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그리고 이순신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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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의 왕실사>,<불륜의 한국사>를 통해서 역사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던 이은식선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전도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내심 걱정이 먼저 앞서지만 원균과 이순신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통해서 그동안 이순신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원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하고 있다. 내심 걱정이 된다는 것은 다름아닌 원균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그동안 몰랐던 이순신에 대한 왜곡된 기록들을 묵과할 수 없이 실록에 있는 그대로 세상에 끄집어 내다 보니 오랫동안 일반 세인들에게 각인되었던 그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포장된 이미지에 충실한 일부 원론주의자들에게 돌을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원균 그리고 이순신>은 성웅, 구국의 영웅, 유년시설 남자아이들에게 가장 닮고 싶은 인물로 대변되는 이순신과 이순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결국 칠천량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주하다 사살된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하다고 알고 있는 원균에 대한 우리의 인식구조를 뒤흔드는 책이다. 이러한 극과 극의 평가는 우리가 일제감정기시대를 거치면서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민족단결과 독립의식고취등의 이유로 적극 이순신을 부각하였고 그 후대에 군사정부의 정권장악과 반공이데올로기의 소산으로 이순신에 대한 미화작업이 극대화 되면서 덩달아 원균에 대한 이미지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까지도 이 두 사람에 대한 허와 실에 대한 과대한 포장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현실이다. 

필자는 이런 측면에서 원균과 이순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 즉 그동안의 편견을 버리고 새롭게 접근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바탕으로 그 실상에 접근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에서 그 중심부에 들지 못했던 악역을 담당했던 원균에 대한 재조명를 통해서 그의 원죄를 벗겨내려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런 필자의 의도는 개인적으로도 극히 환영할만하고 필자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특히 임란발발 초기의 상황과 원균의 마지막 전투였던 칠천량해전을 재고증함으로써 원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제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필자는 임란발발 불과 2개월전에 경상우수사에 부임하여 제대로된 군비점검의 절대적 여유도 없이 임했던 23일간의 전투에서 그나마 그의 적극적인 대응이 있어기 때문에 재해권을 송두리채 왜군에 넘겨주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칠천량전투 역시 수차례 수륙양동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원균의 주장과 휘하 부장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전투력이 하락했다는 점등을 무시한 무리한 작전으로 인해 그 승패는 이미 정해졌던 것이고 또한 이 전투에서 원균이 도주하다가 사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동안 원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쟁발발 초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이순신의 행동과 최초의 해전이었던 옥포해전이후 승전결과에 대해 합의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보고하여 그 결과물을 챙긴점, 원균과 원균의 아들을 매도한 점, 당시 적군의 본거지인 부산진 왜군군영의 방화사건을 자신의 공으로 포장하여 조정에 보고한 점등을 낱낱이 소개하여 이순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공개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필자의 의도가 이순신을 폄하자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단지 원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그의 맞수였던 이순신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하자는 취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하튼 필자의 이번 저서로 인해 원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자리매김해야 할 것에는 의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선무1등공신에 추록된 이순신, 원균, 권율 3명에 대해서 유독 원균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개탄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순신,원균은 임란이 가져온 가장 큰 피해자이자 희생양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왕조 최초로 대군이 아닌 일개 군으로 옥좌에 오른 선조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의심으로 조선시대 가장 강력한 싱크탱크를 갖추고 있었지만 가장 무능한 군주로 기록된다. 혹자는 당쟁의 결과로 임란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고도 하지만 사실상 그 당시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단지 선조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보다는 자신의 옥좌유지에 더 많은 집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권력에 그 어떠한 도전도 용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필자가 지적한 이순신과 원균의 행동은 군지휘자로서의 성향 차이에서 살펴봐야할 점도 있다. 이순신은 철두철미한 전략가 타입이라면 원균은 손수 전장에 나서는 행동대장과 같은 타입이었고 이러한 두 장수의 전쟁수행 스타일이 두 사람의 반목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균은 이순신을 전면에 나서지 않는 소인배로 폄하했고 이순신은 원균을 병법도 모르는 미치광이로 폄하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사람은 당시 조선의 그 누구보다도 왜적의 전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장수들이었다. 결국 이순신이 실각하게 된 계기도 그렇고 원균이 마지못해 칠천량전투를 수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시 조선에 이 두사람을 빼고는 전투에 대한 문외한들과 군주의 옹졸한 치기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무뢰배들로 가득했다는 점이 결국 두사람은 전사로 몰고간 원인인 것이다. 임란이후 포상된 공신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더 가관인 것이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무신들은 고작 18명만이 공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선조를 따라 피난을 떠났던 문신과 내관들은 무려 수천명이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필자는 한 사람은 영웅으로 한 사람은 간웅 내지는 비겁자로 확정해 버린 선조수정실록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은 이처럼 실록과 수정실록을 동시에 역사에 남겨서 후대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점에 대해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결국 후대인의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사관을 심겨주기 위한 과학적인 장치중에 하나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 판단의 몫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어느 한쪽의 서술에 편중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의 서술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경개해야 할 것은 원균과 이순신의 그 공과를 요목조목 파악하는 것 보다 역사적 구도를 두사람의 라이벌 관계 내지는 맞수 그리고 반목적인 대응관계로 인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승격되기 이전까지의 모든 해전는 이순신 단독의 전투가 아니였고 이억기와 원균이라는 삼두마차에 의한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순신의 냉철한 머리, 원균의 넘쳐나는 열정 그리고 이억기의 중용적인 입장이 세계해전사상 불패의 업적을 만든 것이다. 

