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우리역사
信太一郞 지음, 이종윤 옮김 / 삼국시대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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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고찰하여 특이한 국가관계가 지속적으로 존속하는 경우가 왕왕있다. 그중에서도 韓日양국가처럼 복잡하고 특별한 케이스는 드물 것이다. 지리적으로 근거리에 위치하고 언어학적이나 문화, 인종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융화될 수 없는 민족적 정체성이 두드러지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양국은 그 차이점만큼이나 물리적인 거리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 역시 특별한 경우일 것이다. 임진왜란, 일제감정기, 한국전쟁등 우리에게 생각조차 하기 싫은 역사적 배경들은 상대방인 일본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듯이 양국은 동일한 역사적 관점을 각각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러한 시각은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출간된 <또 하나의 우리역사>는 일본의 역사매니아가 쓴 한일역사통사로서 양국간의 역사적 시각에 대한 많은점을 시사하고 있다. 오히려 전문역사학자가 저술한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더 주목할 필요성이 있는듯 하다. 역사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일간의 역사가 학계에서 바라보는 역사보다 더 대중적이면서도 일반인들의 역사관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반적인 내용으로 보아서 우리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서술형태를 볼 수 있다. 이말은 마치 이 책의 저자가 만일 한국인이었다면 과연 어떠한 반향을 불러왔을까라는 점이다. 우선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은 韓民族중심의 국수주의적인 역사해석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라는 일본학계의 반응이 먼저 떠오르고, 다음은 어렵사리 아픈상처를 보듬고 출발하고 있는 양국간의 부스럼을 키우는 꼴이며 역사적 고증이 확실하지 않는 사실을 과대포장하고 있다는 국내학계의 반응일 것이다. 그 만큼 일본인으로 이렇게 서술할 수 있을까라는 점에 사뭇 호김심이 발동할 만큼 저자의 역사시각이 진보적이다. 물론 우리는 저자가 진보적인 것이 아니고 이제야 역사적 진실을 깨닫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동안 일본내의 역사관에 비추어보는 정말 신선한 충격 그 자체이다. 

다음으로 저자의  각별한 노력이다. 비전문가이지만 전문가 못지 않는 역사연구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전문가들이 보지 못한 역사의 이면을 제대로 보고 연구했다는 점이다. 아니 보지 않을려고 외면했던 면들을 제대로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의 일본과 삼국과의 관계에서 중국과 삼국과의 관계등 그동안 정설에서 외면했던 내용들을 조명하면서 양국간의 역사흐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인의 관점에서 한국사의 전반적인 견해는 마치 몸에 걸친 옷을 벗겨내는 부끄러움을 자아낼 만큼 애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해방이후 난장판이었던 시대를 나름의 논조로 해석하는 부분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물론 저자가 조선시대를 李氏조선으로 인식하면서 당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점등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는 국내 강당학계의 역사인식에 비하면 조족지혈정도도 되지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이번 저서를 통해서 한일양국간의 역사관이 역사적 사실에 좀더 근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 가장 돋보인다. 그동안 우리는 일방적으로 문화경제적으로 혜택을 주었는데 배은망덕한 행위만 해왔다는 피해의식, 일본측은 그저 피해망상에 사로잡혀있다는 논리로 반박하는등 결말없는 양쪽의 메아리만 주고 받아왔지만 이번 책의 출간으로 인하여 양국간의 새로운 역사인식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준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강단학계의 역사인식에 반성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런 일본이도 있었구나라는 생각보다 왜 우리는 이러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이 먼저들어 얼굴을 절로 붉히게 한다는 점을 소위전문가라고 말하는 이들은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국의 일반대중들의 한쪽방향으로만 치우친 역사관의 재성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동북아 3국은 역사전쟁을 하고 있다. 어느쪽 주장이 옳고 잘못되었다는 점을 떠나서 동북아 3국의 진정한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희미하게나마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역사라는 큰 강은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하찮게 보이지만 이러한 지류가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소소한 개인적인 역사관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작은 지류가 모여모여 역사를 써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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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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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도시, 동로마제국의 황도,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수도 