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궁의 노래 - 상 - 김용상 역사소설
김용상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인조의 항변 " 후대의 사가들이나 사람들이 우리 조선왕조의 역대왕 중에서 나를 가장 못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치와 외치에 실패했고 민생을 도탄의 길로 빠트렸고 하다못해 혈육인 아들과 손자 그리고 며느리까지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는 점을 들어 나를 가장 못난 군주라고 평하는 것을 모를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나로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숙부인 광해를 권자에서 끌어내리고 보위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대의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연산을 내치고 보위에 오르신 중종과는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분은 신하들에 의해 반강제로 보위에 오르셨지만 난 적극적으로 보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영창대군의 사사나 인목대비의 폐모는 단지 하나의 작은 구실에 불과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다름아닌 이나라 조선의 근간을 뒤흔든 오랑케 청국과의 외교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태조께서 조선을 창업하시면서 존명사대와 성리학을 조선의 근간으로 삼으셨고 그 전통은 유구히 흘러왔다. 지난 임진년 혈맹으로서 우리를 도운 명을 배신한다는 것은 조선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아들이자 세자인 소현과 강빈의 행동은 정말 적절치 못했다. 소현은 볼모시절부터 몸이 좋지못했다. 비록 독살설등이 나돌지만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 또한 봉림에게 보위를 잇기 위해선 나로선 태종의 심정으로 며느리를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봉림은 내가 겪은 수모를 털어낼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빈 강빈의 변 " 내 남편이자 세자이신 소현이 정상적으로 보위를 잇어다면 이나라 조선의 운명은 180도로 바뀌었을거라고 후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물론 긍정적인 발전쪽으로 변했을 것이다는 말이다. 이점만은 누구보다 내가 자신한다. 난 세자와 함께 저들이 적대시 하는 청나라에서 8년동안 볼모생활을 했다. 말이 볼모생활이지 일종의 분조역활을 했던 것이다. 시아버지를 비롯한 조정이 대신들은 그야말로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런 상태에세 나라경영은 파탄에 빠졌고 백성들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고 산지가 오래되었다. 손자병법에 나오듯이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유일하게 세자께서 그 점을 터득하고 청나라에 대한 연구를 하셨다. 비록 처음 세자께서도 꺼렸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이기도 하다. 세상은 도움도 안되는 한줌의 성리학이론에 좌지우지되는 시절이 지났다. 이제 국제적인 정세는 실리위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청나라가 있었다. 이런 점을 모르고 시아버지와 조정대신들은 죽어가는 자식 불알잡기식으로 명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이렇게 되지 않는게 이상할 것이다. 세자께서 비록 평소에 몸이 허약하긴 하였어도 그리 허망하게 가실줄은 몰랐다. 또한 원손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차남이 대군을 세자로 앉힌 처사는 정말 법도에도 어긋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나를 자신을 독살할려고 했다는 말도 안돼는 죄명으로 사사한것 자체도 넌센스이다. 아마도 시아버지는 강박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청에서 몇번 세자에게 보위를 양위해야 한다는 말이 그 자신을 그토록 매정한 사람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야박한 것은 바로 봉림의 행동이다. 내가 사사되고 난뒤 그의 행동은 마치 자신에게 용상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어찌 그리 매정하게 대할 수 있는가. 비록 세자와 정치적인 노선을 달리했더라도 혈육인 조카들을 죽음을 방관하고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권력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자의 죽음, 나의 아들들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몇일밤낮을 지새워도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후대에까지 독살설들의 소문이 가라앉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내가 여기서 가타부타할 수는 없다. 난 이나라 조선의 세자빈으로서 당당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었고 그렇게 했다. 누굴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 일가의 죽음으로 나의 조국인 조선이 반석에 올라가길 바랬을 뿐이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가정에 매달리게 된다. 왜? 그 만큼 안타까움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조선사을 통틀어 이러한 가정에 가장 오르내리는 인물이 정조와 소현세자일 것이다. <별궁의 노래>는 바로 그 중 한사람인 소현세자와 관련된 역사소설이다. 소현세자가 정상적으로 보위를 이었다면 조선은 분명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획기적인 변화는 없더라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일부 시각에서는 서인들이 대다수 집권하고 있는 정국에서 그 영향은 미비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절대적인 맹신에 충격을 주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별궁의 노래>는 이러한 조선의 격변기 시절에 몸소 볼모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은 소현세자의 입장인 아닌 세자빈인 강빈의 입장에서 풀어가는 소설이다. 바로 이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역사는 군주와 사대부중심의 역사이었기에 여성에 대한 역사적 배려나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태부족하다보니 수많은 억측을 낳게 마련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소설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 되어 있는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동안 소현세자나 인조등의 시각에 초점을 마추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과감히 여성인 강빈의 시작에서 그 시대상을 연출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또다른 특징은 강빈이 바라본 인조와 소현세자를 비롯한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을 묘사하는 부분이 실감나고 더 재미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여성이라는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이라 세밀하고 감정적인 표현들이 솔직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것 같다. 또한 당시 민초들의 삶과 청국에서 농업이나 무역에 관한 서술들이 흥미롭다.  

분명 이 작품은 팩션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하였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 되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서 역사적인 판단을 하겠다면 그 오산이다. 물론 독자들의 역사적인 판단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두에 인조와 강비의 인터뷰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정반합이라는 절차에 의거하여 흘러가는 것이다. 역사를 재단할 때 항상 균형이 시각을 잃어서는 올바른 역사판단은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감정적인 대응은 더욱더 금물일 것이다. 우리가 소현세자나 인조에 대한 그동안의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오류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감정적인 시각일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 소설의 말미에서 밣혔듯이 강빈은 조선의 세자빈이었고 그런 세자빈의 위치에서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우리의 감정적인 시각에 대한 반론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동안 인조나 소현세자 그리고 봉림대군(효종)에게 초점이 집중되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여성 강빈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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