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종교의 유무를 떠나 비단 유물론적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가끔은 내세에 대한 두루뭉실한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경우 좀더 구체적인 자기네들의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내세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각종 종교가 선사하는 내세와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체득한 알량한 지식의 편주를 마치 쓰레기 분리수거하듯이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내세를 꿈꾸고 있다.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현세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의미로서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시 만에 하나라도 그러한 내세가 있다면 그러한 나의 내세는 어느 특정의 종교에서 말하는 심판을 받고선 나의 의지가 아닌 신이라 지칭되는 제3자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나의 의지로 펼쳐지는 아주 달콤한 내세이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비록 그러한 내세의 유무는 제쳐두고서라도 이러한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지는 것이다. 

<달콤한 내세>는 뉴욕주 북부의 어느 작은 산간마을에서 발생한 끔직한 사고를 소재로 벌어지는 산간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여느날과 다름없는 아침 등교시간에 벌어진 사고를 각각 다른 네명의 화자를 통해서 각 화자들의 객과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 사고와 무관한 각 개인사를 담아내고 있다. 사고버스의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 매일 아침 쌍둥이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우고 스쿨버스를 뒤따라서 자신의 직장인 정비소로 향하는 빌리 안센, 그리고 그날의 끔직한 사고로 인해 구사일생하는 니콜 버넬을 통해서 과연 그날 그곳에서 어떤일 벌여졌는지 그리고 사고이후 갑자기 몰아닥친 후폭풍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보여준다. 여기에 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뉴요커 변호사인 미첼 스티븐스를 등장시켜 마을 전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작품 전체의 플롯이나 내러티브는 스쿨버스의 전복과 그로인한 어린학생들의 죽음 이후 보이지 않게 흐르는 마을의 분위기를 각 화자들에 의해서 탄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이 작품의 마지막장을 덮게되면 다소 어리둥절해진다. 독자들로 하여금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달콤한 내세>에 대한 그 어떤 결말없이 서둘러 작가는 끝을 맺어버리는것 같은 인상마저 던져주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달콤한 내세인가 대한 그 어떤 암시를 남기지 않은 것 처럼... 

이 작품은 1989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음료수 트럭과 스쿨버스의 정면충돌로 어린학생들이 20명넘게 사망한 사고를 모티브로 차용하고 있다. 이 사건이 화재에 올랐던 것은 어린 학생들의 허무한 죽음이나 사고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의 과실소송으로 화재에 올랐다. 자그만치 손해보상금이 1억 5000만달러에 달하고 소송계류건수만 350건에 달하는등 그야말로 소송의 틈바구니속에서 온세월을 허비했지만 정작 세인들을 더 깜짝놀라게 한것은 사고발생의 책임자인 트럭운전사에 대한 형사소송은 단 한건도 없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달콤한 내세>역시 사고 이후 유가족들의 소송과정을 보여준다. 소송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마을 전체는 술렁이게 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개인들의 은밀하면서도 추잡한 일들과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소송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사악한 생각들이 전면으로 대두하게 된다.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그전 마을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라는 느낌이 급격하게 퇴색되고 자신에 좀더 유리한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기억의 왜곡까지도 강요받게 된다. 그러한 왜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니콜 버넬의 진술을 통해서 이러한 소송의 벗없음을 마감해 버린다. 결국 모든 책임은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의 과속으로 결정나게 되면서 과실 소송은 중단되고 마을 일시에 죽은자들의 도시처럼 고요만이 남게 된다.  

▣ 작가는 실제사고와 작품을 통해서 비록 사고로 인한 보상금으로 금전적인 도움이 될지라도 어느날 갑자기 작은 마을에서 사라져 버린 어린 영혼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그들의 내세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단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죽은이들의 역활이 소소한 보상금으로는 대신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달콤한 내세를 꿈꾸왔던 이들에게 그 어떤 사람들도 그들의 내세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인간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악한 감정이나 욕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또 다른 희망을 보여줌으로서 현세를 살아가는 이유는 또 다른 세계인 달콤한 내세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달콤한 내세는 현세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인 것이다. 이러한 꿈은 그 어떤 물질적인 댓가로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꿈을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무의미한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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