지금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풀의 역사는 그 오래된 시간적 기원만큼이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리고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색적이고 복잡한 문화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그리스도의 성전과 이슬람의 성전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는 겉으로 들어나는 풍경만큼이나 내재적으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그 옛날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 자신이 밝혀듯이 작가의 작품중에 색깔이 가장 돋보이게 살아있는 작품으로 빨강색과 검정색등 비롯한 다양한 색감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비잔티움제국을 몰아낸지 150여년이 지난 1591년 술탄 무라트 3세의 제임기간을 역사적 배경으로 전개되는 역사소설이자 추리소설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또 한편으로 당시 이슬람문화의 절정기를 구가했던 세밀화를 다룬 예술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술탄의 밀명을 받아 은밀하게 진행되는 작업도중 살해된 세밀화가 엘리강스의 죽음을 시발로 이를 둘러싼 또 다른 죽음과 절세미인인 세큐레의 사랑을 얻기 위한 구애자들의 질투, 그리고 당시 유럽으로부터 거세게 불어닥친 문화적 충격을 겪어 나가는 과정을 추리소설의 플롯을 가져와 전제적인 내러티브를 긴장감 있게 끌어가고 있다. 빨강색이라는 색감자체에서 유추되는 정열적이고 역동적이면서도 왠지 죽음의 전초전을 암시하는듯한 불안한 구도를 덧씌우면서 작품속에서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한다. 특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빨강색이 주는 느낌은 서양의 관점과는 사뭇다르다. 스페인 투우에서 보여지는 정열적인 생동감 보다는 핏빛과 죽음을 암시하는 불안하면서도 생명의 근원에 다가가게 하는 신비로움을 동시에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작품전반에 걸쳐 빨강이라는 색감을 뿌려놓고 있어 마치 살얼음판을 건너는듯한 불안함과 동시에 끝모를 속도감을 주고 있다. 

16세기는 유럽에서는 일대 변혁의 시기였다. 중세라는 암흑의 시대를 청산하는 인본주의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동안 세상의 모든 관점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관점 즉 인간이 아닌 신의 관점이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시작은 예술작품 회화에서 유독 강하게 표현되었다. 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은 신이 중심에 서다 보니 인간의 시각은 불손하고 비종교적인 이단을 상징했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치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멀리있는 사물은 작고 흐릿하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사물은 크고 선명하게 보인다는 극히 작은 진실이 원근법이라는 화풍을 통해서 서서히 들어나면서 세상은 변하게 된다. 당시 이러한 원근법이 중세를 고하고 르네상스라는 시대를 열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특히 이러한 발상자체가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위험스러운 것이였다. 그러나 인간은 서서히 자신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이러한 시각이 전혀 불경스럽고 이단적이 아니라 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유럽의 이러한 사조와 대조적으로 이슬람세계는 아직도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길 거부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전환기적 시점을 작품의 배경으로 기존화풍을 수호하기 위한 세력과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기 위한 세력의 한판승부는 결국 구세력의 승리로 매듭되지만 이러한 시도가 남긴 여운의 여파에서 이슬람세계 역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내 이름은 빨강>의 특색중 하나가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내러티브 화자들의 다양성이다. 주인공 카라와 세큐레, 세밀화가 엘레강스,나비, 황새, 올리브 그리고 말, 개, 빨강, 죽음등의 비인격체등을 통해서 릴레이 게임을 연상시키듯이 한 화자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바로 다음 화자가 네러티브를 풀어가는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 전개방식이 사건이 종결되고 먼훗날 세큐레의자식인 오르한을 화자로 전체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대단원에서 암시하는 독특한 구성방식을 가지고 있다. 작품 전개상 살인과 그 추적 그리고 신과 인간의 대결, 사랑의 쟁취등 다양한 대립구조를 보여주지만 그 결말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이러한 대립구도를 통해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 보다 대립적인 입장을 이해시킬려고 하는 의도가 이야기 전반에 묻어 있다. 이는 동서양 양측의 문화적 이질감의 부각보다는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융합할 수 있는방안을 그저 무덤덤하게 다양한 화자들의 시각에 담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그동안 여성에게 많은 제약과 굴레를 안겨주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이슬람세계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제공하고 있다. 여주인공 세큐레를 통해서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이슬람 여성상을 보여준다. 