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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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올해로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지난 60년동안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는 수 많은 변화속에 흘러왔다. 처음 출발당시 주권국가라는 흐릿한 개념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의 국가개념도 변화했고 그 국가 구성원들의 가치관 역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6월 25일을 전후한 몇일정도만 한국전쟁을 그나만 흐릿하게 기억할려고 할 뿐이다. 당시 전쟁참여자나 피참여자에게는 결례되는 말이 될지 몰라도 현실은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오랜세월속에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의 담론들일 것이다.

그 담론은 바로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담론이자 또한 그렇게 강요되었던 담론들의 확대 재생산판이었다. 구 소련의 몰락으로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 대립시대를 지난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우리는 탈냉전의 시대가 아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전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현주소이다. 좀더 나아가 그동안 말 많았던 최초공격자에 대한 해답이 구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일단된 정도이고 노근리나 거창학살사건등의 공개로 인해 전쟁의 참화와 그 패해에 대해서 잠시 거론될 뿐 여전히 반공주의에 기초한 담론에 반기를 들 수 없는 분위기이자 확정된 담론이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시점에서 전쟁당사자중 미국과 소련, 중국등에서는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되더라도 남북한 양측의 입장에서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 전쟁이자 잊어서는 안되는 전쟁이기에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정치학적 담론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각과 해석이 있어야 할 때이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다름아닌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정치적인 담론을 걷어내고 전쟁이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과 가장 큰 피해자인 민족구성원 대다수가 바라보았던 전쟁의 실상에 대해서 날카로운 해석과 그동안 정치적 해석에 묻혀있었거나 봉인받았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공론화의 장으로 이끌고 있다. 특히 전쟁중 작전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남북측과 미군의 학살행위를 통해서 국가와 국가구성원간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학살이 발발하게 된 역사적 동기와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정치적 행위, 그리고 휴전이후 냉전체제속에서 묻혀버리길 강요받았던 원인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고 이러한 해석은 그동안 알고 있었고 알기 강요받았던 우리 대부분의 기억들과 상당하게 상반되는 해석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이제 우리사회도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주목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새로운 해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전쟁에 참여를 강요당했던 민족구성원 대다수가 가장 큰 피해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일부 보수층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 맥아더는 1954년 한 세미나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라고 밝혔고 커밍스는 뉴딜이 금세기 미국의 제1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면 한국전쟁은 제2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일본의 전 수상 요시다 시케루 역시 한국전쟁을 두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한국전쟁은 남측의 국민이나 북측의 인민과는 전혀 무관한 그들만의 축제의 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축제의 장에서 가장 큰 해택을 누린 이들은 북측의 김일성과 그 정권지지자들 그리고 남측의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세력들이었고 이들 양측의 지배층은 한국전쟁을 기화로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이는 휴전이후 북측이 김일성 일인독재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남측역시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반공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을 보면 확연히 들어난다. 사실 1950년 5월 선거에서 치명타를 받은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가장 적절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자신의 권력창출에 이용했던 인물이기도 하면서 이후 반공 멸공의 선봉장 역활을 화려하게 해내게 된다. 

