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개의 미로카드
김운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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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출구를 빠져나오자 빛이 명멸한다. 내 안구는 기억력을 상실했다. 눈꺼풀이 감김과 동시에 빛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그러나 오롯한 어둠은 눈꺼풀을 치켜 뜨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빛과 어둠이 찰나의 순간에 몸을 바꾸어 존재한다. 깜박이는 빛 속을 느리게 걷는다. 그새 엉덩이가 펑퍼짐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헐렁한 환자복 안에서 느슨하게 풀려 있던 엉덩이가 청바지 안에서 잔뜩 긴장한다. 어쩐지 낯선 걷기.

<137개의 미로 카드> 또한 낯설다. 김운하는 기존의 소설적 양식들을 뒤튼다. 메타소설이나 해체소설 정도로 불릴 법하다. 시와 평론, 일기와 서평, 인터뷰 기사가 난립해 있다. 부재하는 작가에게 바치는 헌정집이나 계간지 하나를 통째로 읽는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137개의 미로 카드>는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읽는 소설’이 아니라 ‘쓰여지는 소설’이라고 한 김운하의 말을 빌자면 김운하 소설의 미완성성은 다분히 작위적이랄 수 있겠다. 137개의 카드가 그것을 어떻게 짜맞추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듯이 말이다.

작가는 부재한다. 그 부재의 공간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는 작가가 남겨둔 137개의 미로 카드뿐이다. 하지만 이 카드가 부재를 설명할 키워드가 될 것이라 믿는 것은 작가의 주변인물들로서 그것이 사라짐의 이유와 존재 찾기를 가능케할 것인지는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김운하는 소설 속의 부재하는 작가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드러낸다. 문학의 위기와 존재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한다. 자신의 인문학적 지식과 고전의 아름다움을 하나둘 꺼내 펼쳐 보이면서 말이다.

작가가 부재하는 공간에 문학이 설 자리는 없다. 하여 <137개의 미로 카드> 속에서 실종된 작가는 문학의 실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인문학에 대한 천시 풍조, 매스커뮤니케이션 발달로 인한 문학의 상업화 경향, 각종 시청각 미디어의 대중화에 따른 활자 문화의 쇠퇴 등으로, 이미 문학은 그 존재의 방향성마저 상실했다는 염려가 하루이틀의 일도 아니다. <137개의 미로 카드>는 소설이란 장르 안에 문학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게다가 믿을만하게 탄탄하다. 소설을 서사와 동일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않는다면 이 책은 꽤 매력적이다.

과연 문학은 소생할 수 없을 만큼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가? ‘글을 쓰고 사고하는 확실한 방법으로서 문학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설령 문학이 죽었다 하더라도 문학 행위는 계속될 것’이라는 앨빈 커넌의 말이, 문학에 발 담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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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조용히 좀 해요
레이먼드 카버 지음, 손성경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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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병상에서 읽기엔 부담스러운 소설이다. 극도로 간결한 문체와 단일 플롯과 제한된 배경의 이동과 화장실에 앉아서도 몇 편의 이야기쯤 훌쩍 통과할 만치 short story들로만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카버가 다루는 이야기들은 거창하지 않다. 그는 뚱보 식욕가, 개를 내다버리는 남자, 불면의 아내, 잘못 걸려 온 전화, 말썽꾸러기 아들, 거짓말, 숨겨도 좋을 진실, 어린 밀렵꾼 등, 우리가 흔히 보아왔거나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관계의 균열이거나 단절이라는 점에서 그는 사악하다.

