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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볼루스 인 무지카
얀 아페리 지음, 신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머리는 용광로다, 또는 해면덩어리다. 들숨과 날숨이 가파르게 교차하며 부릅뜬 눈에 붉은 사선을 긋는다. 터진 종기에서 흘러내린 고름이 살진 잠이 된다. 몇 해 전 네가, 청음으로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관능적인 잠, 또는 뭉텅이로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질끈 밟고 가위를 든 네가 푸르르 웃는 호쾌한 잠, 이도저도 아니면 네가 오래 울거나 내가 오래 웃는 잠. 깨고 나면 아픈, 그러나 오래 앓고 싶은 잠. 춤이 너를 더럽히고 무면허 音節들이 너를 내 몬 이 땅에서 난 오늘도 깨고 나면 아픈, 서럽게 먼 잠을 잔다.
- 사랑이라는 육식성 아가리는 세상 도처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득이면서, ‘죽다’라는 동사와 ‘양분을 제공하다’라는 동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곧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였다. (p.96)
- 나는 그녀가 소원을 하나 빌었으면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소원이 우리에게 와야 하는 거야.” (p.74)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 아름답고 슬프고 기괴하고 참담하고 필연적 즉흥과 우연적 계획이 하나의 시퀀스를 멋지게 이루어내는 소설이다, 라고 쓰고보니 어쩐지 메디치상 수상작이라는 영예를 등에 업은 과찬 같아 껄끄럽다. 가끔은 무슨무슨 수상작이라는 것이 외려 작품에 대해 올바로 실토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문학의 사대주의(라는 말이 있었던가)라는 힐난을 받을 것 같아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아웅- 그렇더라도, 여튼, 소설은 맛있다!
모에 인상긴의 탄생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 할아버지와 어머니, 두 혈육은 죽음을 맞는다. 피를 부른 모에의 탄생은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 세계와 접촉하는 법이며 음악에로의 열정을 심어준 것은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파올로 듀란테다. 듀란테는 모에에게 있어 스승이자 친구이며 아버지 같은 존재다. 한편 모에에게 관능적인 사랑, 그로 인한 수줍음과 고통을 알게 해 준 것은 ‘인생을 막 시작한 내가 우물 속에서 발견해낸 나의 사산아’, 안느다. 안느는 세상의 흐름에 역류하는 모든 것을 시도한다. 거꾸로 걷고 거꾸로 말한다. 그녀의 도착은 ‘한 사람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이 교차하는 순간, 그것은 가장 드높은 지성과 가장 커다란 공모의식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라는 고백을 가능케 할 정도로 모에에게 의미 있다. 음악학교에 입학하면서 알게 된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 이후에도 그녀와 순간순간 교차하고 조우하는 안느. 하여 사랑은 처음 음계를 끝없이 재생하는 반복적 리듬이며 복고적인 기억일 뿐이다.
음악학교에서 만나 박하향 담배를 나누어 피던 라자루스 제주룸의 재출현은, 모에의 탄생의 순간과 닮아 있다. 모에의 아버지 오텔로는 들판을 달려 모에를 향하던 라자루스의 차에 치어 죽는다. 죽음과 직결된 출현. 이후 라자루스는 모에의 삶과 음악에 깊숙이 침투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미지의 여인과의 사랑, 그 여인을 통해 얻게 된 아들, 동성애 등으로 파탄을 맞는다. 등장인물들은 모조리 부조리하다. 은둔과 분열과 파탄의 늪에서 음침하게 서성인다. 모에의 <영생의 발라드>는 그리하여 어쩌면 필연적인 탄생일 수밖에 없다. 단말마의 무자비한 비명만이 그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단 하나의 음계인 것이다.
도입부가 너른 들판에 모래알을 흩뿌린 느낌이라 그것을 줏으러 다니다가 자칫 따분하고 지겨워질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챕터부터는 술술 읽힌다. 9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다지 늦은 술술도 아니다. 그런데 신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저자인 얀 아페리로 말할 것 같으면 ‘고전음악과 문학이라는 두 우주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재주와 열정을 지닌 자라고 하니, 신은 왜 한 인간에게만 섬광과도 같은 사랑을 무차별 폭격하느냐 말이다. 여기 구석에 처박혀 하루하루를 배 고프게 살아내는 사람도 있는데, 빈민구제란 말은 신에게는 소용에 닿지 않는 것이냐 말이다. 서럽고 외로운 일상.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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