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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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이라는 자연 현상은 우리 인간들에겐 자연 현상을 넘어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눈을 살아 생전 직접 보지 못하는 적도지방의 사람이나 일년에 몇달을 제외하곤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에게나 눈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대기중의 수증기가 낮은 온도에서 얼어 강하 하는 현상이라는 극히 상식적인 내용으로 받아 들이지는 않는다. 이말은 눈에는 그 만큼 인간의 마음을 끄는 묘한 매력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일게다. 우리가 눈을 상상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하얗다, 순결, 희망, 따뜻함, 포근함, 사랑등의 극히 긍정적이고 푸근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하지만 눈을 자연 현상 그대로 보면 차가운 성질인데 우리는 이와 반대로 이런 눈을 따뜻하게 받아 들이는 특이한 자연선택과정 속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눈을 모티브로한 다양한 설화와 문학작품들에 우리는 익숙해 있고 이런 작품들로 인해 우리의 감정의 나날이 풍성해지고 눈과 귀는 그저 호강을 하고 있으며 눈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작품속에 반영할 경우 대게의 경우 적어도 실패는 보지 않는다는 안도감 마저도 가지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눈>도 바로 눈을 모티브로한 작품이다. 십중팔구 대게의 작품에서 보이듯이 눈 덮인 도시를 배경으로 우연치 않게 찾아 드는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슬픈 사랑 이야기(그리고 대부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남녀간의 끈끈하고 매혹스럽기까지한 우정 이야기, 한발 더 나아가면 각양각색의 등장인물들을 출연시켜 내러티브를 신파조로 끌고가는 스토리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고 설령 그러한 플롯이 사실이더라도 눈이라는 모티브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에 그렇게 심한 자책을 하지 않는다. 파묵의 <눈> 또한 이러한 떨쳐 버리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오게 된다. 무엇보다 제목이 <눈>이지 않는가?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눈>에 대해서 얼마나 독자들의 심정을 자극해 올까라는 기대를 갖기 마련이고 비록 앞에서 접한 그렇고 그런 내용일 것이라는 범주의 범위에 들어 오더라도 실망을 크게 하지 않는다. 말했듯이 그저 <눈>이라는 자체가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장에서 시작한 눈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나올 정도로 눈이 많이도 나온다. 아마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눈을 보게 되니 더 이상의 눈에 대한 부차스러운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이제까지 살펴 보았듯이 이렇듯 우리의 뇌리 속에 똬리 트고 있는 눈에 대한 관념과 그 배경들에 대해서 파묵은 이번 기회에 아주 작심을 한 듯 새로운 읽을 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터키 근현대화 과정에서 빚어 지는 정치적인 갈등, 신과 종교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 하면서 내면화 시키는 과정과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의 차이, 언론과 군부, 일반 민중들의 모순된 삶 그리고 파묵 자신도 거역할 수 없었던 사랑에 빠진 남녀 이야기들이 3일간 내리는 눈속에서 적절한 속도와 긴장감을 던져 주면서 내러티브 전체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파묵 자신의 화신인 카의 시를 플롯으로 작품 전체에 서사적인 느낌의 장엄함 마져도 보여주고 있다.