자신의 생각대로 연인을 선택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이끌어가는 세큐레를 통해서 작가는 신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인간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과 그런 세상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그저 빨강색을 빨강색으로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는 색감을 떠나서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제 목소리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빨강색에 담겨져 있는 다양한 의미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거부하고 있다. 아니 그러한 명명 그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전해준다. 빨강은 빨강일 뿐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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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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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유무를 떠나 비단 유물론적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가끔은 내세에 대한 두루뭉실한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경우 좀더 구체적인 자기네들의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내세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각종 종교가 선사하는 내세와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체득한 알량한 지식의 편주를 마치 쓰레기 분리수거하듯이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내세를 꿈꾸고 있다.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현세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의미로서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시 만에 하나라도 그러한 내세가 있다면 그러한 나의 내세는 어느 특정의 종교에서 말하는 심판을 받고선 나의 의지가 아닌 신이라 지칭되는 제3자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나의 의지로 펼쳐지는 아주 달콤한 내세이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비록 그러한 내세의 유무는 제쳐두고서라도 이러한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지는 것이다. 

<달콤한 내세>는 뉴욕주 북부의 어느 작은 산간마을에서 발생한 끔직한 사고를 소재로 벌어지는 산간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여느날과 다름없는 아침 등교시간에 벌어진 사고를 각각 다른 네명의 화자를 통해서 각 화자들의 객과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 사고와 무관한 각 개인사를 담아내고 있다. 사고버스의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 매일 아침 쌍둥이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우고 스쿨버스를 뒤따라서 자신의 직장인 정비소로 향하는 빌리 안센, 그리고 그날의 끔직한 사고로 인해 구사일생하는 니콜 버넬을 통해서 과연 그날 그곳에서 어떤일 벌여졌는지 그리고 사고이후 갑자기 몰아닥친 후폭풍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보여준다. 여기에 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뉴요커 변호사인 미첼 스티븐스를 등장시켜 마을 전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작품 전체의 플롯이나 내러티브는 스쿨버스의 전복과 그로인한 어린학생들의 죽음 이후 보이지 않게 흐르는 마을의 분위기를 각 화자들에 의해서 탄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이 작품의 마지막장을 덮게되면 다소 어리둥절해진다. 독자들로 하여금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달콤한 내세>에 대한 그 어떤 결말없이 서둘러 작가는 끝을 맺어버리는것 같은 인상마저 던져주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달콤한 내세인가 대한 그 어떤 암시를 남기지 않은 것 처럼... 

이 작품은 1989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음료수 트럭과 스쿨버스의 정면충돌로 어린학생들이 20명넘게 사망한 사고를 모티브로 차용하고 있다. 이 사건이 화재에 올랐던 것은 어린 학생들의 허무한 죽음이나 사고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의 과실소송으로 화재에 올랐다. 자그만치 손해보상금이 1억 5000만달러에 달하고 소송계류건수만 350건에 달하는등 그야말로 소송의 틈바구니속에서 온세월을 허비했지만 정작 세인들을 더 깜짝놀라게 한것은 사고발생의 책임자인 트럭운전사에 대한 형사소송은 단 한건도 없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달콤한 내세>역시 사고 이후 유가족들의 소송과정을 보여준다. 소송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마을 전체는 술렁이게 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개인들의 은밀하면서도 추잡한 일들과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소송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사악한 생각들이 전면으로 대두하게 된다.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그전 마을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라는 느낌이 급격하게 퇴색되고 자신에 좀더 유리한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기억의 왜곡까지도 강요받게 된다. 그러한 왜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니콜 버넬의 진술을 통해서 이러한 소송의 벗없음을 마감해 버린다. 결국 모든 책임은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의 과속으로 결정나게 되면서 과실 소송은 중단되고 마을 일시에 죽은자들의 도시처럼 고요만이 남게 된다.  

