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지식의 힘 - 경제를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 나의 경쟁력 파워 시리즈 3
박유연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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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그 역사적 뿌리가 철학을 비롯한 여타의 학문에 비해서 짧은 편이다. 불과 300백년 내외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중에 하나로 지금은 자리매김하고 있다. 산업혁명이후 촉발된 부의 증폭은 아담 스미스를 필두로 재화와 용역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새로운 장을 펼쳤다. 갈수록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진화로 인해 이를 설명하는 경제학의 발전은 여타 학문의 진보보다 빠른속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보제공의 리얼타임과 경계라는 벽이 허물어진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경제학은 신앙이상의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IMF위기를 겪고 지금처럼 세계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선 시점에서 우리에겐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제는 수요/공급이론, 효용이론, 합리적기대이론등의 경제이론들이 일반인들에게도 낮설지 않을 만큼 경제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일반대중의 입장에서 경제학서적을 접할 경우 상당한 애로점에 맞닥 뜨리게 된다. 물론 그동안 일반대중의 이해를 돕기위한 스토리텔링방식의 경제서적들이 무수히 출간되었지만 사실상 정곡을 집어 주는 서적을 찾기란 그리 만만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는 이해도의 관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너무 스토리텔링쪽에 비중을 두면 잡기형식으로 흘러버리고 그렇다고 조금만 깊에 들어가면 그 책은 바로 사장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경제학의 대중화를 발목잡는 구조일 것이다. 그만큰 경제학은 우리들과 밀접하게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너무나 어려운 학문중에 하나이다. 아마도 미래 경제 전망에 이르게 되면 그 한계는 극치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 바로 경제학인 것이다. 

이번 <경제지식의 힘>은 이러한 면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기획으로 출간된 것 같다. 우선 저자의 경력부터가 일반 학자출신이 아닌 일선에서 경제활동을 관찰하는 기자출신이라는 점이다. 대게 경제서적들은 필자의 주관이나 학파적인 성향에 따라 저술되기 마련이지만 이번 서적은 기자라는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사실 경제학적 기초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전문학자들의 서적을 접할 경우 자치 잘못하면 그 저자의 이론에 경도될 확률이 높다. 이는 독자의 정체성 확보에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지금 세계경제의 대세가 어떤 어떤 주의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전반적인 흐름과 우리의 실생활에 경제학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 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 된다.

그러면에서 이번 책은 경제기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일종의 실용경제학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학에서 제시되는 수 많은 용어와 이론을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활동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설명하여 그 이해도를 배가 시키고 있다. 아마도 백과사전처럼 한번 읽고 책장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생각날때 마다 찾아볼 수 있는 실용적인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사실 개인적으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이 책 한권으로 학습의 효과가 충분할 것으로 보일 만큼 그 질적인 양이 상당하다. 특히 일반대중의 지대한 관심사인 집값의 형성이나 소비자의 행동패턴등을 실례를 들어서 설명한 부분에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경제주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경제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왕 하는 경제활동이라면 마지 못해 하는 것 보다는 좀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그 효율성을 높이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학에서 말하는 모든 이론을 알면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니 그렇게 경제활동을 하는 경제주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도가 이 책 한권으로 경제학에 대한 모든 것을 독파하고 올바른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의사결정의 과정에 경제학의 숨은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을 알게 된다면 좀더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도 일 것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말이 이제는 낮설지 않을 정도로 우리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그 만큼 경제활동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의미이다. 올바른 경제활동을 어떻게 해야하는 가는 이제 각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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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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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는가?
이정표가 없는 거리, 이정표가 없는 지하철역 과연 어떤 세상일까 사람들은 제갈길을 찾지 못해 이쪽 저쪽을 왔다 갔다 할거이고 거리의 차량은 꼼짝하지 못하고 서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정표 없는 세상은 인간에게 또 다른 재앙으로 다가 올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이정표가 사라져 제각각 목적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것 이상의 의미이지 않을까?

