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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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3개 지상파 방송사의 메인 뉴스에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국상고사에 대한 확고부동한 논지가 재정립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단체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국민의 혈세로 설립된 단체이다)에 의하면 역사적인 사초와 기존 주류학계의 일목요연한 논지를 받아들여 우리 상고사의 결정적 KEY를 쥐고있는 浿水(패수)의 위치비정을 대동강이 아닌 한강으로 봐야 타당하다는 논지를 펼치면서 한사군은 분명하게 한반도내 한강이북에 존재했다는 기존의 정설이 확정되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독립무장항쟁에 대해서 국권회복운동이냐 對테러리즘의 일부이냐에 대한 견해도 금명간에 확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왔지만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동안 분열된 국론이 말끔히 정리됐다. 과거가 무엇이 중요한가 지금 현실이 중요하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반응은 한결 더 하다. 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거랑 집에서 아버지께서 말해주는 역사가 너무나도 차이가 나서 혼란스러웠는데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네요. 뭐 독도고 고구려고 우리역사나 땅이 아니면 어때요 지금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겐 별 도움이 안되었는데 잘된 일이죠"  의외로 한국희극인협회는 성명을 통해서 이보다 더한 코메디는 없었다라는 짧막한 논평을 냈다.』
 

상기의 내용은 가상의 기사이고 인터뷰이다. 물론 말도 안된다는 허튼 소리라고 할 지 모르나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사실은 우리 현실속에 버저히 존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쩌면 이런 내용은 현재 대한민국 주류사학계에서는 내심 은근히 바라고 있는 기사일지도 모른다. 뭐 이렇게 생각하면 억측이나 기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세계사를 통틀어 우리민족 만큼 자국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이 높은 나라도 드물지만 반면에 우리만큼 자국역사를 폄하하고 모르는 민족 또한 눈을 씯고 찾아봐도 없다. 또한 학계가 양분되어 어디까지 내땅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땅이라고 갑을박론하는 나라 역시 이 지구상에는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재야 사학자 이덕일씨는 그동안 골리앗을 상대로 고분분투하였으나 결국 거대한 허상과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집단에 의해 그의 주장이 사장되었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들 세력에 대해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동안 강단과 재야 양측학계의 공방대상이었던 사안을 그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범국민적인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공론화 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본서가 집필된 것으로 사유된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한국사의 가장 논쟁거리인 한사군의 한반도내 존재사실,삼국사기 불신론, 조선후기 역사왜곡,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격하등 크게 4가지 부분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이나 독도의 자국 영유권 주장 그리고 지금 거의 확정 되어버린 중국의 고조선,고구려,부여등을 중국변방의 역사 편입이라는 동북공정프로젝트를 접할때 마다 마치 양은냄비가 달아오르듯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정부 강경대응등을 외치지만 결국 약간 그것도 아주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마치 무슨일이 있었느냐듯이 잠잠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국의 내노라는 사학자들이 알아서 상고사에 대해 축소해석해주니 중국이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 일이겠는가. 이는 일제 강점기때라면 아마도 귀족으로 작을 내려주고도 시원치 않을 만큼 환호할 일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크게 두 분류의 집단에 의해서 자행된 행태라고 본다. 근본 교주주의 성리학으로 무장한 노론계와 그 후손인 친일식민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철저하게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국 즉 중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노론계에 의해 고려사와 상고사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이들의 자손들인 친일식민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적극 호응하고 아예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문학작품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해방이후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새로운 역사인식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버린 대한민국 사학계는 결국 이들의 길러낸 제자들에 의해 학계의 머리수가 채워지면서 지금까지도 철옹성 같은 철밥통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OECD회원국이자 G20회원국이고 세계경제 열손가락안에 들고 있다고 동네방네 홍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라고 혈세를 투입하여 세워준 단체에서 오히려 중국사학계보다 한발 더 앞서 알아서 교통정리를 해주는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과연 이나라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나라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행태를 뭐라고 해야하나? 우리에게 역사라는 것은 과연 존재했기나 한가?

