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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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이라는 자연 현상은 우리 인간들에겐 자연 현상을 넘어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눈을 살아 생전 직접 보지 못하는 적도지방의 사람이나 일년에 몇달을 제외하곤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에게나 눈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대기중의 수증기가 낮은 온도에서 얼어 강하 하는 현상이라는 극히 상식적인 내용으로 받아 들이지는 않는다. 이말은 눈에는 그 만큼 인간의 마음을 끄는 묘한 매력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일게다. 우리가 눈을 상상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하얗다, 순결, 희망, 따뜻함, 포근함, 사랑등의 극히 긍정적이고 푸근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하지만 눈을 자연 현상 그대로 보면 차가운 성질인데 우리는 이와 반대로 이런 눈을 따뜻하게 받아 들이는 특이한 자연선택과정 속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눈을 모티브로한 다양한 설화와 문학작품들에 우리는 익숙해 있고 이런 작품들로 인해 우리의 감정의 나날이 풍성해지고 눈과 귀는 그저 호강을 하고 있으며 눈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작품속에 반영할 경우 대게의 경우 적어도 실패는 보지 않는다는 안도감 마저도 가지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눈>도 바로 눈을 모티브로한 작품이다. 십중팔구 대게의 작품에서 보이듯이 눈 덮인 도시를 배경으로 우연치 않게 찾아 드는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슬픈 사랑 이야기(그리고 대부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남녀간의 끈끈하고 매혹스럽기까지한 우정 이야기, 한발 더 나아가면 각양각색의 등장인물들을 출연시켜 내러티브를 신파조로 끌고가는 스토리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고 설령 그러한 플롯이 사실이더라도 눈이라는 모티브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에 그렇게 심한 자책을 하지 않는다. 파묵의 <눈> 또한 이러한 떨쳐 버리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오게 된다. 무엇보다 제목이 <눈>이지 않는가?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눈>에 대해서 얼마나 독자들의 심정을 자극해 올까라는 기대를 갖기 마련이고 비록 앞에서 접한 그렇고 그런 내용일 것이라는 범주의 범위에 들어 오더라도 실망을 크게 하지 않는다. 말했듯이 그저 <눈>이라는 자체가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장에서 시작한 눈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나올 정도로 눈이 많이도 나온다. 아마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눈을 보게 되니 더 이상의 눈에 대한 부차스러운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이제까지 살펴 보았듯이 이렇듯 우리의 뇌리 속에 똬리 트고 있는 눈에 대한 관념과 그 배경들에 대해서 파묵은 이번 기회에 아주 작심을 한 듯 새로운 읽을 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터키 근현대화 과정에서 빚어 지는 정치적인 갈등, 신과 종교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 하면서 내면화 시키는 과정과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의 차이, 언론과 군부, 일반 민중들의 모순된 삶 그리고 파묵 자신도 거역할 수 없었던 사랑에 빠진 남녀 이야기들이 3일간 내리는 눈속에서 적절한 속도와 긴장감을 던져 주면서 내러티브 전체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파묵 자신의 화신인 카의 시를 플롯으로 작품 전체에 서사적인 느낌의 장엄함 마져도 보여주고 있다.

눈이라는 극히 개인적인 모티브를 다소 무거운 정치적인 모티브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분명 파묵만의 능력일 것이고 이로 인한 읽는 즐거움은 독자들만의 행복으로 다가 온다.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3일 천하로 이어지는 국지적인 쿠테타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우리의 이성,상상,기억은 눈의 육각형결정체 고스란히 묻혀 겹겹이 쌓이고 잊어지고 그러면서 다시 되살아나 영원히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처럼 내리는 눈속에 투영됨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즐겁고, 안타깝고, 내러티브속에 끼어 들어가고 싶어지면서도 한편으로 슬퍼진다. 터키 격동의 시기 정치종교적으로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파묵 자신을 대변하고 있는 주인공 카의 죽임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기억되고 싶지 않는 존재로 그러면서도 내리는 눈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은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묵은 <눈>을 우리의 이성,상상,기억의 저장 매체로 재탄생시켰다. 눈을 통해서 우리의 유치할 정도의 작은 이성,상상,기억들이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여있는 눈속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고 세월이 흐른뒤에도 이런 이성,상상,기억들은 대기가 순환 하듯이 항상 우리곁을 맴도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이번 작품 역시 읽는 즐거움과 동시에 생각해야하는 괴로움을 만끽하게 하는 파묵만의 작품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하는것 같다. 일상의 사랑에서 부터 정치, 종교, 혁명등의 무거운 소재에 이르기 까지 파묵만의 소소한 묘사는 한 없이 내리는 눈만큼 포근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면서 겹겹히 쌓여 잊혀지지 않은 추억으로 독자들에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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