그동안 북괴가 내려왔고 유엔군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고, 압록강 근처까지 올라가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애석하게도 중공군이 내려와 후퇴를 하게 되고 결국 38선보다 조금 위로 올라간 곳에 휴전선이 만들어졌다는 판에 박힌 듯한 기존의 공식화된 한국전쟁의 해석에서 부터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해석을 가해야 할 때이다. 결국 한국전쟁은 정치적인 논리와 상황으로 모든 공식적인 기억을 봉인해 왔던 기존의 담론에서 부터 탈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양측의 국민과 인민의 대다수는 사실 전쟁과 무관했다고 봐야 한다. 신생해방국에서 주권의 개념이 자리잡기전의 구성원들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수용키 바란다는 것 자체가 넌세스이자 억측이었던 것이다. 전쟁발발과 동시에 몇차례에 걸쳐 남북을 왔다갔다했던 통치지역에서 일반 민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남는 것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그네들에게 무의미했던가를 보여주는 단편일 것이다. 대다수의 민족구성원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정치적인 해석보다 몸소 겪었던 전쟁의 참화만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인민군에 의한 학살, 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 그리고 관변단체들의 보복성 학살 그야말로 동족간에 강요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발생했던 피비린내 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이외에는 그 어떠한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노근리사건이나 거창양민학살사건등 이제야 정치적인 해석에 벋어나는 새로운 해석들이 하나둘 들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봉인받기를 강요당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국가라는 거대한 틈바구니안에서 묻혀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비참한 기억을 새롭게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역이겠지만 이제 새로운 해석들을 통해서 정치적인 측면이 아닌 순수한 사회적 그리고 민족구성원들 대다수의 기억들을 봉인의 틀에서 끄집어 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서는 또다시 정치적인 해석으로 인해 묻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4.19항쟁이나 5.18항쟁을 통해서 여실히 느끼지 않았던가. 그동안 내재되었던 기억들이 묻여가면서 똑 같은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듯이 이제라도 한국전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해석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인 것이다.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남북한의 지배집단이었고, 최대의 피해자는 참전했다가 죽고 다친 군인과 그 가족들, 이산가족, 피학살 민간인, 미군범죄의 피해자, 기아선상의 북한 주민,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인해 응당 누려야 할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대다수 남북한 민중들인 것이다. 기존의 냉전적 국가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적이면서 인간적인 시각에서 민족구성원의 차별과 고통 그리고 희생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억울하게 스러져 간 남북한의 모든 이름 없는 그리고 기억되기를 거부당한 영령들 앞에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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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란 무엇인가 - 에른스트 마이어가 들려주는 진화론의 핵심 원리 사이언스 마스터스 16
에른스트 마이어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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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에른스트 마이어는 '20세기 다윈'으로 불리기도 한다. 에드워드 윌슨이나 스티븐제이 굴드, 특히 리처드 도킨스처럼 화려한 조명이나 그에 걸맞는 약간의 쇼맨쉽은 전혀 엿볼 수 없으나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윈이후 최대의 인물로 스스럼없이 마이어를 손에 꼽는 이유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세상에 내놓고 여러차례 개정판을 편찬하면서 보여주었던 조용하면서도 혹은 세상과 약간의 타협의 손길을 내미는듯 하면서도 일관되게 진화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에른스트 마이어의 학풍이 다윈의 절차적 방법을 답습하는듯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과격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그의 저술이나 논거를 살펴보게 되면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절로 매료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진화생물학자인 에른스트 마이어의 힘이다. 

<진화란 무엇인가>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다윈혁명이후 지금까지 수없이 많고 수많은 반박과 질타속에 사실로 자리매김한 진화론에 대한 원론적인 책이다. 그동안 진화론과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의 저술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 독자들에게 진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접근방법론에서는 진화론을 반박하는 이들의 작품들보다 오히려 부족한점이 있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을 선행하지 않고서는 학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이론이나 연구결과를 제대로 이해하기 부족하다보니 진화라는 것이 사실은 사실인데 좀 더 세부적으로 파고 들면 정말 모르는것이 더 많은 것 역시 진화에 대한 진실인 것이다. 이러면에서 저자는 특수계층의 독자를 위한 저서가 아닌 일반 독자층을 위한 진화론의 모든 것을 이 책 한권에 담았다. 그리고 이 책의 전제는 진화가 불변의 사실(물론 사실은 그에 대한 반증이 나오면 즉각 폐기되겠지만 이럴 가능성은 내일 아침 해가 서쪽에서 뜰 확률만큼이나 낮다)임을 전제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박하는 이론들이나 창조론자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에 대해 반박해야 하는 아까운 시간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진화론에 좀더 깊이있게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준다.

