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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의 바쁜일과를 대충 정리할때인 오후 5시경이면 어김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애국가와 동시에 확성기에서 사정없이 울려퍼지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더불어 진행되었던 "국기 하강식"을 겪은 세대로서 '국가'라는 개념은 머리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현상으로 국가를 떠올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고 절로 바른자세를 취하게 된다. 지금도 가끔 야구장에서 국민의례가 있을때도 역시 그 자연스운 분위기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시민들은 그저 태극기를 바로보면서 정적에 휩쌓이게 된다. 그나마 국기하강식이나 교련수업 세대가 아닌 요즘 세대들에겐 의식이라기 보다는 참여하고 즐긴다는 유희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아직까지도 '국가'라는 개념 정의에 정확한 답변을 내려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인식되었던 세대들에겐 국가라는 개념은 상당한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더불어 세세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각인되어있다.  

사실 '국가'라는 개념이 저변에 확대되어 지금처럼 인식되었던 시기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이라는 강력한 메타포의 출현과 동시에 민족 =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성립되면서 국가주의에 대한 연구와 이해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인 형틀이 핏줄에 호소하는 민족주의 발호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 국가라고 해도 그렇게 빗나간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이며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는 다양한 각도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저자는 '국가'에 대한 접근을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라는 세가지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자을 전형적인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자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자들은 진보의 국가론이라는 어느 정도 도식화된 틀에 맞추어 이를 주창했던 이론가들의 주장과 지금 현대 특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왕설래의 과정에 비추어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다. 특히 사회혁명과 사회개량이라는 개념을 유토피아적 공학과 점진적 공학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국가와 국가를 형성하는 구성원에 대한 이념적인 개량을 저울질 해볼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저자의 국가론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적인 편차가 존재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두에서 밝혔듯이 '국가'라는 개념을 학문적인 잣대로 세가지의 범주로 획일적으로 구분하기란 그다지 녹녹치 않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나 안건에 대해서 추구하게 되는 국가론은 한가지만이 아니라 세가지 범주의 혼합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저서를 통해서 '국가' 그리고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이념적 성향 그리고 향후 발전해 나가가야 하는 국가론에 대한 세설적인 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프리즘은 다양한 무지개빛을 띠게 마련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어쩌면 상당히 위험한 국가론으로 변질되기 싶다는 것을 우리는 히틀러의 예를 통해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익히 배운바 있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국가론이 과연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그 만큼 현대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구분없는 경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회색분자라고 폄하할 수 도 있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오히려 위험하고 왜곡된 국가론을 주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사고력을 키우면서 자신의 국가관은 어디쯤일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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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6월 리뷰 마감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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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바쁜일과를 대충 정리할때인 오후 5시경이면 어김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애국가와 동시에 확성기에서 사정없이 울려퍼지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더불어 진행되었던 "국기 하강식"을 겪은 세대로서 '국가'라는 개념은 머리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현상으로 국가를 떠올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고 절로 바른자세를 취하게 된다. 지금도 가끔 야구장에서 국민의례가 있을때도 역시 그 자연스운 분위기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시민들은 그저 태극기를 바로보면서 정적에 휩쌓이게 된다. 그나마 국기하강식이나 교련수업 세대가 아닌 요즘 세대들에겐 의식이라기 보다는 참여하고 즐긴다는 유희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아직까지도 '국가'라는 개념 정의에 정확한 답변을 내려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인식되었던 세대들에겐 국가라는 개념은 상당한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더불어 세세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각인되어있다.  

사실 '국가'라는 개념이 저변에 확대되어 지금처럼 인식되었던 시기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이라는 강력한 메타포의 출현과 동시에 민족 =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성립되면서 국가주의에 대한 연구와 이해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인 형틀이 핏줄에 호소하는 민족주의 발호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 국가라고 해도 그렇게 빗나간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이며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는 다양한 각도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저자는 '국가'에 대한 접근을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라는 세가지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자을 전형적인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자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자들은 진보의 국가론이라는 어느 정도 도식화된 틀에 맞추어 이를 주창했던 이론가들의 주장과 지금 현대 특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왕설래의 과정에 비추어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다. 특히 사회혁명과 사회개량이라는 개념을 유토피아적 공학과 점진적 공학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여 국가와 국가를 형성하는 구성원에 대한 이념적인 개량을 저울질 해볼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저자의 국가론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적인 편차가 존재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두에서 밝혔듯이 '국가'라는 개념을 학문적인 잣대로 세가지의 범주로 획일적으로 구분하기란 그다지 녹녹치 않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나 안건에 대해서 추구하게 되는 국가론은 한가지만이 아니라 세가지 범주의 혼합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저서를 통해서 '국가' 그리고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이념적 성향 그리고 향후 발전해 나가가야 하는 국가론에 대한 세설적인 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프리즘은 다양한 무지개빛을 띠게 마련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어쩌면 상당히 위험한 국가론으로 변질되기 싶다는 것을 우리는 히틀러의 예를 통해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익히 배운바 있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국가론이 과연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그 만큼 현대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구분없는 경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회색분자라고 폄하할 수 도 있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오히려 위험하고 왜곡된 국가론을 주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사고력을 키우면서 자신의 국가관은 어디쯤일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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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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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어도 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이라는 현생과의 이별은 어쩌면 공식화된 룰과는 사뭇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적인 개념의 장단의 유무를 떠나 항상 품에 안고 있는 죽음은 마치 최고 의사결정자의 시각에서는 제거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거대한 리스크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투자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비한 아니 결정요인자체로 상정하지 않고 싶은 요인이라고 하면 너무 비약적일까?

