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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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달과 6펜스>로 잘알려진 영국작가 서머싯 몸의 또 다른 장편소설 <면도날>은 1918년 부터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시기를 살아간 미국출신의 젊은이들의 애환을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의 서두에 카파 우파니사드의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여려우니라 』라는 명구를 시작으로 이 소설의 성격을 마치 면도칼의 날까로운 칼날처럼 제단하면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작가 자신이 극중 화자로 등장하면서 자신이 겪게 되는 미국젊은이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이 찾는 진정한 실재와 진리는 무엇인가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래리의 삶을 미화하거나 절대로 우상시하는 것 역시 없다. 단순하게 서술하고 있다. 다만 주인공 래리의 삶을 통해서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와 인간성의 본질, 그리고 인간성 회복을 향한 순수한 젊은 청춘의 영혼을 마치 타인에게 그냥 전해들은 이야기처럼 전개하고 있지만 극중 주인공인 래리는 또다른 작가의 분신인양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비록 소설속에 화자로서 등장하지만 방관자적이고 관찰자적인 화자을 뛰어넘어 래리와 작가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세계1차대전이라는 화마속에서 공군으로 자원입대한 래리는 전쟁이 끝난후 시카고로 귀국하였지만 전쟁전의 그의 모습과는 사뭇다른 정체성을 띠게 된다. 삶과 죽음이 수시로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래리는 진정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고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찾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사랑과 안락함을 다 버리고 그가 찾아나서는 길은 마치 수도사들의 고행의 가시밭길을 연상케 하고 마침내 긴 세월 끝에 래리가 깨닫게 된 삶의 정체성은 세상밖이 아닌 세상속에서 자신을 찾는 길이 해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서 래리는 극히 평범하지만 쉽지만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소설을 통해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본격적인 자본주의시대의 서막을 올리게 되는 20세기초의 사회상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신생국 미국의 문화적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의 사교계를 선택하고 끊임없이 성공하기 위해 인생을 건 사교계의 풍운아 엘리엇, 래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속성을 너무나 잘알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 없는 자본주의를 가장 잘 알고 제대로 이용한 여인 이사벨등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현상을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후 갑자기 몰아닥친 자본의 물결속에서 개인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의 폭주처럼 번영의 끝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풍유로운 시대에 삶에 대한 근원과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고뇌하는 래리는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는 외톨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극중인물들이 래리의 행동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의 넘쳐나는 풍요속에서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지개를 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눈앞에 보이는 삶을 누리기에도 주어진 삶은 짧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세계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출간되었다. 전쟁의 틈바구니속에서 과연 인간성에 대한 본질이 무엇이며 실존적인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회의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고민하는 젊은층의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다루고 있지만 대공황 이후 또다시 찾아온 지금의 경제위기시대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살아 남기위해선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야 하는 적자생존의 시대에 과연 나 자신의 실재는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들에 대한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극중에서 이사벨이 말했듯이 래리가 추구했던 본질에 대한 문제는 그동안 인간이 살아오면서 수천년동안 고민했던 문제였고 그 해답은 없없다. 굳이 그 해답을 내가 찾아야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풍유로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게 돌아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수없이 하면서도 정작 면도칼의 날카로운 면을 자신에게 들이대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작가는 래리이외의 인물들에 대한 삶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극중 관찰자의 위치에서 그 결말 또한 아주 무덤덤하게 진술하고 있다. 세상속에서 삶의 실존을 찾아나서는 래리, 비록 대공황으로 인해 파산을 맞지만 다시 재기하여 그들만의 세상으로 다시 재기하는 이사벨과 그레이, 양단의 고뇌를 죽음으로 결정한 소피는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삶이 틀리고 맞고는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어 있다. 그 판단은 독자 개인의 몫인 것이다. 이러면에서 보면 여타의 소설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권선징악이나 해피앤딩(물론 등장인물들 각자의 삶은 해피앤딩으로 끝나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그들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한줌의 안타까움의 묘사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만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 그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또다른 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찌보면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위를 아슬하게 걷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한발짝만 다른 생각만해도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는 그런 세상속을 살아가고 있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은 남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벼린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날카로운 날이 무뎌지는 날은 언제쯤 오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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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1
생 텍쥐페리 지음, 김민지 그림 / 인디고(글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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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라는 한창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삶을 마감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마치 필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물음표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왕자는 세대를 뛰어넘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어린나이에 읽으면 꿈과 희망을 볼 수 있는 책이고 나이가 들어 다시 이 책을 읽게 되면 지난온 세월에 대한 상념과 일종의 부끄러움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가슴속의 희망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마치 그동안 잊고 살아온 진정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어린왕자를 통해서 되돌아보게 하고 왠지 모를 끝없는 심연으로 끌어가게 한다. 

