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외치다>를 리뷰해주세요.
인권을 외치다
류은숙 지음 / 푸른숲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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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근대 국가 공동체의 경우 그 상징인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국가공식기관의 교육을 받게 되는 유년시절부터 인권에 대한 교육을 더불어 받아 왔기 때문에 새삼 인권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성 또한 없을 정도로 우리는 공식적으로 인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인권은 우리 개인의 삶과 사회활동에 필수불가분의 관계 내지는 있는듯 없는듯 인지하지 못하지만 항상 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권이 현재처럼 자리매김하게 된 역사는 인류역사를 통틀어 사실 얼마되지 않는 짧은 시간안에 정립된 개념이다.  

이처럼 인권은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정작 인권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인권을 외치다>는 바로 우리가 잘알고 잘 인식하고 있다는 인권에 대해서 인권의 역사와 인권의 정확한 개념을 말해주고 있는 인권의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는 보기 드문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인권의 진정한 의미와 왜 그토록 인권이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권리인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人權은 다른 표현으로 天賦人權(自然權(natural rights))이라고도 한다. 즉 하늘이 부여한 권리이며 자연 그 자체로 인간이면 가지고 있는 권리라는 의미이다. 이는 인간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 자체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기본권이다는 뜻일 것이다. 바로 이런 숭고한 개념의 인권이 탄생한 것이 불과 300년이 채 안된 프랑스 혁명의 시발을 가져온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태동되었다. 물론 그 전에 권리장전등의 획기적인 선언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특권층에 해당하는 것이지 일반 시민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개념이었다. 하물며 여성의 권리는 1928년경에 와서야 제대로 된 인권의 인식이 가능했다는 점을 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만 하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오랜세월 동안 향유되지 못했다는 점이 이상할 뿐이다.  

인류는 청동기의 발견과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권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냈다. 그 권력의 유지방안으로 하늘로부터 자연히 물려받은 통치권이라는 개념(왕권신수설)이 자리잡으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가 정당화 되었다. 이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업혁명이 발발하기전까지 당연시 되어 왔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새로운 계층(산업자본 부르주아지)을 탄생시키면서 사회계약설을 기반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인간의 지배역사를 재현하는 방편 뿐이었다. 자본과 상품이라는 새로운 권력구조가 탄생하면서 어찌보면 왕정시대보다 인간을 더 핍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패러다임이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뜨게 만들게 되었고 분명히 그 당시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한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아직도 지금도 제대로 된 인권의 개념은 묘연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21세기 조차도 사실상의 인권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란 그리 쉽지만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인권에 대한 제약은 절대왕정시대의 강압적인 폭력이 아닌 자본이라는 경제 시스템이 그 역활을 대신하면서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라는 이분법적 대결구도를 양상하게 되고 이러한 구도는 자연스럽게 인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삼 인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할 때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권리인 인권은 가진가가 배푸는 형식의 권리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져야  권리인 것인지 기부같은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권을 외치라>를 통해서 새삼 인권에 대한 그동안 우리가 가져왔던 인식들이 그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자연 그대로 인간이기 때문에 가져야 할 권리인 인권은 누가 배풀어준다고 해서 부여받는 권리가 아니다. 가지고 있던 가지지 못하던 간에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기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도 많은 변화 끝에 지금의 현실을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진정한 인권의 길은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스스로가 인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지 않고서는 정작 우리 인간의 권리인 인권은 또다른 개념으로 포장될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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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김대중 1, 2>를 리뷰해주세요.
만화 김대중 1
백무현 글 그림 / 시대의창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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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현대사를 통틀어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한쪽에서는 '선생님' 또 다른 한쪽에서는 '빨갱이'이라는 표현으로 인식된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만큼 DJ에 대한 인식은 우리 현대사의 왜곡된 인식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한국 현대사와 DJ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면 타당할 것이다. 특히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미,소라는 거대한 냉전시대의 틈바구니속에서 왜곡된 민주주의 정치를 걸어왔던 한국현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DJ라는 개인적인 인물연구만으로도 대략적인 현대사를 짚어볼수 있을 정도로 한국 현대사 곳곳은 그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DJ라는 인물은 그를 숭배하는 쪽이든 꺼려하는 쪽이든 간에 무시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의 거울인 것이다.