▣ 작가는 실제사고와 작품을 통해서 비록 사고로 인한 보상금으로 금전적인 도움이 될지라도 어느날 갑자기 작은 마을에서 사라져 버린 어린 영혼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그들의 내세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단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죽은이들의 역활이 소소한 보상금으로는 대신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달콤한 내세를 꿈꾸왔던 이들에게 그 어떤 사람들도 그들의 내세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인간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악한 감정이나 욕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또 다른 희망을 보여줌으로서 현세를 살아가는 이유는 또 다른 세계인 달콤한 내세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달콤한 내세는 현세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인 것이다. 이러한 꿈은 그 어떤 물질적인 댓가로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꿈을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무의미한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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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0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 100년간의 삶을 통해 얻은 지혜의 메시지
엠마뉘엘 수녀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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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라는 시간적 개념은 역사적 또는 그 비슷한 잣대를 견줄 경우 그다지 긴 세월은 아니다. 기꺼해야 1세기로 표현되는 100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개념에서 한켠으로 비켜나 있다. 하지만 이 100년이 다름아닌 우리 인간들의 생을 살아가는 삶을 지칭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지금처럼 최첨단 과학기술의 진보와 그로 인한 의학혁명을 통해서 이젠 왠만큼 산다고 하는 국가들의 평균수명자체가 어머어마하리 만큼 연장된 것은 사실이지 아직까지도 인간에게 100살이라는 삶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나는 100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는 2008년에 영원한 안식을 가진 '카이로의 넝마주이'라고 불리는 엠마뉘엘 수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전적 에세이이다. 특히 그녀가 살아간 시대는 격동과 변화 그리고 인류사상 가장 잔혹한 역사가 묻어있는 20세기를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남다른 100년이다. 종교에 귀화한 성직자로서 이러한 세기를 바라보고 느꼈던 그녀의 삶은 얼마나 많은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는게 오히려 한세기를 살다간 성녀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소 아쉬움으로 남을 수 도 있다. 

엠마뉘엘 수녀는 이 책을 통해서 사랑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물론 그녀의 직분상 종교적인 색체를 띠고는 있지만 수녀는 결코 자신이 속한 종교를 강요하거나 의도적으로 안내하지는 않는다. 특히 영원한 맞수인 이슬람과의 화해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고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선 그 어떠한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수녀 자신이 한평생을 소외받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러 과정에서 참 사랑과 희망을 발견한 것은 종교적인 봉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이들에게 던져주는 숙제이기도 하다. 수녀가 책에서 회상했듯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이도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자신이 속한 종교의 진리로 재단하지 않더라도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 길을 잃지 않는 법, 희망을 찾아가는 법을 통해서 그 삶이라는 여정을 통해 희망의 메세지를 던져 주고 있다. 마치 한여름밤 모깃불을 피워놓고 어린 손자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이야기를 해주는 자상한 할머니처럼 차근 차근 희망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삶을 먼저 살았고 수 많은 일들 겪고 가까이에서 보았던 인생의 선배로서 격하지 않게 편안하게 인생의 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명상록이나 위인들의 잠언 그리고 종교인들의 가르침등 무수히 많은 좋은 말들이 많고 또 많이들 접하고 있다. 하지만 대게의 경우 이런말들은 그저 말뿐인 허상인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엠마뉘엘 수녀의 말한마디가 더 절실하게 살아있는 우리에게 와닿는 것은 바로 그녀가 걸어왔던 길이 진정한 종교인으로서 길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가슴에 애잔하게 와닿는 것이다. 엠마뉘엘 수녀는 비록 영면하였지만 그녀가 이 땅에 헌신한 흔적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대의 불빛 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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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 - 2차 개정판
