서구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이 아시아 비백인인 나에게 저항없이 흡수된 건 내가 한국에서 주류 피부색인 배경도 유효할 것이다. 이십대라는 나이도, 학생이라는 지위도, 편안한 거주지도 딱히 나를 주변인으로 정체화해 나만의 페미니즘을 고민할 지점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나의 투쟁’(히틀러 아님 주의)을 시작한 것은 ‘주류 페미니즘’으로부터 이성애 결혼(가부장제의 부역자), 임신과 출산(사회적 무능), 양육(무지한 아줌마)에 대한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비혼도 딩크도 학자도 워킹맘도 아닌 나는 그렇게 주변인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미국 국적의 흑인도 아니고 인종문제에 해박하지 않아도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는 문장 아래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이 나의 페미니즘을 전부 설명할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후드의 소녀가 베스트셀러 페미니스트 작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힐빌리의 노래』가 생각이 났다. 힐빌리의 노래는 백인 남성의 이야기이므로 성공 서사를 제외하면 완전히 반대지점에 있어 비교하기 적합하다. 가장 큰 차이는 힐빌리는 (미국인)백인 남성이라는 이점을 업은 성공이었고 미키 켄들은 흑인 여성임에도 여기까지 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켄들의 후드는 과거가 아니고 그녀의 삶에서 끝난 챕터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후드 정체성으로 살고 있고 거기서 오는 페미니즘을 한다. 그 현장성은 너무 당연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주제를 건드린다. 식량, 주거, 기본적인 교육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뜬구름 잡는 이념이나 사상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다.(여담인데 두 저자 모두 할머니의 양육으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얻었다는 점이 특이. 노년 여성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에 ‘미국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유색인종이라는 표현을 쓰는데(나는 비백인이라는 말을 선호함. 본문 내 비백인은 1번 나오고 유색인종이 기본값) 나 역시 유색인종이지만 미국이라는 배경 바깥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정의가 대부분이고 그렇다고 나를 백인으로 생각할 수는 더더욱 없어서 나라는 아시안 여성은 사실상 텍스트에서 지워지게 된다. 미국의 유색인종이라고 마음으로 덧붙여 읽는다 해도 어쨌든 느껴지는 부분. 이럴 때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아시아는 제3세계인 거 참 와닿는다.

*책의 제본상태 문제
책 읽을 때 꾹꾹 눌러 180도로 펴는 거 싫어하고 100도 이하 각도로 펴서 양 손으로 잡는 편인데 이 책 중반부 즈음 왔을 때 책등 세로로 갈라짐. 분리된 건 아니고 책등에 세로줄 굵게 2개, 잔주름 많이 생김. 괴로움.
*’그녀’의 문제
도대체 왜 요새 그녀라고 쓰는 거 기피하는지 모를 일. 여자를 여자라고 부르지도 못해요? 그러면서 여동생, 소녀 이런 말은 잘만 씀.
*노오력
책 중에 ‘노오력’으로 번역된 부분이 있던데 번역서에 당대 유행어 등장하는 거 별로라고 생각함. 언젠가 낡아버릴 말 대신 고전으로 읽혀도 괜찮을 단어를 골랐으면. 말하자면 우리집 초등학생 어린이가 대학에 갔을 때 내가 이 책을 물려줘도 노오력에 대한 부연설명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