우리는 산업혁명을 통해서 인류역사상 겪어 보지 못했던 부의 폭발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겪으면서 그야말로 부의 황금시대를 만끽하며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부의 혜택을 골고루 누리지 못하지만 그 옛날과 비교해 보면 평균이상으로 우리 인간의 생활은 살기 좋은 쪽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의 변천을 겪으면서 덩달아 우리의 물질적인 삷의 질도 대폭적으로 향상되었다. 이제 돈만 있으면 하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세계화에 힘입어 우리 삶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인 발전의 이면에는 인간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자본주의 병폐가 상존하고 있다. 일명 물질만능주의라고 하는 이 병은 어느날 갑자기 인간세계에 자리잡기 시작하여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암환자 처럼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정신을 야금야금 장악하고 있다. 누구나 이런 암적인 존재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그 어느 누구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물질만능 황금지상주의인 것이다.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소설이다. 이정표(理程標)란 무엇인가? 이정표는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지를 수월하게 안내하는 역활을 하는 것이 이정표이다. 이정표는 바로 인간이 올바른 길을 가기위해 고안한 장치중에 하나로 그 옛날부터 우리 인간들과 공존해 온 일종의 삶의 표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이정표 그것도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지하철역의 이정표 도난사건을 통해서 어느날 갑자기 도난 당한 이정표를 통해서 지금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처음 이정표가 사라지기 시작할때의 혼란과 의구심들이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음모와 타협하게 되고 그 음모를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모습에서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명암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도심지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자본주의 경쟁세계에서 철저하게 패배당한 노숙자들의 삶과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을 통해서 세상의 부와 권력을 쥐고 행사하는 거대자본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거대자본의 내막을 알면서도 거역하지 못하고 거대자본의 그늘속에서 안주 하려고 하는 대다수의 소시민들의 행동은 왠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꿈과 희망보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항변하고 있다. 바로 지하철역 이정표를 통해서 말이다. 지하철역 이정표는 작가에게 단순한 거리방향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이정표는 다름아닌 우리 가슴의 남아 있는 꿈과 희망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인 것이다.
어떤이는 출퇴근길에 어떤이는 여행 목적지를 위해서 이정표를 보고 출발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꿈과 희망이라는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대자본의 상징인 황금쥐는 이러한 이정표를 없애 자기만의 지하국가를 건설한다는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자본만이 진실이고 정의가 되는 그런 국가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황금쥐는 모든 사람의 지표인 이정표를 없애기로 하는 것이다. 처음엔 다소의 혼란과 반대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본의 단맛을 본 이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거대자본의 음모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장면은 다름아닌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 왔던 것이다. 그동안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수없이 많은 善과 진리가 자본속에 묻혀 버리고 매장당했으며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 우리모두는 외면했던 것이다.
자본의 길에 편승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없다. 아니 그 꿈과 희망을 도난 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게 소소한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찾게 마련인데 우리는 이런 꿈과 희망을 찾질 않는다. 왜 물질적으로나 형태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지금당장 자본으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찾질 않고 그러한 꿈과 희망을 말하는 이들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실폐한 인생쯤으로 치부하는 지도 모른다.

꿈과 희망을 만들어 내는 발전소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들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꿈과 희망의 발전소
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 발전소로 가는 이정표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찾지 않는 것이다. 이 소설은 우화적이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 되어 있지만 소설을 통해서 꿈과 희망을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의 미래는 무엇이며 꿈과 희망으로 가는 이정표 없는 여정이 과연 어떤 삶인가를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언제가 우리의 꿈과 희망의 발전소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어 온 세상이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  "다음역은 꿈과 희망으로 가는 역입니다" 라는 지하철 안내방송을 듣는 것을 소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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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경영학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2
제프 앵거스 지음, 황희창 옮김 / 부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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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영학은 그 역사가 일천하지만 상당히 과학적인 학문중에 하나이다. 각종 투입요소의 결정과 배치를 통한 관리를 통해서 가장 효율적이고 이윤극대화된 결과물을 도출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자생존의 무한한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관리자들의 전략이 없다면 그 배는 바다가 아닌 산으로 갈 것이고 어렴풋이 바다로 향한다고 해도 망망대해속에서 침몰할 것이 때문이다.
이와 아주 비슷한 스포츠가 바로 야구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스포츠중에 가장 복잡한 룰을 가지고 있는 경기가 야구이다. 그때 상황에 따라 룰이 다르고 또한 경영처럼 정해진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스포츠이다. 그래서 야구는 룰을 모르면 정말 재미없는 종목으로 인식될 수 도 있다.  