솔직히 이 서평을 쓰면서도 아직까지 원균에 대한 입장정리가 안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역사적 왜곡과 과도한 숭상이 가져다 주는 병패가 이처럼 크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한다. 원균과 이순신 두 장수는 조선이 배출한 걸출한 영웅임에 틀림없다. 단지 정치인들의 정치논리에 의해 판단이 흐려진다면 이는 영웅에 대한 진정한 대접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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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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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 다양한 모습의 사탄/옆집/여러 가지 형태의 섹스/민달팽이

친구들 : 하느님/우리집 강아지/마지 이모/샬럿 브론테의 소설들/민달팽이 퇴치용 알약/그리고 나.

또 하나 첨가하면 과일은 오렌지뿐이다. 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어머니와 그리고 그녀의 수양딸이자 작가와 동명인 지넷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눈치있는 독자들이라면 작가 자신의 이름을 여주인공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자전적 소설일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 작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지만 꼭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사춘기를 맞이한 소녀가 철두철미한 침례교 신봉자인 어머니와 그리고 모든 세상의 잣대를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주변인물들 틈에서 性 사랑에 눈을 뜨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문제는 사랑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닌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흔히 지금시대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진부하다면 진부한 소재이지만 소설이 발표된 1985년도만 하더라도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왔을 만큼 포스트모던적인 소재였음에 틀림없다. "가정의 미덕, 교회의 세력, 정상적인 이성애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작가는 이 소설을 말하고 있다. 그 만큼 단순하고 짧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소설속에 내포된 담론은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렌지이외의 과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일신교 원리주의자이자 제2의 성모마리아인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가정의 미덕, 종교의 힘,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진실은 너무도 확고하다. 적과 친구들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그녀는 그 어떠한 가치관에 대한 한점 흔들임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상이 비록 자신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종교적인 신앙과 같은 길을 갈 수 없다면 그 마저도 외면해 버리는 여인이다. 딸을 자신이 만든 세계에 철저하게 고착시키려 하지만 결국 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갈등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어쩌면 어머니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길을 나서게 되는지도 모른다... 

