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엉덩이가 예쁘다. 면바지를 입었을때의 약간 펑퍼짐한 엉덩이도, 청바지를 입었을때의 착 달라붙는 엉덩이도 예쁘다. 그러나 제일 예쁠때는 정장을 차려입었을때다. 난 그의 뒷모습을 보며 슬쩍 흘린 코피를 닦곤 한다.
그는 손도 예쁘다. 적당히 얇고 적당히 긴 손가락은 또 남성다운 매력을 풍길정도의 힘줄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선 항상 좋은 향기가 난다.
어느 여름날 담배를 피고난 후 물을 마시는 그의 옆에 잠시 섰다가 다리가 휘청거렸다. 담배냄새와 약간의 땀내, 거기에 은은한 남성향수까지. 와우~ 성적충동이란 이런걸 말하는게 아닌가!
그리고 그의 걸음은 마치 춤을 추는 듯 한다. 늘 삶은 경쾌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왼발과 오른발은 즐겁게 교차한다. 그의 걸음을 넋놓고 바라보기가 몇번이던가.
그렇다.
나는 (젠장)짝사랑이란걸 하고 있는거다.
그것도 내게 그다지 관심없는 듯한 그를.
하루에 몇번 틱틱 말을 건네는 무심한 그를.
아, 이 한심한 청춘이여!

그는 우리 회사의 프리랜서이다. 나는 작은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새로운 학회지나 연구지를 접수받게 되면 와서 표지 디자인을 해준다. 정식으로 출근하진 않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두세번은 오기때문에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그는 우리 회사 직원들과도 친하고 나와도 어느정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반말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속에 가끔 반말이 섞이기도 하는 정도의 친근감이랄까.

가끔 같이 갖는 술자리에서 그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어리석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점점더 힘들어졌다.
틱틱 내뱉는 그의 말들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다가
슬며시 건네주는 캔음료 하나에 봄눈녹듯 녹아버리는 마음이 힘들었다.
나는 수십번도 더 그의 옆에서 같이 걷는 모습을 상상했고, 상상속에서 나는, 운전하는 그의 팔을 옆에 앉아 쓰다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나는
한번도 그것을 입밖에 낸 적이 없다.
그를 나의 연인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늘 상상의 나래만 폈지 현실의 남자로 만들기 위한 고백은 시도조차 못해본 것이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그는 다른곳에서 취업을 했다고 했고, 그래서 우리일을 해주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히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어졌다. 때때로 직원들과 연락하는 자리에 같이 나가긴 했지만 차츰 그 횟수도 줄어들었다.
나는 계속 여기있었고, 또 그 사이에 나는 잠깐 다른 남자와 시시껄렁한 연애를 2개월정도 했었다. 정말 시시껄렁한 연애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직장 선배와 간단히 맥주를 하기로 했고, 얼큰히 취했을 때 내가 내 선배에게 얘기했다.
"있잖아요, 나 그때 그 친구 되게 좋았거든. 후훗.
그친구 옆에 서기를 되게 바랐었는데, 뭐 고백한번 못해봤지. 어리석은 짝사랑이었으니깐. 아니, 부끄런 게으름이었던 거지. 서글픈 소심함이고."
내말을 듣고 선배가 말했다.
"아이, 이 바보야. 나한테 얘길 하지. 그자식도 너 좋아했거든. 나한테 너 좋다고 말하는데, 너야 뭐, 두루두루 잘 지내고 특별히 그자식 좋아하는것 같지도 않아서 너한테 말 안했는데. 니가 말을 했으면 내가 중간에서 어떻게든 해줬을거 아냐."

지금 이사람이 뭐라는거야?
그러니깐 그때, 나 혼자 짝사랑 한게 아니라고?

"지금 뭐라는 거에요? 우리 둘의 마음이 같았다는 거에요? 그런거에요, 지금?"

그랬다.
그도 나를 혼자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여름, 흡연실에서 내 선배와 둘이 담배를 피우던 그는, 자신의 마음을 얘기했다 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고 지낸다는건 너무나 서글픈 일이다. 만약 내가 그 때 알았더라면, 굳이 연인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매일 자신감에 가득차서 생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어쩌면 나는 매일을 웃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못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세상이 정말 살만한 거라고 느꼈을 것이고, 밤마다 아름다운 꿈을 꾸었을텐데!

왜 그는 내게 말하지 못했을까.
내가 보내는 뜨거운 눈빛을 그도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중 누군가가 먼저 감정을 얘기했다면, 어쩐면 우린 지금쯤 너무나 행복한 커플이 되어있을 수도 있을텐데.

술이 확 깨는것 같았다.
술은 깨면서 머리는 아파졌다.
어쩌지? 어쩌지? 도대체 어쩌지?????

그 뒤로는 선배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느틈에 나는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옆으로 뒤척이다, 엎드려 보다 하였다.
잠이 올리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그에게 말해보자 결심하였다. 어쩌면 그는 지금 애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처럼 지리멸렬한 일상을 혼자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잘 되서 그의 옆에 서겠다는 희망까지는 걸어보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에게도 그간 그의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걸 알려줘야 겠다. 그래, 그래야 겠다. 나도 알지 않았는가!

