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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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허클베리 핀의 모험>등으로 우리에게 잘알려진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의 잡기를 한데 모은 책이다. 마크 트웨인이 일생을 살아오면 자신의 신변 이야기에서 부터 일상적인 예의 범절, 교육과 어린이들에 대한 도덕관, 패선 및 먹거리와 건강에 관한 생각들을 여과 없이 담고 있는 책이다. 세상의 빛을 본 내용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더 마크 트웨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출간을 위해 집필하는 책보다 이렇게 손질이 덜 된 내용들이 오히려 작가의 영혼을 파악하는데는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 번 책을 통해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마크 트웨인은 길다고 하면 긴 70여 평생을 유쾌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흔히들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에 대한 수 많은 멘토 내지는 의미를 부여하는게 우리 인간들의 흔하디 흔한 위안일 것이다. 또한 그런 의미 부여에 많은 실존적인 의미와 형식론적으로 고결한 미사여구를 찾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여 하기도 한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고 물론 스스로 그러고 싶지 않더라도 주위에서 가만 두질 않는게 이 세상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크 트웨인을 본다면 왠지 가볍고 장난끼 넘치는 해학작가 정도로 치부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그의 생을 점철한는 유쾌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벼움과는 상당한 이질감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는 또한 그러면서도 상쾌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장례식장에서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조언하는 부분은 한편으로 가볍게 웃어 넘기기엔 너무나 깊은 사유가 담겨져 있다.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을 어떻게 하는 것이 슬픔을 최대한 억누룰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집문앞에 붙여놓은 도둑에게 전하는 말은 마크 트웨인의 진정한 면을 엿볼 수 있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가져갈 수 있는 자신의 재산 목록을 초보인 도둑이라도 찾기 쉽게 세세히 나열해 놓고선 마지막엔 단한가지 부탁 나갈때 제발 문은 닫고 나가달라는 그 한마디에 들어왔던 도둑조차 웃고 나갈 여유가 묻어 있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삶은 이렇듯 긍정적인 사고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그의 어린들이에 대한 교육관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대위인을 빗대어 잘 나타내고 있다. 아이들에게 정형화되고 고정된 교육은 결국 올바른 교육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어린시절과 대비하여 말하고 있다. 흔히들 부보들은 위인들의 명언이나 행동거지를 자신의 아이들이 본받기를 바라며 정도로 나아가기를 바라지만 대게의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마음을 여지없이 실망시키게 한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어린애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그리고 극히 정상적이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이 처럼 마크 트웨인은 마냥 가볍고 단순한 유쾌함이 아니라 삶을 초월한 도가적인 유쾌함을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처럼 그리 복잡하지 않는 세대를 살았던 그였기에 가능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복잡할수록 단순해 지라는 말처럼 우리도 마크 트웨인의 유쾌한 삶을 한 번 따라가 볼 만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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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의 노래 - 상 - 김용상 역사소설
김용상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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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조의 항변 " 후대의 사가들이나 사람들이 우리 조선왕조의 역대왕 중에서 나를 가장 못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치와 외치에 실패했고 민생을 도탄의 길로 빠트렸고 하다못해 혈육인 아들과 손자 그리고 며느리까지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는 점을 들어 나를 가장 못난 군주라고 평하는 것을 모를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나로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숙부인 광해를 권자에서 끌어내리고 보위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대의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연산을 내치고 보위에 오르신 중종과는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분은 신하들에 의해 반강제로 보위에 오르셨지만 난 적극적으로 보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영창대군의 사사나 인목대비의 폐모는 단지 하나의 작은 구실에 불과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다름아닌 이나라 조선의 근간을 뒤흔든 오랑케 청국과의 외교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태조께서 조선을 창업하시면서 존명사대와 성리학을 조선의 근간으로 삼으셨고 그 전통은 유구히 흘러왔다. 지난 임진년 혈맹으로서 우리를 도운 명을 배신한다는 것은 조선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아들이자 세자인 소현과 강빈의 행동은 정말 적절치 못했다. 소현은 볼모시절부터 몸이 좋지못했다. 비록 독살설등이 나돌지만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 또한 봉림에게 보위를 잇기 위해선 나로선 태종의 심정으로 며느리를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봉림은 내가 겪은 수모를 털어낼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빈 강빈의 변 " 내 남편이자 세자이신 소현이 정상적으로 보위를 잇어다면 이나라 조선의 운명은 180도로 바뀌었을거라고 후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물론 긍정적인 발전쪽으로 변했을 것이다는 말이다. 이점만은 누구보다 내가 자신한다. 난 세자와 함께 저들이 적대시 하는 청나라에서 8년동안 볼모생활을 했다. 말이 볼모생활이지 일종의 분조역활을 했던 것이다. 시아버지를 비롯한 조정이 대신들은 그야말로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런 상태에세 나라경영은 파탄에 빠졌고 백성들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고 산지가 오래되었다. 손자병법에 나오듯이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유일하게 세자께서 그 점을 터득하고 청나라에 대한 연구를 하셨다. 비록 처음 세자께서도 꺼렸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이기도 하다. 세상은 도움도 안되는 한줌의 성리학이론에 좌지우지되는 시절이 지났다. 이제 국제적인 정세는 실리위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청나라가 있었다. 이런 점을 모르고 시아버지와 조정대신들은 죽어가는 자식 불알잡기식으로 명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이렇게 되지 않는게 이상할 것이다. 세자께서 비록 평소에 몸이 허약하긴 하였어도 그리 허망하게 가실줄은 몰랐다. 또한 원손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차남이 대군을 세자로 앉힌 처사는 정말 법도에도 어긋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나를 자신을 독살할려고 했다는 말도 안돼는 죄명으로 사사한것 자체도 넌센스이다. 아마도 시아버지는 강박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청에서 몇번 세자에게 보위를 양위해야 한다는 말이 그 자신을 그토록 매정한 사람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야박한 것은 바로 봉림의 행동이다. 내가 사사되고 난뒤 그의 행동은 마치 자신에게 용상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어찌 그리 매정하게 대할 수 있는가. 비록 세자와 정치적인 노선을 달리했더라도 혈육인 조카들을 죽음을 방관하고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권력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자의 죽음, 나의 아들들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몇일밤낮을 지새워도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후대에까지 독살설들의 소문이 가라앉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내가 여기서 가타부타할 수는 없다. 난 이나라 조선의 세자빈으로서 당당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었고 그렇게 했다. 누굴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 일가의 죽음으로 나의 조국인 조선이 반석에 올라가길 바랬을 뿐이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가정에 매달리게 된다. 왜? 그 만큼 안타까움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조선사을 통틀어 이러한 가정에 가장 오르내리는 인물이 정조와 소현세자일 것이다. <별궁의 노래>는 바로 그 중 한사람인 소현세자와 관련된 역사소설이다. 소현세자가 정상적으로 보위를 이었다면 조선은 분명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획기적인 변화는 없더라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일부 시각에서는 서인들이 대다수 집권하고 있는 정국에서 그 영향은 미비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절대적인 맹신에 충격을 주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별궁의 노래>는 이러한 조선의 격변기 시절에 몸소 볼모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은 소현세자의 입장인 아닌 세자빈인 강빈의 입장에서 풀어가는 소설이다. 바로 이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역사는 군주와 사대부중심의 역사이었기에 여성에 대한 역사적 배려나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태부족하다보니 수많은 억측을 낳게 마련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소설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 되어 있는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동안 소현세자나 인조등의 시각에 초점을 마추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과감히 여성인 강빈의 시작에서 그 시대상을 연출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또다른 특징은 강빈이 바라본 인조와 소현세자를 비롯한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을 묘사하는 부분이 실감나고 더 재미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여성이라는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이라 세밀하고 감정적인 표현들이 솔직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것 같다. 또한 당시 민초들의 삶과 청국에서 농업이나 무역에 관한 서술들이 흥미롭다.  