그동안 도약진화, 변환주의, 라마르크주의(획득형질진화론),정향진화등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후 1940년까지도 이러한 다양한 진화론에 대한 찬반의 논의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있어 왔고 그래서 더욱서 진화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금 우리는 이러한 이론들이 하나의 가설이었다는 점을 수긍하게 되고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은 확고한 사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화려한 문구나 정치적 액션을 전혀 가미하지 않고 그저 진화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열쇠들을 하나 둘 끄집어 내어 열쇠통에 맞추어 나감으로서 일반 독자들이 진화을 좀 더 쉽게 한편으로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라잡이 역활을 훌륭하게 해나가고 있다. 지구상 최조의 생명체인 원핵생물에서 지금의 인류라는 종에 이르기까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광범위한 생명체가 바로 진화의 증거임을 알게 해 준다. 다시금 다윈주의가 갖는 세계사적 충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여지며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한갈래의 이론이 아닌 진화가 사실일 수 밖에 없는 증거들과 이론들을 재확인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동안 창조론과 진화에 반대편에 서있는 작자들에게 진화가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그 역활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논박에서 좀더 유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벗어나야 할 때가 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도 창조론이난 지적설계론을 믿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진화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그 사실에 대해서 좀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야할 때라고 여겨진다. 그러면에서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라 무엇인가>는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 부터 상당히 전문적인 이론의 과정까지 한눈에 일목요연하게 그러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게 서술해 나가는 저자의 힘에서 우리는 진화가 사실일 수 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진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현상이 아니다 환경이 주는 자연선택이라는 일련의 제거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을 분명한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이 사실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그동안 수많은 논쟁과 연구가 있어 왔던 것이고 결국 진화가 사실이라는 것에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결과들이 도출되었다. 이제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 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상세한 내용들을 쉽게 그리고 보다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면에서 저자의 이번 저서는 그에 합당한 많은 역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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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지배 - 평화, 민주주의, 자유 시장 - 자유주의를 떠받치는 세 기둥
마이클 만델바움 지음, 황원남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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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 세계는 커다란 흥분에 휩싸였다. 비록 그 변혁의 징후는 그 전 시기부터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했지만 막상 사람들 눈앞에 현실화로 다가오자 다양한 의견과 더불어 한쪽 진영의 맥없는 승리로 끝난 것 같은 느낌 마저도 지울 수 없었다. 바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대부였던 소련연방의 붕괴였다. 볼세비키혁명으로 전제군주국가였던 구 러시아제국을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이끌고 그야말로 마르크스의 정치이론을 현실화 시켰던 세계의 한축이었던 소련의 몰락은 그와 함께 같은 노선을 걸어왔던 동맹국을 비롯하여 그 반대진영에 포함된 민주진영에 이르기 까지 다소 생뚱맞은 느낌마저 들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국에서 촉발된 산업혁명이라는 패러다임은 인류역사상 볼 수 없었던 가치관의 대 변혁이었다. 그 전 중세시대의 마감을 고했던 르네상스, 과학사조혁명등 다양한 일대의 변혁이 있었지만 사실상 산업혁명만큼 파고가 크고 엄청난 여파를 가져온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만큼 산업혁명은 물질적인 변혁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변화에도 파장의 여파가 대단했던 것이다. 한창 산업혁명이 절정기로 질주하고 있을때 독일출신 정치철학자였던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이 가져온 자본주의라는 허울좋은 이면속에 숨겨져 있는 섬뜩한 칼날에 주목하면서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했고 당시 세계인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칼 마르크스의 대안은 그야말로 대안이 아닌 현실가능한 이론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국가 창설은 이후 세계의 절반으로 이어져 나갔고 비단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철학과 상이하게 전개되었지만 큰틀이라는 맥락에서는 마르크스의 견지를 추종해나갔다. 