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제 가슴 속에 아프게 간직해 오던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한 번 시원하게 털어 놓으면 아픈 마음이 약간 줄어들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중견 기업의 창업자인 모 회장(실명을 밝히지 못하는 걸 양해바랍니다)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재벌급은 아니고, 그럭저럭 한국 50대 기업에 들어가는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회사입니다.
형제는 저와 형 둘 뿐이었습니다. 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착실하게 경영 수업을 받았지만, 어릴 때부터 반항적인 기질이 강했던 저는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락밴드에서 기타리스트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아버지와 계속 갈등을 겪던 저는 결국 집을 뛰쳐나왔고, 아버지는 "너를 더 이상 내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더군요. 저는 아쉽기는커녕 오히려 '속 시원하게 잘됐다'고 생각하고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운명처럼 그녀를 만났습니다. 저는 연습을 마치고 밤늦게 허름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자취집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골목길에 웬 아가씨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저는 의아해서 다가가 보았습니다.
"아가씨, 왜 그래요? 어디 다쳤어요?"
그 아가씨는 "으음..." 하고 낮게 신음소리만 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발목을 심하게 다친 것 같았습니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요? 일단 여기 앉아 봐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저는 그 아가씨가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습니다. 그 때, 그녀와 저의 눈동자가 마주쳤습니다. 저는 마치 심장이 멈추는 듯한 격렬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맑은 호수처럼 깊게 파인 검고 큰 눈동자.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투명하고 순수한 눈망울. '백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기분이 바로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제가 넋을 잃고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부끄러웠던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 참,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단 제 자취방으로 갑시다. 구급약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응급처치는 될 거예요."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바로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같이 살자 말자 이런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이 맞은 결과였습니다.
아쉽게도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선천적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장애 따위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에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바라봐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언어 따위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가 있기에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형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한 건 그녀와 동거를 시작한 후 5개월 정도가 지난 뒤였습니다. 형은 빗길에서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어이없게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저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아버지의 눈에 띄게 늙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창업 공신인 김 이사님이 저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자네가 형의 뒤를 이어줘야겠네. 자네 아버님의 뜻이기도 하네."
저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기타리스트의 꿈을 버리고 형의 유훈을 이어 받아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장례식 내내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던 아버지의 눈초리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집무실로 저를 부른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정리해라."
"아버지!"
"긴 말 필요 없다. 우리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야. 하루 빨리 깨끗하게 정리해라."
"아버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 할 수 있어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란 말이에요!"
"뭐야? 사랑? 사랑은 뭔 놈에 말라비틀어진 사랑이야!"
"우리의 사랑을 모욕하지 마세요. 우리는 곧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완벽한 부부가 될 거라구요!"
"뭐.. 뭐? 겨.. 결혼? 이 자식이 이거 완전히 미쳤구만!"
"그래요! 저는 미쳤어요! 아버지 같은 냉혈한은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 맘대로 생각하세요!"
얼굴이 창백해져서 몸을 부르르 떨며 한참 동안 저를 노려보던 아버지는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이 인터폰에 대고 말했습니다.
"김 비서, 거기 있나? 이 자식 빨리 끌고 나가서 일단 감금해둬. 그래, 감금. 지금 비상사태야."
저는 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달려온 경호원들에게 금세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놔! 놔! 이 개자식들아! 놓으란 말야!"
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마침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친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하려는 아들이라도 어떻게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는지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3년 만에 퇴원한 저는 나오자마자 그녀를 찾았지만 종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아버지의 소행이라고 판단한 저는 아버지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애는 섬으로 팔았다. 이제 깨끗이 잊어라."
"뭐.. 뭐야... 지금 뭐라고 했어?"
"이 자식이... 섬으로 팔았다고 했다!"
"어.. 어떻게... 그.. 그런 짓을... 당신은 이제 내 아버지가 아니야!"
"저.. 저놈이!"
울부짖으며 뛰쳐나온 저는 곧바로 전국의 섬이란 섬은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녀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 앞에 서는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짧았지만 찬란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언젠가는... 언젠가는 분명히 재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의 사진을 올립니다. 혹시 그녀를, 아니 비슷하게 생긴 여자라도 본 분이 계시다면 꼭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사생활 보호를 위해 친구들 얼굴은 지우고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