어린왕자는 자본주의와 근대화라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이 세속화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필자 자신 또한 그런 세태를 거역할 수 없는 엄청난 장애속에서 끊없이 방황하고 고뇌하고 그리워하고 희망했던 자신의 삶이었을 것이다. 어린왕자를 통해서 생텍쥐페리는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변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끈을 잡듯이 영혼의 순수성을 말하고 있다. 소행성에서 지구로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왕, 허영심으로 가득한 남자, 술꾼, 사업가, 가로등 켜는 사람, 지리학자를 통해서 세상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권력, 허망, 자기학대, 돈등으로 정의되고 그리고 이 모든것이 마치 진리인양 이것을 향해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전한다. 여행의 종착점인 지구라는 별은 그동안 어린왕자가 만났던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모두보다 더 많은 모순덩어리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모순덩어리 세상에서 작은 아주 작은 희망을 남겨두고 있다. 단지 그 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면서 모자로만 보이는 지금의 시선이 잃어버렸거나 잊혀져버린 순수함의 동경 내지는 그리움일 것이다. 어린왕자는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그 내용은 더 철학적인 의미로 다가오는것 같다.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과 다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 그리고 과연 돌아갈 수는 있는가 하는 상념들이 머리속을 맴돈다. 꿈과 희망을 각양각색의 사유로 포장해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그 색깔이 무엇인가를 제시해주고 있다. 

길들인다라는 것은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라는 말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꿈과 희망에 대한 관계정립일 것이다. 자신의 꿈과 희망에 길들려지고 관계화 된 자신을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이러한 꿈과 희망에 길들려진다는것 자체가 바로 꿈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 아닌겠는가? 수없이 많은 현상과 사람들에게 우리는 길들려져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꿈과 희망에 길들려있다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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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 6 (반양장)
리선샹 지음, 하진이 옮김 / 휘닉스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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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누구도 상상치 못한 대반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과부의 개가, 봉건제의 기반인 토지의 개혁과 조세의 개혁, 자국민의 굶주림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구천은 와신상담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 주기 시작한다. 단지 장작더미위에서 자면서 쓸개의 쓴맛을 보는 것이 와신상담이 아니라 진정한 와신상담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구천은 월나라와 자신이 처한 현실부터 인정하고 서서히 하지만 빈틈 없이 복수의 칼날을 갈아가기 시작한다. 범려를 통한 오충군(오나라에 충성하는 군대)을 통해 병사들의 현장경험을 높이고 오나라 부차에게 철저히 굴복하면서 내실을 다져 나가게 된다. 부차는 결국 만고의 충신인 오자서를 제거하고 북벌을 감행하지만 결국 구천과 범려가 쳐 놓은 덫속으로 깊숙이 깊숙히 들어오게 된다.  