세계양차대전으로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면서 세계는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라는 양대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고, 모든 시스템에서 국가통제를 우선시 한 공산진영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구도는 민주진영의 싱거운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비단 중국을 비롯한 일부 잔존하고 있는 공산진영 역시 사회주의의 진정성을 의심케할 정도로 시스템적 변화를 가져왔고 결국 이 땅에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자 패권자임을 재확인 시켜주는 절차적 확인성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마이클 만데바움의 <자유의 지배>는 이러한 민주주의 발생에서 정착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리하기까지의 역사적 패턴과 사건들을 바탕으로 왜 민주주의이외의 사조가 왜 성공할 수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민주주의 찬양서이다. 저자는 그 시발점을 1919년 민족자결주의로 알려진 윌슨의 선언에서 찾고 있다. 당시 세계1차대전이 끝난 상태에서 윌슨은 민족주권국가개념을 근거로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창하면서 자유,민주라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하지만 당시 세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민주라는 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고 전후 사후 처리문제에 더 치중한 나머지 윌슨은 주장은 묻혀 버리게 된다. 이는 자국인 미국에서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사조였던 것이다. 결국 자유와 민주의 개념상실은 극단적인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최악의 세계대전을 양산했고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다. 이는 바로 자유와 민주 그리고 자유경제 시스템의 부재 결과였고 이들 3요소의 부재는 결국 공산진영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공산진영의 판정패로 끝난 지금의 시대는 분명 자유,민주,자유무역이라는 3요소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사조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탈냉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들 3요소가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상당한 희생을 겪었고 그 댓가는 당장 성패의 판단을 재단할 수는 없으나 핵심선도국 입장에서는 커다란 희생의 댓가로 쟁취한 역사적 위대한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정치제도적 시스템의 자유 그리고 경제시스템의 자유화로 대변되는 지금의 세계가 과연 어디까지 지속되고 성장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 명확한 해답을 던져줄 수 있는 비전 역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이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또다른 변수일 것이다. 저자는 이 시스템의 지속성장을 위해서는 향후 경제적 문제와 범지구적인 환경변화와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정치적 구조를 예로 들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전지구적인 환경변화는 인류가 처한 그 어떠한 위협보다도 큰 예측불가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고 비단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고 난 후 발발한 미국발 서브프라임사태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같은 경제시스템의 공격 또한 냉정시대를 겪으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던 군사적 도발보다 오히려 더 위험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사례들이다. 

또한 아직도 세계적으로 일부 국지적인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있는 주변국들의 예상치 못한 대량살상무기의 사용 또한 장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공산진영이라는 좋던 싫던간에 연대요소가 사라지면서 나홀로 개념이 팽팽해진 일부 주변국들의 도발행위는 탈냉전시대에 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는 위험요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산진영을 패배시킨 지금의 시스템이 우월하다는 생각 그 자체일 것이다. 솔직하게 표현 해서 냉전시대의 막을 종식한 것은 민주진영의 승리가 아니라 공산진영 자체가 가지고 있던 오류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례는 가장 효과적이라고 하는 민주진영의 시스템 또한 자체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다양하고 통제될 수 없는 요인들에 의해 언제든지 그 막을 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분명 현재까지 인류가 고안하고 창조했던 시스템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지속 성장 가능한 시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보완 또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제 200여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시스템의 문제점들은 상상외로 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우리자신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향후 전개되는 문제들은 20세기와 같은 무력적 충돌이나 대립과 같은 형국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제도적 시스템속을 파고들어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충돌이나 대립으로 정의 될 것이다. 그러면에서 1919년의 윌슨의 주장이 새롭게 조명되는 지도 모르겠다. 

