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보이는 어둠>은 우울증에 대한 저자 자신의 경험적 보고서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겪게 된 삶의 마비와 그로부터 탈피하기까지의 과정을 엮고 있다. 스타이런이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심각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시노 델 듀카상을 수상하기 위해 파리에 체류하게 된 시점부터다.

스타이런은 시상식 행사의 일부인 오찬 약속을 까맣게 잊고 프랑수아즈 갈리마르와 점심 약속을 하는가 하면 방송사가 주최한 피카소 박물관 견학 일정도 망각해버리고 만다. 우울증은 비단 감정의 하강뿐만이 아니라 평면적 일상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우둔한 이성이든 냉철한 이성이든 관여하지 않고 끔찍한 균열을 일으키며 자기 혐오를 거쳐 자기 파괴의 욕망에까지 시달리게 하는 것이다.

스타이런은 까뮈와 로맹가리, 무정부주의자인 애비 호프먼 등의 우울증에 관련한 죽음에 대해 언급하며 분노한다. 타인에 의해 그들의 자살은 혐오스런 범죄로 왜곡되기 일쑤이고 비통해하기 보다는 치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나의 사촌 언니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우울증의 희생자가 되었다. 형부의 불륜으로부터 비롯된 우울증은 결국 그녀의 목을 매달았다. 그녀의 자살은 가족들을 슬픔과 비통함 대신에 수치심과 몰이해, 혐오감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위로받지 못했다. 모두들 쉬쉬했다. 측근의 자살을 문학적 치기에 덧칠하려 했던 나란 인간을 빼고는 말이다.

우울증은 스타이런의 육체에 경련을 일으키고 마비를 가져왔으며 격렬한 고통에 시달리게 했다. 불면이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극도로 예민하거나 정 반대 극도로 무감하고 무기력한 시간들이 지속되었다. 결국 자신에 의해 자신이 살해될 운명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를 자처한다.

기이하게도 자물쇠로 잠긴 철망을 친 방과 음산한 복도가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두뇌에 끊임없이 몰아치던 돌풍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휴식처로 찾아들어온 곳이 떠나온 세계보다 좀더 친절하고 부드럽게 미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엄살을 떨지만 결국 그곳에서 그는 갱생하게 된 것이다.

스타이런은 말한다. 우울증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우울증의 의미는 이 세계의 모든 악의 모사품처럼 느껴진다. 일상생활에서의 불협화음, 혼란, 불합리, 전쟁, 범죄, 고문, 폭력, 죽음을 지향하는 충동과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등 견딜 수 없는 역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라고. 끔찍하지 않은가?

우울증은 자칫 배 부른 사람들의 호사품이나 전유물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암이나 에이즈, 사스 같은 병들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왜 우울증은 한겨울 윗목 신세인 것일까? 우울증을 고양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료한 자의 사치쯤으로나 간주되는 우울증을 지리멸렬 읊조릴 용기가 누구에겐들 있을까. 나 혼자 그러안고 감당해야 하는 데서 오는 추락의 깊이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게걸스러운 기대를 가졌던 만큼 실망도 크다. 오히려 우울증에 대한 공포심만 자극한 격이랄까.

상실감이 우울증을 심화시킨다. 왼쪽 귀에서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가끔 근육이 경직된다. 틱 장애도 아닌데 눈꺼풀이 파들거리는 때가 왕왕 있다. 나 같은 음지식물을 누가 좋아할 것인가, 라는 자기혐오는 말할 나위도 없다. 떠남과 내침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다. 핸들을 틀어버리고 싶다는 파괴의 욕망도 두렵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들뜸도 이 즈음에선 겁이 난다. 우울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 이 지독한 상실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