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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평평하다. 밤이 나를 어지럽히는 일은 좀체로 없다. 깨고 나면 잊히는 꿈들도 이제는 수월하다. 먼 곳의 애인이 아들 얻었다는 소식을 재떨이에 뱉으며 일을 나가고 석류처럼 떫은 그리움을 등에 지고 귀가한다. 돈통 속의 누런 동전들이 십 년 동안 쌓이면 약속도 황달 앓는 낯빛이 될 터이지. 그러나 나의 허무는 그리 단단하지 않았으므로 봄밤의 환한 배꽃이며 나를 조롱하며 날아오르던 자목련이며 오래 걷던 길이며 알몸으로 서늘하던 기다림들이 시처럼 아프다. 일상에 잠식 당한 대가는 비구니 같은 표정으로 세상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일이다.
한 남자가 행방불명된다. 실종된 지 7년이 지나자 남자는 사망으로 인정되지만 그는 砂丘에 갇혀 오늘과 내일의 유기적 관계를 상실한 채 맥락없는 삶을 살고 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모래에 시달려 썩어가는 나무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집, 퍼나르기를 멈추면 금세 모래사태에 쓸려 묻히고 마는 집, 모래 구덩이의 을씨년스러움에 감금 당한 남자는 모래를 팔아 연명하는 부락 주민에 의해 강제 부역을 떠맡는다.
모래 속의 여자는 남자에게 유곽 같은 존재다. 여자는 유폐에서 오는 외로움을 녹여주는 대가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욕과 폭력을 묵묵히 받아낸다. 하지만 여자 또한 곤충 채집을 원했을 뿐인 남자에게 행사되는, 도발적이고 야만적인 횡포와 무관하지 않다. 모래와 부락은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유기체다. 그 둘은 교묘히 연동하며 자신들을 버린 세상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낸다. 남자의 존재는 원죄의 원형이다. 존재 자체가 죄가 되고 형벌의 대상이 된다. 탈출과 좌절, 복종과 반목이 뒤범범돼 읽는 내내 모래 더미에 갇힌 듯 텁텁하고 끈적하다. 여자는 자궁 외 임신으로 모래 구덩이에 내려진 로프에 묶여 올려지고, 여자를 끌어올린 로프는 여전히 사다리에 매달린 채이지만 소설은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남자의 독백으로 막을 내린다.
여행은 돌아옴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늘 일탈을 꿈꾸지만 일탈을 잉태하는 것은 내가 서 있는 일상의 자리이다. 하나가 소멸하면 또 다른 하나도 숨을 죽이고 마는, 안은 밖이 되고 밖은 안이 되어버리는 뫼비우스의 띠가 차지한 공간, 그곳에서 나는 오늘도 숨 가쁘다.
아베 코보는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리는 실존주의 작가이며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세계 10대 문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를 보는 세간의 시선이 어떠하든, 그의 행보가 어떠했든지 간에 <모래의 여자>는 매혹적이다. 마치 Radio Head의 노래를 듣는 듯 朦染하고 스산하다. 터지지 않아 답답한 울음처럼, 공증받지 못해 허름한 약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