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SF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은 그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이 마치 땅위에서 한 발자국 붕 떠있는 몽롱한 상황을 자아내게 하고 그러한 상황을 플롯의 기본 틀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왠지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러한 몽환적인 면과 '나'라는 자아와 동떨어진 느낌이 오히려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들은 읽을때는 마치 소설이라는 픽션을 마치 팩트로 받아 들이다가도 막상 책을 덮고 현실이라는 눈앞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허망해 질 뿐이다. 그동안 김탁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일반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는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 역사소설가(물론 작가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에는 분명하게 그리 비쳐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라는 공식이 들어 앉아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여타의 역사소설가와 다른점은 픽션과 팩트의 조화로운 설정을 통해서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내러티브를 제시함 으로서 역사소설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투철한 작업정신과 더불어 역사적인 치밀한 고증 즉 탄탄한 팩트가 결국 상상력 넘치는 픽션을 창조해 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인기 역사소설가가 <눈 먼 시계공>이라는 SF초현실 소설을 선보였다. 왠지 생뚱 맞다는 느낌마져 든다. 제목도 진화론의 전사를 자처하는 리처드 도키슨의 저작과 같을 뿐 아니라 그동안 그의 작품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장르라서 더욱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온다. 더욱이 문학작품을 공저로 출간한다는 점에서 한번 더 갸우뚱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형식적인 특이성도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묻어 있는 현시대의 문제점을 미래라는 시대적 배경에 투영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은 과거에서 준거를 마련했다면 이번 작품은 역으로 미래에서 그 준거를 제시함으로서 내용적인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이 형식적, 내용적인 면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보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작품이 흘러간 과거의 역사를 재현 했다면 이번 소설은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재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눈 먼 시계공>의 시대적 배경인 2049년은 로봇과 절대인간 그리고 사이보그(일부 신체를 기계로 대처한 인간)등 그리고 뇌적출과 뇌이식, 자동운행 자동차등 이론상으로 가능할 것라는 과학적 상상이 그대로 재현된 시대이다. 가사로봇을 비롯한 로봇들이 인간들의 시중을 들고 정치적인 구조로도 국가라는 거대한 중앙 조직에 대한 집착이 흐릿해지면서 특별시 단위의 보다 낮은 단계로의 구성체가 대세로 받아지면서 이 시대는 그야말로 과학문명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작가들은 주인공 은석범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부딛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이 시대의 고민거리를 소설속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지금 연애계를 비롯한 일반대중에까지 널리 퍼져버린 성형수술의 붐을 생명연장이나 근력 강화등에 현혹되어 무분별하게 인간의 몸을 기계화로 대처하는 미래의 사이보그 집단과 다를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과학기술발달과 그로 인한 인간정체성의 정립 및 회의에 대한 고민거리를 독자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산업혁명을 거쳐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미래는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최첨단 총화를 보여 준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속에서 과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과 과학기술의 산물들과 인간의 관계 정립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문학이나 과학의 한 분야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SF소설이나 미래과학 상상소설이 짧은 라이프 사이클을 보인 것은 아마도 그것은 작가들 개인의 역량적인 한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게 인문학이나 문학쪽에서 교육을 받아왔던 환경들에 의해서 작가의 상상력은 그자체로 한계성을 갖게 마련일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점은 극히 개인적인 시각의 편차이고 모든 SF소설을 다아우르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하지만 <눈 먼 시계공>은 전문작가와 과학자의 공저로서 작가적인 섬세한 작품성과 과학자의 팩트가 한데 어울러져 정말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를 통해서 진화론적으로 상고했을때 학문의 종착점은 각분야의 학문들간의 지적인 통섭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지금의 사회는 각분야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풍토는 특히 우리에게 편협적인 시각과 더불어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학의 영역에서 과학을 보면 인간미 없고 딱딱한 사고의 집합체라고 보는 경향이 있고, 과학영역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눈은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도로 폄하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작품속에서도 과학발전과 생태보존이라는 두 집단의 끊임 없는 논쟁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편협한 시각과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학과 문학이 서로 통섭되었을 경우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훌륭한 답을 내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문학과 과학이 서로 만나 하나로 어울어 진다면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탄탄하면서도 섬세한 플롯과 더불어 과학적인 팩트가 뒷받침이 되어 펼처지는 내러티브는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게 하지 않는다. 마치 미래에 발생하게끔 예정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앞당겨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을 SF소설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현대처럼 아무런 의식없이 유행를 타고 있는 성형수술의 붐과 미디어천국을 방불케 하는 광고의 홍수 그리고 이를 정점으로 구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와 돈에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로봇에게 집착하는 모습들은 왠지 모르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진화론에 근거한 뇌과학분야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모티브는 이 소설이 막연한 상상력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반적인 SF소설이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인문학이나 과학이 다른 분야와 어우러지 못하고 한방향으로만 나아 간다면 미래는 분명 고통스러운 현실의 연장일 뿐임을 비단 소설속이지만 가슴에 와닿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차기 한국문학의 대표주자 김탁환과 과학의 미래인 정재승이 던지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화두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러한 발상을 계기로 문학과 과학의 두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분야가 상호간에 통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과 동시에 미래는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밝을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