아무리 재야학계에서 중국고대문헌과 그리고 실존하는 중국의 역사유물(홍산문화유적,하가점상하층유적등)을 제시해도 이병도를 교주로 한 주류사학계의 신앙은 변치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사학이라는 학문을 폄하시키고 젊은층으로 부터 외면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면서 결국 일반대중과 괴리되는 현상을 자아내게 했다. 결국 역사는 그들만의 역사로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제 일회성 이벤트 형식이 아닌 좀더 먼 안목을 가지고 우리 역사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가장 늦었다고 할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어찌보면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새로운 역사인식에 촞점을 맞추어 왜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인가에 대한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할 때이다.

단재선생은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이라고 누누히 역설했다. 지금의 시대는 과거처럼 총과 칼로 다투는 시대가 아니라 문화와 경제그리고 역사로 패권을 다투는 시대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의 역사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그 어떤 누구도 지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의 뼈아프고 부끄러운은 경험을 통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줌의 흙밖에 되지 않는 집단에 의해 한민족의 역사가 뿌리통채로 흔들려서야 어찌 말이 되겠는가. 지금에 와서 당시의 대동아 통합을 캐치프레이로 내건 대일본제국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음독하여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한반도내에 한사군을 일본보다 더 적극적으로 비정해 버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외모마저도 일본인을 닮고 싶었던 철없는 학자 개인을 질타하자는 것은 아니다.(이는 역사가 두고두고 그의 반민족행위를 기억할테니까 굳이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감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이 사람을 사학의 태두로 신봉하는 무리들이 문제가 되면 더 된다는 것이다. 진보적이고 적극적사관을 설파하는 저자를 비롯한 재야사학계를 너무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고 실증사학을 배제한다고 몰아가는 그들이야 말로 정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경우인 것이다.

재야학계를 비롯하여 국민들은 단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알고져 할 따름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과연 우리 한국사에 단 한번이라도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기라도 했던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게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가 범국민적인 여염을 받들어서 제대로된 우리 역사를 새롭게 구성해야 할 것이다. 아니 새로운 구성이 아닌 있는 사실 그대로 기술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대체로 유교권의 국가뿐만 아니라 서양의 경우에도 한 집안의 역사를 담고 있는 족보 내지는 가계도에 대한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물며 한민족의 근원인 뿌리를 찾는 문제는 두말하면 잔소리일뿐이다. 우리가 스스로 찾지 않는 우리의 뿌리는 그 어느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다것이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저자가 이번 저서를 통해서 저자처럼 전문적인 지식으로 역사인식하자는 소리는 아니라고 본다. 단지 그동안 알아왔다고 여겨졌던 한국사에 대한 인식을 커다란 범주내에서 재고찰할 필요성을 제시해주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서산대사가 남긴 시 한편이 지금 우리 한국사 연구와 접근방법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에 대해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
" 눈 내린 들판을 밝아갈 때는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마라, 오늘 우리가 걷는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라는 말처럼 지금 한국사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의 후손들은 또 다시 남의 발자국을 보고 걸어 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일 것이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전부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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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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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큼 훌륭하게, 이토록 아름답게 쓰는 작가는 없다", "눈부시다...놀랍다...우리들 인생을 페이지 갈피갈피에 옮겨놓고야 마는 콘로이의 열정은 한계가 없다"... 거의 대부분이지만 새책이 시중에 쏟아질때 마다 속칭 전문 비평가라는 사람들의 미사여구가 책을 돋보이기 위해서 그럴싸한 문구들로 도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러한 얄팍한(매번 속으면서도) 문구에 현혹되어 무심결에(이번만큼은 속지 말아야지 하면서도)책을 픽업해서 천금같은 시간을 탕진해가면서 과연 그들이 말하는 감동의 물결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씁쓸한 상술과 그에 편승한 서평가들에게 세속적인 욕한마디로 그 책에 대한 불쾌감을 들어 내는 것이 보통의 일이 된 것이 다반사라고 하면 너무 비약적인가? 

