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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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만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는 예상을 하고도 남았지만 막상 작품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우리가 왜 하루키의 작품에 매료되는지에 대한 적당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소설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전작인 <상실의 시대>에서 가졌던 몽환적인 플롯은 여전히 이번 <1Q84>에도 녹아들어 있다. 달(MOON)은 예로부터 태양과 반대의 개념을 우리 인간들에게 각인 시켜왔다. 태양이 밝음, 힘, 남성성을 상징하는 반면에 달은 어둠, 나약함, 여성성등을 상징하여 마치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보편적이고 일반론적으로도 선과 악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들 한켠에 부지불식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달은 모성을 비롯한 순수한 여성의 사랑을 상징하듯이 몽환적으로 우리들에게 다가 오기도 한다. 이번 소설의 모멘트 역시 달이 표방하는 몽환적인 분위기 상징성인 아오마메와 그녀의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사랑 덴고라는 두 화자를 통해서 작가는 사랑을 말하고 이별을 말하고 동시에 사라짐 아니 정확히 상실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다소 SCIENCE FICTION적인 플롯이 가미되어 현존하는 1984년과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현존할 수 없는 1Q84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산재하므로서 독자들의 시선을 더 끌게 한다. 특히 소설속의 또 다른 소설인 <공기번데기>에 대한 궁금증은 마치 아오마메와 덴고가 언제쯤 해후할까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궁금증만큼이나 더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한다. 이번 작품 역시 하루키 특유의 세세한 묘사가 일품으로 꼽히는 작품일 것이다. 인물에 대한 감정묘사에서 외모적인 묘사는 1장과 2장을 읽으므로서 두 주인공에 대해 독자들이 움직일 수 없게 머리속 깊이 각인시켜 버린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나 상황변화에 따르는 묘사들 역시 하루키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장황하면서도 정교하고 지루하지 않다. 마치 뭔가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마저 같게 해버린다. 특히 남녀간 섹스의 묘사는 하루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문구들의 향연일 것이다. 하루키의 섹스는 에로틱한 느낌보다는 자신 작품속을 관통하는 몽환적이 느낌의 표출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보기에 따라 다소 민망한 표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섹스의 묘사는 에로시즘과는 별개로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만의 메세지가 담겨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번 소설에서도 곳곳에 음악이 녹아있다. 특히 아오마메를 상징하는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는 서두에서 부터 그녀의 예정된 삶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아오마메나 덴고 그리고 후카에리등 주요 등장인물을 묘사할때 곳곳에 이런 장치를 곁들어 놓아 인물이해를 문자라는 단어와 음악이라는 음률로 동시에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어 인물들에 대한 애착을 한결 더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번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상실에 대한 작가 나름의 가치관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 이별, 분실, 사라짐, 제거등 우리는 현실속에서 나에게 귀속 되었던 것이 나를 이탈하는 순간에 다양한 단어로 이 과정을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이 과연 적절한가라는(혹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에는 그 어떠한 의문도 가져보질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소설을 통해서 이러한 일련의 표현들이 '상실'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압축되어 진다. 상실이라는 모멘트는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삶의 연속이자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마치 우리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전반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기꺼이 다가가기엔 다소 무거운 작품이다. 작중 덴고 아버지의 말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줘도 모른다" 처럼 알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 것 같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잔잔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이 하루키의 매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이어지는 내러티브 역시 많은 추측을 낳고 있지만 그것 역시 읽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더 기다려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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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2
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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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부분의 SF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은 그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이 마치 땅위에서 한 발자국 붕 떠있는 몽롱한 상황을 자아내게 하고 그러한 상황을 플롯의 기본 틀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왠지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러한 몽환적인 면과 '나'라는 자아와 동떨어진 느낌이 오히려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들은 읽을때는 마치 소설이라는 픽션을 마치 팩트로 받아 들이다가도 막상 책을 덮고 현실이라는 눈앞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허망해 질 뿐이다. 그동안 김탁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일반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는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 역사소설가(물론 작가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에는 분명하게 그리 비쳐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라는 공식이 들어 앉아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여타의 역사소설가와 다른점은 픽션과 팩트의 조화로운 설정을 통해서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내러티브를 제시함 으로서 역사소설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투철한 작업정신과 더불어 역사적인 치밀한 고증 즉 탄탄한 팩트가 결국 상상력 넘치는 픽션을 창조해 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인기 역사소설가가 <눈 먼 시계공>이라는 SF초현실 소설을 선보였다. 