그러면에서 경영과 야구는 닮은점이 아주 많다. 단순히 말해서 점수를 내기 위해서 큰거 한방인 홈런으로 낼 것인가 아니면 안타와 도루 그리고 힛트앤런등의 작전을 구사하면서 야금야금 낼 것인가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경영역시 유사하다. 안정적인 경영의 일환인 다각화를 지향할 것이가 아니면 공격적인 경영으로 속칭말하는 수익이 대박을 올릴 것인가 하는 전략이 수천가지는 될 것이다. 결국 이런 전략적인 방법의 최종선택권자는 야구의 경우 감독이고 경영의 경우 CEO의 몫이다. 이런 최고의사결정권자의 최종선택에 따라 그 팀이 공격일변도적인 팀이 될 수 있고 안정적인 수비위주의 팀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야구와 경영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가 바로 STEP BY STEP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야구는 1루, 2루, 3루, 홈베이스를 차례대로 밟아야만 득점으로 인정되는 게임이다. 중간에 1루나 2루를 건너뛰고선 득점을 할 수 없는 경기이다. 이점은 바로 경영에서 인식하는 인사관리,조직관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경영 또한 조직이나 인사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투입을 하더라도 그 산출물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경영학>은 이처럼 야구와 경영을 콜레보레이션하여 경영학이란 다소 딱딱한 학문을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이런면에서 경영학원론을 읽기전 바로 이 책을 한번 읽고 경영학원론을 본다면 그 효과가 배가될 것 같다.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스토브리그에서의 전략과 선수관리 측면들이 경영에서 말하는 운영관리, 조직관리, 인력관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같은 경쟁시장의 변화는 시시각각 그야말로 리얼타임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점은 경영이란 계속해서 한자리에 머물수 없다는 것을 일변하고 있다. 역시 야구에서도 상황의 반전이 수시로 일어나고 그에 합당한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야구나 경영이나 이러한 변화앞에서 변화하지 못하면 자연도태하기 마련이다.  

작년 뜨거운여름을 달구었고 올 겨울 야구는 이렇게 하는 것다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준 한국야구, 그 이면을 보면 바로 인적관리와 적재적소의 운영, 변화에 따른 효과적인 관리등의 전략적인 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경영이란 바로 이런 야구와 같다. 철저하게 준비된 기업만이 블루오션이라는 대양을 항해할 자격이 주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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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1 - 문종에서 소현세자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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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가 왕을 죽였는가???

법률용어중에 미필적고의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가 왕을 죽인것이다.
왕을 죽이고도 안죽인척 하는 이들, 뻔히 왕을 죽인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이들, 역사에 그런적은 없다는 가르치는 이들, 그말을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잊어버린 이들. 바로 이들 모두 우리가 왕을 죽인것이다. 아니 역사를 죽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말안듣는 이단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님의 <조선왕 독살사건>은 그동안 항간에 떠돌던 야담수준이라고 일축했던 조선왕들의 독살설혐의에 대해서 많은 점을 시사하는 책이다. 특히 저자의 그동안 저술행위으로 보아선 이들 정통학자들에겐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저술중에 하나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의 역사적 사초에 의거하여 어느 왕이 어떻게해서 독살설의 가능성이나 개연성 있었고 그래서 그동안 야사나 야담수준의 내용을 좀더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생각하면는 오산일 것이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저작에서 일관되게 피력하고 있는 사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을 역시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암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 독살사건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얼마전 정조대왕의 어찰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이 나라의 강단학계는 또다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네들의 주장은 바로 발견된 정조어찰이 정조독살설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증거이고 정조독살설은 산간시골에서 떠돌던 야담이었다고 일축했다. 정조독살설 부정함으로서 재야학계의 연구자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했다. 물론 이는 한바탕의 해프닝을 결론지어 졌지만 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해방된지 60년인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식민사관에 대한 그 뿌리가 대단함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이라고 본다. 