눈이라는 극히 개인적인 모티브를 다소 무거운 정치적인 모티브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분명 파묵만의 능력일 것이고 이로 인한 읽는 즐거움은 독자들만의 행복으로 다가 온다.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3일 천하로 이어지는 국지적인 쿠테타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우리의 이성,상상,기억은 눈의 육각형결정체 고스란히 묻혀 겹겹이 쌓이고 잊어지고 그러면서 다시 되살아나 영원히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처럼 내리는 눈속에 투영됨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즐겁고, 안타깝고, 내러티브속에 끼어 들어가고 싶어지면서도 한편으로 슬퍼진다. 터키 격동의 시기 정치종교적으로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파묵 자신을 대변하고 있는 주인공 카의 죽임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기억되고 싶지 않는 존재로 그러면서도 내리는 눈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은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묵은 <눈>을 우리의 이성,상상,기억의 저장 매체로 재탄생시켰다. 눈을 통해서 우리의 유치할 정도의 작은 이성,상상,기억들이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여있는 눈속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고 세월이 흐른뒤에도 이런 이성,상상,기억들은 대기가 순환 하듯이 항상 우리곁을 맴도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이번 작품 역시 읽는 즐거움과 동시에 생각해야하는 괴로움을 만끽하게 하는 파묵만의 작품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하는것 같다. 일상의 사랑에서 부터 정치, 종교, 혁명등의 무거운 소재에 이르기 까지 파묵만의 소소한 묘사는 한 없이 내리는 눈만큼 포근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면서 겹겹히 쌓여 잊혀지지 않은 추억으로 독자들에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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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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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대통령을 상징하는 아이콘 중에 바보, 바보 노무현이라는 것이 통용화 되고 있고 즐겨 회자 되고 있다. <바보>는 우리같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정해놓은 평균적인 지적능력에 약간 모자라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혹은 나보다 못하다고 단정 지우고 싶을 때 즐겨 사용한다. 그럼 한나라의 국가통수권자였던 대통령을 왜 우리는 바보라고 부르고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 분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정신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했고 철저하게 외면 당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의 눈에는 그저 바보스럽게만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들은 여러모로 주기만 하고 당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 그리고 똑똑한 우리는 그런 바보를 자기 위안이나 방패막이 정도로만 생각할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래서 바보는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세계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일 뿐이고 외로운 것이다.  

노전대통령의 서거 이후 그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부각 되면서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부터 미완성의 자서전등 그야말로 사회학 관련 출판업계에서는 속된 표현으로 대박이 났다. 노전대통령과 어떠한 연관이라도 있는 서적이면 단숨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면서 포스트노무현의 위력을 톡톡히 만끽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사태인가? 정작 생전에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했던 대상을 죽고 나니 바쁘게 상품화아닌 상품화하는 현실속에서 그야말로 자본주의시스템의 실상을 보는 듯 하여 가슴 한켠이 씁쓸할 뿐이다.  

그 동안 노전대통령과 관련해서 출판된 서적들의 트렌드는 평전, 유고 자서전, 생전인터뷰의 리뷰을 포함하여 다소 노무현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관점에 비중이 높았고 정작 그가 추구했던 사유적인 접근은 다소 빈약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 <10권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참여정부의 정책방향과 그 기조 그리고 밑바탕 속에 깔려 있었던 노대통령의 사유의 근간을 잠시라도 엿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좋은 작품 의도로 보여진다. 이미 알려졌듯이 노대통령만큼 책을 가까이한 국가통수권자도 드물다. 청와대 비서관 회의나 각료회의때 자신이 읽었던 책을 소개하고 일일이 참모들에게 책 선물하고 리뷰를 경청할 정도로 노대통령은 책은 단순한 독서의 대상이 아닌 본인 자신의 사유의 확장 및 정책의 밑거름 형태로 여겼다. 그래서 노대통령이 주목했고 탐독했던 책 속에서 우리는 그마나 그분 사유의 맥락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자신만의 패러다임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책을 선호하게 마련이지만 노대통령의 경우 참여정부을 실패한 정부라고 혹평을 한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활]을 참모진들과 열독하며 반면교사로서의 자신만의 사유의 확장을 해나가는 모습속에서 바보라는 아이콘에 대한 어렴풋한 진실을 알게 된다.  

