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도리스 레싱은 <런던 스케치>를 통해서 각계각층의 런던 사람들의 삶을 모자이크화 하는 방식으로 불협화음 같은 래퍼토리를 한편의 내러티브로 통일화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퍼즐의 조각들이지만 마치 성당의 그림처럼 각 퍼즐간의 일련의 규칙성이 내제하는 것 처럼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불협화음 같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바로 레이철 커스크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을 통해서 현대대인들의 삶과 일상 그리고 그 족적들을 엿보게 된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토머스와 토니부부를 중심으로 토머스 형제 그리고 부모의 일상적인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을뿐 각각 구성원에 관한 이야기가 액자구조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딱히 그런 스트럭쳐라고 지칭하기도 힘든 한마디로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1)토머스-토니부부  2)하워드-클로디어부부  3)레오-수지 부부  4)토니의 시부모  5)올가-스페판커플 이렇게 5가지 큰틀속에서 각각의 래파토리가 전개되고 시간의 흐름속에 일련의 순서와 무관하게 각각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전체적인 흐름이 전개된다. 하지만 액자소설의 전형적인 구조처럼 각각의 내러티브와 더불어 전체적인 하모니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유니크하게 다가온다. 물론 중심에는 남편과 아내의 역활을 바꿔서 생활하는 토머스-토니부부가 놓여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 부부의 내러티브가 중심으로 부각되지도 않는다. 마치 음악회 시작전에 화음이나 역활분담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맡은 음율을 조율하는 오케스트라의 악단과도 같은 느낌이 강하게 전해진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대로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관악기는 관악기대로 자기 본연의 音만 확인하겠다는 듯이 청객의 귀는 뒷전으로 사정없이 불어대는 음악회 시작전의 그런 분위기이다. 처음 음악회를 접하면서 그래도 내심 한번쯤은 상호간의 화음을 조율해보는 리허설 비슷한 것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지게 한다.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토머스-토니부부의 역활분담에서 기인한 첫 스타트가 왠지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리고 다른 화음들(하워드-클로디어부부등)의 등장으로 뭔가 내러티브의 반전 내지는 작은 충격이나마 존재할 것 만 같은 기대감을 가지면서 책장을 따라 눈길을 진행시키 보지만 이들 악기(등장인물들)들은 정말 자기만의 음만을 보여줄뿐 더이상의 발전된 화음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럴 의사 역시 없어 보일 뿐이다.(이는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로 엿보인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 처럼 말이다) 토머스와 클라라 엄마 헬런의 부분도 그렇고 토머스의 피아노 선생 동성커플의 경우도 그렇고 뭔가 다른 전개감을 기대하지만 작가는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시종 일관한다. 마치 그 부분의 내러티브는 독자들이 알아서 적당하게 맞는 화음으로 조율해 보라는 듯이... (일면 상당히 무책임한 뉘양스를 남기면서...) 전체적으로 뭔가 더 있을것 만 같은 아니 꼭 있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작가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심지어 음악회가 끝나고 러브콜을 받는 지휘자의 작은 즐거움마저 가져가 버린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문외한인 나 같은 경우 상당히 곤욕스러운 읽을거리를 접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딱히 명확한(최소한의 기준으로 보아도)내러티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각각의 악기들이 발현하는 음의 특색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뭐 여기까지도 대충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스트럭쳐나 내러티브 확정성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음악회 시작전의 불협화음의 시간속에 어쩔수 모르는 불안감의 연속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명확한 정리가 되질 않고 계속 가물거릴 뿐이다. 마치 큰 숲을 통과해서 나왔지만 정작 그 숲에 대한 생각보다  소나무 가지가 걸친 피걸러위의 햇살의 묘사나 마당으로 넘어오는 벚나무 가지를 통한 내면의 심리적 묘사를 하는 부분등의 상당히 시크한 일련의 문장과 단어들이 뇌리에 더 깊게 각인 되어버리고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둘로싼 전체에 대한 특징적인 기억의 끄나풀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마치 작가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끌어가는 변주곡에 자연스럽게 넘어간 느낌처럼 말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이란 특정한 유명 정치인, 유명 연예인들의 삶이 하나의 표본이 되고 또 그렇게 인지되도록 매스미디어는 은근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마치 나 자신의 삶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보여지는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고 또 그럴려고 열심히 노력아닌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것이 진정한 나의 삶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수도 없고 찾을 필요성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레이철 커스크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색다르게 다가온다. 아니 정확하게 다가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토머스-토니부부를 비롯하여 등장하는 커플들의 삶, 부부나 커플의 공통적인 삶, 그리고 각각 개인들의 삶은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주목받지 않는 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삶을 그리고 있지만 이러한 불협화음같은 삶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변주곡을 형성하듯이 우리네 인생 역시 별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뭐 특별할 것도 없고 튀는 음정이나 박자가 다소 있더라도 결국 거대한 관현악곡에 묻혀서 표시나지 않게 흘러가는 음악회처럼 보여진다. 음악회가 끝나고 난 뒤 뜨거운 감흥보다는 오히려 허전함이 더 크게 남는 현실을 반영한 듯 하여 자뭇 씁슬한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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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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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바쁜일과를 대충 정리할때인 오후 5시경이면 어김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애국가와 동시에 확성기에서 사정없이 울려퍼지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더불어 진행되었던 "국기 하강식"을 겪은 세대로서 '국가'라는 개념은 머리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현상으로 국가를 떠올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고 절로 바른자세를 취하게 된다. 지금도 가끔 야구장에서 국민의례가 있을때도 역시 그 자연스운 분위기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시민들은 그저 태극기를 바로보면서 정적에 휩쌓이게 된다. 그나마 국기하강식이나 교련수업 세대가 아닌 요즘 세대들에겐 의식이라기 보다는 참여하고 즐긴다는 유희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아직까지도 '국가'라는 개념 정의에 정확한 답변을 내려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인식되었던 세대들에겐 국가라는 개념은 상당한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더불어 세세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각인되어있다.  