춘추오패의 구천은 와신상담을 딛고서 결국 오나라를 멸하고 패업을 달성하게 되고 범려는 과업이 달성된 때에 자신의 사랑 서시를 찾아서 모든것을 훌훌 떨치고서 떠난다. 춘추말기는 이렇게 구천에 의해서 평정된다.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월나라의 구천의 이야기는 대략 20여년 정도의 세월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정사에 의하면 구천의 와신상담보다는 부차의 패악으로 인해 자멸하는 쪽에 무게 중심이 두고 있다. 특히 서시라는 미인계에 의해 오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사관들은 평가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본 소설에서는 서시의 역활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구천이 겪었던 좌절과 패배 그리고 그 패배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주로 그리고 있다. 와신상담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합려를 춘추오패라는 반열에 올려놓은 오자서, 그리고 향후 책사들의 바이블이 된 범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좌절과 패배를 자신의 숭고한 이상으로 승화시킨 구천이 주인공인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지 구천을 통해서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소설은 드라마로 방영되다 보니 돋보이는 점은 마치 드라마의 한 컷을 보는 듯한 소설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삼국지나 초한지를 접한 독자들이 느끼듯이 만연체를 동반한 다소 긴 문장에 지루함을 느꼈겠지만 이 소설은 정말 깔끔하다. 그래서 읽어나가는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내용이 부실하거나 작가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성이 더 소설속으로 빠져 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또한 우리가 삼국지나 초한지를 읽으면서 느끼듯이 중국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일종의 대범함과 관용에 대한 포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마지막 장면인 구천과 부차가 마차를 같이 타면서 나누는 대화는 그 어떠한 면보다 중국만의 관용과 웅대함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드라마를 다시 본다면 그 재미가 한 층 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춘추시대는 구천이나 부차처럼 그나마 대의라는 개념이 살아 있었던 시대였다. 오월 춘추를 지나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중국땅은 난장판이 된다. 주왕실에 대한 대의라는 개념는 살아지고 약육강식의 그저 먹고 먹히는 시대로 접어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마지막 남은 중국만의 자존심을 구천에게서 발견했던 것 같다. 비록 패자로 그려지지만 부차의 담대함 역시 대단하다. 또한 부차와 범려로 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는 서시 또한 그 어떤 여인보다 행복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와신상담, 토사구팽, 어복장검등의 고사성어로만 우리에게 다가 왔던 오월춘추시대 이렇게 소설로 만나는 오월춘추시대는 또다른 재미를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진정한 좌절과 패배의 맛을 느끼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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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 5 (반양장)
리선샹 지음, 하진이 옮김 / 휘닉스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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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전투의 패배로 인한 구천의 험난한 여정은 그야 말로 좌절과 패배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오나라 상국 오자서의 두차례에 걸친 살인계획을 무사히 벗어나지만 이런 외부적인 좌절의 맛 보다 구천 자신 스스로의 좌절의 진정한 맛은 아직 느끼게 하지 못한다. 월나라는 문종을 위시로한 구천 탈출 계획의 하나로 서시와 정단을 비롯한 미인계를 실행하게 되고 문종과 범려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나타내게 한다. 구천은 결국 우여곡절 끝에 꿈에도 그리는 고향 월나라로 이송된다. 3년여의 오나라 죄인생활을 청산하고 부차의 배려로 다시 월나라 왕으로 돌아오게 된다.  

작가는 구천의 월나라 귀향으로 그동안의 좌절과 패배를 어느 정도 종식 시키고 이제 서서히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하는 독자들의 상상력에 찬물을 뿌린다. 진정한 좌절과 패배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구천이 오나라에서 노부생활을 하면서 부차의 강압과 협박 그리고 오자서의 살인계획을 넘기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점은 결국 구천 스스로 좌절과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게의 경우 이러한 구천의 불굴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겠지만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좌절과 패배는 자신 스스로 느껴야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는 듯이 구천으로 하여금 결국에는 상분(변의 맛을 보아 건강 상태를 파악하게 하는 행위)을 통하여 정말 좌절의 참 맛을 구천이 느끼게 하고 있다. 구천은 상분을 통하여 굴욕감 보다는 좌절이라는 현실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과 조국 월나라 그리고 자신을 지켜주면서 따르던 왕비와 신화들 때문이라도 꺽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구천이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그져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이 아닌 철저히 망가지는 모습이다. 부차를 비롯한 오나라 대신들 마져 놀랄정도로 구천은 스스로를 낮추고 자학한다. 구천은 그동안의 좌절과 패배는 진정한 것이 아니기라도 하듯이 철저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패배와 좌절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은 그져 허울좋은 자기 합리화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보통의 경우 좌절과 패배라는 쓴맛을 보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성을 하고 심기일전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자기 합리화의 과정일 뿐이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한번 혹은 더 크게 좌절과 패배를 당하게 된다.  