생전에 노대통령이 탐독했던 10권의 책을 보면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다방면에서 걸쳐 현재 보다는 미래를 말하는 책들이다. 특히 진보의 미래에 대한 저자들 나름대로의 논거가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노대통령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당신 자신 사유의 확인 절차였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노대통령은 지금 형태의 권력에 대해서 회의를 가졌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시민권력을 염두해 두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퇴임 이후 소비자가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대변될 수 있는 형태의 권력창출에 집중할려고 하였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얄굳은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하지만 책에서 소개되고 전참모진들과 강연이라는 형태로 다가왔던 10권의 책에서 우리는 그분이 생각했고 염원했던 사유가 결코 바보스럽지 않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늘나라에서 당신은 만족하리라 여겨진다. 

바보에게는 현재가 하등의 문제가 없다. 왜 다들 바보라고 하는데 나서서 아니다고 해봐야 별다른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바보에게는 현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고 바보들은 미래에 매진한다. 그래서 똑똑한 우리는 바보들의 사유를 그저 바보스럽다고만 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를 상고해 보면 결국 시대의 리더는 똑똑한 우리 같은 바보가 아닌 사람은 될 수 가 없음을 수도 없이 확인 한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리더는 그래서 항상 바보일 뿐이다. 바보 노무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금 시점에서는 상당한 반향성을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아직까지도 우리사회는 이분법적이고 단순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자 한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래서 똑똑한 우리는 나 이외의 사람을 온통 바보로 보는 지도 모른다.  