대충의 스토리만 봐서는 왜 작가를 21세기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는지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다. 단지 약간은 도발적인(사실 소설속에 도발적인 묘사는 전혀 있지도 않다)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에 그녀를 울프에 비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독특한 구성방식을 가지고 있다. 본 소설 속에 아더왕와 원탁의 기사, 마법사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고대도시를 찾아 떠나는 위닛에 관한 이야기등 몇몇의 동화들이 같이 산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러티브중에서 위닛의 이야기는 소설과 그 맥락을 같이 하지만 나머지 내러티브는 별개의 줄거리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이야기들은 하나로 묶어 커다란 내러티브로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도 없고 독자들도 굳이 그렇게 이해할 필요성도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오렌지이던 사과이던, 맛이 있던 없던 간에 과일은 과일인 것이듯이. 히야신스의 꽃색깔이 여러가지 있더라도 우리가 히야신스라고 부르듯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러티브로 받아 들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바로 진실에 대한 작가의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소설속 어머니에게도) 진실이라는 것은 절대적 개념이다. 뭐 다소 유연하게 표현하더라도 상대적 절대성을 가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속에서 이러한 절대적 개념에 돌을 던진다. 종교인들의 이중성 가치관, 가정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가치관,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만이 사랑으로 인식되는 가치관에 대해서 작가는 과격하거나 힘이 있는 필치가 아닌 아주 서정적이고 전원적인 필치로 묘사함으로서 오히려 그 감흥이 크게 다가오게 한다. 오렌지 만큼 상큼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마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지넷 윈터슨의 작품일 것이다. 다소 낯설은 소재와 독특한 스토리텔링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왜 그녀를 포스트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는 찬사에 대해 절로 수긍이 갈 것이다. 성과 진실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그녀만의 화창한 내러티브로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하게 가슴한쪽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한다. 요즘처럼 추워지는 계절에 곱은 손을 녹여주는 주머니 난로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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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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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연암의 계획은 북경에 도착하여 사행단과는 별도로 당시 조선선비들의 지식의 창고였던 유리창을 비롯한 북경의 선진문물을 접하면서 자신의 식견을 넓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특히 당시 서학이라는 형태로 조선에 들어온 아소교의 진상도 파악할겸 친구이자 선경험자인 홍대용의 중국측 지인들을 만나 안부도 묻고 학문적 교류를 왕성하게 펼치고자 사행단을 따라 오는 길에 줄곧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갑작스런 열하 호출로 인하여 고민끝에 여태껏 조선선비중 누구도 밟아보지 못했던 열하로 향하게 된다. 와중에 시복이었던 장복과의 생이별을 통해서 타지에서의 이별과 청나라관리들의 독촉으로 인한 마부 창대의 발병등으로 연암은 열하까지 혼자의 몸으로 강행군을 하게되고 마침내 열하에 도착하게 된다. 

이번 권은 열하에서 연암이 보고 겪었던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다. 1권에서는 연암의 원론적인 견해들이 수록되어 있다면 이번권은 각론적인 세세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어 약간의 무게를 더하는 다소 무거운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다. 특히 열하 태학관에서 우연하게 만난 곡정 왕민호, 통봉대부 대리시경이라는 상당한 높은 관직에서 은퇴한 형산 윤가전등과의 조우을 통하여 당시 천하의 대세, 음악, 역사, 과학, 종교, 정치등의 심도 깊은 필담을 나누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곡정이나 형산등의 한족출신의 선비들 뿐만 아니라 경순미같은 몽고출신의 선비나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만주족 관리들과의 만남은 연암에게 또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소중한 만남이었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이들과의 필담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과 철학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 중국학자들과의 논쟁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곳곳에 연암 특유의 패러디를 동원해가면서 정곡을 찌르는 그의 언변은 잔잔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사물을 보는 그의 정확한 눈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주로 곡정과의 대화가 주가 되었던 것은 곡정 역시 연암과 비슷한 아웃사이더겸 다양한 방면의 지적소유자이면서 시대와 불협화음하고 있다는 면에서 연암은 동질적인 동지의 끈끈한 정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망양록과 곡정필담에서 연암과 곡정은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황제들과 신하들을 자신들만의 무대에 등장시켜 호되게 때론 가련하고 애틋하게 이모저모 낱낱이 탐색하는 과정이 호기심 많은 어린이를 보는 것 같아 절로 웃음짓게 한다. 물론 이 두사람의 의견이 통일되지는 않지만 서로 주거니 받거니하는 필담과정에서 연암이나 곡정이나 그 학식의 깊이를 짐작하고 남게 만들 정도로 박식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구와 태양와 달에 대한 연암의 피력은 비록 그 자신은 친구인 홍대용의 의견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가히 혁명적인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아웃사이더인 곡정 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연암의 우주론은 지금의 우주론과 차이점이 없을 정도로 깊이있는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황교문답과 반선시말등을 통해서 당시 청황실의 라마교에 대한 숭배를 사행단이나 중국측 학자들의 생각보다 한발짝 더 나아간 의견을 보임으로써 연암 특유의 인식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연암은 라마교를 당시의 정세와 연결하여 청나라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의 융통성에 대해서 그만의 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기존의 중국의 기본방침이었던 이이제의방식이 아닌 사전포석방식으로 서반과 몽고등 외곽지역의 불안정한 정세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파악했던 것이다. 이민족 출신의 황제로서 누구보다 이민족의 강력한 힘을 알고 있는 건륭황제는 서반의 반선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서반을 끌어안고 또한 열하에 더위를 피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거동하면서 자신이 직접 몽고에게 강력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연암은 지적하고 있다.