저자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사관에 대한 부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중기부터 내려온 노론적인 입장에서의 역사관과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식민사관이 만나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금까지 가져온 것이다. 이런 정통사관에서 보면 당연히 조선시대에 국왕의 독살설은 부정된다. 아니 있을 수도 없고 있었도 안 될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관을 우리는 그대로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번 <조선왕 독살사건>의 완결판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런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강요하게 하는 그 이면을 엿볼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독살의혹을 뛰어넘어 우리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있는 큰 숙제인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조선왕 독살사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유독 군왕의 독살설이 많은 나라가 조선이다.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500여년을 넘게 장수한 왕조이다. 역대 군왕만 태조를 시작으로 27명이 제위에 올랐던 국가였다. 공식적인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거의 과반수에 가까운 군왕과 차기 대권주자가 독사설에 휘말려 있는 왕조 또한 세계사를 통틀어 조선왕조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과반수에 가까운 독살설 음모속에서도 500여년이라는 기간을 유지한 왕조 또한 눈을 씯고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면에서 조선왕조는 대단히 아이러니한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정권교체의 불안정속에서도 긴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라는 의구심이 자연히 든다. 바로 이점이 군왕의 독살설과 많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 태생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여말선초시대에 부패한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뭉친 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둘은 권력창출을 위해서 이와 잇몸 같은 존재였고 상호간에 확실한 대의명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조선이라는 국가는 시작부터 왕권과 신권에 대한 상호간에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태종의 왕권이 정도전의 신권에 판정승하게 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군주에게 이러한 일련의 왕권강화조치는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조선초기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등의 독살설 의혹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가장큰 시각차이는 다름 아닌 사대부는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사대부중의 제1일자로 간주했고 국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동상이몽을 꿈꾸면서 정치적 여건이 안정적일 때는 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으나 약간의 흔들림(이는 사대부에서 공신으로 둔갑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 질 경우)이 있을때는 국왕을 배제한 사대부들의 강력한 단결력을 이끌어 낸 신조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택군론에 의해 자기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행동에 나서게 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차기대권을 노리는 정치세력과의 결탁도 한 몫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멸망때 까지 계속된다. 차이점이라고는 신권의 중심세력이 공신, 훈구세력에서 배제되었던 또 다른 사대부들(사림들)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심세력의 권력이동은 많은 점에서 조선초기의 양상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다. 사림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성리학의 기수들이었다. 성리학으로 철저히 정신무장한 그들의 대의명분은 그동안 훈구세력의 정치적 행보에 비해 많은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대의라는 큰 범주내에서 보다 확실하면서 적극적으로 왕권을 견제하였던 것이다. 

훈구세력의 몰락이 가져다 준 정치판은 사림들의 분당과 당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이제는 대놓고 왕권에 대한 위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수많은 국왕과 차기대권주자가 독살설 이나 반정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들은 국왕보다 같은 당파 당수의 의견을 절대시하였다. 그런 당파성에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절대군주까지 교체해 버릴 정도로 대범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보듯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군왕의 나라가 아니라 노론의 나라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 어떠한 정책이나 인물(그가 비록 군왕이라고 하더라도)은 철저히 제거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면에 그들의 정신적 모태인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이라는 대의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태조 이성계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지하에서 목놓아 후회를 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사대부들의 정치적인 힘이 클 수 밖에는 없는 태생적 구조를 가졌던 것이 국왕에 대한 많은 독살설 의혹을 낳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이후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더욱더 독살설에 대한 혐의를 둘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효종의 경우 치세기간 동안 캐치플레이었던 북벌의 잔재를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행위나 정조의 개혁정치 역시 정조 사후의 반동정치에서 보듯이 국왕사후에 철저하게 선왕의 치세를 지우는 작업을 최우선시 했다는 점이 다름 아닌 그들의 행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조선멸망의 근본원인이 무능한 몇몇의 군주에게 있다는 말을 하지만 이는 100%로 신뢰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보왔듯이 조선의 군왕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유일하게 태종 이나 숙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왕도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갈 수 가 없었다. 한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은 세종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종도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정책실현에 길게는 18여년이 걸린적이 있을 정도?정적으로 보면 이러한 왕권과 신권의 줄달리기가 성립해서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단일왕조로 장수를 했던 비결중에 하나라고 하면 그나마 위안거리일 것이다.  

<조선왕 독살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조선왕 독살사건>을 통해서 통찰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각론적인 역사적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정조대왕의 어찰(편지)이 발견되면서 학계와 언론은 흥분의 도나기속에 빠졌다. 그동안 재야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던 정조 독살설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근거가 어찰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고 하면서 모처럼 재야에 대한 판정승을 거두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뒤로 저자의 주장에 의해 독살설이 더욱더 힘을 얻게 되므로서 지금은 아주 조용한 때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이점이 아주 큰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각론적인 관점에서 부터 시작된 왜곡된 사관이 결국 한국사라는 크나큰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대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에게는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국사교과서를 봐도 알 수 있고, 한나라의 역사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국립박물관에 가봐도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다름아닌 대한민국 사학계의 정설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장해도 통설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저자는 이러한 식민사관의 잘못된 점을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지적해 왔다.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에서 부터 작게는 여인열전에 이르기 까지 그동안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식민사관의 제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저작 역시 저자의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독도의 영유권문제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할때면 나라전체가 들썩거린다. 그러다가 시간만 지나면 언제그랬냐듯이 조용해진다. 그러는 동안 역사왜곡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역사왜곡은 다름아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사에 대해서 일가견 있다는 학자들이 자국사라고 인정하지 않는 역사를 과연 세계의 그 어떤 나라가 인정해 주겠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은 이러한 역사적 왜곡에 대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군주에 대한 위해사건은 얼마든지 있었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감이 커지는 것이다. 흔히들 역사는 행간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역사를 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바로 그 행간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그동안 가려왔다고 하면 이는 큰 문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관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저서임에 틀림없다. 