하지만 <사우스 브로도>를 읽고 난 순간(아니 읽어가면서 바로) 다른 생각이 든다. 그토록 미사여구와 환상적인 단어조합에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사람들이 왜 이모양의 찬사밖에 던질줄 모를까라고 갸웃뚱해질만큼 팻 콘로이의 <사우스 브로도>는 환상적인(그저 내가 알고 있는 단어의 깊이가 작아서 이말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작품이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외곽 해안도시 찰스턴에서 벌어지는 열명의 청춘들이 겪는 삶과 사랑 그리고 우정. 보통 이러한 이야기거리는 아주 단순하고 전통적이고 다소 식상한 느낌마져 주는 소재이지만 존 콘로이를 만나는 순간 한편의 서사시로 변해버린다는 것을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금새 느낄 수 있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이러한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는 유사한 예를 정말 귀가 따갑고 눈이 아프도록 많이 겪어 봤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아니 아름답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야기꾼은 아마 내 기억엔 없었던 것 같다. 미국 특히 개성 강하고 보수적인 남부지방에 대한 그 어떠한 경험이 없는 이국의 독자라도 소설을 읽고나면 찰스턴이라는 도시는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내 기억속에 가까이 남아 존재하고 있는 도시로 탈바꿈해 버리고 만다. 마치 1969년에서 20년간 찰스턴에 살았다는 강렬한 느낌을 충분히 받게 할 만큼 작가의 레이아웃에 대한 묘사는 마음에 푸근한게 다가온다. 

성격으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인종적인 문제로 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친구들이 소중하게 키워 나가는 사랑과 우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 인생이라는 화두를 만나게 된다. 태어나면서 왠지 모르게 그 방향성이 정해져 버린것 같은 인생이지만 그리고 그럴거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전혀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진 청춘들을 통해서 작가가 바라보는(아마도 레오라는 분신으로 통해서) 인생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레오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 주변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 심지어 허리케인의 기습으로 생과 사의 문턱에 도달했던 순간까지도 그저 인생에 한두번 정도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냥 주어진 아니 어떤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인생을 한번즘 살아가는 의미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일종의 철학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인 레오의 형인 스티브의 자살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때 마저도 잔인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그저 네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일중 하나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치 그냥 길을 걷다가 우연히 죽도록 보기싫은 사람을 만난것 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개인적은 레오와 시바의 첫 사랑나눔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작가의 언어묘사에 다시금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남녀간의 사랑행위가 이처럼 아름답게 묘사했던 이가 과연 있었을까 할 정도 마치 서쪽 수평선으로 저무는 태양을 바라 보고 있는 느낌을 가질 만큼 강렬하면서도 한편으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구었을때의 편안함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은 극적인 반전을 가지고 있는 추리소설이나 대하 역사소설에서 나오는 방대함과 애틋하고 짜릿한 로맨스를 느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그저 레오를 중심으로한 젊은이들의 인생을 다룬 정말 재미없는(여타소설에 비하면 그소재의 진부함이) 내용을 가득차 있을 뿐이다. 기껏해야 광적인 소아이성애자의 집착과 허리케인이라는 자연재해 그리고 레오형의 자살의 비밀등이 약간의 긴장감을 갖게는 하지만 이러한 약간의 충격들 역시 찰스턴이라는 무대에 그냥 한번쯤 일어날 수 있는 일인것처럼 묻혀서 지나간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가의 엄청난 포스을 느끼게 한다.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그저 우리가 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 겪게 되는 일이 뿐이라고...
그렇지만 이렇게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했던 작가는 없었다는 점에 그 어떠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1,2권 합쳐서 천여페이지에 육박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소설의 후반부를 갈수록 이야기의 결말에 다가가야만 한다는 아쉬움에 책장을 넘기기가 절로 주저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문학작품의 개성강한 주인공들의 삶을 동경하게 마련이다. 그들 삶을 통해서 꿈을 꾸고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잠시만 현실로 눈을 돌리면 모든것은 변한게 없다. 언제 무슨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더라도 있을수 있는 것이라며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굳이 인생에 틀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더라도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팻 콘로이는 <사우스 브로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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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김대중 3
백무현 글 그림 / 시대의창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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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한발의 총성으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또 다시 한번 요동치게 된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다"라는 말을 남긴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최후진술처럼 그렇게 유신이라는 희대의 사기극은 어이없이 너무나 허무하게 저편으로 지기 시작했다. 이는 4.19에 이은 한국 현대사의 또다른 부흥을 예고하는 시발탄이었다. 유신치하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온국민은 그야말로 유럽중세의 암흑의 시대를 방불케하는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촛불만을 바라보는 처지였다. 이제 그 어둠의 장막이 거치면서 따뜻한 춘풍과 함께 서울의 봄이 오기 시작한다.