사실 '국가'라는 개념이 저변에 확대되어 지금처럼 인식되었던 시기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이라는 강력한 메타포의 출현과 동시에 민족 =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성립되면서 국가주의에 대한 연구와 이해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인 형틀이 핏줄에 호소하는 민족주의 발호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 국가라고 해도 그렇게 빗나간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이며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는 다양한 각도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저자는 '국가'에 대한 접근을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라는 세가지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자을 전형적인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자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자들은 진보의 국가론이라는 어느 정도 도식화된 틀에 맞추어 이를 주창했던 이론가들의 주장과 지금 현대 특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왕설래의 과정에 비추어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다. 특히 사회혁명과 사회개량이라는 개념을 유토피아적 공학과 점진적 공학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국가와 국가를 형성하는 구성원에 대한 이념적인 개량을 저울질 해볼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저자의 국가론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적인 편차가 존재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두에서 밝혔듯이 '국가'라는 개념을 학문적인 잣대로 세가지의 범주로 획일적으로 구분하기란 그다지 녹녹치 않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나 안건에 대해서 추구하게 되는 국가론은 한가지만이 아니라 세가지 범주의 혼합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저서를 통해서 '국가' 그리고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이념적 성향 그리고 향후 발전해 나가가야 하는 국가론에 대한 세설적인 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프리즘은 다양한 무지개빛을 띠게 마련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어쩌면 상당히 위험한 국가론으로 변질되기 싶다는 것을 우리는 히틀러의 예를 통해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익히 배운바 있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국가론이 과연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그 만큼 현대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구분없는 경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회색분자라고 폄하할 수 도 있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오히려 위험하고 왜곡된 국가론을 주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사고력을 키우면서 자신의 국가관은 어디쯤일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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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6월 리뷰 마감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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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바쁜일과를 대충 정리할때인 오후 5시경이면 어김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애국가와 동시에 확성기에서 사정없이 울려퍼지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더불어 진행되었던 "국기 하강식"을 겪은 세대로서 '국가'라는 개념은 머리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현상으로 국가를 떠올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고 절로 바른자세를 취하게 된다. 지금도 가끔 야구장에서 국민의례가 있을때도 역시 그 자연스운 분위기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시민들은 그저 태극기를 바로보면서 정적에 휩쌓이게 된다. 그나마 국기하강식이나 교련수업 세대가 아닌 요즘 세대들에겐 의식이라기 보다는 참여하고 즐긴다는 유희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아직까지도 '국가'라는 개념 정의에 정확한 답변을 내려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인식되었던 세대들에겐 국가라는 개념은 상당한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더불어 세세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각인되어있다.  