레이몬드 카버의 명성에 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왔다. 카버를 말하는 사람들은 체호프와  헤밍웨이와 하루끼와 미니멀리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의 단편들을 단 한 개도 읽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수치심이 끼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냉큼 그를 사들여 야금대면서 체호프를 들먹이고 싶지도 않았다. 요즘의 나는 너무 시끄럽다. 침묵마저 소란스럽다.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무언가에게 뒤를 내 준 것처럼 불안하고 의지없이 진행되는 행위에 환멸을 느끼는가 하면 얕은 꿈들에게 잠을 방해 받은 채 몽롱한 시간을 보내다가 울고싶어지는 때도 있다. 이렇게 나를 들썩이는 것들에게 '제발 조용히 좀 해!'라고 외치는 순간 이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필연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좋고 나쁨으로 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의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악연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지만 마이너스 곡선을 그리기에는 충분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건 정말 끔찍한 회색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번역을 한 손성경 교수의 '카버의 작품에 그려진 삶은 우울한 회색이다.'라고 끝머리를 장식한 말을 보고 웃음이 났다. 카버의 인물들은 평범하지만 그들 모두는 일상의 균열을 간직한 자들이다. 하지만 카버는 그들의 균열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한다. 작은 힌트마저 남겨놓지 않는다. 독자는 다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허나 그마저도 인물들의 일상이 아닌 독자 자신의 일상과 빗대어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유추의 결과는 독자의 일상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보는 이에 따라 균열의 원인이 달라진다.   

카버의 인물들은 모두 흔들린다. 그들은 피로하고 음울하며 비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한 채 막연한 불안 상태에 있다. 前震의 흉계에 대해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떠한 방어기제도 마련하지 못한 채 외로움에 침잠하고 만다. 그들에게 소통 가능한 사랑이란 달동네에서 명품족에 관한 뉴스를 주워 듣는 것만큼이나 먼 세계의 일이다. 그들은 위안도 사랑도 평화도 걸치지 못하고 태어난 그대로의 헐벗은 모습으로 일상에 던져진 고아들이다. 회색 일색이다.

내일 퇴원하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넘게 일상을 외면할 수 있을 만치 넉넉한 인생도 아니고 병원밥과 생활이 따분해지기도(이렇게 말하니 교통사고를 빙자한 나이롱 환자가 된 듯하여 껄쩍지근하네그려) 한 탓이다. 오늘, 일상에 균열을 가하는 제법 충격적인 소식(?)을 통보 받았다. 미래에 관한 전면적인 개편을 감행해야 하는데 아직은 얼떨떨한 상태라 무얼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불행은 왜 한꺼번에 오는 것일까? 불행아, 제발 조용히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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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4-09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마저 소란스럽다.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생계-딱 까놓고 말해서 돈버는 일.
1주일간의 유예더라도 결국은 그리로 가야 한다는 걸 아니까,즉 우리는 인간이니까,병상에서도 마음 부릴 곳이 없나봅니다.-_-;카버 읽는 걸 뜯어 말렸어야하는데...충고나 뜯어 말림 이런 것을 할 만큼 자기 확신이 강하다면 사는 게 좀 수월할지.아..참.그리고 이젠 무슨 책 안 읽었다고 부끄러워지고 뭐 그러진 않더군요.이 현실! 이거만큼 압도적인 텍스트가 어디 있을라구요.

비로그인 2004-04-0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체홉을 읽고, 레이먼드 카버를 찾아 들어왔다 리뷰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글쎄요, 결국 한권의 책이라는 것은 그것이 제 독자와 올리는 혼례가 더 행복하고 생산적인 것일 때 더 큰 문학적 가치를 갖는것이라고 미셀 투르니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독자가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요소들과 책속의 인물들 사이의 동화작용에서 상호소통하며 그것이 독자에게 체화되어 재발견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인데, 그게 좀 힘들었나 봅니다. 상황이 좀 더 나아지고 다시 읽으면 좀 더 여유롭고 너그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녀물고기 2004-04-0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잖아도 몸도 마음도 한가해지면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생계가 목을 조/여/와/요. 으 으 으 윽.

마녀물고기 2004-04-0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소통이란 참으로 즐겁군요. 오시는 분들 감사, 글 남겨주시는 분들 예쁘게 감사.
 