<만화 김대중>은 만화 박정희와 만화 전두환을 집필해서 상당한 반향을 가져온 필자의 3번째 인물 탐구서이자 역사연구서이다. 비록 만화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한국 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그동안 가려지고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책은 김대중의 고향이 전남 신안군 하의도라는 섬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것도 시간의 추를 상당히 올려잡아 조선시대 선조때 인목왕후에서 태어난 정명공주를 위해 하삼도를 떼어주겠다는 약간은 우스게소리에서 발달된 하의도의 비극으로 시작한다. 불모지인 섬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논과 밭은 그야말로 생명과 같은 존재였지만 부마(홍씨일가)와 나라에 2중으로 내는 세금의 가혹함은 그야말로 절대왕권시대 인민의 비참함을 실례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악업은 일제강점기를 통해선 더욱더 강도를 더함으로써 김대중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린 민주투사라는 이미지의 생성원인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하의도는 수탈의 역사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 어느곳이 이런 참담함에서 벗어날수 있겠는가마는 그의 고향인 하의도의 역사를 보면 DJ의 탄생도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만화 김대중>은 바로 이렇게 하의도의 역사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의 탄생과 유년시절, 그리고 청년시절과 정치에 입문하여 겪게 되는 고난의 세월을 담고 있다. 특히 생존인물들의 등장과 그들을 그린 케리커쳐가 제법 사실성에 근접하고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어 DJ를 둘러싼 인물과 역사인식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DJ에게 왜곡되게 인식된 두가지 성향 선생님과 빨갱이를 객관적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막연하게 선생님이라고 추앙아닌 숭배를 하는 쪽과 사실을 모르고 빨갱이로 몰아가는 양쪽에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직대통령,노벨평화상 수상자,각종인권단체 인권상수상등 그의 화려한 이력보다는 인간 김대중에 대한 단면을 볼 수 있어 그 동안 그에게 지워졌던 왜곡된 이미지들을 지워버리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서술되어진 부분들이 오히려 DJ를 돋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좀더 많은 부분에서 연구가 되어야겠지만 그가 우리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찌보면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이자 최대 수혜자로써 선생님과 빨갱이라는 극적인 상징으로서 그를 볼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인식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DJ를 바로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또한 잊지말아야 할 것은 DJ를 바로 보는 눈이 다름아닌 우리 현대사를 올바르게 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인이 된 그에게 합당한 평가를 내려야 할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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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복수 1 - 인간 사냥
크리스티앙 자크 지음, 이상해 옮김 / 자음과모음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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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라는 기대를 이번에도 크리스티앙 자크는 저버리지 않은 것 같다. <람세스>,<오시리스의 신비>,<투탕카몬>으로 이미 크리스티앙은 이집트 신화와 문명의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이면서 현대 서양문명의 근원인 그리스로마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대 이집트의 문명은 그 신비로운 만큼이나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미지의 세계이다. 역사와 신화가 뒤섞여 마치 어디서부터 역사이고 어디서 부터 신화인지 분간하기 힘든 문명이 다름 아닌 고대 이집트이다. 우리는 그의 전작에서 이집트의 새로운 세계에 매혹되었다. 필자의 이집트에 대한 애착은 신화와 신비라는 베일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독자들의 눈과 귀를 매혹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전 작품이 이집트 고왕국시대를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은 BC528년전 이집트 제26왕조시대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에 의해 신성의 땅이 짓밟히는 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집트는 그야 말로 신들의 나라이다. 아몬과 오시리스를 대표하는 신들의 영광을 지상의 지배자인 파라오가 신들의 힘을 빌려 지배하는 나라였다. 백성들은 파라오를 신이 현현한 존재로 파악했고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인식했다. 이런 신들의 나라에서 신들이 서서히 인간들에 의해 그 존재의 가치를 잃어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신들의 복수>는 크리스티앙 특유의 필치를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일개 장군에서 파라오에 등극한 아마시스는 그동안 이집트가 추진했던 신정 정치에 일대 개혁을 가한다. 비록 외세인 그리스용병의 힘을 빌어 신관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정분리를 도모하면서 페르시아와 화해무드를 조성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왕비까지 그리스 출신의 타니트로 정함으로써 자신의 굳은 의지를 만천하에 공표하고 자신만의 왕권강화에 주력한다. 이미 수도를 멤피스에서 그리스와 가까운 사이스로 이전하여 신들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이집트를 만들어 간다.(기존 이집트의 시각으로 봤을때 그리스는 신들을 배척한 타락한 문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시스의 이러한 개혁은 사역원 독살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보이지 않는 저항을 받게 된다. 주인공 필사생 켈 그리고 그의 여인인 여신관 니티스, 켈이 죽마고우 베봉은 역모라는 누명을 쓰고 파피루스의 암호문을 풀기위해 테베의 태양의 신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들을 뒤쫒는 젬판관과 정보국장 하네트 그리고 이들에게 누명을 덮어쉬운 음모자들.