왠지 생뚱 맞다는 느낌마져 든다. 제목도 진화론의 전사를 자처하는 리처드 도키슨의 저작과 같을 뿐 아니라 그동안 그의 작품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장르라서 더욱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온다. 더욱이 문학작품을 공저로 출간한다는 점에서 한번 더 갸우뚱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형식적인 특이성도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묻어 있는 현시대의 문제점을 미래라는 시대적 배경에 투영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은 과거에서 준거를 마련했다면 이번 작품은 역으로 미래에서 그 준거를 제시함으로서 내용적인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이 형식적, 내용적인 면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보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작품이 흘러간 과거의 역사를 재현 했다면 이번 소설은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재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눈 먼 시계공>의 시대적 배경인 2049년은 로봇과 절대인간 그리고 사이보그(일부 신체를 기계로 대처한 인간)등 그리고 뇌적출과 뇌이식, 자동운행 자동차등 이론상으로 가능할 것라는 과학적 상상이 그대로 재현된 시대이다. 가사로봇을 비롯한 로봇들이 인간들의 시중을 들고 정치적인 구조로도 국가라는 거대한 중앙 조직에 대한 집착이 흐릿해지면서 특별시 단위의 보다 낮은 단계로의 구성체가 대세로 받아지면서 이 시대는 그야말로 과학문명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작가들은 주인공 은석범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부딛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이 시대의 고민거리를 소설속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지금 연애계를 비롯한 일반대중에까지 널리 퍼져버린 성형수술의 붐을 생명연장이나 근력 강화등에 현혹되어 무분별하게 인간의 몸을 기계화로 대처하는 미래의 사이보그 집단과 다를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과학기술발달과 그로 인한 인간정체성의 정립 및 회의에 대한 고민거리를 독자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산업혁명을 거쳐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미래는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최첨단 총화를 보여 준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속에서 과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과 과학기술의 산물들과 인간의 관계 정립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문학이나 과학의 한 분야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SF소설이나 미래과학 상상소설이 짧은 라이프 사이클을 보인 것은 아마도 그것은 작가들 개인의 역량적인 한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게 인문학이나 문학쪽에서 교육을 받아왔던 환경들에 의해서 작가의 상상력은 그자체로 한계성을 갖게 마련일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점은 극히 개인적인 시각의 편차이고 모든 SF소설을 다아우르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하지만 <눈 먼 시계공>은 전문작가와 과학자의 공저로서 작가적인 섬세한 작품성과 과학자의 팩트가 한데 어울러져 정말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를 통해서 진화론적으로 상고했을때 학문의 종착점은 각분야의 학문들간의 지적인 통섭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지금의 사회는 각분야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풍토는 특히 우리에게 편협적인 시각과 더불어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학의 영역에서 과학을 보면 인간미 없고 딱딱한 사고의 집합체라고 보는 경향이 있고, 과학영역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눈은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도로 폄하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작품속에서도 과학발전과 생태보존이라는 두 집단의 끊임 없는 논쟁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편협한 시각과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학과 문학이 서로 통섭되었을 경우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훌륭한 답을 내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문학과 과학이 서로 만나 하나로 어울어 진다면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탄탄하면서도 섬세한 플롯과 더불어  과학적인 팩트가 뒷받침이 되어 펼처지는 내러티브는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게 하지 않는다. 마치 미래에 발생하게끔 예정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앞당겨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을 SF소설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현대처럼 아무런 의식없이 유행를 타고 있는 성형수술의 붐과 미디어천국을 방불케 하는 광고의 홍수 그리고 이를 정점으로 구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와 돈에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로봇에게 집착하는 모습들은 왠지 모르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진화론에 근거한 뇌과학분야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모티브는 이 소설이 막연한 상상력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반적인 SF소설이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인문학이나 과학이 다른 분야와 어우러지 못하고 한방향으로만 나아 간다면 미래는 분명 고통스러운 현실의 연장일 뿐임을 비단 소설속이지만 가슴에 와닿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차기 한국문학의 대표주자 김탁환과 과학의 미래인 정재승이 던지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화두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러한 발상을 계기로 문학과 과학의 두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분야가 상호간에 통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과 동시에 미래는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밝을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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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1