분명 이 작품은 팩션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하였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 되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서 역사적인 판단을 하겠다면 그 오산이다. 물론 독자들의 역사적인 판단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두에 인조와 강비의 인터뷰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정반합이라는 절차에 의거하여 흘러가는 것이다. 역사를 재단할 때 항상 균형이 시각을 잃어서는 올바른 역사판단은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감정적인 대응은 더욱더 금물일 것이다. 우리가 소현세자나 인조에 대한 그동안의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오류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감정적인 시각일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 소설의 말미에서 밣혔듯이 강빈은 조선의 세자빈이었고 그런 세자빈의 위치에서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우리의 감정적인 시각에 대한 반론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동안 인조나 소현세자 그리고 봉림대군(효종)에게 초점이 집중되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여성 강빈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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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고래바위 - 어른이 읽는 동화
이순원 지음, 홍원표 그림 / 굿북(GoodBook)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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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저자는 산꼭대기 위의 거대한 고래바위의 바다를 향한 기나긴(시간의 그림자)여정을 통해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당신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고...

왠지 바다를 생각하면 세상을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 그 푸르름에 한없이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바다는 한없이 자상한 어머니 같다가도 때론 엄격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른 아침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절로 흘릴 수 있는 것 역시 바다라는 거대한 안식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로부터 모든 생명체가 출발했듯이 모든 생명체의 삶의 종착역 역시 바다이다. 바다는 우리의 모든 기억과 경험을 태초부터 간직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참을 느끼는 것이다.