▣ 이 책에 소개된 10권의 책은 진보, 보수, 중도등의 정치적인 스택트럼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가지치관 한번 쯤 비교 검정해 볼 필요가 있는 상당히 좋은 책들로 보여진다. 비단 다 읽어보질 못했지만 강사들의 서머리만을 통해서도 날을 잡고 한번쯤 일독해 보고 싶어지는 책들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지금 같은 가치관의 혼란시대에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세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도 남을 책들이다. 여기에 덤으로 이 책들을 통해서 노대통령의 사유에 조금이나마 공감을 가질 수 있다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임에는 틀림 없다. 유심히 책들의 저자를 보면 온통 바보들이다 우리도 이제는 바보들의 사유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한번쯤은 들여다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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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다스리는 사람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
함규정 지음 / 청림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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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을 말할때 십중팔구 빠트리지 않고 등장하는 메뉴가 바로 '이성'이라는 단골손님이다. 즉 동물에게는 눈을 씻고 찾을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이지적인 이성을 구비하고 있기에 인간은 여타의 생명체와는 그 격이 다르다고 하는 말을 정말 수도 없이 많이 들었고 또한 우리 인간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 이 말이 진리에 해당될까? 우리 인간은 정말 감정을 이성적으로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는 책은 감정을 어떻게 지배하는냐에 따라 우리가 타인에게 동종의 인간으로 비쳐지는냐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치부되는냐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볼 기회를 던져 주고 있다. 특히 직장인들에게 유효적절하게 와닿고 있다. 하지만 큰 범주에서 보면 비단 직장인 뿐이겠는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코칭이라고 보면 일견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성인이나 군자라고 표현한다 이말은 그 만큼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다는 말의 메타포적인 표현일 것이다. 왜 진화론적으로 우리는 영장류에 속에 있는 침펜지나 오랑우탄과 가까운 친척으로 아직까지도 유전자적인 기질에 의해 감정이 이성을 앞질러갈 수 밖에 없는 자연선택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감정을 이성의 하위개념을 생각한다면 감정의 다스림보다는 이성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여 비교우위를 가지는게 경제학적으로 타당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감정은 결코 그런 개념이 아니기에 더욱 더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필연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고대 인류가 태생해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타인에 대한 걱정이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현대사회에서 타인을 배제한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고도의 집적화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더욱더 감정에 대한 관심과 역활이 중요하게 다가오고 있다. 네트워크상에서 나의 감정으로 인한 여파는 이제 상대방 한 사람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일파만파식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더욱 더 자신의 감정표출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종착역은 '행복'이다. 그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감정의 표현, 조절을 슬기롭게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단재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역사는 나와 타인의 투쟁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인생이라는 것 역시 나와 타인의 적절한 투쟁에서 어떤 감정을 주고 어떤 감정을 받아야 하는 가에 대한 심오한 투쟁과정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감정의 표현과 그 절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설정에 대한 일종의 감정 다스리기 길라잡이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사람마다 처해진 환경과 성장배경등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Tip들은 우리가 사회생활를 영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좋은 것은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다스리면 가장 큰 소득이겠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 특히 부정적인 생각부터 지워버려야 한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에 공감이 간다. 행복은 나 스스로 행복한 감정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우선 자기 스스로부터 긍정적인 마인드의 표출이 필요할 것이다. 행복은 내가 추구하지 않으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타인과의 감정표출 역시 똑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성인군자처럼 완벽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모처럼 부담없이 읽은 책이다. 내용구성도 재미있고 실제생활과 연관되어 있어 더욱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이 가볍다는 말은 아니다.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그 끝이 없고 한없이 무거운 소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Key Point 형식으로 파트를 정리하여 무겁고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내용들을 적절하게 정리한 점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저자가 던져주는 Tip에 대해서 다는 아니더라도 한번쯤 실생활에서 적용해 보고 몸소 익혀본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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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세트 (양장) - 전3권 - 한정 양장본 열하일기 5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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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로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을 정사로 하는 사행단에 군관자제(개인수행원)자격으로 장장 5개월에 걸쳐 중원대륙을 다녀온 일정을 기록한 기행기이다. 당시 연암과 교류를 가졌던 일명 연암사단인 박제가, 홍대용등은 연암보다 먼저 청제국을 다녀온 상태에서 연암의 이번 기행은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오히려 연륜으로나 학문으로 정체성이 확립된 시점에서의 중국기행은 그의 안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 왔고 이런 기회를 연암은 열하일기라는 저작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후대에 우리에게 왜 연암을 조선최고의 문장가라 칭하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열하일기는 그 형식상은 기행문의 일종이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들은 가히 당시 조선을 경천지동하게 할 정도의 위력이 담겨져 있다. 오죽했으면 정조의 문체반정의 시범 케이스에 걸려 금서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책이 간행되기도 전에 여러 선비들의 입소문으로 필사본이 먼저 돌아다니게 되었다. 결국 열하일기는 연암의 살아 생전 빛을 보지 못하게 되고 하물며 그의 손자인 박규수가 영의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도 세인의 두려움으로 간행 되지 못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핵폭탄같은 위력을 담고 있는 저서이었다.
연암은 당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청나라에 대해서 오랑캐가 아닌 진정한 제국으로 인식했다. 열하일기가 당시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를 사용치 않고 청의 연호인 건륭을 사용하므로써 시작부터 직격탄을 받게 되지만 연암의 생각은 이들과 달리했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도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는 신념하에 여행을 하면서 청제국의 문물과 제도, 문화, 과학,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표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론격인 일신수필에서 언급한 수레제도, 벽돌제조과정, 난방방식, 말타기, 의복에 대한 그의 견해는 날까로운 눈썰미를 엿볼 수 있다. 사대부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선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연암의 노마디즘과 휴머니즘보다 더 강력하게 열하일기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철촌살인같은 그의 웃음 즉 유머러스하고 나이브한 철학이 담긴 위트일 것이다. 사행중 갑자스럽게 들런 상가집에서의 문상장면, 그리고 흉악하고 덩치큰 무뢰배를 만나 슬그머니 뒤걸음치는 장면, 가게점포의 현판을 곡해해서 생기는 해프닝, 한밤중에 고북구를 나오면서 성벽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쓰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술을 사용하는 장면, 정진사를 비롯한 사행단에게 중간 중간 날리는 맨트를 그야말로 왜 우리가 열하일기에 열광하는지는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다.