누가 왕을 죽였는가?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창공을 나는 새에게는 오른쪽날개와 왼쪽날개가 있다.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어느 한쪽 날개로는 날수없는 것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역사를 재단하는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한쪽 날개에 의존한 역사비행을 했다면 이제는 정말 올바른 역사비행을 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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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2 - 효종에서 고종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누가 왕을 죽였는가???

법률용어중에 미필적고의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가 왕을 죽인것이다.
왕을 죽이고도 안죽인척 하는 이들, 뻔히 왕을 죽인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이들, 역사에 그런적은 없다는 가르치는 이들, 그말을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잊어버린 이들. 바로 이들 모두 우리가 왕을 죽인것이다. 아니 역사를 죽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말안듣는 이단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님의 <조선왕 독살사건>은 그동안 항간에 떠돌던 야담수준이라고 일축했던 조선왕들의 독살설혐의에 대해서 많은 점을 시사하는 책이다. 특히 저자의 그동안 저술행위으로 보아선 이들 정통학자들에겐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저술중에 하나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의 역사적 사초에 의거하여 어느 왕이 어떻게해서 독살설의 가능성이나 개연성 있었고 그래서 그동안 야사나 야담수준의 내용을 좀더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생각하면는 오산일 것이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저작에서 일관되게 피력하고 있는 사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을 역시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암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 독살사건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얼마전 정조대왕의 어찰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이 나라의 강단학계는 또다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네들의 주장은 바로 발견된 정조어찰이 정조독살설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증거이고 정조독살설은 산간시골에서 떠돌던 야담이었다고 일축했다. 정조독살설 부정함으로서 재야학계의 연구자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했다. 물론 이는 한바탕의 해프닝을 결론지어 졌지만 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해방된지 60년인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식민사관에 대한 그 뿌리가 대단함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이라고 본다. 

저자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사관에 대한 부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중기부터 내려온 노론적인 입장에서의 역사관과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식민사관이 만나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금까지 가져온 것이다. 이런 정통사관에서 보면 당연히 조선시대에 국왕의 독살설은 부정된다. 아니 있을 수도 없고 있었도 안 될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관을 우리는 그대로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번 <조선왕 독살사건>의 완결판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런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강요하게 하는 그 이면을 엿볼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독살의혹을 뛰어넘어 우리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있는 큰 숙제인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조선왕 독살사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유독 군왕의 독살설이 많은 나라가 조선이다.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500여년을 넘게 장수한 왕조이다. 역대 군왕만 태조를 시작으로 27명이 제위에 올랐던 국가였다. 공식적인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거의 과반수에 가까운 군왕과 차기 대권주자가 독사설에 휘말려 있는 왕조 또한 세계사를 통틀어 조선왕조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과반수에 가까운 독살설 음모속에서도 500여년이라는 기간을 유지한 왕조 또한 눈을 씯고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면에서 조선왕조는 대단히 아이러니한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정권교체의 불안정속에서도 긴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라는 의구심이 자연히 든다. 바로 이점이 군왕의 독살설과 많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 태생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여말선초시대에 부패한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뭉친 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둘은 권력창출을 위해서 이와 잇몸 같은 존재였고 상호간에 확실한 대의명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조선이라는 국가는 시작부터 왕권과 신권에 대한 상호간에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태종의 왕권이 정도전의 신권에 판정승하게 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군주에게 이러한 일련의 왕권강화조치는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조선초기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등의 독살설 의혹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가장큰 시각차이는 다름 아닌 사대부는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사대부중의 제1일자로 간주했고 국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동상이몽을 꿈꾸면서 정치적 여건이 안정적일 때는 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으나 약간의 흔들림(이는 사대부에서 공신으로 둔갑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 질 경우)이 있을때는 국왕을 배제한 사대부들의 강력한 단결력을 이끌어 낸 신조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택군론에 의해 자기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행동에 나서게 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차기대권을 노리는 정치세력과의 결탁도 한 몫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멸망때 까지 계속된다. 차이점이라고는 신권의 중심세력이 공신, 훈구세력에서 배제되었던 또 다른 사대부들(사림들)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심세력의 권력이동은 많은 점에서 조선초기의 양상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다. 사림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성리학의 기수들이었다. 성리학으로 철저히 정신무장한 그들의 대의명분은 그동안 훈구세력의 정치적 행보에 비해 많은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대의라는 큰 범주내에서 보다 확실하면서 적극적으로 왕권을 견제하였던 것이다. 