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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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SF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은 그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이 마치 땅위에서 한 발자국 붕 떠있는 몽롱한 상황을 자아내게 하고 그러한 상황을 플롯의 기본 틀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왠지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러한 몽환적인 면과 '나'라는 자아와 동떨어진 느낌이 오히려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들은 읽을때는 마치 소설이라는 픽션을 마치 팩트로 받아 들이다가도 막상 책을 덮고 현실이라는 눈앞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허망해 질 뿐이다. 그동안 김탁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일반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는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 역사소설가(물론 작가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에는 분명하게 그리 비쳐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라는 공식이 들어 앉아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여타의 역사소설가와 다른점은 픽션과 팩트의 조화로운 설정을 통해서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내러티브를 제시함 으로서 역사소설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투철한 작업정신과 더불어 역사적인 치밀한 고증 즉 탄탄한 팩트가 결국 상상력 넘치는 픽션을 창조해 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인기 역사소설가가 <눈 먼 시계공>이라는 SF초현실 소설을 선보였다. 왠지 생뚱 맞다는 느낌마져 든다. 제목도 진화론의 전사를 자처하는 리처드 도키슨의 저작과 같을 뿐 아니라 그동안 그의 작품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장르라서 더욱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온다. 더욱이 문학작품을 공저로 출간한다는 점에서 한번 더 갸우뚱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형식적인 특이성도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묻어 있는 현시대의 문제점을 미래라는 시대적 배경에 투영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은 과거에서 준거를 마련했다면 이번 작품은 역으로 미래에서 그 준거를 제시함으로서 내용적인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이 형식적, 내용적인 면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보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작품이 흘러간 과거의 역사를 재현 했다면 이번 소설은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재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눈 먼 시계공>의 시대적 배경인 2049년은 로봇과 절대인간 그리고 사이보그(일부 신체를 기계로 대처한 인간)등 그리고 뇌적출과 뇌이식, 자동운행 자동차등 이론상으로 가능할 것라는 과학적 상상이 그대로 재현된 시대이다. 가사로봇을 비롯한 로봇들이 인간들의 시중을 들고 정치적인 구조로도 국가라는 거대한 중앙 조직에 대한 집착이 흐릿해지면서 특별시 단위의 보다 낮은 단계로의 구성체가 대세로 받아지면서 이 시대는 그야말로 과학문명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작가들은 주인공 은석범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부딛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이 시대의 고민거리를 소설속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지금 연애계를 비롯한 일반대중에까지 널리 퍼져버린 성형수술의 붐을 생명연장이나 근력 강화등에 현혹되어 무분별하게 인간의 몸을 기계화로 대처하는 미래의 사이보그 집단과 다를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과학기술발달과 그로 인한 인간정체성의 정립 및 회의에 대한 고민거리를 독자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산업혁명을 거쳐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미래는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최첨단 총화를 보여 준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속에서 과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과 과학기술의 산물들과 인간의 관계 정립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문학이나 과학의 한 분야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SF소설이나 미래과학 상상소설이 짧은 라이프 사이클을 보인 것은 아마도 그것은 작가들 개인의 역량적인 한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게 인문학이나 문학쪽에서 교육을 받아왔던 환경들에 의해서 작가의 상상력은 그자체로 한계성을 갖게 마련일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점은 극히 개인적인 시각의 편차이고 모든 SF소설을 다아우르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하지만 <눈 먼 시계공>은 전문작가와 과학자의 공저로서 작가적인 섬세한 작품성과 과학자의 팩트가 한데 어울러져 정말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를 통해서 진화론적으로 상고했을때 학문의 종착점은 각분야의 학문들간의 지적인 통섭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지금의 사회는 각분야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풍토는 특히 우리에게 편협적인 시각과 더불어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학의 영역에서 과학을 보면 인간미 없고 딱딱한 사고의 집합체라고 보는 경향이 있고, 과학영역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눈은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도로 폄하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작품속에서도 과학발전과 생태보존이라는 두 집단의 끊임 없는 논쟁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편협한 시각과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학과 문학이 서로 통섭되었을 경우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훌륭한 답을 내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문학과 과학이 서로 만나 하나로 어울어 진다면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탄탄하면서도 섬세한 플롯과 더불어  과학적인 팩트가 뒷받침이 되어 펼처지는 내러티브는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게 하지 않는다. 