세상 어느 바위보다도 우람했던 고래바위에서 너럭바위로 뾰족바위 징검돌 빨래돌 조약돌 공깃돌 모래를 거쳐 티끌 만한 명개흙이 되어서야 바다에 이르는 여정은 공수래공수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모든 욕심과 탐욕을 한줌 티끌도 없이 훌훌 털어야만 해탈의 경지로 나아간다는, 지금 현재 우리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한때의 기억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겁의 시간을 지나서 결국 자연에서 태어난 것처럼 자연으로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고래바위가 말해주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형상은 없어질지 몰라도 삶에 대한 희망만큼은 내가 억지로 손에 잡고 있는 것을 하나 둘씩 놓을 때 마다 커져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고래바위였을 때는 몰랐던 바다(꿈과 희망)에 대한 동경이 점차 몸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그 크기에 반비례하여 바다에 대한 열망은 커져가는 것은 마치 우리가 삶을 살면서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과 불신이 높아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짧은 한편의 동화를 통해서 다시금 어릴적 꿈과 희망을 보게 되었다. 그토록 갈망하고 희망했던 어릴적 꿈은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고래바위에서 명개흙으로 줄어든 만큼이나 작아진 것이다. 내가 걸치고 있는 사회의 지위와 권력을 놓치지 않을려고 할수록 그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마치 고래바위가 명개흙이 되어서야 알았던 진정한 바다를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거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는 마치 모래시계에서 모래알이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꿈과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꿈과 희망마저 잃어버린 바위들은 지금도 산중턱에 그리고 개울가에서 마치 자신이 꿈과 희망의 바다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지금 현재에 우리 자신이 이룩한 부와 사회적 지위가 마치 꿈과 희망의 종착역에 온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은 아니 그렇게 믿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의 꿈과 희망이 과연 그토록 우리 자신이 갈망했던 진정한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동화가 인생의 무슨 허무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래바위가 명개흙이 되어서야 깨달았듯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그 꿈을 찾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우리에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꿈과 희망이 있다. 그 꿈과 희망을 고스란히 찾는 간직하는 방법을 고래바위는 그 길고 힘든 여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확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바다에게 말해보라 과연 바다는 어떠한 대답을 할까 아마도 모든 것을 털고 어릴적 모습 그대로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지 않을까,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깊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라는 꿈과 희망은 우리 자신이 순수한 모습을 다가가면 갈수록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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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 상인 김만덕
윤수민 지음 / 창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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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만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처음 접한 것은 KBS 한국사전을 통해서이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주목 받지 못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취지로 하고 있었기에 상당히 흥미롭게 시청한 기억이 난다. 제주의 중개상인 김응열의 딸로 태어나 집안의 몰락으로 기녀라는 신분으로 지내다가 상업에 눈을 뜨고 재물을 모으기 시작한 김만덕은 당시 제주와 본토를 비롯한 대기근의 시기에 사재를 털어 진휼한 의녀로서 지금까지도 제주에서는 상당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역사서적이나 프로그램은 이러한 김만덕의 생을 조선 최초의 여성 CEO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번 팩션은 김만덕의 생을 역사소설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그녀가 살았던 당시 제주에 대한 생활상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지금이야 제주가 일일생활권에 속해 있다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제주는 중앙정부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였고 물산이나 문화적인 면에서도 본토와 상당히 이질적인 곳이였다. 그래서 제주는 또 다른 조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척박한 땅에서 한때 기안에 적을 올린적인 있는 여성의 신분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그녀의 삶은 아마 제주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반문을 가지게 한다. 

특히 이번 소설을 통해서 제주 특유의 방언과 잠녀들의 삶 그리고 제주의 주거문화등 제주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한 기녀들의 삶을 세세히 알 수 있다는 보너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그동안 최명희의 혼불등에서 봐왔던 특유의 지방색 문화를 오랫만에 접하게 된 것 같다. 사실 지금의 시대에도 제주에 대해서는 관광이나 레저이외 다른 분야에 대해선 몰랐던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이 한권의 소설로 많은 부분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만덕이라는 여걸의 삶과 더불어 제주라는 지방의 지방색을 동시에 알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리속에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삶이 절로 그려진 것은 필자의 섬세한 묘사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제주의 지방방언이나 고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읽어나가는 속도감이 떨어 졌으나 한편으로는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미주나 낱말풀이를 찾아 읽어가면서 오히려 더 소설속의 현장을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역사가 말하는 김만덕는 분명 위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여성이었다는 점을 이 소설은 말해 주고 있다. 아마도 역사소설을 자주 찾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픽션화 하면서 그들의 삶을 공유해볼 기회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어떤것인가를 보여준 인물, 신분적 한계를 극복한 여성등의 거대한 담론에 앞서 그녀 역시 사랑과 좌절과 고뇌 속에 일생을 살다간 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알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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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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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는가?
이정표가 없는 거리, 이정표가 없는 지하철역 과연 어떤 세상일까 사람들은 제갈길을 찾지 못해 이쪽 저쪽을 왔다 갔다 할거이고 거리의 차량은 꼼짝하지 못하고 서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정표 없는 세상은 인간에게 또 다른 재앙으로 다가 올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이정표가 사라져 제각각 목적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것 이상의 의미이지 않을까?