연암은 이러한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조선이 먼저 파악해서 시의적절한 외교정책을 감행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제국은 이렇게 정책변화를 통해서 더욱더 강대한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숭명배청 사상에 물들어 있는 조선의 고루한 선비들의 작태가 그저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연암과 중국측 학자들과의 필담을 통해서 연암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연암은 곡정으로 대변되는 중국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확실한 주장도 언급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 또한 한글자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므로서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흐름을 바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주장에 반대의견이 있더라도 누락하지 않고 후에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케하는 배려야 말로 연암의 열린 정신을 보여주는 단례일 것이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다고 연암과 곡정의 필담은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나듯이 다양한 주제에 관해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게 되고 연암의 이번 사행길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북경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이야기들은 대체로 상당히 수준높은 담론들을 담고 있다. 특히 망양록은 고대 주나라의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禮와 관련된 난해한 대담을 그 주제로 담고 있어 일반 대중에게 다소 지루한 느낌 마저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연암 특유의 노마디즘과 재치있는 위트 한마디로 인해 오히려 더 깊이 그의 담론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연암이 누구인가 아무리 불세출의 논거나 주장이라도 이를 읽어 주는 대중이 없으면 공염불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그는 곳곳에 특유의 나이브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입담을 던저 주고 있는 것이다. 역시 연암답다는 생각을 재차하게 된다.

太學留館錄(태학관에 머물며)
還燕道中錄(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
傾蓋錄(열하에서 만난 중국 지인들)
黃敎問答(라마교에 대한 문답)
班禪始末(반선의 내력)
札什倫布(반선을 만나다)
行在雜錄(사행과 관련된 문건들)
審勢編(천하의 대세를 살피다)
忘羊錄(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
鵠汀筆談(공정과 나눈 필담)
山莊雜記(피서산장에서의 기행문들)
 

▣ 황교문답,반선시말,찰십륜포을 통해서 조선의 식자로서는 난생처음 겪게 되는 티벳불교와 달라이라마의 접견에서 사행단 대다수가 황제의 강압에 의한 결정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반선을 접견하게 되고 덕담까지 듣게 되고 또한 덤으로 불상을 비롯한 선물공세까지 받게 된다. 정사 박명원을 비롯한 공식 사행단은 상당히 곤란한 입장에 처하지만 연암은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즐긴다. 연암 특유의 유머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반선과 라마교를 관찰하면서 이후 곡정과의 필담에서 선수를 칠 수 있겠구나 하면서 내심으로 미소까지 짖는 연암의 모습과 사행단의 모습이 대조적이이다. 연암으로서는 이번 사행길에 열하와 반선을 접하게되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연암은 붓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래저래 자신이 횡재했다고 느낀 연암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은 그저 가볍기만 해 보인다. 마부 창대도 몸이 완쾌되어서 동행할 수 있게 되고 돌아가는 길에 만리장성 북쪽끝인 고북구을 자세히 구경도 하고 빈승한테 수작도 걸어보면서 더 많은 견문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북경을 항해서 가는 길은 그저 노마드적인 풍모를 볼 수 있다. 

▣ 개인적으로 이번 권에서 망양록의 내용이 가장 난해한 것 같다. 궁,상,각,치,우로 대변되는 동양음악의 기원과 하,은,주 상고시대부터 공자에 이르는 예약의 정의와 범위 그리고 후대 왕조에 미치는 악의 영향등에 대한 논거를 보면서 연암의 박식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정도랄까 물론 후반부에 중국역사 전반에 대한 고찰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어려운 내용이었다. 