<신들의 복수>는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 당했던 제26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왜 신들의 나라가 어이없이 인간들의 나라에 지배를 당했는가를 다른 각도에서 풀어간다. 역사적 실존인물들의 등장과 가공의 인물들의 적절한 배합은 팩트와 픽션이라는 구도를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케 한다. 또한 그의 전작인 <람세스>에서 모세와 트로이전쟁 영웅들의 카메오같은 등장으로 즐거움을 주었듯이 이번에 피타고라스를 등장시켜 또다른 희열을 제공한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면서도 신비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신비주의는 이집트 신화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을 읽는 색다른 즐거움과 개연성을 갖게 한다.

소설의 즐거움은 역시 반전에 있을 것이다. 켈을 비롯한 주인공들이 고난을 이겨 내고 마침내 암호문을 해석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음모자의 비밀이 밝혀지고 이집트 미래를 위해 누비아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낮익은 인물을 통해서 대반전을 야기한다. 항상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기 마련이다. 음모자의 정체가 밝혀지기 까지 독자들은 젬판관의 여러가지 추측으로 켈의 죽마고우인 베봉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 없지만 필자는 새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이번 소설 역시 이집트 신화와 문명을 좀더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로 넘쳐 난다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 들의 갈망과 숭배 그리고 신화를 현세에 받아 들이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살아있는 생생한 느낌을 받게 된다. 거기에다 이번 소설은 왠지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또다른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 같은) 마치 이대로 이야기가 끝난다면 너무나 아쉽고 허망하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것 처럼. 이 또한 크리스티앙의 또다른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 나머지 이집트의 재건이야기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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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스퐁나무 보름달문고 25
하은경 지음, 이형진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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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 함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역활을 한다. 그 동안의 대부분의 동화가 그런 역활을 수행해왔고 이런 점은 어린이들의 성장과정중 정서함양이라는 점에 지대한 공헌을 한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살짝만 달리 비틀어 보면 그 동안 우리의 어린이들은 너무나 획일적인 꿈과 희망을 먹고 자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사실 든다. 정형화된 꿈과 희망 그리고 항상 따라다니는 권선징악의 스토리 구도등 꿈과 희망을 상상하는 것이 아닌 마치 제조업공장에서 일률적으로 맞춘 제품처럼 꿈과 희망이라는 상품을 대량제조하여 판매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 

안녕, 스퐁나무는 그런점에서 색다른 스토리를 보여준다. 그동안 사실 어린이 문학작품에서 약간은 금기시되었던 부부간의 갈등문제 특히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가족해체문제에 대해서 주제로 하여 출간된 동화책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필자의 의도가 신선하다고 보여진다. 물론 이런점들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올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너무나 흔한일상의 일이 되었고, 또한 한부모가정의 증가와 아이들의 의식구조의 조숙함으로 인해 사실 쉬쉬하면 숨기는 소재거리와는 이제 거리감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 아예 표면화시켜 그에 대한 슬기로운 접근방법을 찾아가는게 정답이지 않나 싶다.  