인간은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는 혹자의 말처럼 우리는 매시간 죽음이라는 최종 종착점을 향해 브레이크없는 기차처럼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간에 있어 죽음이라는 명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가?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삶의 연장선이라는 거대한 메타포적인 관념으로 인지되었고 이에 기반하여 종교와 신이라는 불세출의 발명품이 탄생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을 다른 출구로 돌려놓았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한 총체적인 불안과 공포는 인간인한 진행중에 있다. 특히 그 죽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잣대에 놓이게 되면 그 어떠한 철학적 의미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마련인 것이다. 여기 독일문학계의 주목받는 여류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라는 작품은 죽음을 소소하면서 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알리스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죽음과 죽음이 가져다 주는 감정의 기복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상당히 유니크한 작품이다.  

옛 연인, 나이를 초월한 지인, 지금 현재의 연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받게 되는 일련의 감정상태를 별개의 이야기 처럼 다루면서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죽음과 그 뒷이야기라는 형식의 구조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다. 어둠, 공포, 피의 향연, 부정, 두려움등으로 대변되는 통상적인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끌어 가는 내러티브의 큰 맥락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태양계의 행성을 이루고 있는 9개의 별중에 어느날 부터인가 명왕성이라는 별이 행성의 지위를 상실했듯이 죽음도 어쩌면 이런 명왕성의 상실처럼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런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죽음이라는 화학적인 종결보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는 상실감으로 인한 혼돈이 더 크게 느껴질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실감과 그 후유증은 자신이 태어나기전 얼굴한번 보지 못한 말테 삼촌의 죽음에 대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시크한 접근에서 더 명확하게 보여진다. 죽음을 직접 목격했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를 떠나서(죽음의 시점이 현재이거나 과거이거나를 떠나서) 나와 관련있는 일련의 죽음들은 상실과 더불어 아픔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러한 극히 평범한 과정의 되풀이가 어쩌면 삶이지는 아닐까라는 무거운 철학적 의문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흥미본위의 호기심를 주안점으로 접근하게 되면 큰 낭패감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이번 작품에는 스펙타클한 속도감이나 내러티브의 대반전, 모티브인 죽음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적 표현등 뭔가 숨겨진 장치적인 요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니크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 까지도 이런 일말의 기대감을 저버릴만큼 상당히 건조한 문장의 연속으로 남는다. 다섯남자의 죽음과 이를 대면하게되는 주인공의 입장차는 왠지 모를 엇박자의 연속처럼 보여 당혹감을 주기고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엇박자 내지는 불협화음이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근원적인 접근방식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작가의 의도된 장치적 연출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역자는 이러한 표현 기법들이 작가만의 매력포인트라 논평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나 알고 있고 치명적인 리스크지만 왠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죽음(상실)에 대한 장대하고 거대한 사고의 담론을 일상적인 삶의 한복판으로 녹아낸 작가의 담론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측면에서 작품을 보게 된다면 다소 무미건조하게 만 다가오는 문장들이 새삼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면서 잔잔한 수면을 흔드는 파장으로 가슴속에 오래토록 남게 될 것이다. 뭐라 딱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막연했던 상념들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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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전체국가주의의 이념으로 전세계를 파탄으로 몰고간 히틀러와 나치즘은 인류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남을 것입니다. 다양성이 결여된 일신교적인 사고가 얼마나 위험하고 그 패해가 얼마나 오래토록 트라우마로 남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세계사의 한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히틀러와 관련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단편적인 사건들의 총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6월 우리에게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듯이 제대로된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자각으로 다시는 같은 실수의 반복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애와 그의 업적, 사상의 기록을 상세하게 밝힌 책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전후 시대에 대한 개괄을 역사적 맥락, 사회적 환경, 권력의 범위와 한계, 시대상 등의 분야에 따라 정리함으로써, 그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또한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된 단 한 종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평전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전 환경부 장관 김명자의 <원자력 딜레마>. 환경부 장관으로 환경 정책과 원자력 정책에 고심해 온 저자의 오랜 학구적 깊이와 정책적 경륜이 녹아 있는 책이다. 후쿠시마 비상 사태 이후 흔들리는 원자력 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국인의 자리에서, 실천적 정책 입안자의 눈으로, 원자력계 외부에서 파헤친다. 