사실 '국가'라는 개념이 저변에 확대되어 지금처럼 인식되었던 시기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이라는 강력한 메타포의 출현과 동시에 민족 =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성립되면서 국가주의에 대한 연구와 이해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인 형틀이 핏줄에 호소하는 민족주의 발호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 국가라고 해도 그렇게 빗나간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이며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는 다양한 각도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저자는 '국가'에 대한 접근을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라는 세가지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자을 전형적인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자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자들은 진보의 국가론이라는 어느 정도 도식화된 틀에 맞추어 이를 주창했던 이론가들의 주장과 지금 현대 특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왕설래의 과정에 비추어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다. 특히 사회혁명과 사회개량이라는 개념을 유토피아적 공학과 점진적 공학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국가와 국가를 형성하는 구성원에 대한 이념적인 개량을 저울질 해볼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저자의 국가론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적인 편차가 존재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두에서 밝혔듯이 '국가'라는 개념을 학문적인 잣대로 세가지의 범주로 획일적으로 구분하기란 그다지 녹녹치 않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나 안건에 대해서 추구하게 되는 국가론은 한가지만이 아니라 세가지 범주의 혼합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저서를 통해서 '국가' 그리고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이념적 성향 그리고 향후 발전해 나가가야 하는 국가론에 대한 세설적인 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프리즘은 다양한 무지개빛을 띠게 마련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어쩌면 상당히 위험한 국가론으로 변질되기 싶다는 것을 우리는 히틀러의 예를 통해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익히 배운바 있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국가론이 과연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그 만큼 현대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구분없는 경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회색분자라고 폄하할 수 도 있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오히려 위험하고 왜곡된 국가론을 주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사고력을 키우면서 자신의 국가관은 어디쯤일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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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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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어도 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이라는 현생과의 이별은 어쩌면 공식화된 룰과는 사뭇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적인 개념의 장단의 유무를 떠나 항상 품에 안고 있는 죽음은 마치 최고 의사결정자의 시각에서는 제거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거대한 리스크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투자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비한 아니 결정요인자체로 상정하지 않고 싶은 요인이라고 하면 너무 비약적일까?

인간은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는 혹자의 말처럼 우리는 매시간 죽음이라는 최종 종착점을 향해 브레이크없는 기차처럼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간에 있어 죽음이라는 명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가?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삶의 연장선이라는 거대한 메타포적인 관념으로 인지되었고 이에 기반하여 종교와 신이라는 불세출의 발명품이 탄생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을 다른 출구로 돌려놓았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한 총체적인 불안과 공포는 인간인한 진행중에 있다. 특히 그 죽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잣대에 놓이게 되면 그 어떠한 철학적 의미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마련인 것이다. 여기 독일문학계의 주목받는 여류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라는 작품은 죽음을 소소하면서 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알리스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죽음과 죽음이 가져다 주는 감정의 기복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상당히 유니크한 작품이다.  