그러면에서 <안녕, 스퐁나무>의 기획의도는 좋았던것 같다. 비록 열두살의 어린나이에 사랑은 변한다라는 의미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거나 책내용에 나오는 스퐁나무와 사원의 관계를 전부다 이해할수는 없지만 엄마의 입장과 아빠의 입장을 남름대로 스스로 이해할려고 하는 의도에서 꿈과 희망이 조금식 쏟아나는 것이다. 주인공인 현이가 생각하는 부부 내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는 앙코르와트의 스퐁나무와 사원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할수 없는 관계, 싫어도 떨어지면 둘다 의미를 상실할수 있는 관계로 다가오듯이 사랑이란 항상 자기입장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 마치 스퐁나무가 사라지면 사원이 무너져 내리듯이 일방통행이 될수없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누가 스퐁나무, 사원의 역활을 하는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렇게 같이 공존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소 무거운 소재를 다룬 동화이지만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동화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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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사이드의 남자 2
칼렙 카 지음, 이은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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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우리에게 잘알려져 있는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최우수 언론인에 수여되는 '퓰리처상'을 만든 장본인 조지프 퓰리처, 전세계 금융가의 대부인 J.P. 모건, 뉴욕 마피아계의 대부 폴 켈리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인물들이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들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인 19세말 뉴욕 경찰청장을 역임하면서 희대의 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일종의 팩션을 가미한 스릴러 소설으로 볼 수 도 있지만 19세기말 미국 뉴욕의 시대상을 반영해 주는 역사소설 겸 사회고발소설의 역활도 동시에 하고 있는 작품이다. 경찰청장과 하버드대학 동기인 가상의 인물인 타임스지 기자 존 무어와 법의학자 클라이즐러가 루스벨트의 장례식장에서 해후하여 지난 25년전 뉴욕을 강타한 희대의 살인마 존 비첨의 살인행각을 추척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사이코패스인 살인자을 통해서 단순한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그리는 소설은 아니다. 살인자가 사이코패스로 돌변하게 되는 여러가지 원인들을 제시하고 그 원인제공이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한다.

극중 주인공인 클라이즐러박사의 견해로는 인간은 유녀시절의 강력한 메세지로 인해 그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지 탄생에서부터 그 선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년시설 부모로부터의 학대나 외면과 육체적인 경험등을 통해 피폐해진 사고는 결국 육체적인 어른으로 성장은 하였으나 그 정신세계는 유년시절의 고통으로 해방되지 못하고 또 다른 분출구를 찾아 해매게 된다. 그 분출구가 급기야 살인이라는 극단의 표현으로 표출된다는 것이 우리 주인공의 논지이다.  

소설이 이런 희대의 살인마를 추척하는 수사팀의 수사과정에서 발생하는 외부의 압력(대표적으로 대주교와 J.P.모건등의 가진자)과 수사팀 구성원들간의 이견을 거치면서 최종적인 살인범 검거에 이르게 된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로 치부될 수 밖에는 없는 구도이다. 

하지만 필자의 또 다른 의도는 다른곳에 있다. 신대륙의 발견과 그리고 미합중국이라는 신생국의 탄생과정에서 미국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 되어버렸다. 물론 지금도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는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당시 19세기의 미국은 열광의 도가니를 방불케했다. 골드러쉬와 산업, 금융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하여 미개척 식민지였던 국가가 짧은 시간에 엄청난 발전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전의 이면에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피해가 많이 있다. 인디언들의 희생, 흑인노예들의 희생, 그리고 이민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의 어두운면을 소설의 요소요소에 뿌려놓고 있다. 아니 어쩌면 존 비첨이라는 살인자와 그의 희생양인 된 매음굴의 어린소년들과 이들의 매개로 업을 삼고 있는 마피아들을 통해서 사회고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전하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했던 이들을 통해서 정작 발전이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대두시킨다. 그러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가슴 아픈 부분들이 많다. 지금의 잣대로 19세기말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 당시만 해도 왠만한 유력집안에서는 하녀를 부리고 있던 시절이었고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시절임은 틀림없다. 그런 시절에 이들 소외계층의 문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반문할 수 도 있지만 결국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희생이다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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