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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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한 시작을 더듬거리다가 유령이라고? 진심이야? 시기를 잠깐 거쳐 이 소설에 완전히 잠기는 건 삶의 한 가운데 나타나는 빌러비드 유령을 가진 독자들이 겪는 일이다. 발화한 적 없지만 존재하는 것, 무감각하게 치워버려 이젠 무심한 줄 알았지만 어느 때고 돌아와 내 삶을 집어삼킬 수 있는 기억의 유령. 아무리 텍스트가 독자의 손에 들어온 순간 어떻게 읽든 좋다고 하지만 노예를 여성으로, 유아살해를 출산거부로, 자유를… 자유로 내 멋대로 폭주하며 읽으면서도 21세기 변방국의 주류 피부색을 한 내가 19세기의 노예제를 두고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을 느꼈는데, 이는 해설에 나온 토니 모리슨의 말 “이 소설은 노예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 노예제만으로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어떤 사람들의 내면적 삶에 대한 것입니다.”로 해방을 맞았다.

이야기를 내내 관통하는 것은 말이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말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몸을 키우고 그 덕분에 비밀들과 존재하지 않은 시간들, 사라진 사람들이 말을 입고 세상에 나온다. 제2부의 독백들은 마치 만신이 망자의 말을 토해내는 씻김굿 같다. 토니 모리슨이 남도의 씻김굿을 알았을 리 없지만 한풀이로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것, 그 한풀이를 지켜보는 구경꾼(독자)의 개인적인 응어리 또한 스토리(굿)를 따라가며 함께 분출되며 적절한 이름을 가진 아픔이 되고, 종국에 그 한을 보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빌러비드와 세서의 시적 대화에서 반복되는 ‘내 거야’라는 말이다. 반복적으로 ‘내 거야’를 읽다보면 이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 아닌 마땅히 살았어야 했으나 살지 못했던 자기 삶에 대한 소유권 선포임을 알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슬릭의 <내꺼야>를 떠올렸는데 이는 행정자치부에서 만든 출산지도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곡으로, 여성의 몸을 식민지화하는 시각에 대한 분노와 내 몸의 경계를 침범하는 침입자에게 내 몸의 주인은 나(이런 90년대 슬로건이 아직도 필요하다는 게 절망 포인트), 내 거라는 강한 선포가 담겨있다. 이 곡의 ‘내가 나의 새끼를 가질 권리는 내게 있어’라는 가사가 직접적으로 빌러비드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죽고 묻혔지만 돌아온 흑인 여성-낙태당하거나 차별받았지만 (그 지옥에서) 돌아온 페미니스트라는 점에서 결을 같이 한다.

보통 죽은 아기가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 나는 속절없이 어미의 마음을 가진 독자가 되어 아기를 안아주고 싶다는 둥의 생각을 하지만 빌러비드는 다르다. 그녀는 다 자라서 돌아와 흡사 임신한 듯한 몸을 하고 떠났다. 다시 갖게 된 생명력, 그 안에는 드디어 밖으로 나온 덴버의 몫도 있다. 세서와 동행하며 삶에 난 구멍에 같이 이름을 붙인 독자의 몫도 있다. 그래서 슬픔이 아닌 바깥으로 나갈 힘을 얻고 책을 마친다. 과연 명작이다.

세서가 문을 걸어잠그자, 그 집 여자들은 마침내 자유로워져서 있고 싶은 대로 있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키는 대로 마음속 말을 했다.
거의 그랬다. 스탬프 페이드가 들을 수는 있었지만 해독하지는 못한그 길을 에워싼 목소리들에는 124번지 여자들의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발화할 수 없고, 발화된 적도 없는 생각들이었다.
- P327

세서는두 손과 무릎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웃느라 가슴이 들썩거리고 눈물까지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두 손과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웃음이 잦아든 후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빌러비드와 덴버는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세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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