다음날.
난 굳이 휴대폰을 뒤지지 않아도 그의 전화번호를 떠올릴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선명하여 '떠올리다'라는 단어는 어째 어울리진 않지만.
그래도 일년만에 전화를 하기는 너무나 낯설다. 그도 그럴테지.

'잘 지내고 있는가요. 날이 좋아요. 어쩐지 당신 생각이 났어요.'
나는 문자를 보냈다.

기분 좋은 하루였다. 비록 답문자는 날아오질 않았지만. 그의 답문자를 기다리며 있노라니 오전도, 오후도 구름위를 걷는 듯 설레이기만 했다.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앉아 집중되지도 않는 정신으로 책을 읽는 밤 11시에도 답문자는 오질 않았다.
나는 실수한걸까?
전화번호를 잘못안건 분명 아닐테다. 난 한순간도 그 번호를 잊지 않았으니.
그에겐 이미 여자가 있는걸까?
아님 나라는 여잘 잊은걸까?
혹시 결혼을 했나? 그래서 내 문자를 보고 부부싸움이라도 한걸까?
아아~ 너무나 머리가 복잡하다.

딩동.
휴대폰을 집는 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에게서 온 문자였다.
'누구신지요?'

세상에.
이 무슨 잔혹한 말인가.
선배가 한 말이 거짓인가. 나를 좋아했다면 나의 번호쯤은 외워두고 있었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래, 갈때까지 가보자.

'저, ***예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내 답이 왔다.

'아, 설마 했어요. 반가워요.'

그래, 더 해보자.

'잘 지내요? 답이 없어 서운했잖아요. 시간되면 얼굴봐요.'

'네, 반갑네요. 그래요 언제 한번 봐요.'

언제 한번 보자, 는 말은 보지말자는 말과 같다. 내친김에 더.

'이번주중에 봤으면 하는데..부담스러우신가요?'

이 문자에 대한 답은 한 10분뒤에 왔다.

'아뇨. 너무 오랜만이라. 주말 어때요?'

'네, 좋아요. 근무처는 어디세요? 저는 삼성동이요.'
'저는 강남이에요. '
'네 그럼 강남에서 뵈요. 토요일에요. 몇시가 좋으세요?'
'아무때나요.'
'다섯시, 괜찮아요?'
'네.'
'잘자요^^'
'**씨두요.'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그러니 토요일이 되려면 며칠을 더 보내야 했다.
아, 너무나 기다려지는 주말이여!

그리고 토요일 오전.
나는 미장원에 가서 드라이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내고 드라이를 했다. 드라이를 하는 내내, 나는 수요일부터 지금 토요일 오전까지를 떠올려보았다.
수요일밤은 기쁜 마음에 잠자리에서 혼자 쿡쿡거렸고, 목요일은 팀장한테 꾸지람을 들어도 인상을 쓰지 않았다. 금요일의 야근도 전혀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야근하고 집에 가는 길, 나는 그에게 또 문자를 날려보았다.

'내일이군요.  평안한 밤 보내시고, 내일 뵈요. 웃으면서:)'
'네. 내일 뵈요.'

그의 문자는 항상 짧다. 속상하리만치 짧다.
나는 실성한 여자인듯, 또 날려보았다.

'혹시 말이죠, 결혼했어요? 아님 약혼이라도?'
여자가 있냐는 말을 차마 묻지 못하겠기에 돌려 물었더니,
'둘다 아니요.'
란 답이 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 토요일 오전 스물 여덟해를 살아오는 동안 미친짓이라 생각했던 '돈내고 머리 드라이하기'를 실행에 옮긴것이다.  어제는 딸기팩도 했다. 아침엔 아끼는 바디클렌징으로 샤워를 했고, 같은향의 크림도 발랐고, 앗싸 같은향의 향수도 뿌렸다. 겨드랑이에 디오도란트를 뿌린 것은 물론이고. 분홍색의 립스틱과 샤도우를 했고, 렌즈의 단백질도 제거했다.
하늘거리는 내 원피스위로 드라이한 머리가 찰랑거렸고, 더불어 분홍색 샌들에 맞추어 신은 분홍색 귀걸이도 찰랑거렸다. 아, 세상의 모든 찰랑거리는 것들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토요일의 강남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늘 멋진 남녀들이 오고간다 생각했던 이 복잡한 강남엔 몇년만에 와보는 것이던가.
오늘 보이는 이 많은 사람들이 어째 좀 안되보인다. 나처럼 예뻐보이는 여자도 없고, 나처럼 즐거워 보이는 남자도 없다. 나처럼 구름위를 걷는듯한 사람도 없고, 나처럼 하늘을 날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도 없다. 나를 태운 구름은 그에게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

여기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그를 볼 수 있다. 일년만의 그를. 그는 어떤 모습일까? 햇살이 너무 뜨거워 손으로 이마에 그늘을 만들면서 나는 횡단보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약속시간보다 나는 십분정도 일찍 왔는데, 그는 와 있을까? 오고있는 중일까? 설마 안나오진 않겠지?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는 순간, 뛰고 싶은 나를 말린다. 사뿐히, 걸어야지.