▣ 옥에 티라면 연암 역시 성리학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곡정과의 필담에서 고려사에 대한 그의 인식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뭐 여기까지 지금의 잣대로 욕심을 부린다면 그야말로 연암의 열하일기는 아예 세상의 빛을 보지못했으라 여겨지지만, 그 만큼 이데올로기의 잔상이 깊고 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 열하를 걸쳐 다시 북경에 도착한 연암의 눈에 비쳐지는 북경의 거리와 문물들을 연암이 어떻게 요리해 나가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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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심리학 - 천 가지 표정 뒤에 숨은 만 가지 본심 읽기
송형석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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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차원의 소녀, 멍 때리고 앉아 있는 남자,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을 수 없는 아버지, 십년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았건만 남처럼 느껴지는 남편... 도무지 이들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생각들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한두번쯤 하게 마련이다. 뭐 굳이 정신분석학의 대가 칼 융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정신세계 즉 심리에 대해서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익히 알고있을 것이다. 특히 현대처럼 복잡한 시스템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혹자는 발현되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거의 전부다 한두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도 말한다. 굳이 이런저런 병명을 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다양한 문제들이 현대인만의 특성은 아니다. 잠시만 우리 역사를 살짝 엿보더라도 남을 전혀믿지 못하고 심지어 자식도 믿지 못햇던 의심많았던 인조, 모든 문제에서 우유부단으로 일생을 마감한 덜떠어진 선조 그리고 너무나 철두철미했던 이순신등 다양한 케이스를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다보면 그 응용분야는 무궁무진하게 확장된다. 특히 요즘처럼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한 시대에는 직원의 채용에서부터 직원의 교육 그리고 소비자의 소비성향 및 기업경영전략 전반에 걸쳐 심리학의 응용분야는 점점 더 확장된다. 어디 기업뿐이겠는가 정치, 문화, 교육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심리학이 응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이미 심리학은 우리와 근접한 거리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이처럼 심리학의 분야가 갈수록 확대되는 것일까? 심리학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관찰자적 학문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심리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이 심리학이고 인간활동중에 인간의 정신세계를 거치지 않는 활동이 거의 없듯이 심리학 역시 사회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위험한 심리학>는 바로 이러한 심리학에 대한 전반적인 증세와 대처방안 그리고 자가진단등에 걸쳐 우리가 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심리적 행동에 대해서 스토리텔링방식으로 아주 쉽게 접근토록 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각종 ㅇㅇ컴플렉스 시리즈에서 부터 은둔형 외톨이까지 그 증세의 근본적인 원인과 치료방안 그리고 예방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심리학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럼 왜 저자는 책의 제목에 위험한이라는 단어를 첨부했을까?
흔히 우리는 타인의 심리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서 알고져 한다. 타인을 지배할려고 하던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사랑을 얻기위해서던 간에 타인에 대한 심리상태를 파악하고져 한다. 예를들어 저 사람은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경계대상이고 이 사람은 이러저러해서 가까이 지내도 별 탈이 없을꺼라는 안도감을 가지면서 타인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된다. 특히 만남의 관계를 수량적으로 환산하게 될수록 이러한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대게 마련이다. 곧 이미 알려져 있는 심리학적 접근방법을 동원해서 타인에 대한 심리상태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에 대한 모든것을 판단해 버린다.