가부장제의 ‘착한소녀‘라는 주물 틀에 들어맞는 소녀, 성가신 스스로의 흥미도 드러내지 않고 목표와 관심사도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기꺼이 지도를 받을 의사를 보이는 소녀는 교사, 고용주, 또한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힘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자원을 얻게 된다. 반대로 더럽고, 시끄럽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되고자신의 출신을 밝히는 소녀는, ‘착한 소녀와 유리되면 될수록 같은 자원의 수혜를 입지 못한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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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58
윤은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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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착할 곳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주소는 손에 쥐어진 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착할 곳 자체의 의미는 사라지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방랑의 이미지만 남는다. 이 시집에서 정착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이고 현재는 길 위에 주소를 쥐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슬픔의 먹지를 깔고 적은 듯 간결한 시행에 비해 남아있는 감정이 진하다. ‘이제는 나는 고양이를 기르’는데 그 장소 역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다. ‘볕 잘 드는 방을 고를 줄 아’는 화자는 언제든 또다른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으므로 현재의 ‘다른 곳’은 정착이 아닌 임시거처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시집 내내 주소는 손에 쥐어진 채인 것이다.
곳곳에 아이들의 등장이 눈에 띈다. 일견 이상의 13인의 아해가 떠오르기도 하는 아이들이다. 희망의 존재로서의 아이가 아닌 보호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미래가 암시되는 아이들은 화자와 다르지 않다. 혼자 조는 아이가, 돌을 던지는 아이가, 처음 보는 방향으로 달리는 아이가, 우는 아이가, 창고 건초 더미 위의 아이가 모두 화자이면서 화자의 파편이다. 더불어 시집 내내 길 위에 있었던(헤맨 것은 아니다. 주소를 손에 쥐었으므로 의도적인 도착하지 않음이다) 독자이며 독자의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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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시선 457
김승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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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에서 얇게 저며져 식탁에 오른다는 것, 본체인 덩어리와 색과 결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실함이 나온다. 하지만 진실의 중요성이 금과 은으로 흔히 비유되어온 것에 비교하면 단무지와 베이컨은 장기보존을 위해 가공되었음에도 변질될 수 있고 연약하다. 이것이 이 시집을 흐르는 진실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연약함은 진실의 생명력, 가변성을 보여준다. 얇게 저며진 씨뇨라/마담/교수님/미시즈/아줌마는 모두 가변성을 가진 진실이다. 통합의 순간을 그리워하든 마음에 들지 않는 조각이 섞여있든 결국 같은 색, 같은 결을 가진 진실들이다. 이것이 진실을 슬프게 한다. 그리하여 진실하지 않은 가해자는 피해자를 조롱하고 진실한 피해자는 진실의 닫힌 문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진실은 (강남역이나 구의역이나 기억보관소나)무거운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다. 잠깐 손을 맞잡은 두개의 물방울처럼 포스트잇은 진실과 진실로 서로를 통하게 하고 접착력을 잃는다. 진실은 바위에 새겨지지 않고 포스트잇에 적힌다. 그러므로 진실은 일면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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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음성같이 옛 애인의 음성같이 - 김승희가 들려주는 우리들의 세계문학
김승희 지음 / 난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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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세계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이 이런 제목의 새 옷을 입고 재출간 되었다. 제목으로 사용된 구절은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편에서 신의 물음을 수식하는 말로 등장한다. 헤세의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글을 타고, 이 구절로 뒤를 밟으며 어떤 것이 어머니의 음성 같고 옛 애인의 음성 같은 것인지 생각해본다. 이미 들어보았고 너무 익숙하지만 아득한 것, 이제는 옆에 있지 않은 것. 애증과 향수와 추억이 뒤범벅인 것. 이는 또한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이 책이 새로 제목을 정해야 한다면 정말이지 이 문장이 꼭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전의 제목도 퍽 마음에 든다. 이 무시무시한 고전들을 들었다놨다 하면서 군살 없는 저런 제목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선생님의 글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목소리는 4년 반 정도 들은 게 전부지만 그 시절 그런 글에 사로잡힌 마음이 읽는 내내 되살아나 어떤 단어들은 선생님의 판서로 보이고 어떤 구절은 선생님 목소리로 들렸다. 진정 어머니의 음성같이 옛 애인의 음성같이 읽은 것이다.

여기 실린 총 52편의 세계문학을 앞에 두고 읽은 것은 반갑고 안 읽은 것은 안타깝고 모르는 것은 괴롭다. 얼마나 더 읽어야 충분할까? 그래도 각 글에 흐름을 따라갈 정도의 요약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예를 들면 아예 도전도 못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것. 특히 반가웠던 건 『왼손잡이 여인』 편인데 마음에 맞는 서평을 여태 읽어보지 못해서, 그리고 나 역시 해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았거나 몰랐는데 알게 된 여러 소설들도 그런 반가운 마음으로 하나하나 찾아봐도 좋겠다. 신기하게도 고전도 시대에 따른 유행이라는 게 있는데 이 책이 원래 92년도에 나왔으니만큼 지금은 유행하지 않아 두루 읽히지 않는 소설도 다수 등장해서 오히려 신선할 듯하다.

*표지의 유화 진심으로 선생님 초상인 줄 알았는데 아님. 책날개 펴보고야 알았음. 근데 진짜 선생님 옆모습 같다.

