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왈츠 - 세대를 초월한 두 친구, 문학의 숲에서 인생을 만나다
황광수.정여울 지음 / CRETA(크레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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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임을 알게 되면 언젠가 자신이 고아가 될 운명임을 깨닫고 육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정신의 양부모가 필요함을 벼락맞은 듯이 알게 된다. 이후 양부모를 찾아 타인을 만나고 만나는 여정이 인생의 큰 조각인데, 그 양부모는 더러는 친구고, 더러는 연인이고, 더러는 선생이며, 때로는 단 한 번의 물리적 접촉도 없고 시대도 공유하지 않는 문학 속의 누군가, 아예 실존하지도 않았던 영화 속 누군가이기도 하다. 그들과는 정신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말보다 영원을 소망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이 책에 그 영원의 관계를 찾은 아주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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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작가임에도 정여울 작가의 책은 『끝까지 쓰는 용기』 이전에는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전 저작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함에도 그 책에서 큰 기쁨과 울림을 받았고, 그래서 자연히 그녀가 애정을 숨기지 않는, 그녀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황광수 평론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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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장 읽기도 전에 호기심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영면하심으로부터 오는 무거움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하며 쌓아온 신뢰와 행복의 시간을 독자로서 공유할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을 좀 더 진지하게 느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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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를 지나 두 사람의 서신 교환으로 책은 시작한다. 한 글자도 더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것은 시인의 글이 아닌 평론가의 글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단어를 사용해 감동을 주는 것이 시인의 글이라면, 평론가의 글은 애정하는 것을 세상이 아는 단어로 설명한다. 오해도 과장도 피하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를 벼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서신은 그래서 한 편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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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지나면 인터뷰다. 문학 이야기지만 결국은 문학을 통해 풀어내는 사상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문학은 소금물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그 갈증이 더욱 심해지는 읽기의 괴로움을 동반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문학을 왜 읽느냐는 것이다. 여기 두 평론가의 문학의 힘과 책임과 기대를 읽으며 나의 읽기에 대한 짐을 내려놓아 본다. 읽고 싶다는 욕망이 민주주의의 이상과도 깊게 관련된다는 말씀이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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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것은 황광수 선생의 유고 에세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투병과 삶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낯익은 이름에 놀랐다. 바로 황현산 선생에 대한 글이다. 그분은 내가 배운 적도, 직접 뵌 적도 없으면서 내 멋대로 선생님이라고 혼자 부르는 분인데, 물론 그 근거는 그분이 쓰신 글이다. 어떤 이의 독자였다가 다른 이의 독자가 되어 그 둘을 같은 자리에서 읽는 황홀함, 그러나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상실감, 그럼에도 여전히 여기에 아름다운 글이 남아서 언제든 내가 펼쳐볼 수 있다는 충만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순간 정여울 작가가 엮은 애도 편지인 이 책이 독자인 나에게도 역시 애도 편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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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곳곳, 그리고 말미에 실린 이승원 작가의 유럽 여행기에서 세 사람의 여행을 읽으며 지금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는 정여울 작가의 인스타그램이 생각났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기차를 타고 아름답고 작은 것들을 볼 때마다, 여전히 압도적인 무언가를 만날 때마다 얼마나 선생님이 그립고 그 마음을 털어놓고 싶을까. 그럼에도 이별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한 그녀이기에, 그 마음까지도 모두 다음 책에 여전히 아름답게 녹아들기를 소망한다. 길모퉁이에 있는, 아름답고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여전히 압도되고 싶은 보통의 독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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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 - 손으로 만든 표정의 말들 딴딴 시리즈 1
이미화 지음 / 인디고(글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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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누리호가 발사되던 날, 그 발사 순간을 수어통역 하는 것을 보았다. 통역사의 풍부한 표정과 알지 못해도 짐작해봄직한 수어가 담긴 영상에 재미있다는 반응이 잔뜩 달린 게시물이었다. 재미있다는 반응은 아마도 통역사의 표정과 커다란 손동작 때문일텐데, 타인의 언어를 보고 ‘ㅋ’을 여러 번 찍어낸다는 점에서 그 게시물이 불편했다. 나의 음성 한국어를 먼 타국에서 영상으로 돌려보고 그 특징을 들먹이며 웃고있대도 내가 같이 웃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누리호 발사 수어 통역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그 고요한 굉음을. 그걸 보고 누리호를 경험하게 된 사람들과 웃음으로 소비하는 사람들로 나뉘는 것을. 그 둘 사이에 견고하게 세워진 장벽과, 그 장벽을 또 다른 누군가가 가만가만 허물어가는 것을.