저자가 말하는 위험한이란 다름아닌 바로 이러한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지사지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타인의 눈에 나라는 자신은 어떤 심리학적 병세를 갖고 있고 그래서 나를 만나는 상대하는 타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생각만해도 섬뜩하지 않을까? 주변의 모든사람을 그러한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 살벌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학이란 위험한것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심리학이란 바로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즉 서로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라는 것이다. 타인은 자신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타인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나감으로써 보다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자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을 반면교사로 삼아 나도 타인에게 언제든지 그렇게 비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타인에 대한 포용력을 키워나가야 현대처럼 복잡다양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내 판단의 잣대로 삼는 위험한 심리학이 아닌 타인과 자신이 공생할 수 있는 안전하고 긍정적인 심리학이 필요할 시점인 것이다. 수신이라는 것이 결코 본인 스스로 혼자서 이룩할 수 없듯이 진정한 수신은 타인과 더불어 부딛쳐 살아가는 중에 진정한 수신이 이루어 지듯이 인간관계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다. 돼지가 될것인가 부처가 될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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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Olympos
댄 시먼스 지음, 김수연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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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우주항공국(NASA)에서 달에 물이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양이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동안 아폴로 프로젝트와 마리너 프로젝트를 통해서 인류는 지구이외의 행성에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가장 근접한 위성인 달에 최초로 인류의 족적을 새겼고 각종 데이타를 근거로 가장 확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화성으로 많은 위성과 탐사 로봇을 착륙시키면서 또 다른 생명체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물론 반대론적 입장에서는 인류의 숨겨진 야심이 또 다른 지구 식민화를 염원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우주라는 대양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인류를 닮은 생명체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이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호기심은 SF라는 장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이끄는 분야로 발달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SF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인간의 이러한 상상력은 서서히 공상이 아닌 실현단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반증이 바로 달에서 물이 발견되었고 혹시 아나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머지 않은 미래에 톱뉴스로 지면을 장식할지... <올림포스>는 흔히들 통칭하는 SF소설이다. 하지만 여타의 SF소설과는 스토리의 소재나 전재방식 그리고 전체적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물론 세속적으로 시대적 배경은 아주 먼 시간적 정량화의 감을 잡기 힘든 40세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 공간적인 배경(굳이 공간적으로 함축한다는 것 자체가 SF소설에서는 의미가 없지만)은 지구화된 화성, 그리고 미래의 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현생인류의 후손이라 불릴만한 호켄베리박사와 고전인류,후기인류와 모라벡이라는 유기체등의 출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결코 부족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인 SF소설의 요소들로 이 소설이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그저그런 또 하나의 SF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작가가 각종 단체의 상을 수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아주 독특한 소재와의 조우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이라는 존재이다.

팩스로드와 프리팩스 그리고 QT를 통해서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자재로 공간이동 혹은 양자이동이 가능하고 자가복제와 다양한 검색기능을 갖추고 있는 40세기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를 비롯한 각종 신들 그리고 아킬레스, 오디세우스, 헥토르,파리스로 대변되는 트리이전쟁을 한데 묶어버린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인 것이다. 도무지 조화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이한 두가지의 존재를 찰떡궁합으로 탄생시킨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제치있는 스토리 전개가 바로 이 소설의 방대한 분량을 금새 잊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곳곳에 담겨져 있는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통해서 SF소설과 문학작품 사이를 혼돈케 하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트로이전쟁을 살짝 각색해 버려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신화와 트로이전쟁에 대해서 검색해보게 하는 등 작가로 하여금 여러종류의 책을 다시 펼처보게 하는 재미 또한 숨겨져 있다. 소설에서 보듯이 신화와 40세기 첨단과학이 과연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고 알아왔던 모든 신화(그리스로마신화를 포함해서) 그 자체가 일종의 SF물이라고 보면 너무 비약적일까?
제우스의 번개, 변신술, 헤파이스토스의 제련술, 이카루스의 날개, 헬레오스의 하늘을 날으는 마차, 키르케의 마술 그리고 신들이 즐겨 먹고 마시는 넥타르와 암브로시아의 재생력은 지금 현재 과학의 힘으로 이루어졌고 향후 첨단과학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화 그 자체가 다름아닌 신화를 창조했던 당시에 SF였고 지금도 SF으로 남아 있다고 하면 이런 발상자체 역시 상당히 SF적 공상에 지나지 않는가? 그래서 소설속의 공간이동이나 다양한 전투신보다 신화속의 신들의 힘을 약간더 업그레이드한 묘사가 오히려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이슈로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생각의 전환일 것이다. 첨단과학의 발달로 인해 재생능력을 획득한 인간들의 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물론 40세기에 이르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연 존재할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를 고대 신화의 주인공인 아킬레스와 헥토를 통해서 신이 아닌 단지 복수의 대상으로 전략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적극 호응이라도 하듯이 신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신이라는 자체를 스스로 부인해버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러한 소재나 스토리전개가 여타의 SF장르의 작품들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 떼우기식으로 쉽게만 읽어나갈 만한 소설은 아닌 것 같다. 신화적인 머리와 SF적인 감각이 동시에 필요한 작품이다. 그래서 읽을수록 흥미를 더하는 작품이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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