김대중과 한국현대사는 바늘과 실처럼 항상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찾아오는 일련의 정치사태는 김대중을 떼어내고선 역사진행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을정도로 상호간에 많은 관련성을 가지게 된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정치활동이 중지되었던 김대중과 김영삼등의 정치인들은 박정권의 몰락으로 인해 해금조치되게 된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출신의 신군부에 의한 새로운 정권창출 내막을 막아내는데는 아직까지도 나이브한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김대중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권이 전두환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그들의 음모는 일사철리로 진행되게 되었고 마침내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한국전쟁을 제외한 가장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1980년 5월 전라도 빛고을에서 발생한 광주민중항쟁은 지금까지도 사건해결이 미흡할 정도로 우린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잔혹감과 처절함은 인간이기를 거부해 버린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그날의 상혼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앙금으로 남아있을 만큼 많은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버렸던 것이다. 또한 다시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일어설 기반을 상실한 채 수면밑으로 강제 잠수당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물론 신군부들의 정권욕에 대한 치밀한 계획성과 그 추진과정에서의 비도덕성을 최우선으로 질타할 수 도 있지만 결국 김대중과 김영삼등을 비롯한 정치권의 불협화음이 4.19이후 찾아온 봄날을 놓쳐버린 결과라는것에 대하여 부인할 수는 없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김대중의 설득을 포기하고 결국 광주항쟁과 연관시켜 내란음모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또 하나의 웃지못할 희대의 코메디를 연출하면서까지 정적제거에 열을 올렸지만 결국 권력의 정통성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과 협의하에 김대중을 풀어주게 된다. 