 

 

 

 

 

 

서스킨드는 이 책에서 수많은 이론 물리학자들의 희망을 모았다가, 실망만을 안겨 주고 역사의 뒤편을 사라질 뻔했던 끈 이론의 역사를 되짚으며, 우주의 가장 큰 수수께끼, “우주는 왜 우리와 같은 형태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를 해결할 희망은 끈 이론 속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새롭게 진화하고 있는 끈 이론이 유도해 낸 ‘풍경(Landscape)’과 ‘메가버스(Megaverse)’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초월자나 신 또는 지적 설계자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 과학자들이 뛰어넘기를 포기한 갭을 넘어갈 수 있음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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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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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 역시 마거릿여사 자신의 말처럼 "믿을만한 거짓말"의 향연을 우리 독자들은 맞딱뜨리게 되고 이러한 해후가 결코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작품속에 스프레드된 일련의 사실들이 또 다시 팩트와 픽션이라는 경계선에서 그야말로 언제 땅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바라보게만 하는 관중의 설레임과 동시에 불안감(이번만큼은 왠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리라는 그런 심정)준다. 뭐 개인적으로 여류작가의 작품을 선호하지 이유가 다름아닌 지엽적인 세계관이나 과도한 미학관에서 표출되는 표현들과 이를 다양한 미사여구로 이끌어가는 다소 무리하다 싶은 내러티브에서 오는 표준화 비슷한 정형화라고 변하고 싶다면(물론 극히 개인적인 소견임을 다시한번 밝혀 둔다) 마거릿여사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느낌들 보다 랜덤하면서도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고 정련되지 못한 단어들이 한데 모여 미학적인 전체를 발하는 그녀만의 필력이 왠만한 남자작가 이상의 힘이 보여서 유독 애독하게 하고 매력적으로 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도둑신랑이라는 동화에서 모티적인 영감을 얻어 탄생한 <도둑 신부>는 <눈먼 암살자>의 스트럭쳐와 비슷한 액자소설의 구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팜므파탈의 화신인 지니아와 그녀를 둘러싼 세여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전제로 토니,케리스,로즈의 각자의 삶이라는 별도의 또 다른 내러티브를 각각의 축으로 진행되는 구조이다. 마치 지니아와 세인의 이야기를 거실이라고 한다면 토니와 지니아의 이야기는 거실을 통해서 드나드는 룸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는 토니, 케로스, 로즈의 독립된 래파토리가 각자 유년시절의 추억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다루는 별개의 작품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지니아라는 공통분모와 또 다른면서도 동일성 있게 연결된 구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니크한 스트럭쳐가 독자들로 하여금 팩트와 픽션의 경계점에서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면서 작가 자신의 세계로 유혹하기도 한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공공의 적인 지니아와 막달라 마리아에 비견되는 토니,케리스,로즈와의 관계가 일방적인 가해자와 일방적인 피해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지만 막상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사적인 삶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이러한 이분법적인 시각은 송두리채 흔들리면서 애매모호한 불연속면에 다다르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자체가 우리 인간들의 삶과 극히 다를바없다는 작가의 또 다른 메시지는 아닐까 싶다.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작가는 종교에 대한 촌철살인적인 견해를 맘껏 표현하고 있으며 토니라는 전쟁학자의 입를 통해 전쟁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어 또 다른 생각거리를 던져주면서 팩트적인 설정에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작가는 토니, 케리스, 로즈의 서로 다른 성격과 삶속에 또 다른 거울속의 개인들의 모습을 상정하여 예정된 지니아의 만남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자아의 이면에 대한 성찰을 갖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작품 군데 군데 나열되어 있는 거꾸로 표현된 문장이나 단어들이 거울속에 반영된 또다른 자아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게 한다. 이번 작품 역시 자아의 재발견이나 전쟁 그리고 종교에 대한 심오한 주제에서 부터 남녀간의 애정, 삼각관계라는 전통적인 래퍼토리를 통해서 경중이 적절하게 믹스된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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