자칫 기행문이 백과사전 내지는 철학서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라도 하듯이 연암은 군데 군데 적절하게 이런 나이브한 웃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천하의 문장가인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이런 나이브한 웃음도 호질(범의 꾸중)에 이르면 씁슬한 맛을 느끼게 한다. 비록 중국 이야기라고 운을 떼지만 이는 필시 조선양반사회를 실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계급에 대한 비판은 비단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연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설을 쏟아내고 있다.
 
지구와 태양와 달에 대한 연암의 피력은 비록 그 자신은 친구인 홍대용의 의견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가히 혁명적인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아웃사이더인 곡정 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연암의 우주론은 지금의 우주론과 차이점이 없을 정도로 깊이있는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황교문답과 반선시말등을 통해서 당시 청황실의 라마교에 대한 숭배를 사행단이나 중국측 학자들의 생각보다 한발짝 더 나아간 의견을 보임으로써 연암 특유의 인식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연암은 라마교를 당시의 정세와 연결하여 청나라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의 융통성에 대해서 그만의 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기존의 중국의 기본방침이었던 이이제의방식이 아닌 사전포석방식으로 서반과 몽고등 외곽지역의 불안정한 정세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파악했던 것이다. 이민족 출신의 황제로서 누구보다 이민족의 강력한 힘을 알고 있는 건륭황제는 서반의 반선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서반을 끌어안고 또한 열하에 더위를 피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거동하면서 자신이 직접 몽고에게 강력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연암은 지적하고 있다.

연암은 이러한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조선이 먼저 파악해서 시의적절한 외교정책을 감행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제국은 이렇게 정책변화를 통해서 더욱더 강대한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숭명배청 사상에 물들어 있는 조선의 고루한 선비들의 작태가 그저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연암과 중국측 학자들과의 필담을 통해서 연암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연암은 곡정으로 대변되는 중국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확실한 주장도 언급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 또한 한글자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므로서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흐름을 바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주장에 반대의견이 있더라도 누락하지 않고 후에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케하는 배려야 말로 연암의 열린 정신을 보여주는 단례일 것이다.
 
▣ 정조가 침몰하는 조선이라는 배의 선장이었다면 연암은 알려지지 않는 조타수였다. 이는 물론 사견이지만 정조의 문체반정은 정조의 노론에 대한 히든카드였다. 정조는 문체반정의 시범케이스로 연암의 열하일기를 지목했고 열하일기는 그야말로 금서로 낙인 찍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금서지정이 오히려 세간의 불을 댕겨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르게 되면서 그동안 우물안의 개구리격이었던 조선선비들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일조를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마도 정조는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역으로 식자층의 허상을 깨는데 연암의 열하일기를 적극 활용했던 것은 아닐까.

분명히 열하일기는 당시에 불온한 서적이었다. 건륭이라는 연호를 버젓이 사용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무엇보다 열하일기의 내용자체가 쓰나미와 비견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 그자체였던 것이다. 왜 연암은 이렇듯 위험한 게임을 했을까 아마도 그 해답은 치서록에 담겨있는 밴댕이가 새우가 되고 새우가 가오리가 된다는 우스개 소리처럼 진실이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할려고 하는 것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연암에게 진실이나 진리는 고정화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그 과정을 찾아가는 길이 있을 뿐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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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 영광과 좌절이 교차한 공부 귀재들의 과거 시험과 출세 이야기
정구선 지음 / 팬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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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외무고시,행정고시 그리고 각종 고시라는 타이틀속에 지금 이 시각에도 신림동을 비롯한 대학가 주변에서 전용면적 10㎡미만의 고시원에서 불철주야 책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럼 왜 많은 시간적, 금전적 투자를 감행하면서 확률적으로 극히 낮은 게임에 도전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뻔하지 않을까 싶다. 고시합격이라는 OUT-PUT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메리트가 기회비용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고위직 공직생활의 기본전제이고 세상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고시합격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신분상승의 공식적인 창구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빗나간 생각에 반기를 드는 이들도 수 없이 많겠지만 굳이 이러한 반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나열치 않더라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소위 출셋길의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고시가 근대화의 산물이었을까?  