그렇다고 이 책이 비장애인을 ‘계몽’하기 위한 수어 소개서는 아니다. 여타의 외국어를 배울 때처럼 세상을 만나는 방식 하나를 더해가면서 청인인 저자는 수어로 가능한 세계를 하나 더 구축한다. 자신을 다시 보고, 이해하고, 화해하고, 타자를 받아들인다. 수어는 이 책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저자의 새로운 친구다. 그렇게 지어진 섬세한 세계는 영화로, 책으로, 가족으로, 산책으로, 채식으로 은은하게 스며든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역시 내가 수어를 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수어로 전해진 농담을 알아들었을 때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장벽을 허물어 세계를 넓히느냐 마느냐는 물론 나에게 달려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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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 - ‘모두’의 페미니즘에서 누락된 목소리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미키 켄들 지음, 이민경 옮김 / 서해문집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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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해방되어야 하는 존재에서 투쟁하는 존재를 지나 이제는 각자의 투쟁을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제목이다. 처음 페미니즘을 더듬더듬 배울 때 페미니즘의 근원을, 그로부터 파생된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구십구퍼센트 백인 여성의 이름으로 쓰여있었다. 새내기 페미니스트에게 백인/비백인의 나눔은 체감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일단 그조차도 귀한 경전같아서 남김없이 흡수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태초에 말씀이 있게 된다, 백인 여성의 말씀이.
서구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이 아시아 비백인인 나에게 저항없이 흡수된 건 내가 한국에서 주류 피부색인 배경도 유효할 것이다. 이십대라는 나이도, 학생이라는 지위도, 편안한 거주지도 딱히 나를 주변인으로 정체화해 나만의 페미니즘을 고민할 지점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나의 투쟁’(히틀러 아님 주의)을 시작한 것은 ‘주류 페미니즘’으로부터 이성애 결혼(가부장제의 부역자), 임신과 출산(사회적 무능), 양육(무지한 아줌마)에 대한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비혼도 딩크도 학자도 워킹맘도 아닌 나는 그렇게 주변인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미국 국적의 흑인도 아니고 인종문제에 해박하지 않아도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는 문장 아래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이 나의 페미니즘을 전부 설명할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후드의 소녀가 베스트셀러 페미니스트 작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힐빌리의 노래』가 생각이 났다. 힐빌리의 노래는 백인 남성의 이야기이므로 성공 서사를 제외하면 완전히 반대지점에 있어 비교하기 적합하다. 가장 큰 차이는 힐빌리는 (미국인)백인 남성이라는 이점을 업은 성공이었고 미키 켄들은 흑인 여성임에도 여기까지 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켄들의 후드는 과거가 아니고 그녀의 삶에서 끝난 챕터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후드 정체성으로 살고 있고 거기서 오는 페미니즘을 한다. 그 현장성은 너무 당연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주제를 건드린다. 식량, 주거, 기본적인 교육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뜬구름 잡는 이념이나 사상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다.(여담인데 두 저자 모두 할머니의 양육으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얻었다는 점이 특이. 노년 여성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에 ‘미국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유색인종이라는 표현을 쓰는데(나는 비백인이라는 말을 선호함. 본문 내 비백인은 1번 나오고 유색인종이 기본값) 나 역시 유색인종이지만 미국이라는 배경 바깥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정의가 대부분이고 그렇다고 나를 백인으로 생각할 수는 더더욱 없어서 나라는 아시안 여성은 사실상 텍스트에서 지워지게 된다. 미국의 유색인종이라고 마음으로 덧붙여 읽는다 해도 어쨌든 느껴지는 부분. 이럴 때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아시아는 제3세계인 거 참 와닿는다.