<만화 김대중 3>는 이렇듯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질곡이 깊었던 1980년대를 다루고 있다. 정치적 해금에서 다시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언도 받고 영어의 몸으로 수감생활을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번권에서도 DJ대한 정치적 행보와 정치역동에 촛점을 맞추고 있지만 집필의도에서도 밝혀듯이 인간 김대중에 대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김영삼계열과의 불협화음 과정이나 신군부들의 회유과정에서 한 인간으로서 받게 되는 선택의 길목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그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선고재판에서 재판장의 입술모양만 뚤어지게 쳐다봤다는 일화 역시 누구나 공감이 갈 수 있는 솔직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또한 수감생활에서 이희호여사에세 보내는 편지를 보노라면 위대한 정치인을 떠나 일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을 억압했던 군부세력에 대한 최후진술로 다시는 이땅에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고 했던 말이나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어서 삭발을 강요했던 교도관에게 후일 대통령에 당선되어서까지 연하장을 보냈던 사연등은 비록 그의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은 정치적 연출이라 폄하하지만 이는 받아 들이기에 너무나 억지주장일 것이다. 생사의 문턱에서 그의 모습은 정치인의 모습이 아닌 세상을 초월한 성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아무리 사상적 스팩트럼의 위치가 좌냐 우냐를 떠나서 정말 숭고한 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김영삼의 단식투쟁과 맞물려 민추협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금 민주주의 실낱같은 희망을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단초가 된다. 1980년대는 김대중 개인이나 한국현대사 둘다 사형선고가 내려졌던 시대였다. 결국 그는 다시 살아났고 우리의 현대사 역시 다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마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처럼 초라하지만 웅장하게 민주주의는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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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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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來로부터 禁書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대중에게 보여서는 안되는 기록들 즉 집권계층에게는 치명타를 줄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책을 말함일 것이다. 하물며 한 민족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리고 그 민족의 역량이 대범치 않다면 금서는 영원히 금서로서만 남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 한민족의 근원의 비밀을 담고 있는 금서의 행방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 여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천년의 금서>이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당황하고 분노했다. 일본보다 중국측이 더 못된 짓을 자행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하지만 마지막장을 덮으면서는 낯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웠다. 아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도 이런면에서 작가는 <천년의 금서>를 집필하는 동안 수 많은 고뇌의 바다속을 허우적거리지 않았나 하는 상상을 갖게 한다. 우리상고사의 뿌리인 고조선 이전의 "韓"이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비밀과 음모, 마침내 금서의 비밀을 풀고 역사의 실마리를 찾게 되지만 왠지 통쾌하다는 생각은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그저 가슴 깊은 곳에서 한심하고 부끄러운 심정만이 눈 앞을 가로 막는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되고, 공식적이면서 현존하는 역사서인 三國史記를 보면 B.C 56년경 박혁거세에 의해 신라가 건국 되고 이어서 고구려, 백제가 고대국가로서의 출발을 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물론 삼국사기의 정체성에 대해선 역사학계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신빙성에 대한 의혹을 보내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삼국사기는 우리의 뿌리는 고조선 및 고조선이전의 국가형태에 대해서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작성할 시기에 이미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서인 유기, 신집, 서기가 유실되었고 또한 신라를 정통으로 역사서를 서술하다 보니 초기 3국의 연대부터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후 일제감정기시대에 실증사학을 모토로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사학자들에 의해 굳어진 우리의 상고사는 그야말로 오류와 허점 투성이로 점철되어 왔다. 지금도 우리학생들의 교과서엔 이러한 자취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한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각들은 어찌 보면 이미 우리들 자신들의 뇌리속에 각인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수많은 외침과 불안정한 정세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는 식으로 자기폄하식 자조가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식민사관속에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왔다. 한국가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국립박물관의 역사연대표에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 정통강단학계에서 고조선을 고대국가로 인정하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실증사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우리의 강단학계(랑케의 실증사학을 우리만큼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 곳도 없으리라)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 어떠한 고고학적 증거로 고조선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발상은 지금 사학계의 거두로 알려진 이병도의 역사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일본학자들의 영향으로 우리 상고사를 한반도내로 확정해 버린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지금도 우리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단재 신채호선생을 필두로한 좀 더 나이브한 재야사학자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서서히 우리상고사의 실체가 하나둘씩 들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통설에 밀려있는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영유권주장에 분개하면서도 실상 그 대처방안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번 중국의 동국공정확정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의 뿌리인 상고사마저도 중국변방의 역사로 편입되어버렸다는 자체가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국의 유명한 역사학자들도 부정해 버린 역사인데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일반적인 국민적정서와 학계의 학문적 정서는 상당한 괴리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실증사학에 근거해 문헌이나 고고학적 유물로 그 확정을 지울 수 없는 현상을 학자적인 양심에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북공정프로젝트에서 발견된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 유적발견에서 우리의 뿌리실체가 들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 학자들도 인정한 한민족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학계의 입장은 그리 명쾌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이제는 이러한 유물의 발견과 동시에 과학적 입증방법을 통해서 현실화되어 있지만 여전히 고전적인 논거에 집작하고 있는 것이 그저 서글픔만이 남는다.

작가는 이러한 우리 강단사학계의 폐단을 사학자인 여주인공이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해서 역사적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네들이 강조하는 실증사학적 접근방식이 어떤 것이며 또한 실증의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요 몇 년 사이 새롭게 발굴되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요동땅의 우리 유물들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항변일 것이다. 마치 이렇게까지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인정 못하냐는 식의...

책의 말미에 한은원교수와 보수 정통학자들간의 논쟁 과정을 보면 <시경>편의 해석과정과 <단군세기> 오성취루, 남해조수퇴삼척의 과학적 증명을 둘러싼 논쟁들이 바로 우리 학계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정말 사학자들이 꼭 한번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학문이라는 대의의 달성이라는 것 역시 사소한 부분을 무시하고선 그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我와 非我와의 투쟁이다” 라는 단재 선생의 일갈처럼 결코 우리 스스로 찾지 않는 역사는 그 어느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소설속 주인공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보면서 느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도 일본이나 중국처럼 역사를 왜곡하자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단지 최소한의 자기의 정체성 그 뿌리에 대한 인식은 저버리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뿐이다. 우리 선조들이 피땀흘려 이룩한 역사적 자취를 후대에 이르러 외면하고 폄하해서야 되겠는가 각 가정에서 족보를 신성시 여기듯이 우리 민족이 근원인 상고사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할 뿐이다. <천년의 금서>를 통해서 작가는 또다시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반성과 자각의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역사서 한권의 의미가 어떤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  이는 앞으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미완의 숙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역시 김진명이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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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라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가난한 열등생, 서울대 합격하기까지의 인생역정- 책 제목과 부제만 보면 난 개인적으로는 한숨이 먼저 나오면서 결코 이런 내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다.