훈구세력의 몰락이 가져다 준 정치판은 사림들의 분당과 당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이제는 대놓고 왕권에 대한 위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수많은 국왕과 차기대권주자가 독살설 이나 반정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들은 국왕보다 같은 당파 당수의 의견을 절대시하였다. 그런 당파성에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절대군주까지 교체해 버릴 정도로 대범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보듯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군왕의 나라가 아니라 노론의 나라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 어떠한 정책이나 인물(그가 비록 군왕이라고 하더라도)은 철저히 제거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면에 그들의 정신적 모태인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이라는 대의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태조 이성계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지하에서 목놓아 후회를 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사대부들의 정치적인 힘이 클 수 밖에는 없는 태생적 구조를 가졌던 것이 국왕에 대한 많은 독살설 의혹을 낳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이후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더욱더 독살설에 대한 혐의를 둘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효종의 경우 치세기간 동안 캐치플레이었던 북벌의 잔재를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행위나 정조의 개혁정치 역시 정조 사후의 반동정치에서 보듯이 국왕사후에 철저하게 선왕의 치세를 지우는 작업을 최우선시 했다는 점이 다름 아닌 그들의 행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조선멸망의 근본원인이 무능한 몇몇의 군주에게 있다는 말을 하지만 이는 100%로 신뢰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보왔듯이 조선의 군왕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유일하게 태종 이나 숙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왕도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갈 수 가 없었다. 한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은 세종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종도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정책실현에 길게는 18여년이 걸린적이 있을 정도?정적으로 보면 이러한 왕권과 신권의 줄달리기가 성립해서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단일왕조로 장수를 했던 비결중에 하나라고 하면 그나마 위안거리일 것이다.  

<조선왕 독살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조선왕 독살사건>을 통해서 통찰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각론적인 역사적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정조대왕의 어찰(편지)이 발견되면서 학계와 언론은 흥분의 도나기속에 빠졌다. 그동안 재야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던 정조 독살설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근거가 어찰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고 하면서 모처럼 재야에 대한 판정승을 거두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뒤로 저자의 주장에 의해 독살설이 더욱더 힘을 얻게 되므로서 지금은 아주 조용한 때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이점이 아주 큰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각론적인 관점에서 부터 시작된 왜곡된 사관이 결국 한국사라는 크나큰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대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에게는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국사교과서를 봐도 알 수 있고, 한나라의 역사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국립박물관에 가봐도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다름아닌 대한민국 사학계의 정설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장해도 통설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저자는 이러한 식민사관의 잘못된 점을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지적해 왔다.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에서 부터 작게는 여인열전에 이르기 까지 그동안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식민사관의 제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저작 역시 저자의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독도의 영유권문제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할때면 나라전체가 들썩거린다. 그러다가 시간만 지나면 언제그랬냐듯이 조용해진다. 그러는 동안 역사왜곡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역사왜곡은 다름아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사에 대해서 일가견 있다는 학자들이 자국사라고 인정하지 않는 역사를 과연 세계의 그 어떤 나라가 인정해 주겠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은 이러한 역사적 왜곡에 대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군주에 대한 위해사건은 얼마든지 있었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감이 커지는 것이다. 흔히들 역사는 행간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역사를 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바로 그 행간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그동안 가려왔다고 하면 이는 큰 문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관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저서임에 틀림없다. 

누가 왕을 죽였는가?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창공을 나는 새에게는 오른쪽날개와 왼쪽날개가 있다.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어느 한쪽 날개로는 날수없는 것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역사를 재단하는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한쪽 날개에 의존한 역사비행을 했다면 이제는 정말 올바른 역사비행을 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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