보바리즘을 지닌 사람은 결국 자신의 환상과 욕망 때문에 숙명적으로 난파하는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추구하다가 결국 숙명의 덫에 치어 파산하는것, 그것은 보바리즘의 공포이면서 또한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체험이기도 하지 않을까?
- P87

이 황무지에선 죽음의 매장이 재생의 희망과 연관되지 못하고, 인간이 매년 되풀이하는 무의미한 죽음은 부활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니 황무지의 인간에게 재생의 봄보다는 죽음의 겨울이 더욱 편안할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4월은 잔인한 계절이 되고, 만물이 부활하고 재생하는 뜨거운 혁명의 봄은 황무지의 사람들에게 위험과 위기와 신경질적인 혼란의 계절이 된다. 황무지의 현대인들은 차라리 죽음의 겨울 같은 생중사의 안일한 평화주의를 더욱 사랑하니까.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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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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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한 시작을 더듬거리다가 유령이라고? 진심이야? 시기를 잠깐 거쳐 이 소설에 완전히 잠기는 건 삶의 한 가운데 나타나는 빌러비드 유령을 가진 독자들이 겪는 일이다. 발화한 적 없지만 존재하는 것, 무감각하게 치워버려 이젠 무심한 줄 알았지만 어느 때고 돌아와 내 삶을 집어삼킬 수 있는 기억의 유령. 아무리 텍스트가 독자의 손에 들어온 순간 어떻게 읽든 좋다고 하지만 노예를 여성으로, 유아살해를 출산거부로, 자유를… 자유로 내 멋대로 폭주하며 읽으면서도 21세기 변방국의 주류 피부색을 한 내가 19세기의 노예제를 두고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을 느꼈는데, 이는 해설에 나온 토니 모리슨의 말 “이 소설은 노예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 노예제만으로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어떤 사람들의 내면적 삶에 대한 것입니다.”로 해방을 맞았다.

이야기를 내내 관통하는 것은 말이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말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몸을 키우고 그 덕분에 비밀들과 존재하지 않은 시간들, 사라진 사람들이 말을 입고 세상에 나온다. 제2부의 독백들은 마치 만신이 망자의 말을 토해내는 씻김굿 같다. 토니 모리슨이 남도의 씻김굿을 알았을 리 없지만 한풀이로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것, 그 한풀이를 지켜보는 구경꾼(독자)의 개인적인 응어리 또한 스토리(굿)를 따라가며 함께 분출되며 적절한 이름을 가진 아픔이 되고, 종국에 그 한을 보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빌러비드와 세서의 시적 대화에서 반복되는 ‘내 거야’라는 말이다. 반복적으로 ‘내 거야’를 읽다보면 이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 아닌 마땅히 살았어야 했으나 살지 못했던 자기 삶에 대한 소유권 선포임을 알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슬릭의 <내꺼야>를 떠올렸는데 이는 행정자치부에서 만든 출산지도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곡으로, 여성의 몸을 식민지화하는 시각에 대한 분노와 내 몸의 경계를 침범하는 침입자에게 내 몸의 주인은 나(이런 90년대 슬로건이 아직도 필요하다는 게 절망 포인트), 내 거라는 강한 선포가 담겨있다. 이 곡의 ‘내가 나의 새끼를 가질 권리는 내게 있어’라는 가사가 직접적으로 빌러비드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죽고 묻혔지만 돌아온 흑인 여성-낙태당하거나 차별받았지만 (그 지옥에서) 돌아온 페미니스트라는 점에서 결을 같이 한다.

보통 죽은 아기가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 나는 속절없이 어미의 마음을 가진 독자가 되어 아기를 안아주고 싶다는 둥의 생각을 하지만 빌러비드는 다르다. 그녀는 다 자라서 돌아와 흡사 임신한 듯한 몸을 하고 떠났다. 다시 갖게 된 생명력, 그 안에는 드디어 밖으로 나온 덴버의 몫도 있다. 세서와 동행하며 삶에 난 구멍에 같이 이름을 붙인 독자의 몫도 있다. 그래서 슬픔이 아닌 바깥으로 나갈 힘을 얻고 책을 마친다. 과연 명작이다.

세서가 문을 걸어잠그자, 그 집 여자들은 마침내 자유로워져서 있고 싶은 대로 있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키는 대로 마음속 말을 했다.
거의 그랬다. 스탬프 페이드가 들을 수는 있었지만 해독하지는 못한그 길을 에워싼 목소리들에는 124번지 여자들의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발화할 수 없고, 발화된 적도 없는 생각들이었다.
- P327

세서는두 손과 무릎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웃느라 가슴이 들썩거리고 눈물까지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두 손과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웃음이 잦아든 후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빌러비드와 덴버는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세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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