왜곡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중에 하나로써 그리고 영원한 숙제이자 지상과제인 교육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 봐야만 하는 입장에서 이런 내용의 책들이 더 이상 출간 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부모들이 절대로 읽어서는 안된다. 특히 이 책을 무슨 서울대 가는 비법서인양 착각하고 읽는 부모들이 있을 것 같은 노파심 때문이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필자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절대로 그런 책이 아니다. 또 읽어 보면 별 특별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의 부모들이 그렇게 받아 들일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왜? 속되게 표현하면 애들 잡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봐라 이처럼 가정형편이 힘들고 공부도 지지리도 못했던 학생도 죽어라고 노력하니까 서울대를 가니까 이 사람보다 조건이 더 좋은 너가 서울대를 못 간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고 하면서 공부, 공부, 공부를 왜쳐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부모들의 심정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조상 속칭 말하는 일류대를 나오면 분명 삶의 질(외형적인 질과 자칭 내면적이라고 착각하는 질을 포함해서)이 향상되는 것은 사실이다. 부모세대가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리고 지금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공부가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트인 생각을 하는 부모세대도 많이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자사고나 특목고를 보내기 위해 초등학교때부터 남과는 다른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국가통수권자가 솔선수범하여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유치원에서부터 우리말을 알기전에 영어부터 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마냥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기엔 왠지 불안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 사회적 분위기가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우리자녀들을 바라보는 점 또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로 나누어서 결국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를 조금이라도 잘하는 방법론만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이 서점가의 로얄박스에는 언제나 공부잘하는 비법이나 나도 일류대를 갈 수 있다는 등등 그야말로 공부기계를 양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굳이 부모들이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작정을 한다면 다른 내용은 모조리 잊어 버리고 단 하나 필자인 철범씨의 어머니 같은 마음만 받아 들이길 바란다. 필자의 어머니처럼 절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부하라는 소리 않고 그냥 묵묵히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말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의 필자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가장 큰 밑거름은 바로 필자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필자의 노력도 대단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에 '공'자 한마디 안하고 지켜봐 준 어머니가 그저 대단할 뿐이다. 그리고 공부 보다 책읽기를 중요시 여겼던 점 또한 학창시절 필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하는가 뻔한 말이지만 우리 학생들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필자처럼 어두운 밤길을 손전등을 비쳐가면 단어장을 보고 문제집을 몇번씩 되풀이 해서 풀어야 한다는 그런 방법론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인들의 삶을 보면 대체로 어려운 가정형편속에서도 주위 환경에 굴하지 않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곤한다. 필자 또한 만만치 않은 환경속에서 나름 성공했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우리가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아마 필자도 같은 심정이겠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위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실패가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말하듯이 인간은 항상 실패를 하게 마련이다. 단지 성공한 사람과 일반인의 차이는 그 실패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살이에서 그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학생의 본분은 첫째가 공부에 있음은 당연하다. 단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다음 문제인 것이다. 공부를 받아 들이는 마음가짐에서 나름의 기본원칙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자전적인 삶에 투영된 일관된 점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한창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은 학생들에게 또 공부관련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경험을 해본 이들의 솔직한 삶을 한번 들여다 보고 새삼 마음을 한번 더 추스려보는 것이 영어단어 하나더 외우고 수학공식 하나 외우는 것 보다야 백배는 낫다는 점이다.

지금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잘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가장 잘맞는 옷을 찾는 것이다. 하루를 입어도 10년을 입은것 거처럼 편안하고 10년을 입어도 하루를 입은것 처럼 세련된 그런 자신만의 옷을 찾는 것이 공부에 대한 진실을 알게되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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