<자유의 지배>는 산업혁명이 대두된 민주자본주의의 역사를 통찰하는 역사서이자 미래를 예견케 하는 미래학서적이다. 피와 맞바꾼 프랑스혁명을 필두로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민주 그리고 경제의 자유라는 삼두마차가 이끌어온 시스템은 인류가 보아오고 겪어왔던 그 어떤 시스템보다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 준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민주자본주의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현 시스템의 굴곡과 그리고 허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지적하고 있다. 비단 그 중심에 미국이 서있고 미국중심적인 사고 또한 엿보이지만 결국 모든 주권국가들의 합의가 없고서는 과연 지금의 시스템이 지속되고 성장할 수 있을련지에 대해서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향후 민주시스템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가 다름아닌 미국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고 저자의 예측은 불과 6년후 미국발 경제위기로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핵심국 주변국을 뛰어넘어 이 시스템이 지속성장 가능하기 위해선 범세계적인 협의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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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국화와 칼 Picture Life Classic 4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진근 옮김 / 봄풀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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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를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국화와 칼>은 일본이라는 국가 그리고 구성원들인 개개인의 일본인들에 대한 심도깊은 성찰을 통해서 베일속에 감추어져 있는 일본을 수면위로 끌어올린 베스트셀러이다. 세계적으로 3천만부이상이 번역되어 읽혀진 그야말로 일본연구에 대한 바이블같은 존재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다소 오리엔탈리즘적인 편향적인 시각이 엿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일본연구의 총화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내용면에서 진일보한 저서임에 틀림없다. 그동안 국내에도 여러 출판사를 통해서 출간되었지만 사실상 독자들에게는 다소 딱딱하게 다가왔던 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제대로 된 일본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가 끝까지 완독했다고 자부하는 독자나 저자가 표명하는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독자들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은것은 책의 질적인 내용보다는 전형적인 출판 방식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취지에서 이번에 출간된 <그림으로 읽는 국화와 칼>은 그동안 독자들에게 불만족스러웠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새로운 계기로 다가오는 것 같다. 우선 저자의 생각을 간략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해를 첨부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의 정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과 일본역사를 추론하여 내용과 부합하는 각종 그림이나 사진자료를 함께 게시함으로서 저자가 논지하는 바를 보다 효율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사실 우리에게 일본이라는 나라는 불편한 존재이자 韓민족에게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를 짊어준 존재로 남아있다. 비단 세월의 흐름속에 이러한 과거를 묻고자 하지만 불현듯 느닷없는 그네들의 상식을 뛰어넘어버리는 망언들을 접할때 마다 우리는 일본의 정체성에 대해서 또다른 시각으로 곱씹어 보게 된다. 도대체 그들의 머리속은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길래 이런 일들이 별다른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일까? 

<국화와 칼>은 사실상 세계2차대전 당시 진주만 기습을 당하고 나서 미국이 참전하면서 착수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발되었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구조였고(일본을 강제 개화시킨 당사자 역시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그 아이러니를 엿 볼 수 있다.물론 일본은 이것을 자신들 명예에 대한 수치로 파악했고 부던히 칼을 갈았던 것이다) 그런 일본을 정확히 파악하는 길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름길중의 하나라는 생각으로 착수했던 용역 프로그램의 하나였다. 정부로 부터 요청을 받은 저자는 비단 적국인 일본을 직접 방문하여 샘플링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미국내에 살고 있는 일본인과 그동안의 일본관련 서적을 바탕으로 불멸을 명작을 남기게 되었고 결국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진 미군정시기에 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지침서로서의 역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발발하기전까지도 봉건주의 시스템을 끌고온 보기드문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다. 중국의 경우 봉건주의는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막을 내렸지만 일본은 그때까지도 막부를 중심으로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을 위시한 철저한 봉건사회였다. 이러한 봉건사회의 특징이 고스란히 일본민족 개개인의 속성에 뿌리깊게 남아있는 명예 즉 세켄이라는 독특한 정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일본인의 명예는 서양인이 갖고 있는 그 개념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47인의 사무라이>라는 인기있는 일본의 고전에서 그 단편을 보여주듯이 명예에 흠집을 받을 경우 피를 부를는 복수내지는 극단적인 자기희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일본인의 특성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명예는 국가에 대한 충과 의무 그리고 의리라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만나면서 일본 특유의 정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형식적이고 내면적인 행동양식이면에 극히 개인적이고 향략적인 행동들은 오히려 명예에 대한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탈출구로서의 역활을 담당했던 것이다. 