우리는 산업혁명을 통해서 인류역사상 겪어 보지 못했던 부의 폭발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겪으면서 그야말로 부의 황금시대를 만끽하며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부의 혜택을 골고루 누리지 못하지만 그 옛날과 비교해 보면 평균이상으로 우리 인간의 생활은 살기 좋은 쪽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의 변천을 겪으면서 덩달아 우리의 물질적인 삷의 질도 대폭적으로 향상되었다. 이제 돈만 있으면 하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세계화에 힘입어 우리 삶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인 발전의 이면에는 인간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자본주의 병폐가 상존하고 있다. 일명 물질만능주의라고 하는 이 병은 어느날 갑자기 인간세계에 자리잡기 시작하여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암환자 처럼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정신을 야금야금 장악하고 있다. 누구나 이런 암적인 존재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그 어느 누구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물질만능 황금지상주의인 것이다.

<지하철역 이정표 도난사건>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소설이다. 이정표(理程標)란 무엇인가? 이정표는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지를 수월하게 안내하는 역활을 하는 것이 이정표이다. 이정표는 바로 인간이 올바른 길을 가기위해 고안한 장치중에 하나로 그 옛날부터 우리 인간들과 공존해 온 일종의 삶의 표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이정표 그것도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지하철역의 이정표 도난사건을 통해서 어느날 갑자기 도난 당한 이정표를 통해서 지금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처음 이정표가 사라지기 시작할때의 혼란과 의구심들이 서서히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음모와 타협하게 되고 그 음모를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모습에서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명암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도심지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자본주의 경쟁세계에서 철저하게 패배당한 노숙자들의 삶과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을 통해서 세상의 부와 권력을 쥐고 행사하는 거대자본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거대자본의 내막을 알면서도 거역하지 못하고 거대자본의 그늘속에서 안주 하려고 하는 대다수의 소시민들의 행동은 왠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꿈과 희망보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항변하고 있다. 바로 지하철역 이정표를 통해서 말이다. 지하철역 이정표는 작가에게 단순한 거리방향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이정표는 다름아닌 우리 가슴의 남아 있는 꿈과 희망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인 것이다.
어떤이는 출퇴근길에 어떤이는 여행 목적지를 위해서 이정표를 보고 출발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꿈과 희망이라는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대자본의 상징인 황금쥐는 이러한 이정표를 없애 자기만의 지하국가를 건설한다는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자본만이 진실이고 정의가 되는 그런 국가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황금쥐는 모든 사람의 지표인 이정표를 없애기로 하는 것이다. 처음엔 다소의 혼란과 반대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본의 단맛을 본 이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거대자본의 음모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장면은 다름아닌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 왔던 것이다. 그동안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수없이 많은 善과 진리가 자본속에 묻혀 버리고 매장당했으며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 우리모두는 외면했던 것이다.
자본의 길에 편승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꿈과 희망이 없다. 아니 그 꿈과 희망을 도난 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게 소소한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찾게 마련인데 우리는 이런 꿈과 희망을 찾질 않는다. 왜 물질적으로나 형태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지금당장 자본으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찾질 않고 그러한 꿈과 희망을 말하는 이들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실폐한 인생쯤으로 치부하는 지도 모른다.

꿈과 희망을 만들어 내는 발전소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들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꿈과 희망의 발전소
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 발전소로 가는 이정표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찾지 않는 것이다. 이 소설은 우화적이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 되어 있지만 소설을 통해서 꿈과 희망을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의 미래는 무엇이며 꿈과 희망으로 가는 이정표 없는 여정이 과연 어떤 삶인가를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언제가 우리의 꿈과 희망의 발전소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어 온 세상이 꿈과 희망으로 가득차  "다음역은 꿈과 희망으로 가는 역입니다" 라는 지하철 안내방송을 듣는 것을 소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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