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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개의 미로카드
김운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0월
평점 :
사각의 출구를 빠져나오자 빛이 명멸한다. 내 안구는 기억력을 상실했다. 눈꺼풀이 감김과 동시에 빛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그러나 오롯한 어둠은 눈꺼풀을 치켜 뜨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빛과 어둠이 찰나의 순간에 몸을 바꾸어 존재한다. 깜박이는 빛 속을 느리게 걷는다. 그새 엉덩이가 펑퍼짐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헐렁한 환자복 안에서 느슨하게 풀려 있던 엉덩이가 청바지 안에서 잔뜩 긴장한다. 어쩐지 낯선 걷기.
<137개의 미로 카드> 또한 낯설다. 김운하는 기존의 소설적 양식들을 뒤튼다. 메타소설이나 해체소설 정도로 불릴 법하다. 시와 평론, 일기와 서평, 인터뷰 기사가 난립해 있다. 부재하는 작가에게 바치는 헌정집이나 계간지 하나를 통째로 읽는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137개의 미로 카드>는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읽는 소설’이 아니라 ‘쓰여지는 소설’이라고 한 김운하의 말을 빌자면 김운하 소설의 미완성성은 다분히 작위적이랄 수 있겠다. 137개의 카드가 그것을 어떻게 짜맞추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듯이 말이다.
작가는 부재한다. 그 부재의 공간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는 작가가 남겨둔 137개의 미로 카드뿐이다. 하지만 이 카드가 부재를 설명할 키워드가 될 것이라 믿는 것은 작가의 주변인물들로서 그것이 사라짐의 이유와 존재 찾기를 가능케할 것인지는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김운하는 소설 속의 부재하는 작가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드러낸다. 문학의 위기와 존재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한다. 자신의 인문학적 지식과 고전의 아름다움을 하나둘 꺼내 펼쳐 보이면서 말이다.
작가가 부재하는 공간에 문학이 설 자리는 없다. 하여 <137개의 미로 카드> 속에서 실종된 작가는 문학의 실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인문학에 대한 천시 풍조, 매스커뮤니케이션 발달로 인한 문학의 상업화 경향, 각종 시청각 미디어의 대중화에 따른 활자 문화의 쇠퇴 등으로, 이미 문학은 그 존재의 방향성마저 상실했다는 염려가 하루이틀의 일도 아니다. <137개의 미로 카드>는 소설이란 장르 안에 문학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게다가 믿을만하게 탄탄하다. 소설을 서사와 동일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않는다면 이 책은 꽤 매력적이다.
과연 문학은 소생할 수 없을 만큼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가? ‘글을 쓰고 사고하는 확실한 방법으로서 문학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설령 문학이 죽었다 하더라도 문학 행위는 계속될 것’이라는 앨빈 커넌의 말이, 문학에 발 담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