해답은 이미 고려시대 광종때 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과거제도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고시의 차이점은 아마도 근대적 패러다임의 영향으로 인해 응시자격의 정확하게 신분의 차별만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대동소이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지금 고시의 역사적 연원의 뿌리는 아주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 유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면에서 이번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는 과거제도 특히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을 통해서 바라본 일종의 문화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방에서 치루어지는 향시부터 시작해서 군주앞의 최종시험인 전시까지 조선의 과거는 지금의 고시와 비교하면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여정이었다. 그래서 과거급제는 개인의 출셋길을 넘어서 대대로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되었고 왠만한 양반가에서는 과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 생활 양식이 바뀔 정도였다. 개국의 이념이자 정권유지의 정신적 어젠더였던 성리학을 표방하는 조선에서도 과거의 급제를 위해선 민간신앙의 구복이나 이단시 되었던 불교의 귀의등 그 어떠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정도로 과거급제는 일생일대의 목표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과거에 급제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난제를 극복해야 하는데 하물며 과거급제의 꽃이라 불리우는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달콤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과거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의 최종목표였다. 그리고 장원급제를 위한 개인, 집안마다의 독특한 교수법까지 등장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을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 물신양명으로 노력을 했고 결국 태종은 조선시대 국왕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임금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반 사대부들은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조선에서 과거는 국시인 성리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관리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은 물론이거니와 개개인의 인격적인 판단까지 아울러 제단했던 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고시는 그저 성적의 상하로 합격기준이 나뉘어 지지만 과거제도는 성적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인재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출신자들의 고위직 진출이 월등히 많았으며 이들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동량이었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면 과거라는 제도는 조선이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적시스템의 최상에 위치한 보기드문 제도였다. 하지만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이러한 과거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대두되면서 과거제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인사적체가 만연되고 일부 가문의 세도 및 특정 당파의 독점으로 인해 순수한 과거선발제도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과거제도가 갖는 의미는 조선시대 그 어떠한 제도보다 많은 면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과거는 엘리트라고 지칭하는 사대부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사회전반에 미치는 여파가 컸다는 것이다. 현대처럼 직업의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조선시대 과거는 사대부로서 도가 아니면 모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시험이라는 제도는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감독을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부패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과거에서 부정을 하면 그에 대한 댓가는 참혹했다. 적어도 법규정에 의하면 과거라는 대안없이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전무한 사대부들에게 과거의 부정은 위험한 거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좀더 과거시험을 잘 보려고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고 이러한 부정들로 인해 조정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리시험이든지 답안지 맞바꾸기에서 부터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과거급해한 인물들이 속속 출현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급제를 하고 관직에 나가서도 처음 예상처럼 장미빛 인생만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정치적 선택, 가문의 힘, 개인의 영달등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급제자들의 인생항로가 순식간에 역전되는 경우가 역사에는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허와 실 그리고 과거시험에 새롭게 등장하는 부정 그리고 과거를 통해서 장차 관직생활을 했던 이들의 다양한 삶을 통해서 과거라는 제도가 조선 사대부들에게 미쳤던 영향을 사회문화적으로 접근하여 과거와 사대부들간의 역학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과거는 비단 서생들만 발탁하는 제도가 아니라 이미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당하관이하의 관리들도 응시할 수 있는 제도였다. 조선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인재등용의 POOL를 확대했고 이러한 바탕에서 과거제도는 인재산실의 요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에 기상천외한 부정적인 방법들이 동원되어 그 의미를 퇴색시켰으나 결과론적으로 과거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근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급제를 위해 온갖방법을 동원하는 그들의 모습과 급제 이후 삶을 통해서 과거의 정책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유익한 담론들이 한편으로 역사에 재미있게 다가가는 방편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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