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모의 조카 ㅣ 프랑스 현대문학선
드니 디드로 지음, 황현산 옮김 / 세계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밖을 보니 환상적으로 눈님이 나리시기에 아흐 탄성을 지르는 찰나, Where is the love~ 핸드폰이 울어댄다. 당신이 누구든! 내 당신에게 백 년 동안의 키스를 보내오, 자못 정열적인 어투로 손짓, 허리짓, 발짓, 쌩쑈를 해가며 전화를 받았으나 통재라, 코끝 앙 깨물어줘도 시원찮은 애인도 아니고 내 살처럼 익숙한 친구도 아니고 느끼하지만 그닥 싫지 않은 호의 보이는 뭇사내도 아닌! 일터의 대빵님이시다. 침 꿀꺽 삼키며 pay 올려준다는 얘기면 참아야지, 여차지저차해서 오늘 농땡이다 하면 참아야지, 했지만 눈도 오는데 늦지 않으려면 다른 날보다 일찍 나서야 할 거라는, 친절한 코멘트를 휘날리신다. 죄길, 그럼 그렇지. 어떻게 내 주위의 인간들은 감성이라고는 뙤약볕에 나뒹구는 개똥보다도 팍팍하고 말라 비틀어진 북어 대가리보다 볼품없고 만성 변비 환자처럼 누르퇴퇴하단 말이냐. ‘눈이여요, 그대. 하늘에서 무수히 그대가 나려요.’ 어찌하여 이런 문자 하나 날리지 못하는 것이냐 말이다! 내가 봐도 좀 닭살스럽긴 하다만.
이리 쓰잘데기 없는 썰을 풀며 변방을 도는 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읽었는지 아닌지 기억조차 못하는 내게 독후감 쓰기는 지푸라기이자 마지막 보루인 셈인데, 대체 이런 류의 소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도통 모르겠다. 굳은 머리에 기름칠 해가며 열심히 읽긴 읽었다만 사실 뭔 말인지 헤아리는 것도 수월찮다. 내가 얀세니즘을 아나,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가 어쩌고 하는 계몽철학을 아나, 유물론을 아나, 그렇다고 혁명 이전의 프랑스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기를 하나, 책을 읽은 건지 글자 공부를 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은 당시 프랑스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대해 일자무식의 문외한이 읽기엔 버겁고 또 버거운 책이라는 것이다. 하여 난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행히 역자인 황현산 교수가 무지막지한 책임의식을 갖고 방대한 자료와 빛나는 석학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무수한 주석을 달아놓기는 했지만 본문 읽으랴 주석 읽으랴 그 또한 중노동이었음에랴. 또한 역자의 해설로 말하자면 넘어서야 할 또 다른 텍스트일 뿐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내 정신은 일개 미립자 보다도 불완전하다).
이것은 1인칭 화자인 ‘나(철학자 디드로)’ 와 건달인 ‘그(음악가인 장 필립 라모의 조카)’의 대화로 진행되는 대화체 소설이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한나절 동안 주고받는 이야기가 십수년을 아우른다. 라모의 조카는 생계를 위해서라면 권세 있고 돈 있는 자에게 빌붙어 자존심도 버린 채 광대짓을 서슴치 않는 자이다. 그는 사회의 변혁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못하는 천재들을 혐오스러운 존재라 치부하고 도덕이나 학문, 교육 등도 봉건 귀족을 옹호하고 그들의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 조롱하면서, 도덕적 가치와 상식을 뒤엎고 악덕이 덕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악인임을 인정함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이야 행동은 그렇게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인 것에 비하면 적어도 ‘위선자’라는 불명예에서는 비켜간다. 그의 인생관은 표리부동에 있다.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면 그때 그때 진실을 말할 수도,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 진실이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헌데, 디드로는 이렇듯 방종하고 비열하며, 파렴치한인 라모의 음악적 재능에 매혹된다. 라모는 스스로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되고, 비통함에 오열하는 여자, 절망에 빠진 사내, 눈물짓는 처녀, 폭군이 되어 위협하고 노예가 되어 복종하기도 하는 등 열정에 사로잡혀 노래하는 시인이다. 디드로는 라모를 경멸하면서 찬탄해마지 않는다.
일갈하고, (짧은 소견으로) 디드로는 자신이 편집을 맡고 있던 <백과전서>가 팔리소, 슈아젤, 베르탱 등에게 공격을 받자 광기 어린 무뢰한인 ‘라모’를 등장시켜 자신을 포함한 당시의 지식인과 지배계급을 마음껏 조롱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을 통해 그들을 색다르게 풍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무식하게 진격하기 보다는 의뭉스럽게 우회하는 전술을 편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건 그렇고 아무튼! 앞서도 말했듯 당시 프랑스의 여러 가지 배경이나 디드로와 책에서 언급되는 인물들간의 관계에 대해 통찰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 책은 어렵고 또 너무나 어렵다! 누가 제발 내게 이 책을 이해시켜다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