작가는 구천을 통해 좌절과 패배를 음미하는 절대 기준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철저하게 패배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구천을 통한 좌절과 패배의 참 맛은 이러한 현실을 통한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형식상의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가 아니라 이보 후퇴가 없이는 절대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또한 작가는 그동안 구천의 좌절과 패배를 정치적이고 남성중심적으로 전개했던 방식에서 영웅의 심리적 요소을 뛰어넘어 평범한 일개 필부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준다. 선왕의 후궁인 당려의 사랑을 보면서 자신속에 숨겨져 있었던 평범한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패권을 향한 대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심성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구천은 대전이 아닌 마구간에서 침식을 하면서 서서히 복수의 칼날을 세운다. 하지만 구천의 복수가 부차와 오나라를 향한 복수가 아닌 구천 자신의 좌절과 패배에 대한 복수인 것이다. 마치 자신을 정복하지 않고선 그 어떠한 것도 정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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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 4 (반양장)
리선샹 지음, 하진이 옮김 / 휘닉스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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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전투에서 대패한 구천은 자신의 왕비와 범려를 포함한 신하들과 함께 악명 높은 오나라의 고소대의 대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오자서는 여전히 구천을 살려두는 부차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구천 살인계획을 은밀히 진행하지만 실패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오자서는 여전히 구천을 죽인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구천은 부차의 굴욕을 거부하고 버틴다. 한편 범려는 제신들의 의혹을 눈길에게 불구하고 구천을 살릴 방법을 왕비 아어와 의논하여 부차의 북진정책 야욕에 불을 당긴다.    


구천이라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좌절과 패배를 쓴맛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첫번째 기정 사실화 되었던 왕위 계승에서 쓴잔을 마시고 취리전투로 화려하게 개선하지만 다시 초산에서의 패배와 영원한 맞수 부차에게 노비로 끌려오면서 구천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오나라 고소대의 대 감옥에서의 좌절은 전쟁의 패배보다 더 한 굴욕감을 가져온다. 작가는 진정한 좌절과 패배가 무엇인가를 구천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전쟁의 패배보다 더 가슴아픈 좌절은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거나 굴욕을 당하는 것을 묵묵히 바라만 봐야 하는 심정만큼 큰 좌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천의 눈앞에서 하나씩 죽어나가는 그 죽음 또한 너무나 잔인하게 죽어 나가는 제신들을 보면서 좌절의 참 맛을 음미하게 한다. 더구나 왕비인 아어의 몸을 받친 헌신은 구천으로 하여금 더이상의 굴욕과 좌절은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구천이 누구인가? 춘추시대를 풍미한 오패중의 영웅이 아니던가, 작가는 진정한 와신상담의 참 맛을 느끼게 하면서 또한 구천으로 부터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아내가 몸까지 받치면서 자신을 살려내려는 의도를 진정으로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좌절과 패배를 아는 자만이 삶의 고단함과 삶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음을 작가는 구천의 고난을 통해서 말해 주고 있다.  

구천의 오른팔인 범려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특이한 인물로 등장한다. 초나라 출신으로 월나라 구천에 등용되어 취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만 부차에 패배하여 구천과 함께 오나라 노부의 신세가 된다. 이후 구천과 함께 월나라로 돌아와 서시를 통한 미인계로 월나라를 멸망 시키지만 결국 그는 구천의 곁을 떠난다. 박수칠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이 그나 월나라를 떠나면서 그의 지기 문종에게 했던 유명한 고사가 바로 토사구팽이다. 범려는 구천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떠났고 토사구팽을 피했다. 그리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서는 상업에 종사하여 거부가 된다. 화식열전을 보면 범려는 그 당시 유통,물류경제를 정확히 파악했던 것 같다. 유통을 통해서 거대한 부를 축척했지만 범려는 그 부를 만인들에게 나누어 준 범상치 않는 인물이다. 또한 중국 4대미인으로 알려진 서시와의 러브 스토리 또한 두고 두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작가는 구천의 좌절과 패배를 현실화 시키는데 범려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추상적인 좌절의 개념이 아닌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좌절의 맛을 범려의 애리한 현실판단으로 구천에게 각인 시키고 있다. 구천의 좌절과 패배는 끝은 아직까지 보이질 않고 그 고단한 여정은 계속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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