마치 미래에 발생하게끔 예정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앞당겨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을 SF소설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현대처럼 아무런 의식없이 유행를 타고 있는 성형수술의 붐과 미디어천국을 방불케 하는 광고의 홍수 그리고 이를 정점으로 구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와 돈에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로봇에게 집착하는 모습들은 왠지 모르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진화론에 근거한 뇌과학분야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모티브는 이 소설이 막연한 상상력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반적인 SF소설이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인문학이나 과학이 다른 분야와 어우러지 못하고 한방향으로만 나아 간다면 미래는 분명 고통스러운 현실의 연장일 뿐임을 비단 소설속이지만 가슴에 와닿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차기 한국문학의 대표주자 김탁환과 과학의 미래인 정재승이 던지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화두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러한 발상을 계기로 문학과 과학의 두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분야가 상호간에 통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과 동시에 미래는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밝을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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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 화석연료에 중독된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
리처드 하인버그 지음, 송광섭.송기원 옮김 / 부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미래에서 온 편지>는 저자의 경력 뿐 아니라 번역자의 이력 또한 눈을 끄는 책이다. 토목공학도로서 건설, 토목현장의 일선에서 인간의 편안한 삶을 추구했던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분야의 전문가가 지구란 거대한 배에 흠집을 냈다는 참회의 심정으로 딸과 공동으로 번역한 환경 예측 보고서이자 지구와 인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기 반성이다. 옛 선현들의 말에 눈밭위를 걸을때는 항상 심사숙고를 하고 걸어라고 했다. 나의 발자취로 인해 뒤에 걸어 올 후대인들이 방향이 결정되기 쉽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런 행보를 하라는 뜻일 것이다. 바로 선현들이 이말이 가장 뼈저리고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가 다름아닌 지금의 시대일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이 탄생해서 45억년이라는 가히 카운팅하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렀고 그 와중에 지구상에는 수 없이 많은 생명체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지금 인류처럼 가장 단시간내에 출현해서 지구의 구석구석에 그 발자취를 남긴 종은 없다고 봐도 무관할 것이다. 긴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자연선택의 과정에 의해서 진화한다는 통설을 뒤집기라도 하듯이 인류는 단시간에 진화라는 역사를 새로쓸만큼 급진적으로 진화해왔다. 특히 맬서스가 우려했던 기하급수적 인구성장이 현실화 되고 산업혁명에 의한 일대 대폭발을 거치면서 그동안 진화라는 커다란 톱니바퀴에 그럭저럭 물려가던 방향성이 이제는 그 어떠한 규칙성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인구의 증가는 예전의 수렵,채집의 시대나 농경시대의 생산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식량의 확보는 다시 에너지원에 대한 무분별한 채취로 인해 환경 파괴라는 부메랑으로 다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달하였다. 화석연료의 대책 없는 소비는 한정적인 에너지원의 고갈 뿐 아니라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등 이제는 인간이 가장 맹신하고 자신있어 하는 과학기술로도 예측할 수 없는 극히 위험천만한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특히 저자는 2107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후대인이 보낸 편지를 통해서 통제되지 않는 자원의 무분별한 사용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는지를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다. 굳이 100년후를 예상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시간에도 전지구적으로 불길한 징후들은 수도 없이 감지되고 있다. 고생대 석탄기이후 매장되었던 검은황금 석유의 발견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상 가장 지불 댓가가 저렴한 에너지원을 물쓰듯이 사용하고 있고 석유정점이라는 각계각층의 경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 사용량을 줄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에게 안락한 삶을 가져다 주는 모든 하드웨어에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는 이제 인간의 생활과 결부지어서는 상상도 못할 존재가 되어버린 동시에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가져오는 폐단 역시 사용의 댓가 치고는 엄청나게 큰 비용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실은 이러한 깨달음이 지금 이전의 시대에서 부터 대두되었지만 각종 정치적인 논리로 발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저자는 지금의 위기를 화석연료가 대표한다는 생각자체에 대한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 문명의 모든 측면에서 그 한계와 종말적인 징후가 보이면서 더 심층적인 대안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인구의 증가, 환경서식처의 파괴, 지구온난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의 고갈등 제반 요소들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많이 퇴색하게 마련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의 시대가 모든 분야가 마치 씨줄과 날줄로 얽혀여 직조해낸 결과물이듯이 이에 대한 해법 역시 한가닥의 실타래만을 교체한다고 해서 풀어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염두해 두고 각 분야에서 상호유기적인 협력이 있어야만 그나마 사태 진전의 효과가 나올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선각자이자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먼저 생각하는 힘을 맹신했다. 항상 모든것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진일보한 발자국을 먼저 남김으로서 인간은 형이하학적인 면에서 지구상에 명멸했던 그 어떠한 종보다 장족을 발전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러한 믿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준 불의 효용과 가치는 불이 가져단 준 결과에 비해 과대포장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인 에페메테우스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지혜와 성찰이 지금의 시대엔 더 필요한 것이지 모른다. 