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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주세요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평점 :
며칠 동안 3월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참하고 나른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영 시무룩하다. 황사의 조짐인지 비의 조짐인지는 모르겠으나 모쪼록 날씨에 휘말려 우왕좌왕하는 일은 없어야지 싶다. 감기 중이다. 내 감기의 8할은 편도선의 붓기가 만들어내는 바, 이번에도 다를 게 없다. 직업의 특성 상 하루종일 목을 쓰다 보면 밤에는 정말 환장할 만치 목이 아프다. 목구멍에 불새라도 키우는 듯 뜨겁고 묵지근 홧홧한 것이 소방차 일개 편대가 물을 뿜어도 소용없을 듯.
편지글 형식의 소설이 지니는 한계는 그것이 자칫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게 되는 필요악을 생산하게 되거나 지루한 동어반복이거나 유치한 자기 고백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지를 주고 받는 당사자들은 이미 관계(만남이라는 가시권 안에 있는)를 형성하고 있거나 형성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둘 사이의 공통 사건에 대해 상황을 재연하는 식의 설명(독자를 향한)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츠지히토나리의 <사랑을 주세요>는 편지글 형식이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 받는 주체이자 대상인 리리카와 모토지로는 일면식도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 하에 이러한 한계를 조금쯤 벗어난다. 그러니 둘 사이에 공통 사건이 있을 리 없고, 화자의 입을 통해 재연되는 일상은 독자를 위한 억지 설명이 아니라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데서 일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리리카는 부모에게 버림 받고 육아원에서 성장한다. 원장 패거리들이 행하는 모욕과 학대로 자살을 감행하지만 한낱 쇼로 끝나버린 뒤 익명(이름은 있지만 그의 배경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의미로써의)의 누군가에게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리리카는 누군지도 모르는 그가 자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데서 어리둥절함을 느끼지만, 자신의 자살쇼의 동기는 육아원의 학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죽음에의 갈망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절망’에서 온 것이라는 당돌한 고백을 필두로 그와의 교류를 수락한다. 아, 이것은 필히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리리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연애담(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일그러진 관계로 시작되는)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조우한 일에 대해, 온갖 경멸과 분노와 시기심과 열정과 찬사를 늘어놓는다. 정열과 다혈질은 소통하는 것일까, 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리리카가 격정의 댄서라면 모토지로는 온화한 연주자라고 해야 할까. 리리카의 온갖 변덕스러움을 받아내면서 그녀의 삶의 축軸이 무너지지 않게, 온전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모토지로의 역할이다. 이런 모토지로에게 시간의 경계 분명한,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후키노와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녀를 간호하고 순간순간 절망하면서도 모토지로는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감사한다. 자연히 리리카에게 편지 보내는 횟수가 줄어들고 이런 간극으로 인해, 생生이 공모한 둘 사이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 후 리리카와 편지를 주고받는 대상은 후키노라는 여성으로 대체된다. 다행인 것은 이것이 짧게 막음됨으로써 독자가 화자를 통해 구구절절한 설명을 듣게 되는 진부함을 맛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이 극적 반전으로 생각되거나 가슴 화끈거리는 자극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말이 어렴풋 짐작 가능했던 탓일까. 예전에 츠지의 <질투의 향기>를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는 어쩐지 맥 빠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출판사의 전략인지는 모르겠으나 <질투의 향기>에는 책에 구멍을 내고 미니어처 향수를 심어놓더니, <사랑을 주세요>에는 편지지와 봉투를 슬며시 끼워 넣었다. 책에 구멍을 내는 행위는 독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하지만 이번 것은 애교다. 난 그것을 사랑을 달라며 누군가에게 편지 보내는 못난 짓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도화지로 사용했다. 남자애가 여자애에게 얼굴 붉히며 꽃을 전하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