사랑을 주세요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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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3월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참하고 나른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영 시무룩하다. 황사의 조짐인지 비의 조짐인지는 모르겠으나 모쪼록 날씨에 휘말려 우왕좌왕하는 일은 없어야지 싶다. 감기 중이다. 내 감기의 8할은 편도선의 붓기가 만들어내는 바, 이번에도 다를 게 없다. 직업의 특성 상 하루종일 목을 쓰다 보면 밤에는 정말 환장할 만치 목이 아프다. 목구멍에 불새라도 키우는 듯 뜨겁고 묵지근 홧홧한 것이 소방차 일개 편대가 물을 뿜어도 소용없을 듯.

 

편지글 형식의 소설이 지니는 한계는 그것이 자칫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게 되는 필요악을 생산하게 되거나 지루한 동어반복이거나 유치한 자기 고백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지를 주고 받는 당사자들은 이미 관계(만남이라는 가시권 안에 있는)를 형성하고 있거나 형성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둘 사이의 공통 사건에 대해 상황을 재연하는 식의 설명(독자를 향한)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츠지히토나리의 <사랑을 주세요>는 편지글 형식이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 받는 주체이자 대상인 리리카와 모토지로는 일면식도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 하에 이러한 한계를 조금쯤 벗어난다. 그러니 둘 사이에 공통 사건이 있을 리 없고, 화자의 입을 통해 재연되는 일상은 독자를 위한 억지 설명이 아니라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데서 일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리리카는 부모에게 버림 받고 육아원에서 성장한다. 원장 패거리들이 행하는 모욕과 학대로 자살을 감행하지만 한낱 쇼로 끝나버린 뒤 익명(이름은 있지만 그의 배경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의미로써의)의 누군가에게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리리카는 누군지도 모르는 그가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데서 어리둥절함을 느끼지만, 자신의 자살쇼의 동기는 육아원의 학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죽음에의 갈망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절망’에서 온 것이라는 당돌한 고백을 필두로 그와의 교류를 수락한다. 아, 이것은 필히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리리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연애담(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일그러진 관계로 시작되는)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조우한 일에 대해, 온갖 경멸과 분노와 시기심과 열정과 찬사를 늘어놓는다. 정열과 다혈질은 소통하는 것일까, 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리리카가 격정의 댄서라면 모토지로는 온화한 연주자라고 해야 할까. 리리카의 온갖 변덕스러움을 받아내면서 그녀의 삶의 축軸이 무너지지 않게, 온전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모토지로의 역할이다. 이런 모토지로에게 시간의 경계 분명한,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후키노와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녀를 간호하고 순간순간 절망하면서도 모토지로는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감사한다. 자연히 리리카에게 편지 보내는 횟수가 줄어들고 이런 간극으로 인해, 생生이 공모한 둘 사이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 후 리리카와 편지를 주고받는 대상은 후키노라는 여성으로 대체된다. 다행인 것은 이것이 짧게 막음됨으로써 독자가 화자를 통해 구구절절한 설명을 듣게 되는 진부함을 맛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이 극적 반전으로 생각되거나 가슴 화끈거리는 자극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말이 어렴풋 짐작 가능했던 탓일까. 예전에 츠지의 <질투의 향기>를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는 어쩐지 맥 빠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출판사의 전략인지는 모르겠으나 <질투의 향기>에는 책에 구멍을 내고 미니어처 향수를 심어놓더니, <사랑을 주세요>에는 편지지와 봉투를 슬며시 끼워 넣었다. 책에 구멍을 내는 행위는 독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하지만 이번 것은 애교다. 난 그것을 사랑을 달라며 누군가에게 편지 보내는 못난 짓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도화지로 사용했다. 남자애가 여자애에게 얼굴 붉히며 꽃을 전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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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3-2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로 작성해서 올리려는데 아무리 해도 첫 번째 문단은 글씨체 수정이 안 된다. 그래서 손 안 대고 그냥 올린다. 정말 맘에 안 든다. 글씨체의 압박! 왜 그러는 지 아는 분 있음 얘기 좀 해 주시라~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 반양장본
마크 해던 지음, 유은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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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컨디션이 지랄같다. 폭설을 전후로 해서 내가 한 일은 이렇다. 왼쪽 볼에 난 뾰루지 네 개 심심하면 쥐어 뜯기, 중천에 해 차오를 무렵 일어나서 허겁지겁 밥 벌러 가기, 김정호 추모 앨범 들으면서 침대에 땅굴 파기, 요상망측한 강박으로 꾸역꾸역 책 뜯어 먹기, 혼자 극장 가서 졸다 오기.

