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날 적었던 글인데 자삭했었어요(ㅠㅠ 알라딘에 옛남친이 있는 관계로... 이 자릴 빌어 그에게 미안하단 말을 전합니다.)어쨌거나 이 연애담으로 해적님의 이벤트에 참가합니다 :)
젊은 느티나무에 나오는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이라는 표현이 입안을 뱅뱅 맴돈다. 한 때 내게 머물렀던 무리와 부조리를 고백하는데 오늘은 만우절이라는 핑계를 댄다면 면책사유가 될 수 있을까?
남녀 간에 오랜 우정은, 둘 다 지독히 이성적인 매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거나,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채 계속 바라볼 때 가능하다고 한다. 내 경험에 의하면 꼭 위의 두 가지 경우만의 우정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녀 간의 우정관계는 균형이 깨지기가 너무나 쉽다는 거다.
내게는 애인이 있었고, 늘 그래왔듯이 그 시점에서의 이성“친구”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왕의 남자>를 이성 친구(편의상 D)와 보기로 한 저녁이었나 보다. 극장 앞에서 D와 조우하여 막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평일에는 전화도 거의 없었고, 데이트는 주말만 정해서 만나던 애인의 전화였다.
- 어, 이 시간에 왠일이야?
- 왠일은... 오늘 일찍 퇴근했어. 별일 없으면 영화나 볼래? 내가 그쪽으로 갈게.
- 어, 저기, 나 오래간만에 친구만나서 시내 나왔어. 어떡하지? 모처럼 일찍 끝났는데....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D를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른다.
미안해, 주말에 만나-라고 서둘러 전화를 끊고,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영화는 정말 재밌었지만, 때때로 생각에 잠겼다.
왜 애인에게 굳이 거짓말을 한 걸까. 솔직히 D를 만나 영화 한편 본다 했으면 됐을 것을. 더 심각한 건, D가 내게 물어온 적은 없지만 애인이 있음을 감춘 것같이 된 그간의 시간들이었다.
마음과는 반대로 영화만 보고 쌩하게 집에 돌아와선, 상황의 심각성을 깊이 깨달았다. 애인, 혹은 배우자를 두고도 딴마음을 품고 그걸 행동에 옮기는 게 상대방에게 얼마만한 고통을 주는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봐와서 잘 알고 있었다. 애인은 결혼할 사람이고, D는 친구다. 종교도 있고 스스로 도덕관념도 철저한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인식을 넘어선 무리와 부조리가 내게도 있다니.
비난받아 마땅한 자신을, 여기까지만- 이라는 말로 합리화시켰다.
이후로 나는 선을 지켰고,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D도 여전히 친구로서의 룰을 충실히 지켰다. 그러나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애인과는 곧 헤어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D에 대해 어떤 의도도 욕심도 없다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무리와 부조리는 항상 돌파구를 찾고 있었을 테니까.
다시 여름쯤에 이번엔 애인이 없는 상태에서 D를 만났다.
좋은 기회라고도 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지만 헤어진 애인에 대한, 그리고 D를 속였던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 가혹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더구나 나를 편한 친구로 생각하는 D에게 느닷없이 각별한 감정을 요구한다는 건 일종의 횡포 같았고 그 선을 넘을만한 어떤 용기조차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영화를 보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다시는 D에게 연락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은밀한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인 그를 단념하는 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