최동환 해설 / 지혜의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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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는 천부경과 더불어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大倧敎)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366자의 한문으로 씌어진 매우 짧은 경전으로, 5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천훈(天訓)·신훈(神訓)·천궁훈(天宮訓)·세계훈(世界訓)·진리훈(眞理訓)의 오훈(五訓)으로 되어 있다. 단군왕검이 전파한 성통광명,재새이화,홍익인간을 그 모티브로 다루고 있는 경전이자 철학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韓에 대한 기원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점에 대해선 학계를 비롯한 역사 연구가들에게 위서라는 의심을 받고도 있는점도 있지만, 우리의 뿌리인 고조선 더 나아가 고조선이전 국가의 실체인 '한'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져 있는 책이다. 경전이면서 철학서이자 동시에 역사서인 삼일신고는 그동안 일반대중에겐 너무나 알려지지 못했다. 출발자체가 대종교라는 종교에서 출발하다보니 산업화와 근대화의 거센 파도를 틈타 한반도를 장악해버린 기독교의 입김에 의해 유사종교 내지는 사이비종교라는 오인까지 받다보니 그 평가 자체가 있을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역사와 관련해선 고조선자체를 부정하는 학계의 분위기에서 고조선이전의 배달국, 한국이라는 용어자체가 넌센스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지금도 초등학교 교과서엔 우리의 시조가 단군이고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받게 되는 역사교육과 사회적 분위기속에 단군을 믿는 학생들은 점점 사라지게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저 곰이나 호랑이가 나오는 재미있는 전설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때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과 기독교의 신인 하나님과의 웃지 못할 한판 승부도 벌어졌고 그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 있는 단군상의 머리가 사라지는 회괴망측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작태는 지금도 기독교원리주의자들의 의해서 버젓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기도 하지만. 물론 여기서 종교적 역사적 논거를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고서는 왜 이리 설쳐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들은 삼일신고를 비롯한 천부경등에 담겨져 있는 그 사상적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즉 유신론, 범신론, 범재신론등의 다양한 신학적 해석과 그 접근방법과는 달리 한신학이라 일컫어지는 독특한 사상적 배경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신학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아니면 철학적 내지 학문적 입장에서 수용하는냐의 문제에서 여타 종교들과의 갈등이 있을법 하지만 대게 원신종교의 출발점이 그 민족 고유의 공통된 사상에서 근거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수긍갈 수 있는 면이기도 할 것이다. 

▣ 학창시절 한민족의 고유사상으로 홍익인간과 재새이화라는 두 단어를 무지하게 들어왔지만 정작 그 근원에 대해선 아는이가  드물정도일 것이다. 단군을 설화속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기를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단군왕검의 국가건국 철학인 홍익인간과 재새이화의 색체역시 흐려지기 마련인 것이다. 본 삼일신고의 내용은 고도한 한문학적 지식과 고도의 동양고전의 지식이 수반되어야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소 어려운 책이다. 물론 저자는 일반대중에게 좀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도표와 그림등을 도입하여 쉽게 설명한다고 하지만 막상 일반 대중에게는 어렵기는 매한가지인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뒤부분에 해설된 366자의 의미만큼은 대략 이해간다. 아마도 그동안 한민족이라는 무언의 힘이 알게 모르게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너무 국수주의적인 발상일까.
세계는 지금 글로벌화 블럭화를 거치면서 하나의 범국가적 형태를 추구하고 있다. 물론 이는 주로 경제적인 원인이 작용하고 있지만이러한 대세는 막지 못할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선진산업국의 면면을 바라보면 이러한 글로벌한 시대속에서도 자국 자민족 고유의 정신만큼은 절대 손에서 놓지도 않거나 협상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고유 정신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손을 들고 말할수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삼일신고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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