옛 연인, 나이를 초월한 지인, 지금 현재의 연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받게 되는 일련의 감정상태를 별개의 이야기 처럼 다루면서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죽음과 그 뒷이야기라는 형식의 구조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다. 어둠, 공포, 피의 향연, 부정, 두려움등으로 대변되는 통상적인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끌어 가는 내러티브의 큰 맥락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태양계의 행성을 이루고 있는 9개의 별중에 어느날 부터인가 명왕성이라는 별이 행성의 지위를 상실했듯이 죽음도 어쩌면 이런 명왕성의 상실처럼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런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죽음이라는 화학적인 종결보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는 상실감으로 인한 혼돈이 더 크게 느껴질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실감과 그 후유증은 자신이 태어나기전 얼굴한번 보지 못한 말테 삼촌의 죽음에 대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시크한 접근에서 더 명확하게 보여진다. 죽음을 직접 목격했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를 떠나서(죽음의 시점이 현재이거나 과거이거나를 떠나서) 나와 관련있는 일련의 죽음들은 상실과 더불어 아픔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러한 극히 평범한 과정의 되풀이가 어쩌면 삶이지는 아닐까라는 무거운 철학적 의문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흥미본위의 호기심를 주안점으로 접근하게 되면 큰 낭패감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이번 작품에는 스펙타클한 속도감이나 내러티브의 대반전, 모티브인 죽음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적 표현등 뭔가 숨겨진 장치적인 요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니크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 까지도 이런 일말의 기대감을 저버릴만큼 상당히 건조한 문장의 연속으로 남는다. 다섯남자의 죽음과 이를 대면하게되는 주인공의 입장차는 왠지 모를 엇박자의 연속처럼 보여 당혹감을 주기고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엇박자 내지는 불협화음이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근원적인 접근방식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작가의 의도된 장치적 연출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역자는 이러한 표현 기법들이 작가만의 매력포인트라 논평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나 알고 있고 치명적인 리스크지만 왠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죽음(상실)에 대한 장대하고 거대한 사고의 담론을 일상적인 삶의 한복판으로 녹아낸 작가의 담론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측면에서 작품을 보게 된다면 다소 무미건조하게 만 다가오는 문장들이 새삼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면서 잔잔한 수면을 흔드는 파장으로 가슴속에 오래토록 남게 될 것이다. 뭐라 딱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막연했던 상념들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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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전체국가주의의 이념으로 전세계를 파탄으로 몰고간 히틀러와 나치즘은 인류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남을 것입니다. 다양성이 결여된 일신교적인 사고가 얼마나 위험하고 그 패해가 얼마나 오래토록 트라우마로 남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세계사의 한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히틀러와 관련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단편적인 사건들의 총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6월 우리에게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듯이 제대로된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자각으로 다시는 같은 실수의 반복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애와 그의 업적, 사상의 기록을 상세하게 밝힌 책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전후 시대에 대한 개괄을 역사적 맥락, 사회적 환경, 권력의 범위와 한계, 시대상 등의 분야에 따라 정리함으로써, 그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또한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된 단 한 종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평전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전 환경부 장관 김명자의 <원자력 딜레마>. 환경부 장관으로 환경 정책과 원자력 정책에 고심해 온 저자의 오랜 학구적 깊이와 정책적 경륜이 녹아 있는 책이다. 후쿠시마 비상 사태 이후 흔들리는 원자력 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국인의 자리에서, 실천적 정책 입안자의 눈으로, 원자력계 외부에서 파헤친다. 

 

 

 

 

 

 

서스킨드는 이 책에서 수많은 이론 물리학자들의 희망을 모았다가, 실망만을 안겨 주고 역사의 뒤편을 사라질 뻔했던 끈 이론의 역사를 되짚으며, 우주의 가장 큰 수수께끼, “우주는 왜 우리와 같은 형태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를 해결할 희망은 끈 이론 속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새롭게 진화하고 있는 끈 이론이 유도해 낸 ‘풍경(Landscape)’과 ‘메가버스(Megaverse)’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초월자나 신 또는 지적 설계자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 과학자들이 뛰어넘기를 포기한 갭을 넘어갈 수 있음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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