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적 : 다양한 모습의 사탄/옆집/여러 가지 형태의 섹스/민달팽이

친구들 : 하느님/우리집 강아지/마지 이모/샬럿 브론테의 소설들/민달팽이 퇴치용 알약/그리고 나.

또 하나 첨가하면 과일은 오렌지뿐이다. 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어머니와 그리고 그녀의 수양딸이자 작가와 동명인 지넷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눈치있는 독자들이라면 작가 자신의 이름을 여주인공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자전적 소설일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 작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지만 꼭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사춘기를 맞이한 소녀가 철두철미한 침례교 신봉자인 어머니와 그리고 모든 세상의 잣대를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주변인물들 틈에서 性 사랑에 눈을 뜨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문제는 사랑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닌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흔히 지금시대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진부하다면 진부한 소재이지만 소설이 발표된 1985년도만 하더라도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왔을 만큼 포스트모던적인 소재였음에 틀림없다. "가정의 미덕, 교회의 세력, 정상적인 이성애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작가는 이 소설을 말하고 있다. 그 만큼 단순하고 짧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소설속에 내포된 담론은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렌지이외의 과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일신교 원리주의자이자 제2의 성모마리아인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가정의 미덕, 종교의 힘,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진실은 너무도 확고하다. 적과 친구들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그녀는 그 어떠한 가치관에 대한 한점 흔들임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상이 비록 자신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종교적인 신앙과 같은 길을 갈 수 없다면 그 마저도 외면해 버리는 여인이다. 딸을 자신이 만든 세계에 철저하게 고착시키려 하지만 결국 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갈등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어쩌면 어머니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길을 나서게 되는지도 모른다... 

대충의 스토리만 봐서는 왜 작가를 21세기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는지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다. 단지 약간은 도발적인(사실 소설속에 도발적인 묘사는 전혀 있지도 않다)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에 그녀를 울프에 비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독특한 구성방식을 가지고 있다. 본 소설 속에 아더왕와 원탁의 기사, 마법사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고대도시를 찾아 떠나는 위닛에 관한 이야기등 몇몇의 동화들이 같이 산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러티브중에서 위닛의 이야기는 소설과 그 맥락을 같이 하지만 나머지 내러티브는 별개의 줄거리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이야기들은 하나로 묶어 커다란 내러티브로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도 없고 독자들도 굳이 그렇게 이해할 필요성도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오렌지이던 사과이던, 맛이 있던 없던 간에 과일은 과일인 것이듯이. 히야신스의 꽃색깔이 여러가지 있더라도 우리가 히야신스라고 부르듯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러티브로 받아 들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바로 진실에 대한 작가의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소설속 어머니에게도) 진실이라는 것은 절대적 개념이다. 뭐 다소 유연하게 표현하더라도 상대적 절대성을 가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속에서 이러한 절대적 개념에 돌을 던진다. 종교인들의 이중성 가치관, 가정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가치관,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만이 사랑으로 인식되는 가치관에 대해서 작가는 과격하거나 힘이 있는 필치가 아닌 아주 서정적이고 전원적인 필치로 묘사함으로서 오히려 그 감흥이 크게 다가오게 한다. 오렌지 만큼 상큼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마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지넷 윈터슨의 작품일 것이다. 다소 낯설은 소재와 독특한 스토리텔링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왜 그녀를 포스트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는 찬사에 대해 절로 수긍이 갈 것이다. 성과 진실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그녀만의 화창한 내러티브로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하게 가슴한쪽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한다. 요즘처럼 추워지는 계절에 곱은 손을 녹여주는 주머니 난로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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