어느 국가나 민족에게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 극단적인 면이 바로 전쟁과 평화이다. 하지만 일본인들 처럼 그 양면성이 극적으로 표출되는 민족 또한 보기 드문 것이 사실이다. 군국주의의 절정기에 일본은 국가자체가 천황을 위시하여 하나의 병영국가였고 모든 자원 심지어 식민통치한 국가들의 자원까지 동원하여 전쟁에 목을 걸었고 모든 시스템은 날이 새파랗게 선 칼날 같았다. 하지만 패망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듯이 점령군의 주둔을 쌍수들어 환영한 민족이 바로 일본인들이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만만치 않지만 바로 이러한 특징이 일본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전체적인 역사를 개관하면서 일본인들의 사상과 그 기원 그리고 그들의 이해하기 힘든 정서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연구하였다. 그중 명예와 의리 그리고 의무가 지금의 일본을 만든 원동력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점을 먼저 이해하고서야 일본의 행태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는 이러한 현상들이 많이 퇴색되고 변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천년동안 뼈속 깊이 뿌리잡고 있는 일련의 정서들이 쉽게 변화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이런면에서 저자가 책 말미에 예견했던 몇가지 사안들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저자는 일본인 특유의 집단적 기회주의 성향에 대해서 전후 세계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군국주의 노선을 과감하게 포기한 일본은 전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물론 이러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에도 그들 특유의 명예와 의리 그리고 의무가 개입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저자가 지적했듯이 미국의 지원이 있으면 그야말로 호랑이등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라고 했듯이 일본은 미국의 보호아래 세계2위의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저자는 끝까지 일본에 대한 기회주의 성향에 대해서 쉽게 단념하고 있지 않다. 언제든지 예전의 신념이었던 군구주의의 가치가 재확인되면 일본인들은 바로 전향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정서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지금의 일련의 사건들을 보게 되면 정말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이 일본의 전부를 말해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또한 시대의 거대한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엔 지금의 시대는 많은 제약과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역사를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역사라는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이다. 그러면에서 어쩌면 화사하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국화꽃 속에는 아직도 시퍼런 일본도가 그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국화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민족이 일본이라면 너무나 가혹한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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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번역가가 지적했듯이 혹시 손에 땀을 쥐게 하거나 흥민진진한 속도감을 기대하고 이 책을 손에 드는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소설이다. 이런 스릴감이나 속도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나를 보내지 마>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지막 장을 덮을때 까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든 인간에게 가장 불편한 진실 즉 '죽음'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만큼 무덤덤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그저 평범한 기숙학교 헤일셤 출신인 간병사 캐시의 유년, 학창시설의 회고로 부터 시작되는 소설은 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유년시설을 보여주는 듯하다. 기숙학교라는 특징상 숙식을 같이 했던 동창생들과 학교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던 환경들에서 독자들은 새롭고 이채로운 특징을 엿볼 수 없다. 단지 중간중간 기억하기 쉽지 않게 흘러 가는 기증,완결,근원자등 이 소설의 내러티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캐시와 토미, 루스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성장과정을 관통하듯이 흘려보내고 만다. 물론 독자들에게 왠지 심상치 않는 소재를 다루고 있을거라는 예감을 갖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 소설의 진면목은 그냥 그대로 화면에 영상이 뿌려지듯이 독자들에게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클론, 복제인간이라는 SF적인 소재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약간은 어울리기 불편한 소재를 작가는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서로의 영역을 혼합해서 구성해버렸다. SF소설과 성장소설이라는 혼화될기 힘들것 같은 양대 장르가 작가의 상상력과 맞물려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한 것처럼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한번쯤은 이러한 상상을 해봄직하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타인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선택된 일반인의 생을 연장시키기 위해 또다시 선택된 기증프로그램의 희생양인 클론들의 삶을 죽음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대비해 아주 냉철하면서도 타자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비록 복제인간이라는 SF적인 소재를 담고 있으나 전혀 SF적인 뉘양스를 담고 있지 않다. 기증이나 복제에 관한 그 어떠한 세부적인 표현도 없거니와 그 흔한 과학적 태크니션에 대한 묘사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소설을 읽는 동안 성장소설적인 분위기를 감지했던 독자들로 하여금 왠지 일반적인 성장소설과 사뭇다른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러한 느낌 역시 캐시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암시를 확인하면서 책의 페이지를 다시 되돌여 군데 군데 숨겨져 있는 암시물들을 찾는 고통을 감내하게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이 내러티브가 다소 괴기하게 느껴질 수 도 있으나 이야기 후반부에 에밀리선생님과 마담으로 지칭되는 일반인 그리고 캐시와 토미로 대변되는 클론들의 토론을 통해서 인간 존엄성의 가치와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잣대로 제단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 내면에 많은 고민을 던져주는 작가의 통탈력은 대단하게 보여진다. 인간에게 가장 불편한 진실인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무덤덤하게 그러면서도 사고의 확장을 펼쳐주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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