김정호는 70년대 중반 포크를 대중화시키는데 한몫한 인물이다. 그의 노래는 시적 메타포로 풍성하다. 뿐더러, 결핵으로 죽었지만 그를 앗아간 것은 병이 아니라 그 한의 노래라 할 만큼 그의 노래를 메우는 정서는 한이다. 이번 추모 앨범의 수록곡들 대부분은 어쿠스틱 기타 하나만으로 연주된다. 그래서일까, 온통 서글프고 온통 그렁그렁하다. 듣고 있으면 채 삼키지 못한 한들이 쿨렁쿨렁 게워진다. 김의철, 이성원, 김두수 등 우리나라 포크의 대표 주자라 할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여 귀 호강도 이만저만 아닌데, 에라이 배 부른 투정이지. 아무튼 김두수, 이성원은 끔찍하게 좋다. 음악이 독서의 효율을 떨어뜨리기는 했어도 이 앨범 들으며 책 읽는 행사는 얼마간 더 지속될 듯 싶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고 소개 형식은 횡설수설이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림과 도표와 수식과 글자가 뒤섞인 짬뽕이지만 글자가 훠월씬 많으니 일단 안심해도 좋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이후로 이런 식의 소설을 간혹 만나게 되는데 난 뭐 그닥 친절해 보이지도 않고 재미가 뽕빨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라서 심드렁.

밤 12시 7분, 시어즈 부인의 개 한 마리가 쇠스랑에 꽂혀 죽은 채 발견된다. 웰링턴을 발견한 것은 ‘나’이다. ‘나’는 자폐아다. 나는 이 살해사건을 소설로 완성하리라 마음 먹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웰링턴에게 쇠스랑을 꽂은 범인을 잡아야만 한다. 나, 크리스토퍼는 비록 자폐아이기는 하나 무지막지 천재적인 소년이다. ‘4살 이전에는 사물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서 제대로 녹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그 이후의 일들은 모두 기억할 수 있다. 또 나는 소수를 7507까지 알고 있으며 노란색과 갈색을 싫어하고 빨간색을 좋아한다. 음식에 노란색이 섞이면 빨간 식용 색소를 뿌리고서야 먹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나는 굶는 쪽을 택하겠다. ‘나’는 과연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며칠 전 8명의 여성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 제목은 까먹었다. 책을 읽으며 그 영화가 생각났고, 우연치고는 참 좁은 거리에 있군그래, 중얼거렸다. 영화의 시작도 살해(살인)사건이었고, 사건을 해결하는 와중에 인간의 저열함과 비겁함과 아오~ 골치 아프게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속속 드러난다. 아무튼 인간들이란, 하는 순간이다. 어쨌건 저쨌건 책은 재미있다.

책 읽는 족족 감상문 쓰기로 작정한 것이 엊그제인데 벌써 게으름이다. 에이고오, 여기까지 쓰는데도 주뢰를 트네그랴.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랑 ‘나는 훌리오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랑 정영문의 소설 몇 권이라앙은 어느 세월에. 하지만 불끈! 니들도 언젠가는 잘근잘근 씹어주고 사리살짝 쓰다듬어주고 벙긋벙긋 예뻐해줄게, 기둘리이이이이.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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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볼루스 인 무지카
얀 아페리 지음, 신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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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용광로다, 또는 해면덩어리다. 들숨과 날숨이 가파르게 교차하며 부릅뜬 눈에 붉은 사선을 긋는다. 터진 종기에서 흘러내린 고름이 살진 잠이 된다. 몇 해 전 네가, 청음으로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관능적인 잠, 또는 뭉텅이로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질끈 밟고 가위를 든 네가 푸르르 웃는 호쾌한 잠, 이도저도 아니면 네가 오래 울거나 내가 오래 웃는 잠. 깨고 나면 아픈, 그러나 오래 앓고 싶은 잠. 춤이 너를 더럽히고 무면허 音節들이 너를 내 몬 이 땅에서 난 오늘도 깨고 나면 아픈, 서럽게 먼 잠을 잔다.