*책의 제본상태 문제
책 읽을 때 꾹꾹 눌러 180도로 펴는 거 싫어하고 100도 이하 각도로 펴서 양 손으로 잡는 편인데 이 책 중반부 즈음 왔을 때 책등 세로로 갈라짐. 분리된 건 아니고 책등에 세로줄 굵게 2개, 잔주름 많이 생김. 괴로움.
*’그녀’의 문제
도대체 왜 요새 그녀라고 쓰는 거 기피하는지 모를 일. 여자를 여자라고 부르지도 못해요? 그러면서 여동생, 소녀 이런 말은 잘만 씀.
*노오력
책 중에 ‘노오력’으로 번역된 부분이 있던데 번역서에 당대 유행어 등장하는 거 별로라고 생각함. 언젠가 낡아버릴 말 대신 고전으로 읽혀도 괜찮을 단어를 골랐으면. 말하자면 우리집 초등학생 어린이가 대학에 갔을 때 내가 이 책을 물려줘도 노오력에 대한 부연설명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

가부장제의 ‘착한소녀‘라는 주물 틀에 들어맞는 소녀, 성가신 스스로의 흥미도 드러내지 않고 목표와 관심사도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기꺼이 지도를 받을 의사를 보이는 소녀는 교사, 고용주, 또한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힘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자원을 얻게 된다. 반대로 더럽고, 시끄럽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되고자신의 출신을 밝히는 소녀는, ‘착한 소녀와 유리되면 될수록 같은 자원의 수혜를 입지 못한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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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58
윤은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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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착할 곳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주소는 손에 쥐어진 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착할 곳 자체의 의미는 사라지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방랑의 이미지만 남는다. 이 시집에서 정착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이고 현재는 길 위에 주소를 쥐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슬픔의 먹지를 깔고 적은 듯 간결한 시행에 비해 남아있는 감정이 진하다. ‘이제는 나는 고양이를 기르’는데 그 장소 역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다. ‘볕 잘 드는 방을 고를 줄 아’는 화자는 언제든 또다른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으므로 현재의 ‘다른 곳’은 정착이 아닌 임시거처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시집 내내 주소는 손에 쥐어진 채인 것이다.
곳곳에 아이들의 등장이 눈에 띈다. 일견 이상의 13인의 아해가 떠오르기도 하는 아이들이다. 희망의 존재로서의 아이가 아닌 보호받지 못하고 불안정한 미래가 암시되는 아이들은 화자와 다르지 않다. 혼자 조는 아이가, 돌을 던지는 아이가, 처음 보는 방향으로 달리는 아이가, 우는 아이가, 창고 건초 더미 위의 아이가 모두 화자이면서 화자의 파편이다. 더불어 시집 내내 길 위에 있었던(헤맨 것은 아니다. 주소를 손에 쥐었으므로 의도적인 도착하지 않음이다) 독자이며 독자의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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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시선 457
김승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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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공통점은 하나의 덩어리에서 얇게 저며져 식탁에 오른다는 것, 본체인 덩어리와 색과 결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실함이 나온다. 하지만 진실의 중요성이 금과 은으로 흔히 비유되어온 것에 비교하면 단무지와 베이컨은 장기보존을 위해 가공되었음에도 변질될 수 있고 연약하다. 이것이 이 시집을 흐르는 진실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연약함은 진실의 생명력, 가변성을 보여준다. 얇게 저며진 씨뇨라/마담/교수님/미시즈/아줌마는 모두 가변성을 가진 진실이다. 통합의 순간을 그리워하든 마음에 들지 않는 조각이 섞여있든 결국 같은 색, 같은 결을 가진 진실들이다. 이것이 진실을 슬프게 한다. 그리하여 진실하지 않은 가해자는 피해자를 조롱하고 진실한 피해자는 진실의 닫힌 문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진실은 (강남역이나 구의역이나 기억보관소나)무거운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다. 잠깐 손을 맞잡은 두개의 물방울처럼 포스트잇은 진실과 진실로 서로를 통하게 하고 접착력을 잃는다. 진실은 바위에 새겨지지 않고 포스트잇에 적힌다. 그러므로 진실은 일면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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