저기, 그가 보인다.
커다란 의류매장 앞에 서서 엠피쓰리를 듣고 있던 그는 나를 발견하곤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뺀다. 그리고 옆으로 매고 있던 가방에 엠피쓰리를 넣는다. 검은색 면티에 갈색 면바지를 입은 그는 엠피쓰리를 넣자마자 횡단보도 쪽으로 한걸음, 두걸음 걸어온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그는 햇살보다 밝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기고 있다.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하고 싶다.
"저기 저 근사한 남자가 기다리는 여자가 저에요!" 라고.

그의 미소에 더 큰 미소로 화답한 나는 혹시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미소가 지워지진 않는다.
우리는 지금 이순간부터 무엇을 하게 되고, 무엇을 먹게 되고, 무엇을 이야기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주보고 몇분동안은 심장을 다스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참지 못해 내 오른손이 왼쪽가슴으로 얹어지고-심장아! 제발 천천히, 천천히 뛰어 줘.- 진정을 시키며 그의 앞에 선 순간, 그의 오른손이 왼쪽 가슴에 얹어진 것을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했다.



                                                                                             -The End-

 

 

덧. - 이 글은 지어낸 얘기입니다. 제 홈페이지에  작년쯤엔가 올렸던 글을 이벤트 참여하기 위해 가져왔어요.(백프로 지어낸 얘기는 아닙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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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4-10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이에요. 100% 지어낸 이야기라면 이런 감동은 없을 거에요. ^^

Mephistopheles 2007-04-1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픽션이 몇 %이며..픽션이 몇 %인지..밝혀라! 밝혀라!

비로그인 2007-04-1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같이 이런 연애질, 저런 연애질, 오만가지 연애질 이야기를 다 하다가, 이런 이벤트에서는 또 아무 말도 못하는데 대단하십니다 다락방 님.^^

레와 2007-04-10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은 오늘 아침.
햇살때문에 설레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는데,
지금은 다락방님 때문에 아주 터져버릴 것 같아욧!

책임지세요..!!

비로그인 2007-04-1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화라고 해줘요!!! 넘 두근거렸자나요... ㅜㅜ

미아 2007-04-1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해도 누가 쓴건지 대번에 알겠어요.ㅎㅎㅎ

다락방 2007-04-1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님/ 말씀드렸듯이 '지어내기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후훗

메피스토님/ 논픽션은 몇 % 이고, 픽션은 몇 % 일까요? 후훗

쥬드님/ 연애, 라는 건 제게 굉장히 생소하게만 들려요. 이미 오래전의 일이기 때문이죠. 결국 썼던 글을 가져온걸요, 뭐. :)

레와님/ 오래전에 레와님은 이 글을 읽으신줄 압니다만. 호호. 제가 어떻게 책임져드리면 될까요?

체셔님/ 분명 얼마만큼은 실화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솔로입니다. 후훗

다락방 2007-04-1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아님/ 아, 그래요? 후훗. 미아님은 이제 제 글에 익숙해지셨군요. :)

다락방 2007-04-1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게님/ 지금....속삭이지 않은거 맞아요? 와우~

이리스 2007-04-10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다 뭔가 퐈아악~ 털어놓고 싶지만 내 정체가 드러나는 곳이라 -_-;

향기로운 2007-04-1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게작게님.. 저.. 그런실수를 했었잖아요^^;; 지난번 배혜경님의 자기소개에 덜컥 속삭글로 해놓곤...^^;; 배혜경님이 속삭이신분들 풀어달라고 할때 그때 알아봤어요^^;;
다락방님의 연애담.. 너무 두근두근 떨렸사와요. 아, 난 정말 주책아줌마.. 맞나봐요.. 어쩐대..^^;;;;

다락방 2007-04-1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게님/ 아, 몰랐어요. 여기서 속삭이면 제가 못보는 군요. 하하. 멋지다는 말씀, 감사해요 :)

낡은구두님/ 음..정체가 드러나면....안되나요? 궁금한데 말입니다 :)

향기로운님/ 다음엔 더 떨리게 해드릴까요? 후훗

마늘빵 2007-04-10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밝혀라 밝혀라 으쌰으쌰

비로그인 2007-04-1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논픽션이다에 올인! ㅋ~

다락방 2007-04-10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도대체 뭘 밝히라는거예요? 하하

체셔님/ 후후

무스탕 2007-04-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메 워메 워메... 으짤까나... 얼른 뒷편 이어주세요!!!!

다락방 2007-04-1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 저기, 저 위에 '-The End-' 라고 써있잖아요. 후훗-

날개 2007-04-1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남자.. 문자가 너무 뜨뜻미지근해요. 소심한걸까요? 조심하는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시간이 너무 흘러 뜬금없어하는걸까요?
본편이 끝났으니 속편은 올려주시겠죠?^^ 뒷 이야기가 궁금해 죽겠어요..
실제 경험담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란 것까지일것 같은데.. 그런가요?

다락방 2007-04-1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글쎄..그럴까요? 후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