- 사랑이라는 육식성 아가리는 세상 도처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득이면서, ‘죽다’라는 동사와 ‘양분을 제공하다’라는 동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곧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였다. (p.96)

- 나는 그녀가 소원을 하나 빌었으면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소원이 우리에게 와야 하는 거야.” (p.74)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 아름답고 슬프고 기괴하고 참담하고 필연적 즉흥과 우연적 계획이 하나의 시퀀스를 멋지게 이루어내는 소설이다, 라고 쓰고보니 어쩐지 메디치상 수상작이라는 영예를 등에 업은 과찬 같아 껄끄럽다. 가끔은 무슨무슨 수상작이라는 것이 외려 작품에 대해 올바로 실토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문학의 사대주의(라는 말이 있었던가)라는 힐난을 받을 것 같아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아웅- 그렇더라도, 여튼, 소설은 맛있다!

모에 인상긴의 탄생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 할아버지와 어머니, 두 혈육은 죽음을 맞는다. 피를 부른 모에의 탄생은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 세계와 접촉하는 법이며 음악에로의 열정을 심어준 것은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파올로 듀란테다. 듀란테는 모에에게 있어 스승이자 친구이며 아버지 같은 존재다. 한편 모에에게 관능적인 사랑, 그로 인한 수줍음과 고통을 알게 해 준 것은 ‘인생을 막 시작한 내가 우물 속에서 발견해낸 나의 사산아’, 안느다. 안느는 세상의 흐름에 역류하는 모든 것을 시도한다. 거꾸로 걷고 거꾸로 말한다. 그녀의 도착은 ‘한 사람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이 교차하는 순간, 그것은 가장 드높은 지성과 가장 커다란 공모의식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라는 고백을 가능케 할 정도로 모에에게 의미 있다. 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알게 된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 이후에도 그녀와 순간순간 교차하고 조우하는 안느. 하여 사랑은 처음 음계를 끝없이 재생하는 반복적 리듬이며 복고적인 기억일 뿐이다.

음악학교에서 만나 박하향 담배를 나누어 피던 라자루스 제주룸의 재출현은, 모에의 탄생의 순간과 닮아 있다. 모에의 아버지 오텔로는 들판을 달려 모에를 향하던 라자루스의 차에 치어 죽는다. 죽음과 직결된 출현. 이후 라자루스는 모에의 삶과 음악에 깊숙이 침투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미지의 여인과의 사랑, 그 여인을 통해 얻게 된 아들, 동성애 등으로 파탄을 맞는다. 등장인물들은 모조리 부조리하다. 은둔과 분열과 파탄의 늪에서 음침하게 서성인다. 모에의 <영생의 발라드>는 그리하여 어쩌면 필연적인 탄생일 수밖에 없다. 단말마의 무자비한 비명만이 그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단 하나의 음계인 것이다.

도입부가 너른 들판에 모래알을 흩뿌린 느낌이라 그것을 줏으러 다니다가 자칫 따분하고 지겨워질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챕터부터는 술술 읽힌다. 9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다지 늦은 술술도 아니다. 그런데 신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저자인 얀 아페리로 말할 것 같으면 ‘고전음악과 문학이라는 두 우주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재주와 열정을 지닌 자라고 하니, 신은 왜 한 인간에게만 섬광과도 같은 사랑을 무차별 폭격하느냐 말이다. 여기 구석에 처박혀 하루하루를 배 고프게 살아내는 사람도 있는데, 빈민구제란 말은 신에게는 소용에 닿지 않는 것이냐 말이다.
서럽고 외로운 일상.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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