이제 더이상 앞만보고 달려가는 기관차의 동력으로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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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의 진화 -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들려주는 성의 비밀 사이언스 마스터스 1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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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지구의 역사가 1만년 내외라고 믿는 창조론자들이나 적어도 45억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진화론자들이나 공통적으로 곡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지는 존재가치나 역활론에 대해서는 이구동성격으로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중에서 가장 고등한 생명체는 다름 아닌 우리들 인간 자신이고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떠한 생명체들과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신이라는 형이상학적존재를 제외한 형이하학적 존재중에서 가장 으뜸이 바로 신의 아들들인 인간이라는 믿음과 이에 반해 조금은 덜 하지만 인간은 비롯한 모든 생명체은 어느날 갑자기 뚝딱하고 생겨난 것이 아니고 가장 원시적인 세포에서 서서히 진화했다고 믿으면서도 유독 우리 인간의 진화는 여타의 생물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다는 은근한 자부심 아닌 자긍심을 가슴한켠에 남겨놓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예전의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만큼 위험하고 왜곡된 생각으로 종차별이라는 거대한 담론에서는 극히 잘못 인식되어 있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모든면에서 우리와 극히 진화나 유전적으로 가까운 영장류와도 확연히 구별되는 진화를 거쳐 지금의 현대인류에 이르렀고 다른 생명체와 다른 문화, 예술,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진화의 가장 최극점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바로 섹스에 관한 담론이다. 우리 인간은 섹스를 여타의 포유류들과 달리(가장 흔히 볼 수 있듯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아주 당당하게 짝짓기를 하는 개들을 찌푸린 시선을 바라본적이 한두번 쯤 있을 것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대게의 경우 배우자 내지는 고정적인 섹스 파트너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과 섹스라는 행위를 가지지는 않는다. 더욱 인간과 가장 닮은 영장류들과 확연하게 다른 점은 우리 인간은 섹스를 정해진 때(발정기나 번식기)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을때(물론 상대방과 합의하에)섹스를 한다. 또한 우리는 섹스를 번식의 대상을 떠나 즐거움 내지는 쾌락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도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라는 극히 제한적인 형태의 집단이 있지만 대게 보통은 일부일처제내지는 고정적인 섹스파트너와 그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이러한 생각은 거의 신앙의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과 비교해 보면(그 범위를 좀더 줄여 포유류 아니 영장류로 줄이더라도) 인간의 섹스는 다소 의외의 면들이 많이 있다. 물론 이점에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동물들과 다른 사고라는 힘이 섹스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통제 가능한 섹스가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진화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약간만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논리에는 허술한 점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수의 동물집단에서 인간처럼 섹스를 하는 개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인간처럼 일부일처라는 규칙성에 따르는 동물들도 있지만 동물계 전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규칙성은 극히 예외적이면서 왠지 불안정해 보일 정도이다. 그럼 인간의 섹스와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의 섹스중에 어느것이 정상적인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정상적이고 나머지는 수준 낮은 진화에 의거된 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섹스의 진화>에서 명백하게 그리고 다소 의기소침해지기 쉬운 주제이지만 저자 특유의 위트와 설명을 통해서 섹스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결론은 인간의 섹스가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고차원적이고 통제 가능한 인간만의 특유의 행위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섹스 역시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처럼 세월이 흐름과 처해진 환경속에서 철저하게 제거되면서 살아남은 진화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왜 일부일처제를 더 선호하고 자식을 남녀공동으로 양육하는지는 우리 인간이 수준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 그런것이 아니라 단지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여성의 패경에 대한 저자의 실랄한 논거는 상당히 수긍이 가는 진화론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섹스가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내지는 윤리적 가치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든 인간들에게 외치고 있다. 섹스는 그저 단순하게 진화의 산물일뿐이라고...

인류와 영장류의 공통조상에서 가지치기를 시작하였던 500만년전부터 꾸준하게 환경에 적응하면서 철저하게 자연선택의 논리에 의해 진화 되어온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마치 섹스에 대해서 고차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한다. 아니 그러고 싶을 것이다. 이점이 여타의 동물과 다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해야 그 우월성확보에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섹스만큼 유전자의 이기적인 선택에 의해 진화된 산물도 없을만큼 철저하게 유전자의 이해타산에 의해 자연선택된 일련의 행위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예술,언어,문화라는 얄팍한 덮개로 진화라는 거대한 현상을 덮길 바랄뿐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인류라는 종 역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처럼 진화라는 역사에서 특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특별하고 뛰어난 종이 아닌 지구라는 행성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진화의 일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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